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황자총통 발굴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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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분류'''

'''수량/면적'''

'''지정연도'''

'''제작시기'''

'''지정해제일'''
1996년 8월 31일
1. 개요
2. 경위
3. 범죄 인지와 수사
4. 후폭풍
5. 바깥고리
6. 국보 제274호 지정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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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고학계와 대한민국 해군흑역사로 남은 발굴 조작사건.
범인은 해군 '''황동환'''(黃東煥, 해사 22기) 당시 대령 및 수산업자이자 유물발굴단에 민간탐사용역으로 참여한 '''홍무웅'''(洪武雄), 골동품상 겸 발굴단 자문위원 '''신휴철'''(申休哲)로, 이들은 1992년 경남 통영군 한산도 해저에서 거북선에 장착되었다고 알려진 총통을 인양했다고 보고하여 화제가 되었다. 해당 총통은 불과 17일만에 국보로까지 지정되기에 이르렀으나, 후일 순천지청 지익상 검사가 수사하던 뇌물죄 사건에서 관련 증언이 나오면서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이에 문화재관리국은 1996년 총통을 국보에서 해제하였다.

2. 경위


1992년 8월 18일, 해군사관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된 '충무공 해전 유물 발굴단'은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도 문어포 서북방 460 m 수역 해저에서 조선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총통을 인양했다.
조사 결과 총통의 포신에는 "만력 병신년(1596) 6월 일 제조하여 올린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 造上 別黃字銃筒)", "귀함(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 하는 명문이 있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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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함(龜艦)이라는 글귀는 이제까지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로는 전하지 않는 거북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었기에, 역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단번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발굴한 지 겨우 17일이 지난 9월 4일, 문화재청은 이 황자총통을 '국보 제274호 귀함별황자총통'으로 지정했다. 아무리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로 보인다고 해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등록되었다. 백제를 대표하는 무령왕릉의 황금 유물들도 그 가치는 당연히 국보로 지정되어야 마땅하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1971년 발굴 이후 약 3년이 지나 1974년 9월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다른 예로 1973년 발굴한 천마총신라 금관도 당연히 국보 지정 확정이 당연한 중요 유물이었지만 5년이 지나서야 지정되었다.
이렇게 아무리 출처가 명확하고 문화재적 / 역사적 의미가 중요한 유물이라도 충분히 검토를 한다면 최소한 몇 년은 지나야 국보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겨우 17일 만에 국보로 지정된다? 별황자총통 건은 이례적이어도 너무 이례적이었다. 문화재전문위원 현장답사 등 절차를 생략하니, 당시 한 문화재위원이 작성했다는 200자 원고지 5매 분량 평가서가 국보를 평가하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순신의 유물이 나왔는데 빨리 국보 지정 안 하고 정부는 뭐하느냐고 보도했다. 이순신이라는 이름값에 휘둘려 질 낮은 가짜 유물을 제대로 된 검증절차도 없이 졸속으로 넘겨버린 것이다.
국보가 된 황자총통은 진해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해군은 이후 이를 바탕으로 실물복원은 물론, 포격시험까지 실시하기에 이르렀으며, 포신에 새겨진 일사적선 필수장(一射敵船 必水葬)은 해군 전체의 슬로건이 되었다.[1] 게다가 1992년이 임진왜란 400주년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도 관심이 엄청나게 집중된 것은 물론, 대한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38톤급 소형 탐사정 한 척과 운영요원이 불과 30명인 초미니 발굴단으로서는 믿기 어려우리 만큼 큰 업적을 올린 것이기에, 발굴단장 황동환 대령(해사 22기)은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3. 범죄 인지와 수사


발굴 후 4년이 다 되어가던 1996년 5월,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지익상 부장검사는 수산업자 홍무웅을 조개 채취 허가와 관련된 뇌물 사건으로 조사하던 중 홍씨로부터 "황동환 대령에게도 돈을 줬는데, 그로부터 국보 별황자총통은 '''가짜'''란 말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검찰은 총통을 발굴했던 황동환 대령을 은밀하게 불러 조사를 했지만 황 대령은 "나도 그런 소문을 듣긴 했는데, 해군의 명예도 있고 하니까 대충 덮어 주면 좋겠다." 하고 말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홍무웅의 말이 사실무근이라고 화를 벌컥 내며 명백한 진품이니 조사해보면 다 나온다고 당당하게 나와야 했건만, 황씨의 태도는 누가 봐도 좀 수상하긴 했다. 당연히 검찰은 이 말을 그냥 넘기지 않고 증거를 잡기 위해 수사에 착수했다[2]. 수사와는 별도로 황 대령을 다시 소환해 자백을 유도했지만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난 6월 중순에야 황 대령은 결국 사건의 전모를 실토했다. 홍무웅을 통해 골동품상 신휴철이 가지고 있던 총통을 사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마치 정말로 발굴한 양 건져올렸고, 이 과정에는 해사 박물관장 조성도 대령[3]도 관여했다는 것'''이었다. 6월 18일, 대한민국 해군이 이 사실을 공식발표하자 학계는 물론 전 국민이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통을 판 신씨의 집에서 제작시기를 알 수 없는 총통 13점과 글씨를 음각하는 도구들이 발견되었다. 체포된 신씨는 며칠 뒤 사위와 함께 총통을 만들고 글씨를 새긴 후, 그 위에 화공약품을 1년간 부어서 부식시켰다고 자백했다. 심지어 '''조선시대 유물도 아니었다'''는 수사결과가 나오자 해군과 문화재청은 개망신을 피할 수가 없었다.

4. 후폭풍


결국 1996년 8월 30일, 문화재위원들은 별황자총통을 국보에서 해제했다. 이 때문에 국보 제 274호는 영구결번되었다. 프로 스포츠에서는 보통 유명한 선수에게 부여하는 영예인 영구결번이 국보에서는 부끄러움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사실 발굴 당시부터 유물을 두고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었다. 전례 없이 초광속으로 국보로 지정됨이 영 석연찮지만 차치해보자. 금속으로 만든 총통이 400년 가까이 바다에 잠겨 있었다면 당연히 표면이 부식되어야 했지만, 발굴(?)된 총통의 상태는 '''지나칠 정도로 양호했다.''' 보통이라면 녹으로 덮여 글씨는 알아볼 수도 없어야 정상이었을 텐데, 별황자총통에 새겨진 글씨는 금방 새긴 듯 너무나 선명했다.
총통의 상태가 지나칠 정도로 좋은 것도 눈감아준다 하더라도 총통에 새겨진 문구 역시 수상쩍다는 지적이 있었다. 글귀 중 일부는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였다. 예를 들어 거북선은 한자로 '''귀선(龜船)'''이라고 하지 귀함(龜艦)이라고 쓴 기록은 전무했다. 또한 당시에는 왜군을 적선(敵船)이 아니라 도적 '적(賊)'으로 표현했다. 또한 '사(射)'란 표현은 활로 화살을 쏠 때 쓰고, 화약무기를 쏠 때에는 '방(放)'이라 하였다. 수장(水葬)이란 단어도 조선시대에 사용된 예가 없다. 조선시대의 장례법은 매장만 허용[4]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어학적 고증은 사료를 비판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하다.[5] 예컨대, 오늘날 해군에서 대체로 전투에 쓰이는 배는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 배 함(艦)자를 사용함이 일반적이지만, 이는 한반도가 근대화하면서 일본제 한자단어를 차용해 쓴 뒤 생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판옥선'처럼 배 선(船)자를 사용했다. 거기에다 '거북함(艦)'이 아닌 '거북선(船)'으로 통용되는 것도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사(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활이든 뭔가를 쏠 때 '발사'라고 표현함은 원래 일본에서 유래했다. 조선에서는 화포류에는 '방(放)'을 사용했다. 사(射)라는 한자가 원래는 <주례>에서 일컫는 육예(六藝) 중 하나라서, 막연히 뭔가를 '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활을 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도 원래 우테(射て)는 '활을 쏴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도 포를 쏠 때는 하나테(放て)라고 구별해서 표현했다. 그런데 후대에 총기가 보편화되고 총포류에 기반한 군대가 나오자 구체적으로 '활'을 지칭하는 의미가 빠지고, 보편적으로 '쏜다.'는 뜻으로 변한 것이다. 만약 정말로 조선시대 유물이었다면 '귀함황자 경적선 일사적선 필수장(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이 아니라 '귀선황자 경적 일방적 필침(龜船黃字 驚賊 一放賊 必沈)'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총통의 성분을 분석해보니 아연이 무려 8.06%나 포함되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연은 열에 약하기 때문에 별황자총통을 실제로 무기로 썼다면 총통이 화약의 열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버릴 수준이었다. 화공약품을 1년간 부어 인위로 부식시켰으니 저런 수치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이는 총통을 발굴한 해군사관학교 측이 총통 발굴 이후 기본적인 시료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무언가 수작이나 외압, 은폐행위가 없이 정상적으로 신중히 연구하고 절차를 밟았다면 처음부터 위조사실을 쉽게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들을 양성한다.'고 자처하며 유물 발굴을 주도한 해군사관학교는 물론, 유물을 정확히 검증하지도 않고 졸속으로 국보로 지정한 문화재위원들 모두 학문적 정합성 및 연구/고증기간을 무시하고 치적 쌓기에만 정신이 팔린 결과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발굴조작 사건으로 역사에 남았다. 당시 국보 지정 심의과정에 참가한 문화재위원 중 '''군사유물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상 해군의 설명만 믿고 국보로 지정한 것이다. 객관적인 연구방법론을 무시하고 딴 생각 하는 비전문가들이 정책을 주도하는데 누구도 제동을 걸지 않거나, 감시하지도 않으면 어떤 식으로 나라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지 보여 준 사례.
결과적으로 신안 해저유물 발굴 등으로 쌓아올린 해저유물 발굴사에 씻을 수 없는 불신을 안긴 사건이 되었다. 2012년 11월에 진도 앞바다에서 승자총통 유물이 인양되었음에도 이를 쉽게 믿지 않고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
더욱이 해당 사건에 관여한 골동품상 신휴철은 가짜 별황자총통 외에도 모조 총통, 모조 갑주, 모조 측우기 등 40여 종을 만든 혐의로 결국 구속되었다. # 우리나라 전통 화약무기연구계의 대표적 인물인 채연석 교수의 저서 <우리의 로켓과 화약무기>에도 전체 이름이 다 나온 것은 아니지만 채연석 교수와 있었던 일이 나오는데, 당시 채연석 교수가 그와 그가 가진 총통을 보고 잠시 설렜으나 뭔가 미심쩍어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이후 이 글의 주제인 총통 위조 사건이 등장한다.

5. 바깥고리



6. 국보 제274호 지정해제


이 귀함별황자총통은 해군 이충무공해저유물발굴조사단에 의해 1992년 8월 경상남도 통영군 한산면 문어포 서남쪽 해저에서 발굴 인양되었다. 우리나라 국방과학기술문화재 화포 연구 사료로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1992년 9월 4일 국보 제274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진품이 아닌 모조품으로 밝혀져 문화재적 가치를 상실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1996년 8월 31일 지정 해제되었다.


[1] 별황자총통이 조작된 유물임이 드러난 이후로도 해군에서는 이 문구를 계속 사용한다. 2012년 기사[2] 해당 건은 지 부장검사가 당시 유창종 지청장에게 보고를 올렸는데, 유 지청장은 문화재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이었던 만큼 보고를 받은 직후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미술상을 통해 관련자의 신상을 알아보는 등 직접 수사를 지휘했다고 한다.[3] 발각되기 전인 1993년에 사망.[4] 조선시대는 신체발부 수지부모가 중요 도덕관 중 하나였던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으니 당연한 얘기이다. 당시 조선에서 불이나 물로 사망자의 시신처리를 했다간 사망자의 유언 여부와 관계없이 장 100대를 때렸다(대명률직해 200조-喪葬).[5] 언어학적 고증으로 위조임을 밝혀낸 서양의 대표적인 사례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기진장)가 있다.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임명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음을 천명하고 교황권이 황제권보다 우위에 서 있음을 명시했다는 이 문서는 15세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인문학자 로렌초 발라가 위조임을 밝혀내었다. 4세기에 쓰인 문헌 자료와 비교하여, 당대에는 용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라틴어 단어가 듬뿍 들어갔음을 확인하여 위조라고 결론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