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역사
폴란드볼로 보는 벨라루스의 역사
1. 개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주인이 자주 바뀌던 땅이었다. 주변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민족적, 언어적, 문화적 독자성이 희미한 편. 지금의 영토는 모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속한 영토였고,서쪽 절반은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폴란드 땅이었으나, 2차 대전 중에 소련이 폴란드로부터 강탈해온 것이다.[1]
다만 벨라루스의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잃은 브레스트 등의 서쪽 영토를 2차대전 이후 수복한 것이라고 본다
벨라루스는 지난 몇 백년간, 서방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폴란드/리투아니아 중심의 유럽주의자들과 민족적, 종교적 유사성과 공통 조상을 강조하는 슬라브주의자들이 역사적으로 맞대어 왔으며, 히틀러와 스탈린 치하 20세기의 피바람나는 광풍이 불기 전에는 동슬라브인(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 라트갈레인, 유대인, 독일인, 스웨덴인, 리보니아인들 같은 다양한 민족들이 공존하던 문화와 종교의 접경지였다는 점에서는 아랫동네 우크라이나와 통하는 바가 있다.
2. 고대사
오늘날에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서기 6세기 무렵까지 발트어족들이 살고 있었으나 슬라브인들의 이주 이후 이들 대부분은 슬라브족과 섞여 살며, 오늘날 벨라루스인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크리비치족과 드레고비치 족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발트어를 쓰는 여러 부족들과 동슬라브족 사이의 혼혈이 바로 벨라루스인이라고 한다. 동슬라브족이 발트인들이 살던 오늘날의 벨라루스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발트어-슬라브어 이중언어 현상이 나타났다.[2] 이를 통해서 우리는 벨라루스 일대의 발트인들이 슬라브족에게 일방적으로 학살 및 추방을 당한 것이 아닌, 서로 동화되고 융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수한 발트어 사용 지역은 오늘날의 발트 3국의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및 및 칼리닌그라드 일대로 밀려났다. 9세기 초 벨라루스 땅에는 폴로츠크 공국이 등장한다. 키예프 공국은 벨라루스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키예프 공국의 구성원이 된 폴로츠크 공국은 오늘날의 벨라루스 북서부와 라트비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드네프르 강과 다우가바 강을 연결하는 수운 요충지에 위치한 폴로츠크 시는 키예프 공국의 교역망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키예프 공국은 정치적으로 권력의 중심이 한 곳에 단단히 자리잡은 중앙 집권제 국가가 아니라 문화적, 종교적, 상업적 중심지였던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동슬라브계 언어와 문화[3] , 정교회라는 종교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영주들과 자치 도시들의 연합체에 더 가까웠는데, 이 중에서 키예프 자체 다음으로 가장 번영하고 중요했던 도시들 중 하나였던 폴로츠크 공국을 흔히 역사학자들과 대중적으로는 최초의 벨라루스인들의 국체로 본다. 폴로츠크 공국과 수운으로 연결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비텝스크 공국, 민스크 공국, 나바흐루다크 공국이 건설되었다.
허나 유럽 내에서도 유난히 민족, 문화, 종교의 이동과 침략, 상호 영향과 교차 발전이 심했던 중~동부 유럽 전반이 그렇다시피 근대 이전에는 현대에서 통용되는 뚜렷한 민족적 구분과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동슬라브계 언어와 정교회라는 장기적 정체성을 가지고 현대 벨라루스 영토에 처음으로 뚜렷한 기록을 남긴 정치적 국체가 폴로츠크 공국이어서 이렇게 평가할 뿐이다.
3. 중세사
12세기 말부터 리보니아에 정착하던 독일인 선교사와 상인들을 중심으로 1201년 리가시가 건설되고,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이 들어오게 되었다. 검의 형제 기사단은 발트 원주민들을 침략하고 개종시키는 와중에 폴로츠크 공국과도 충돌하였다.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들이 요새를 차곡차곡 쌓아가며 전진하면서 폴로츠크 공국은 발트 해 연안과 다우가바 강 유역의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번영을 누렸던 1223년 키예프 공국이 몽골 제국에게 파괴당하면서 동슬라브인들이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라고 불리우는 고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지나치게 무거운 조세를 부과했으며 종종 루테니아인들이 의심스러울 때마다 정기적으로 쳐들어가서 마을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하였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슬라브 신화와 비슷한 발트 다신교를 믿고 있던 리투아니아인의 세력이 오늘날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독일 십자군과 타타르인들을 무찌르자 루테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한다.[4] 리투아니아인들은 "우리는 새것을 들여오지도 않고, 옛것을 바꾸지도 않는다."라는 모토로 루테니아의 기득권들을 안심시키자 민스크를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는 무혈 점령이 이루어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초창기 중심지는 흑루테니아의 도시 나바흐루다크였으며, 루테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타타르인들과 싸울 때 적극적으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협력하였다. 14세기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와 동군연합을 이루고 리투아니아인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이교도 리투아니아인들과 정교회 루테니아인 사이의 통혼이 활발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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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부 유럽의 역사에서 서방 라틴 교회의 세계 속으로 편입된 폴란드가 가장 오랫동안 깊은 관계와 역사를 공유했던 정교회권의 이웃이 우크라이나였다면, 벨라루스는 역시 (상당히 뒤늦게 편입되었지만) 서방 교회의 동유럽 깊숙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리투아니아와 비슷한 관계를 맺어왔다. 발트해를 넘어 십자군이란 이름 아래 지속적으로 현대 발트3국의 땅을 침략했던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 튜튼 기사단, 덴마크, 스웨덴의 공격을 피해 이교도 신앙을 간직했던 리투아니아인들은 13~14세기를 걸쳐 튜튼 십자군의 침략으로부터 더 안정적인 땅을 찾아 키예프 루스가 사라진 동슬라브 정교회 공국들의 권역으로 남하했고, 이 와중에 많은 정교회 루스인들을 자국의 핵심 관료, 문화적 엘리트 계층으로 흡수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게디미나스 공은[5] 는 25년간 재위하면서 대공국의 영토를 크게 넓혀 오늘날의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 해당하는 국경선과 비슷한 수준의 영토를 남겼다. 게디미나스는 루테니아 영토를 합병할 때면 언제나 지역 주민들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지방 법률을 보존하며 봉건 영주들의 재산권을 절대 터치하지 않고 상인들의 계약을 맺을 자유도 건드리지 않는 영민함을 보였다. 게디미나스를 시기한 튜튼 기사단은 게디미나스가 사실 비테니스의 후손이 아니라 말을 치는 시동(Horse Boy) 출신이라는 험담을 퍼트리기도 했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튜튼 기사단이 열받을만 하게도 게디미나스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중단하고 십자군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적, 사무적 언어는 현대 리투아니아어가 아닌 벨라루스어의 모태가 되는 중세 루스어(루테니아어)였고, 대공국의 경제적, 인구적 기반 또한 현대 리투아니아 땅인 발트해 인근보다는 민스크, 폴라츠크, 마힐료우, 흐로드나 일대의 대농지들이었다. 아무리 서로 같은 땅을 공유하며 서로 깊게 관계를 맺어도 종교적인 차이를 중심으로 도시민, 귀족층을 형성한 기득권층과 농민들이 다수였던 피지배 계급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폴란드인이나 우크라이나인들과는 달리 자국의 왕실 자체도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됐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경우 기존의 정교회 소속 귀족, 도시민들이라고 딱히 배제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현대 벨라루스 지방은 정교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가톨릭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나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깊게 동화되었다.
3.1. 르네상스
연대기가 지식층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던 키예프 루스 그리고 가톨릭 수도사들의 영향으로 벨라루스에서도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키예프 루스의 역사를 담은 연대기들이 서술되었다. "1446년까지 쓰인 백러시아(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 연대기"는 9세기부터 1446년까지의 역사와 설화를 담은 책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키예프 루스의 계승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책이었다. "비초비에츠 연대기"는 최초로 '''벨라루스어'''로 서술된 연대기로 13세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독일 기사단의 전쟁부터 16세기까지의 정치사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동안 잊혀진 연대기였다가 비초비에츠 가문에서 필사본 하나가 발견되면서 이후 1846년 중세 벨라루스어판 그대로 재출간되었다.
또한 마그데부르크 자치 도시들이 생기면서 벨라루스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조금씩 받게 되었다. 인구 대부분이 농노로 묶여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의 도시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이 이루어졌다. 폴로츠크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시스크 스카리나[6] 는 최초로 벨라루스어로 된 책들을 최초로 그것도 성공적으로 출간했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여행 경험을 듣기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학생이었던 스카리나는 1504년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라틴어를 배우면서 직접 역사, 철학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고 곧 독서광이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파도바로 유학하여 그곳에서 의사 박사 학위와 면허를 딴 후에 프라하에 정착하고 돈을 모아 프라하에 벨라루스어로 된 책들을 출간할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이곳에서 스카리나는 1517년 벨라루스어로 번역된 시편을 키릴 문자로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2년동안 벨라루스어 구약 성서 23권을 1만권 넘게 인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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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크 스카리나 탄생 525주년 기념우표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 법전을 편찬하는 영예로운 작업에 참여한 스카리나는 비잔틴-러시아 문화와 가톨릭-프랑스-이탈리아 문화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일단 법전 편찬이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스카리나는 1534년 모스크바 공국을 여행하며 자신이 인쇄한 성경을 배포하고자 했으나, 성경은 교회 슬라브어로 쓰여진 것만 인정할 수 있다는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스카리나가 가져온 중세 루테니아어 성경은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는 가운데 불태워졌다. 크게 실망한 스카리나는 다시 프라하로 돌아가 여생을 의사로 일하며 보냈다고 한다.
모스크바 공국 성직자들은 이후에도 한동안 활판 인쇄술에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최초의 러시아인 인쇄업자인 이반 표도로프와 표트르 므스티슬라베츠도 모스크바 공국에서 쫒겨나 벨라루스로 와서 교육용 복음서와 시편을 출간했다 하며, 모스크바 공국의 인쇄술 혐오는 표트르 대제 시절 이후에나 조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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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의 통치 기관인 귀족 의회의 법률은 종교의 자유를 명시했고, 의회 내 무시 못할 영향력의 정교회나 신흥 개신교 귀족 세력 또한 존재했기 때문에 나머지 유럽이 종교 문재로 피비린내나게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벨라루스는 비교적 평화로울 수 있었다. 폴란드어가 주도적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식어는 1696년까지 루테니아어 즉 중세 벨라루스어였다. 그러나 종교를 포함한 국정 문제의 거의 대부분을 귀족들의 자유에 맡겨 놓은 폴란드-리투아니아식의 관용 정책은 반대로 대지주 귀족들 자신들이 원하면 다스리는 영지의 종교적 다양성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것 또한 막을 수단이 없다는 양날의 칼이었다. 16세기 말에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방으로 합쳐짐으로써 벨라루스 전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역이 되었다. 루블린 조약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 왕국 쪽으로 아예 떼주어 버린 키예프 중심의 우크라이나 일대는 중세 정교회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의식이 어딜 안 가고 예수회를 중심으로 기존의 정교회 귀족들을 개종시키거나 아예 소외시키려는 가톨릭계 귀족들의 문화, 종교적 침입에 반발, 흐멜니츠키 대봉기와 대홍수라는 엄청난 판을 벌리며 아예 연맹의 뿌리 자체를 흔들었고, 형식적으로 아직 리투아니아 대공국 관할이었던 벨라루스에서도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예수회 교육을 중심으로 폴란드어를 일상언어로 차용하고, 공격적인 바로크 가톨릭 신앙을 추구하면서 17세기 중반 부터 종교적, 민족적, 문화적 분화가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4. 근대사
17~18세기 벨라루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왕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 사이의 3파전이 격렬하게 벌어지면서 많은 벨라루스인들이 죽거나 도망갔는데. 이 때문에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던 시점에서 그 넓은 땅에 인구가 겨우 300만명밖에 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이웃 우크라이나 지역이 전쟁이 더 격렬하게 벌어지긴 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땅이 워낙에 비옥해서 사람이 죽거나 잡혀가도 다른 지역에서 곧 이주민들이 몰려오는데 반해서, 벨라루스는 코사크 공동체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올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의 결과 벨라루스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중세 키예프 공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제들은 벨라루스 지방을 외세인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서 재탈환해야 할 땅으로 인식하여 정교회 문화와 동슬라브 언어의 부흥을 부추겼으며,[7] 러시아에서 직접 관리들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종종 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 농노들이 카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귀족들에 대항하여 폭동과 소요를 일으킬 때는 오히려 사회계급 안정을 위한답시고 폴란드인 지주들 편을 들어주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였다. 벨라루스를 병합시킨 예카테리나 대제는 귀족 문화의 보호자를 자처한 덕분에, 벨라루스 지역에 살던 카톨릭 지주들은 흐멜니츠키 반란 때 우크라이나의 폴란드 지주들이 때죽음을 당한 것과는 반대로 재산과 권력을 보존시킬 수 있었다.
1796년 러시아 제국에서는 벨라루스를 비텝스크 시를 중심으로 하는 비텝스크주, 민스크 시를 중심으로 하는 민스크주 이렇게 두 개의 주로 나누었다. 당시 비텝스크주의 인구는 150만명, 민스크주의 인구는 80만명이었다. 빌노를 수도로 하는 리투아니아주는 인구가 160만명이었다. 1861년 러시아 제국에서 농노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러시아 제국 치하의 벨라루스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귀족 지주들로부터 농노 해방을 시키는 와중에 일부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주들에게는 보상을 최소한만 해주었으며, 벨라루스 농부들에게는 비교적 가벼운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농촌 공동체 미르는 농노 해방 정책 시행 이후 각 가정의 인원수대로 땅을 분배했는데, 이를 계기로 벨라루스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농민 입장에서는 노동 가능 인원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으면 인원수대로 더 많은 비율의 땅을 분배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주에서 인구가 간신히 두 배 증가할 동안 벨라루스에서는 인구가 다섯 배나 증가했다.
5. 현대사
1906년을 기점으로 벨라루스 지역에는 표트르 스톨리핀의 개혁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성이 크게 증대하고 신용조합이 들어섰다. 농업 생산이 증대되고 산업이 발달하면서 벨라루스에서도 민족문화를 복원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 했다. 이들은 벨라루스어가 러시아어의 방언이 아니고 독자 언어라고 주장하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공식 언어라는 점이나 16세기에 프란시스크 스카리나(Francysk Skaryna 1487~1551)를 중심으로 발달한 벨라루스 문학의 발전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1914년부터 벌어진 세계 대전 및 러시아 혁명과 대숙청 같은 대재앙 및 혁명이 연이어 계속 터져나간 20세기 벨라루스의 정황상,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의 노력은 많은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독일군과 러시아군의 교전지가 되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가 더 이상 1차 대전에 참전하기 힘들어지자 이 기회를 노리고 독일 제국은 1918년 민스크에 입성해 벨라루스를 점령하였다.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조약으로 독일 군대가 벨라루스에 주둔하는 동안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이 잠시 세워졌었으나 그해 후원자인 독일이 항복하고 1년만인 1919년에 붉은 군대가 들어오면서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붉은 군대와 폴란드군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분할되어 동부지방은 러시아에게, 서부지역 영토가 폴란드에 편입되었다. 이후 동벨라루스에서 성립된 벨라루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2년에 소련이 공식적으로 설립되면서 소련의 관할하에 들어갔다. 그 이후에는 급속한 산업화와 농업집산화가 이루워졌지만 독소불가침 조약의 결과로 벌어진 폴란드 침공으로 폴란드 동부지역을 상당수 차지하면서 서벨라루스까지 합쳐서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나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벨라루스는 독일의 군사점령지로 전락하고 벨라루스 중앙 라다라는 자치 정권이자 괴뢰 정권이 설립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독일군이 벨라루스인과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을 학살하여 무려 225만명 가량(당시 벨라루스 인구의 1/4)이 죽음을 당하고 전체 산업시설의 80%가량이 파괴된 슬픈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여하튼 다시 소련의 관할로 들어오면서 산업시절을 재건한 뒤로는 그런대로 발전된 지역이 되었다가 1986년 체르노빌 사건이 터지면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1990년 벨라루스 자유선거에서 독립파는 전체의석의 10%를 차지하는데 그쳤지만 대세를 타면서 1991년에 소련이 해체의 길로 접어들며 독립하였다.
초기 정부는 친서방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초인플레이션과 산업기반 붕괴로 인한 경제파탄 앞에서는 무기력 했고 결국 첫 대통령 선거에서 루카셴코가 집권하게 되었고 루카셴코는 국기와 국가를 다시 변경하고 반대파를 회유하거나 탄압하는 정책을 통해 장기집권을 이록하면서 독재정치로 유럽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1999년 러시아와 통합조약을 서명, 러시아-벨라루스 연합을 조직했지만 이는 이후 후속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무산'''되었다. 이후 좀 더 높은 단계의 연합체인 유라시아 연합에 참여하고 있다.
[1] 소련은 폴란드의 동쪽을 떼어가는 대신, 서쪽에 있는 패전국 독일의 동부 영토를 떼서 폴란드에 붙였다. 그래서 수도 바르샤바가 원래는 폴란드 국토 약간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동쪽에 치우친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떼어온 옛 폴란드 동부가 소련 해체로 벨라루스 땅이 되었다.[2] 중세 루테니아어와 현대 벨라루스어에도 이중언어 현상이 적잖이 반영되어 있다[3] 영어권을 비롯한 서방 학계에서는 현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로 분화되기 이전의 정교회권 동슬라브계 민족 전반을 루스를 라틴어화한 루테니아(Ruthenia)인들이라고 지칭한다. 동슬라브계 민족들의 자세한 역사적 기원과 분화는 루스 항목에 설명되어 있다.[4] 리투아니아 뿐만 아니라 노브고로드 공국도 기사단과 전쟁을 벌일 때도 벨라루스인들에게 많은 지원을 받았다.[5] 재위 1316년 ~ 1341년[6] 출생 ??~ 사망1551년[7] 사실 이때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벨라루스어를 단순히 러시아어의 방언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