벨기에 침공
Invasion of Belgium.
원래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일 먼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했기에(7월 28일) 정상적으로는 세르비아 침공이 첫번째 전투를 차지해야겠지만 오헝제국의 미흡한 준비 덕에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 벨기에 침공이 먼저 일어났으며 '''벨기에 방면의 전투가 큰 전투로서는 최초가 되었다.'''[6]
1914년에 독일 제국의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명한 러시아 제국에 독일 제국이 8월 1일에 선전포고를 명함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러시아의 동맹은 처음 협약이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방의 프랑스 공화국이였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공으로 독일의 국력이 분산될 것을 두려워한 독일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1905년에 그 유명한 슐리펜 계획을 입안해 독일 주력이 벨기에를 돌파함으로 파리를 공략해 프랑스를 굴복시킨 후 러시아를 공략한다는 거대한 작전을 기획했다. 1905년에 슐리펜이 은퇴함으로 참모총장은 헬무트 폰몰트케(小)(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7] 가 역임하고 슐리펜 계획 또한 총괄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이 중립을 지킬 것으로 생각해서[8] 폰몰트케(小)에게 슐리펜 계획을 중단하고 전력을 러시아로 보내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년간 슐리펜 계획을 총괄하고 수정하며 발동할 날만을 기다린 폰몰트케(小)에게 이는 씨알도 안 먹히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폰 몰트케(小)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해 동부로 옮기는 새로운 작전을 짜려면 족히 1년이나 걸리는데다가 이미 발동된 순간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빌헬름 2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황제를 설득시켜서 결국 발동, 계획대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4일에 벨기에를 침공했다.
탄생부터 영국의 지원과 여러 강대국의 보증을 기반으로 중립국을 내세운 벨기에의 군대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6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벨기에군은 워낙 상태가 개판인 나머지 바버라 터크만 여사의 『8월의 총성』에서는 오스만 제국군을 연상시킬 정도라 표현한다. 군기가 나쁘고, 깔끔하지 못한데다가, 행군조차 제대로 못 따라가는 등 전형적인 오합지졸의 표본을 연상시켰다. 예산도 적은 나머지 탄약도 부족해 변변찮은 훈련량을 자랑했다. 징병제는 '''1913'''년에 도입되었으며 오히려 징병제는 군대를 더욱 인기 없도록 만들었다.
장교들은 오합지졸 병사들에 비하면 더 나았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문제가 심각했다. 당대 대표 시류인 공세주의에 영향받은 나머지 강대국에 둘러싸인 중립국으로서 현실적으로 방어전밖에 기획하지 못함에도 오히려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장교도 존재했다고 한다.[9] 참모제는 '''1910년'''에 도입되었으며 이마저도 국왕 알베르 1세의 노력 덕에 생겼다.
-개로 기관총좌를 끄는 벨기에군. 전투모가 실크햇이다.
벨기에군은 작전 또한 일관되지 않았다. 주적이 명확했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벨기에는 사방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1913년까지 제대로 된 계획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나마 1913년 말에 국왕 알베르 1세의 노력으로 참모 에밀 갈레(Émile Galet)와 함께 독일을 주적으로 설정해 전력을 천연방어선 뫼즈 강(Meuse)에 집중해 강력한 리에주(Liege)와 나뮈르(Namur) 요새에 의지한다는 전략을 짰지만, 참모부와 참모총장 슈발리에 드셀리에 드모랑비에(Chevalier de Selliers de Moranville)에 의해 거부당했다. 셀리에 장군은 그 대신에 '''병력을 사방에 분산해 전장이 명확해지면 주적을 향해 집중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벨기에의 국왕이자 전시 총사령관 알베르 1세는 이런 부족한 병력과 분산된 전략으로 강력한 34개의 사단을 자랑하는 독일군을 맞서 싸워야했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명군 알베르 1세와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리에주와 나뮈르 요새 뿐이였다.
영 못 미더운 벨기에군과 달리 벨기에가 온 힘을 쏟아서 건설한 리에주 요새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모델을 도입한 최고의 요새였다. 150미터의 언덕 위에 건설된 요새는 1888년에서 1892년 사이에 앙리 브리아몽(Henri Brialmont)의 디자인에 따라 건설되었다. 워낙 막강했기에 당시 가장 강력했던 포탄인 210mm마저 '''튕겨내도록''' 설계되었다. 12개의 비교적 작은 요새들이 거대한 중앙의 건물을 촘촘히 둘러싸며 이들은 서로 연계해 중앙의 건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적을 격퇴하는 게 임무였다. 이들 12개의 소(小)요새에는 400개의 최대 6칼리버를 자랑하는 대포들도 위치했었다.
이런 거대한 요새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40,000명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요새 운용 외에도 소요새 사이에 참호를 파서 곧바로 중앙건물로 돌파하려는 적군을 저지해야 했었다. 폰 슐리펜과 독일 참모부는 이런 리에주 요새와 나뮈르 요새를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슐리펜이 은퇴했을 시점인 1906년에는 리에주 요새의 막강한 방어력을 파쇄할 포탄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벨기에를 손쉽게 통과할 필요가 있는 슐리펜 계획에게 적신호를 밝혔다.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포트 아서(Port Arthur)는 9개월간 저항했는데 당시에는 막강한 리에주 요새의 방어력에 감탄한 사람들은 포트 아서의 기록을 경신하거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않겠느냐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리에주 요새는 큰 피해를 각오해서라도 뚫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비록 슐리펜의 은퇴 시에는 요새를 파쇄할만한 포탄이 없었다고 해도 1909년에는 크룹(Krupp)과 오스트리아의 스코다(Skoda)[11] 는 각각 리에주 요새를 둘러싼 콘크리트를 뚫을 수 있는 420mm와 305mm 곡사포를 실험하거나 완성했었다.
7월 29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비밀 봉투를 받은 브뤼셀 주재 독일 대사 클라우스 폰벨로잘레스케(Claus von Below-Saleske)는 8월 2일에 비밀 봉투를 개봉해 곧바로 벨기에 정부에 전달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폰벨로잘레스케는 12시간 내에 벨기에 정부로부터 답장을 요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답변을 최대한 빨리 베를린에 전하고 아헨의 유니언 호텔에 묵던 오토 폰에미히(Otto von Emmich) 장군에게도 직접 전하라고 지시받았다.
그 전날만 해도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으로 긴장한 벨기에 정부에 벨로프살레스케는 독일로부터 걱정할 게 없다고 장담했으나 벨로프살레스케가 개봉한 봉투는 독일의 최후통첩이었다. 8월 2일에 벨로프살레스케는 명령대로 최후통첩을 벨기에 외무부에 전달했다. 7월 26일에 몰트케가 직접 작성한 최후통첩에는 벨기에를 공격하고자 하는 프랑스군은 나뮈르 요새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으며 벨기에군이 못미더운 독일군은 벨기에령으로 진입해 대신 프랑스군을 격퇴하겠다는 것이었다.[12] 좋은 미사여구로 장식했으나[13] 독일의 최종의도는 벨기에 정부에게 '''독일군의 침공에 저항하지 말라는 점'''을 관철하는 것이다. 통첩은 만약에 벨기에가 저항하면 적으로 간주할 것이고 12시간 내에 답변을 요구하며 끝맺었다.
8월 2일, 알베르 1세와 벨기에 정부는 독일의 오만한 통첩을 무시하고 침공해오는 독일군에 끝까지 저항하리라 천명했다.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 정부는 나약한 벨기에가 끝까지 싸우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빌헬름 2세는 알베르 1세의 부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의 혈연관계를 이용해 이 침공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알베르 1세는 '''"그는 나를 뭐로 보는가?'''(What does he take me for?)이라 반문하곤 독일로 향하는 나뮈르 요새와 리에주 요새의 다리를 끊고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에 있는 모든 도로와 터널을 파괴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알베르 1세는 한 때 자신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63세의 노장이자 리에주 요새의 지휘관 제라르 르망(Gérard Leman)에게 명했다.
벨기에의 확답을 들을 것도 없이 독일군은 벨기에를 돌파하는 첫 번째 관문인 리에주 요새를 향했다. 선봉을 맡은 폰엠미흐 장군은 특별히 6개의 부대로 구성된 소규모의 뫼즈군(Army of the Meuse)을 이끌었다. 만약에 벨기에군이 항전하지 않는다면 이런 소규모의 부대로도 리에주 요새를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독일군에서는 벨기에가 잘해봤자 형식적인 저항을 보일 뿐, 그 나약한 군세로 진지한 저항을 퍼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빌헬름 2세의 트롤링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무저항을 예상했던 뫼즈군은 벨기에 기마대와 자전거병에게 공격당했다. 꿋꿋이 150미터 위의 언덕에 위치한 리에주 요새에 맞닥뜨린 뫼즈군은 다리를 끊는다면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독일의 패기서린 협박에 불구하고도 끊긴 다리를 발견했다. 끊긴 다리를 무시하고 건너려 하자 벨기에 보병에게 공격당했다. 나약했다고 믿었던 벨기에군과 독일군은 실제로 교전에 맞닥뜨린 것이다. 25,000명의 벨기에군보다 2배 넘게 많은 60,000명의 뫼즈(독일)군은, 밤이 돼서야 치열한 교전 끝에 리에주 북부에 위치한 비제(Visé)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8월 5일에 공세를 재개한 폰엠미흐의 뫼즈군은 리에주 요새에 야포로 포격한 뒤, 보병돌격을 명했다. 그러나 겨우 야포 정도로는 리에주 요새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 덕에 제대로 된 엄폐물 없이 언덕 위의 요새를 향한 보병은 벨기에의 총격에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중대 뒤에 중대를 끊임없이 밀어 넣고 소요새 사이의 공간에 벨기에군이 참호를 완성하지 못한 탓에 큰 피해에 불구하고도 돌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돌파한 병력마저 중앙의 요새를 향하면서 기관총 세례에 직격으로 맞은 탓에 '''시체만 산을 쌓아갔다.''' 고전하는 독일군의 공세에 벨기에군은 착검돌격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의 실행을 위해선 리에주 요새를 격파하는 게 필수인 독일군은 꿋꿋이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뛰어난 성과 없이 독일군의 시체만 쌓여갔는데, 그 대신 이 시체 산은 '''인공엄폐물'''을 형성해 벨기에군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소수 병력에 의존해야 했던 벨기에군과 달리 독일군은 예비병 또한 넘쳐나서 『8월의 총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명을 총알 쓰듯"(spending lives like bullet) 병력을 무식하게 밀어 넣았다. 5일 밤에도 엠미흐는 공세를 재개했으나 제14여단을 둘러본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von Ludendorff)는 병사들이 우울하고 불안해했다고 표현했다.
밤에 재개되는 공세 속에 제14여단의 흐트러진 대열을 목격한 루덴도르프는 무슨 소동인지 둘러보러 갔다. 제14여단장 폰부소(Friedrich von Wussow)가 기관총 세례를 맞고 죽었음을 확인한 루덴도르프는 곧바로 지휘권을 이어받고 과감히 소요새 플레롱(Fléron)과 데브녜(d'Évegnée) 사이를 돌파했다. 운 좋게도 플레롱의 기관총이 작동하는 데 실패했는데 이를 보기 좋게 공략한 루덴도르프는 6일날 오후 2시에 리에주 안마저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의 언덕에 도달했다. 루덴도르프는 야포를 리에주를 향해 조준하고선 르망을 항복시키기 위해 브뤼셀에 부임해 있던 독일 군사담당관을 특사로 리에주 요새 안으로 파견 보냈다. 파견된 군사담당관은 르망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체펠린 비행선이 리에주를 박살 낼 것이라 협박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곧바로 독일군은 비행선으로 요새를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또다시 특사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갖춘 르망은 항복을 거부했다.
항복할 수 없다면 납치해서 강제로 항복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독일군은 40명을 영국군과 비슷한 복장으로 위장시켜 르망의 지휘부로 파견 보냈다. 그러나 위장복이 허술했는데 지휘부에 도착한 곧바로 40명은 발각당해 벨기에군에게 공격받았다. 르망은 아수라장이 된 지휘부에서 탈출해 서부에 있는 소요새 롱생(Loncin)에서 지휘를 재개했다.
중앙의 건물을 둘러싼 소요새가 돌파당했음을 간파한 르망은 리에주 요새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깨달았다. 북부와 남부의 소요새 고리를 독일군이 돌파한 순간 독일군은 중앙 건물을 포위해 외부의 지원을 끊으면 도시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르망의 정보부는 폰 에미흐의 병력은 4개의 여단에[14] 이는 르망의 단 하나뿐이었던 제3사단에 4배에 달했다. 안트베르펀(Antwerp)의 요새에 의지해 야전군을 보존하는 게 국왕 알베르 1세의 의중임을 아는 르망은 전군에게 도시 리에주를 버리고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요새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점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던 리에주 요새의 르망과 달리 브뤼셀의 벨기에인들은 르망의 성공적인 방어전에 찬사를 보내며 마치 전쟁에서 이긴 듯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루뱅(Louvain)의 벨기에 총사령부 또한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에 취해 몇 명의 참모는 '''공세작전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훨씬 더 현실에 투철했던 알베르 1세는 이런 안일한 작전에 반대를 표하며 벨기에 내에 있는 독일군 군단을 총 5개로 간파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제때 와준다면 리에주는 건사할 수 없더라도 안트베르펀 요새와 나뮈르 요새에 의지해 독일군을 막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알베르 1세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에게 계속 지원요청을 보냈다. 프랑스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4개의 사단을 보내겠음을 약속했으나 9월 15일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리에주 요새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지 언정, 소수 병력으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용감히 맞서 싸우는 벨기에군에 전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리에주 요새에 내리고 알베르 1세에게 군사훈장을 내렸다. 런던의 타임즈지(The Times)는 독일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냄으로 "불멸의 명성"(Immortal renown)을 얻었다고 리에주의 벨기에군에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에게는 6일의 밤은 훗날 4년간 참호속에서 고생할 병사들처럼 암울했을 뿐이었다. 독일군은 끊임없이 벨기에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포격과 비행선으로 포탄 세례를 선사했다. 물론 이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르망과 벨기에군을 항복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7일날, 루덴도르프는 후속 부대 없이 직접 도시 리에주에 쳐들어가 벨기에군의 항복을 종용했으나 이미 르망은 도시에서 후퇴했다. 리에주의 시장을 붙잡은 폰엠미흐는 시장에게 만약에 요새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리에주는 불타오를 것이라 협박했으나 시장은 요새의 항복을 종용하는데 거부하고 포로로 남았다. 도시의 함락으로 독일군은 기뻐했으나 리에주 요새는 당연히 멀쩡했다. 르망의 항복없는 저항덕에 원래 계획대로 10일에 벨기에로 진군했어햐 하는 알렉산더 폰클루크(Alexander von Kluck)의 제1군은 13일로 지체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요새를 파쇄하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중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9일에 리에주 요새를 향해 각각 크룹에서 제작한 420mm의 강력한 중포 빅 베르타(Big Bertha)와 스코다에서 제작한 중포를 파견 보냈으나 벨기에인들이 철도를 폭파한 탓에 이 또한 심각하게 지체되고 있었다.
빅 베르타(Big Bertha) 중포
8월 12일, 독일군이 기다리던 중포는 리에주의 퐁티스 요새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3일 12시 30분경 퐁티스 요새가 파괴되었고, 17시 30분 앙부르 요새를 함락했다. 이후 리에주의 요새들은 추풍낙엽처럼 함락된다. 14일에 쇼드퐁텐, 리에르, 플레롱 요새가, 15일 봉셀, 랑탱 요새가 함락되었으며 16일에 리에주의 마지막 남은 요새들인 올로뉴와 플레말이 함락되었다.
벨기에의 강간 문서 참고.
원래라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일 먼저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했기에(7월 28일) 정상적으로는 세르비아 침공이 첫번째 전투를 차지해야겠지만 오헝제국의 미흡한 준비 덕에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 벨기에 침공이 먼저 일어났으며 '''벨기에 방면의 전투가 큰 전투로서는 최초가 되었다.'''[6]
1. 개요
1914년에 독일 제국의 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고,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명한 러시아 제국에 독일 제국이 8월 1일에 선전포고를 명함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러시아의 동맹은 처음 협약이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방의 프랑스 공화국이였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공으로 독일의 국력이 분산될 것을 두려워한 독일군 참모총장 알프레트 폰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은 1905년에 그 유명한 슐리펜 계획을 입안해 독일 주력이 벨기에를 돌파함으로 파리를 공략해 프랑스를 굴복시킨 후 러시아를 공략한다는 거대한 작전을 기획했다. 1905년에 슐리펜이 은퇴함으로 참모총장은 헬무트 폰몰트케(小)(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7] 가 역임하고 슐리펜 계획 또한 총괄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영국이 중립을 지킬 것으로 생각해서[8] 폰몰트케(小)에게 슐리펜 계획을 중단하고 전력을 러시아로 보내라고 명한다. 그러나 수년간 슐리펜 계획을 총괄하고 수정하며 발동할 날만을 기다린 폰몰트케(小)에게 이는 씨알도 안 먹히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폰 몰트케(小)는 슐리펜 계획을 수정해 동부로 옮기는 새로운 작전을 짜려면 족히 1년이나 걸리는데다가 이미 발동된 순간 멈추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빌헬름 2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황제를 설득시켜서 결국 발동, 계획대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4일에 벨기에를 침공했다.
2. 저항을 결정한 벨기에 정부
2.1. 약체 벨기에군
탄생부터 영국의 지원과 여러 강대국의 보증을 기반으로 중립국을 내세운 벨기에의 군대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6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기병사단으로 구성된 벨기에군은 워낙 상태가 개판인 나머지 바버라 터크만 여사의 『8월의 총성』에서는 오스만 제국군을 연상시킬 정도라 표현한다. 군기가 나쁘고, 깔끔하지 못한데다가, 행군조차 제대로 못 따라가는 등 전형적인 오합지졸의 표본을 연상시켰다. 예산도 적은 나머지 탄약도 부족해 변변찮은 훈련량을 자랑했다. 징병제는 '''1913'''년에 도입되었으며 오히려 징병제는 군대를 더욱 인기 없도록 만들었다.
장교들은 오합지졸 병사들에 비하면 더 나았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문제가 심각했다. 당대 대표 시류인 공세주의에 영향받은 나머지 강대국에 둘러싸인 중립국으로서 현실적으로 방어전밖에 기획하지 못함에도 오히려 '''선제공격'''을 주장하는 장교도 존재했다고 한다.[9] 참모제는 '''1910년'''에 도입되었으며 이마저도 국왕 알베르 1세의 노력 덕에 생겼다.
-개로 기관총좌를 끄는 벨기에군. 전투모가 실크햇이다.
벨기에군은 작전 또한 일관되지 않았다. 주적이 명확했던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벨기에는 사방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으며 1913년까지 제대로 된 계획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나마 1913년 말에 국왕 알베르 1세의 노력으로 참모 에밀 갈레(Émile Galet)와 함께 독일을 주적으로 설정해 전력을 천연방어선 뫼즈 강(Meuse)에 집중해 강력한 리에주(Liege)와 나뮈르(Namur) 요새에 의지한다는 전략을 짰지만, 참모부와 참모총장 슈발리에 드셀리에 드모랑비에(Chevalier de Selliers de Moranville)에 의해 거부당했다. 셀리에 장군은 그 대신에 '''병력을 사방에 분산해 전장이 명확해지면 주적을 향해 집중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벨기에의 국왕이자 전시 총사령관 알베르 1세는 이런 부족한 병력과 분산된 전략으로 강력한 34개의 사단을 자랑하는 독일군을 맞서 싸워야했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명군 알베르 1세와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리에주와 나뮈르 요새 뿐이였다.
2.2. 유럽최강 리에주와 나뮈르 요새
영 못 미더운 벨기에군과 달리 벨기에가 온 힘을 쏟아서 건설한 리에주 요새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모델을 도입한 최고의 요새였다. 150미터의 언덕 위에 건설된 요새는 1888년에서 1892년 사이에 앙리 브리아몽(Henri Brialmont)의 디자인에 따라 건설되었다. 워낙 막강했기에 당시 가장 강력했던 포탄인 210mm마저 '''튕겨내도록''' 설계되었다. 12개의 비교적 작은 요새들이 거대한 중앙의 건물을 촘촘히 둘러싸며 이들은 서로 연계해 중앙의 건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적을 격퇴하는 게 임무였다. 이들 12개의 소(小)요새에는 400개의 최대 6칼리버를 자랑하는 대포들도 위치했었다.
이런 거대한 요새 시설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40,000명의 인원이 필요했는데 이들은 요새 운용 외에도 소요새 사이에 참호를 파서 곧바로 중앙건물로 돌파하려는 적군을 저지해야 했었다. 폰 슐리펜과 독일 참모부는 이런 리에주 요새와 나뮈르 요새를 매우 경계했다고 한다. 슐리펜이 은퇴했을 시점인 1906년에는 리에주 요새의 막강한 방어력을 파쇄할 포탄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는 벨기에를 손쉽게 통과할 필요가 있는 슐리펜 계획에게 적신호를 밝혔다.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포트 아서(Port Arthur)는 9개월간 저항했는데 당시에는 막강한 리에주 요새의 방어력에 감탄한 사람들은 포트 아서의 기록을 경신하거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않겠느냐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리에주 요새는 큰 피해를 각오해서라도 뚫어야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비록 슐리펜의 은퇴 시에는 요새를 파쇄할만한 포탄이 없었다고 해도 1909년에는 크룹(Krupp)과 오스트리아의 스코다(Skoda)[11] 는 각각 리에주 요새를 둘러싼 콘크리트를 뚫을 수 있는 420mm와 305mm 곡사포를 실험하거나 완성했었다.
2.3. 브뤼셀에 도착한 독일의 최후통첩
7월 29일에 독일 정부로부터 비밀 봉투를 받은 브뤼셀 주재 독일 대사 클라우스 폰벨로잘레스케(Claus von Below-Saleske)는 8월 2일에 비밀 봉투를 개봉해 곧바로 벨기에 정부에 전달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폰벨로잘레스케는 12시간 내에 벨기에 정부로부터 답장을 요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답변을 최대한 빨리 베를린에 전하고 아헨의 유니언 호텔에 묵던 오토 폰에미히(Otto von Emmich) 장군에게도 직접 전하라고 지시받았다.
그 전날만 해도 독일의 룩셈부르크 침공으로 긴장한 벨기에 정부에 벨로프살레스케는 독일로부터 걱정할 게 없다고 장담했으나 벨로프살레스케가 개봉한 봉투는 독일의 최후통첩이었다. 8월 2일에 벨로프살레스케는 명령대로 최후통첩을 벨기에 외무부에 전달했다. 7월 26일에 몰트케가 직접 작성한 최후통첩에는 벨기에를 공격하고자 하는 프랑스군은 나뮈르 요새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으며 벨기에군이 못미더운 독일군은 벨기에령으로 진입해 대신 프랑스군을 격퇴하겠다는 것이었다.[12] 좋은 미사여구로 장식했으나[13] 독일의 최종의도는 벨기에 정부에게 '''독일군의 침공에 저항하지 말라는 점'''을 관철하는 것이다. 통첩은 만약에 벨기에가 저항하면 적으로 간주할 것이고 12시간 내에 답변을 요구하며 끝맺었다.
8월 2일, 알베르 1세와 벨기에 정부는 독일의 오만한 통첩을 무시하고 침공해오는 독일군에 끝까지 저항하리라 천명했다. 빌헬름 2세와 독일 제국 정부는 나약한 벨기에가 끝까지 싸우리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빌헬름 2세는 알베르 1세의 부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의 혈연관계를 이용해 이 침공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알베르 1세는 '''"그는 나를 뭐로 보는가?'''(What does he take me for?)이라 반문하곤 독일로 향하는 나뮈르 요새와 리에주 요새의 다리를 끊고 벨기에-룩셈부르크 국경에 있는 모든 도로와 터널을 파괴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알베르 1세는 한 때 자신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던 63세의 노장이자 리에주 요새의 지휘관 제라르 르망(Gérard Leman)에게 명했다.
후술하겠지만 항복하라는 독일의 패기서린 위협에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갖춘 르망은 1분, 1초라도 버티기 위해 끝까지 저항하며 알베르 1세의 명령을 지켰다.'''"방어하도록 임명받은 위치를 자네의 사단과 함께 끝까지 지키도록"'''
"To hold the end with your division the position which you have been entrusted to defend"
3.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
3.1. 리에주 전투
벨기에의 확답을 들을 것도 없이 독일군은 벨기에를 돌파하는 첫 번째 관문인 리에주 요새를 향했다. 선봉을 맡은 폰엠미흐 장군은 특별히 6개의 부대로 구성된 소규모의 뫼즈군(Army of the Meuse)을 이끌었다. 만약에 벨기에군이 항전하지 않는다면 이런 소규모의 부대로도 리에주 요새를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독일군에서는 벨기에가 잘해봤자 형식적인 저항을 보일 뿐, 그 나약한 군세로 진지한 저항을 퍼부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빌헬름 2세의 트롤링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하지만 무저항을 예상했던 뫼즈군은 벨기에 기마대와 자전거병에게 공격당했다. 꿋꿋이 150미터 위의 언덕에 위치한 리에주 요새에 맞닥뜨린 뫼즈군은 다리를 끊는다면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독일의 패기서린 협박에 불구하고도 끊긴 다리를 발견했다. 끊긴 다리를 무시하고 건너려 하자 벨기에 보병에게 공격당했다. 나약했다고 믿었던 벨기에군과 독일군은 실제로 교전에 맞닥뜨린 것이다. 25,000명의 벨기에군보다 2배 넘게 많은 60,000명의 뫼즈(독일)군은, 밤이 돼서야 치열한 교전 끝에 리에주 북부에 위치한 비제(Visé)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8월 5일에 공세를 재개한 폰엠미흐의 뫼즈군은 리에주 요새에 야포로 포격한 뒤, 보병돌격을 명했다. 그러나 겨우 야포 정도로는 리에주 요새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그 덕에 제대로 된 엄폐물 없이 언덕 위의 요새를 향한 보병은 벨기에의 총격에 떼죽음 당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중대 뒤에 중대를 끊임없이 밀어 넣고 소요새 사이의 공간에 벨기에군이 참호를 완성하지 못한 탓에 큰 피해에 불구하고도 돌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돌파한 병력마저 중앙의 요새를 향하면서 기관총 세례에 직격으로 맞은 탓에 '''시체만 산을 쌓아갔다.''' 고전하는 독일군의 공세에 벨기에군은 착검돌격으로 독일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의 실행을 위해선 리에주 요새를 격파하는 게 필수인 독일군은 꿋꿋이 위의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뛰어난 성과 없이 독일군의 시체만 쌓여갔는데, 그 대신 이 시체 산은 '''인공엄폐물'''을 형성해 벨기에군을 곤란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소수 병력에 의존해야 했던 벨기에군과 달리 독일군은 예비병 또한 넘쳐나서 『8월의 총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명을 총알 쓰듯"(spending lives like bullet) 병력을 무식하게 밀어 넣았다. 5일 밤에도 엠미흐는 공세를 재개했으나 제14여단을 둘러본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von Ludendorff)는 병사들이 우울하고 불안해했다고 표현했다.
밤에 재개되는 공세 속에 제14여단의 흐트러진 대열을 목격한 루덴도르프는 무슨 소동인지 둘러보러 갔다. 제14여단장 폰부소(Friedrich von Wussow)가 기관총 세례를 맞고 죽었음을 확인한 루덴도르프는 곧바로 지휘권을 이어받고 과감히 소요새 플레롱(Fléron)과 데브녜(d'Évegnée) 사이를 돌파했다. 운 좋게도 플레롱의 기관총이 작동하는 데 실패했는데 이를 보기 좋게 공략한 루덴도르프는 6일날 오후 2시에 리에주 안마저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의 언덕에 도달했다. 루덴도르프는 야포를 리에주를 향해 조준하고선 르망을 항복시키기 위해 브뤼셀에 부임해 있던 독일 군사담당관을 특사로 리에주 요새 안으로 파견 보냈다. 파견된 군사담당관은 르망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체펠린 비행선이 리에주를 박살 낼 것이라 협박했다. 이를 증명하듯이 곧바로 독일군은 비행선으로 요새를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또다시 특사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불굴의 의지를 갖춘 르망은 항복을 거부했다.
항복할 수 없다면 납치해서 강제로 항복시키겠다고 마음먹은 독일군은 40명을 영국군과 비슷한 복장으로 위장시켜 르망의 지휘부로 파견 보냈다. 그러나 위장복이 허술했는데 지휘부에 도착한 곧바로 40명은 발각당해 벨기에군에게 공격받았다. 르망은 아수라장이 된 지휘부에서 탈출해 서부에 있는 소요새 롱생(Loncin)에서 지휘를 재개했다.
중앙의 건물을 둘러싼 소요새가 돌파당했음을 간파한 르망은 리에주 요새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 깨달았다. 북부와 남부의 소요새 고리를 독일군이 돌파한 순간 독일군은 중앙 건물을 포위해 외부의 지원을 끊으면 도시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르망의 정보부는 폰 에미흐의 병력은 4개의 여단에[14] 이는 르망의 단 하나뿐이었던 제3사단에 4배에 달했다. 안트베르펀(Antwerp)의 요새에 의지해 야전군을 보존하는 게 국왕 알베르 1세의 의중임을 아는 르망은 전군에게 도시 리에주를 버리고 끝까지 저항하기 위해 요새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점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던 리에주 요새의 르망과 달리 브뤼셀의 벨기에인들은 르망의 성공적인 방어전에 찬사를 보내며 마치 전쟁에서 이긴 듯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루뱅(Louvain)의 벨기에 총사령부 또한 이런 긍정적인 분위기에 취해 몇 명의 참모는 '''공세작전을 짜고 있었다고 한다.''' 훨씬 더 현실에 투철했던 알베르 1세는 이런 안일한 작전에 반대를 표하며 벨기에 내에 있는 독일군 군단을 총 5개로 간파하고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제때 와준다면 리에주는 건사할 수 없더라도 안트베르펀 요새와 나뮈르 요새에 의지해 독일군을 막을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알베르 1세는 프랑스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에게 계속 지원요청을 보냈다. 프랑스 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는 4개의 사단을 보내겠음을 약속했으나 9월 15일까지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리에주 요새가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지 언정, 소수 병력으로 독일군의 강력한 공세에 용감히 맞서 싸우는 벨기에군에 전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Légion d'honneur) 훈장을 리에주 요새에 내리고 알베르 1세에게 군사훈장을 내렸다. 런던의 타임즈지(The Times)는 독일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냄으로 "불멸의 명성"(Immortal renown)을 얻었다고 리에주의 벨기에군에 존경을 표했다. 그러나 일선의 병사들에게는 6일의 밤은 훗날 4년간 참호속에서 고생할 병사들처럼 암울했을 뿐이었다. 독일군은 끊임없이 벨기에군의 전의를 꺾기 위해 포격과 비행선으로 포탄 세례를 선사했다. 물론 이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르망과 벨기에군을 항복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7일날, 루덴도르프는 후속 부대 없이 직접 도시 리에주에 쳐들어가 벨기에군의 항복을 종용했으나 이미 르망은 도시에서 후퇴했다. 리에주의 시장을 붙잡은 폰엠미흐는 시장에게 만약에 요새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리에주는 불타오를 것이라 협박했으나 시장은 요새의 항복을 종용하는데 거부하고 포로로 남았다. 도시의 함락으로 독일군은 기뻐했으나 리에주 요새는 당연히 멀쩡했다. 르망의 항복없는 저항덕에 원래 계획대로 10일에 벨기에로 진군했어햐 하는 알렉산더 폰클루크(Alexander von Kluck)의 제1군은 13일로 지체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요새를 파쇄하기 위해 훨씬 더 강력한 중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로써 독일군은 9일에 리에주 요새를 향해 각각 크룹에서 제작한 420mm의 강력한 중포 빅 베르타(Big Bertha)와 스코다에서 제작한 중포를 파견 보냈으나 벨기에인들이 철도를 폭파한 탓에 이 또한 심각하게 지체되고 있었다.
빅 베르타(Big Bertha) 중포
8월 12일, 독일군이 기다리던 중포는 리에주의 퐁티스 요새에 도착했다. 다음 날인 13일 12시 30분경 퐁티스 요새가 파괴되었고, 17시 30분 앙부르 요새를 함락했다. 이후 리에주의 요새들은 추풍낙엽처럼 함락된다. 14일에 쇼드퐁텐, 리에르, 플레롱 요새가, 15일 봉셀, 랑탱 요새가 함락되었으며 16일에 리에주의 마지막 남은 요새들인 올로뉴와 플레말이 함락되었다.
4. 벨기에의 강간
벨기에의 강간 문서 참고.
[1] 이는 1차 이프르 전투까지 계산한 날짜로 이 항목에서는 국경 전투 이전에 벌어지는 전투까지 다룬다.[2] 독일 제1군의 지휘관[3] 독일 제2군의 지휘관이자 전 독일 제국 수상 베른하르트 폰뷜로우의 형.[4] 벨기에 국왕이자 벨기에군 총사령관[5] 리에주(Liege) 요새의 지휘관[6] 작은 규모라면 룩셈부르크를 점령하던 당일에 일어난 독일과 프랑스에서 이미 몇 명의 군인들이 충돌한 뒤였다.[7]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손쉬운 승리를 일구어낸 19세기 독일의 명장 헬무트 폰몰트케(大)(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의 조카이다.[8] 사실 이는 결코 틀린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는 상당히 모호한 답변을 줄 뿐이었지만 하다못해 프랑스가 침공당했어도 벨기에가 공격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영국이 그리 빨리 개입했거나, 아니면 실제 역사대로 전력을 다해서 협상국에 도움을 전달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정식으로 묶인 게 하나도 없었고 벨기에 침공이 벌어진 이후에도 참전에 대한 반대가 좀 거셌다.[9] 현대에는 기계화라는 개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 당시의 벨기에와 비슷한 포지션인 강소국은 오히려 이웃한 강대국과의 전쟁이 치러지면 적국의 영토로 깊숙히 침투해 선제공격을 가해 최대한 많은 피해를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방어전으로 가면 불리할 정도로 근대 시기와 비교해 화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기도 하였고 현대전에서는 1차대전의 참호처럼 돌파하기 힘든 방어선이란 만들기가 굉장히 힘들기 때문. 대표적인 예시가 싱가포르. 하지만 벨기에 장교들이 저런 주장을 하던 때는 1900년대로 막 접어든 시기이다. 현대전의 필수품인 비행기는 고작 10년 전에 발명되었으며(벨기에가 징병제를 도입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자동차도 고작해야 몇십년전에 나온 사치품이었다. 물론 벨기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의 군인들은 모두 자기 발로 뛰거나 기껏해야 말을 타는게 최선이었지만, 어쨌든 선제공격은 건 당대 벨기에한테는 불가능이었다. 벨기에와는 비교도 힘든 강대국인 독일조차도 프랑스를 선제공격 했다가 실패하는 마당에 벨기에가 적 강대국으로 선제공격을 가한다? 그야말로 독일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은 물론, 이 기회를 활용해 벨기에를 지도 상에서 지워버려도 별 비난을 들어먹지 않는 사태만이 연출될 것이다.[10] 빨간색 점들은 2차대전에 이르러서야 건설된다.[11] 오늘날 체코의 그 자동차 회사 맞다. 이 당시에는 체코는 보헤미아 왕국으로 존재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후국이었다.[12]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독일이 이상한 덤터기 씌울까 봐 국경으로부터 전군을 10km나 후퇴시킨 상황이었다. 독일의 100% 구라.[13] 최후통첩에서 독일은 군사작전이 끝난 순간 곧바로 군을 물리고, 피해가 발생하면 모두 배상해주며 전쟁이 끝난 즉시 벨기에 왕국의 중립국이자 자주국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적었다. '''물론 이를 이행하리라는 보장은 없다.'''[14] 사실은 5개의 여단으로 정보부의 예상보다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