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본류
1. 개요
보수본류(保守本流)는 일본에서 평화헌법 유지, 대미협력외교, 경제성장에 정치의 중점을 두는 보수 진영의 한 노선이다.
2. 성향
보수방류 대비 좀 더 온건, 중도적인 성향으로, 주로 평화헌법 유지, 경제(무역교류)중시, 자유보수주의~보수자유주의, 미일동맹 중시 노선을 내걸고 있다.
3. 역사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은 1952년까지 미군에 의한 통치를 받게 된다. 이 시기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은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을 중시해야 하며, 냉전 상황에서 미국을 지지하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 안전보장은 미일안보조약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점령기간에 만들어진 평화헌법을 통해 일본이 전범국가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력하는듯한 노선으로 성과를 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1]
하지만 전범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구 일본 제국의 수뇌부 출신[2] 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치욕이었다. 때마침 한국전쟁이 터지자 요시다 시게루는 한국전쟁에서 UN군 지원 정도의 역할만 하고 이걸로 경제 재건 및 성장을 도모하는 선에서 전쟁 개입을 최소화하자고 주장했다.[3] 반대로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반공 타령하며 살아남은 일부 전범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해 평화헌법을 폐기하고 다시 무장해 한국을 넘어 만주까지 진출하는 사실상 전쟁 준비를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 국민들은 군국주의, 카미카제, 도쿄 대공습,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대표되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폐해를 톡톡히 눈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불과 5년만에 재무장을 하자는 기시 계파에 대한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었고, 요시다와 기시의 갈등으로 기시파가 나가면서 결국 요시다 중심으로 결집한 보수본류와 기시를 중심으로 한 보수방류가 탄생하게 된다.
그 후 1957년 기시가 총리가 되자, 보수방류들은 요시다 노선을 수정하려고 했지만, 엄연히 미국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방류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1960년 안보투쟁이 벌어지며 기시의 정치 커리어가 끝나 버려 요시다 노선 수정은 오랜 시간 수면 아래로 들어가고 만다.
이후 1970년대부터는 다시 보수본류가 집권을 하면서 이 기조를 유지했지만 1990년에 록히드 사건과 리크루트 사건으로 1993년 자민당이 55년만에 정권을 빼앗기고, 이 기회를 발판삼아 성장한 보수방류들이 본류를 몰아내기 시작해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사망한 후 2000년대 모리 요시로부터는 강경파들이 더 많이 집권하면서 현재는 보수본류가 비주류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0년대 당시 보수본류 노선에 가까운 총리는 후쿠다 야스오 정도였다.
[1] 실제로도 평화헌법은 일본의 경제성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국이 국방비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동안, 일본은 한국이라는 방파제와 미국의 핵우산에 기대어 예산을 경제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다보니 미국도 처음엔 일본 군사력을 줄이기 위해 평화헌법 지원 등 각종 드라이브를 걸어뒀으나, 21세기 들어 확고한 미일 관계가 확립된 이후부턴 일본이 국방 예산에서 너무 꿀 빠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와 일본의 재무장이 이뤄지는 측면도 있다. 물론 이런 기류에 편승해 한국이 우려하는 '제국주의의 부활' 운운하는 일본 우익들이 아예 없는건 아니나, 제국주의 따윈 개나 주고 평화헌법도 지지하지만 단순히 자주권 회복 차원에서 재무장을 주장하는 부류도 있고 반대로 평화헌법에 반대하지만 애초에 국채가 얼만데 무슨 재무장이냐고 반대하는 부류도 있어 일본 내에서도 일관된 노선이 정립된 상황은 아니다.[2] 기시 노부스케는 2키 3스케로 불리는 만주국의 5대 실세 중 한 명이었다. 고위 경제관료로서 만주국의 경제정책을 주관했다. 물론 1급 전범 수준은 아니라 잡범 비슷하게 되어 전후 살아남긴 했지만, 이게 어떻게 보면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3] 이 때 요시다 시게루가 만세를 불렀다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진 않다. 물론 한국전쟁이 패전국 일본을 일으키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