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

 



1. 개요
2. 줄거리
3. 등장 인물
4. 이 소설의 실체
5. 교과서 수록
6. 본문


1. 개요


김동인이 1932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로 '어떤 의사의 수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화자인 의사 '여(余)'[1]가 만주에 여행을 하던 중에 들른 어느 조선족 마을에서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정익호란 사람을 본 일화를 그린 이야기이다. 과거엔 이 소설을 민족주의 소설로 보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1920~1930년대에 조선에서 일어난 일제강점기 화교배척폭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도록 한다.

2. 줄거리


의사인 여(余)는 만주의 풍속도 살필 겸 그 지역에 퍼져 있는 질병에 대해 조사도 할 겸해서 1년 기한을 잡고 만주 곳곳을 시시콜콜히 돌아보았는데 그 때 조선족 소작농들이 한 20여 호 되는 XX촌이란 마을에 들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올 무렵 '여'는 몽골인 종자 1명과 함께 노새를 타고 만주 곳곳을 돌고 있었는데 어느덧 가을도 다 가고 만주의 혹한이 찾아오기 시작한 초겨울이 되었다. 그럴 때에 동포들이 모여 있는 이 XX촌에 오게 되었고 그 동네에서 한 10여 일을 일 없이 매일 호별 방문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조선 사람들과 이야기로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중에 '여'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란 별명을 가진 정익호란 인물을 알게 된다. 이 정익호란 인물은 여러 모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우선 그는 고향부터 알 수 없었다. 경기 방언을 쓰는 것 같으면서도 빠른 말로 재재거릴 때엔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기도 하고 또 싸울 때에는 평안도 사투리도 보여서 사투리만 가지고는 고향을 짐작할 수 없었다. 또 쉬운 일본어도 좀 할 줄 알고 한문 글자도 좀 알고 중국어에 능통하고 쉬운 러시아어도 좀 할 줄 아는 것으로 보아 이 곳 저 곳에서 숱하게 주워먹고 다닌 것은 짐작이 가지만 그의 경력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익호란 인물은 '여'가 이 마을에 들어오기 1년 전 쯤에 갑자기 나타났다고 한다. 와 같은 외모에 독한 눈매, 작고 민첩한 몸집, 나이는 25~40세까지 임의로 볼 수 있을 만한 외모의 소유자로 하는 일 없는 건달이었다. 매일 투전판에 기웃거리고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싸움 걸고 칼부림하는 게 주특기인 악당이었다. 그 탓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정익호를 싫어했으나 워낙 포악한 인간인지라 어느 누구도 건들지 못했다. 정익호는 마을 사람들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밥을 얻어먹고 잠을 얻어자며 살았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집 주인들에게 사례란 걸 한 적이 없었고 만약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걸 트집잡아 싸움을 걸고 싸움을 하면 칼부림까지도 하였다.
그 탓에 마을 사람들은 정익호를 본명으로 부르지 않고 어느 날부터 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도 이 암덩어리 '삵'을 내쫓으려고 회의도 하고 계획도 세웠지만 겁이 나서 어느 누구도 선빵을 맡으려는 자가 없었다. 결국 삵은 여전히 이 마을에서 태연하게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삵이나 죽어버리지.'라고 하고 병이 나면 '이놈의 병, 삵한테나 가라.'는 식으로 정익호를 저주했다. 즉,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정익호를 동정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정익호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일찌감치 남의 동정이나 사랑 따위는 단념한 사람이었고 마을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며 살았다. 그렇게 XX촌 사람들과 정익호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여'가 이 마을을 떠나기 하루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 마을의 촌장이었던 송 첨지란 노인이 그 해 소출을 나귀에 싣고 중국인 지주가 있는 촌으로 갔다. 그러나 이 중국인 지주는 소출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송 첨지를 두들겨 패죽였고 송 첨지의 시신은 나귀에 묶인 채로 XX촌에 돌아왔다. 마을 젊은이들은 송 첨지의 원수를 갚자며 분연히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지주 집에 쳐들어가려고 앞장 서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 상 송 첨지의 시신을 검시하던 '여'는 검시를 마치고 가는 길에 삵을 만났다. 평소엔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칼부림하길 좋아하던 그 삵이 정작 눈에 불을 켜야할 때는 조용히 있으니 여는 삵에게 '가련한 인생아. 인종의 거머리야. 가치 없는 인생아. 밥버러지야. 기생충아.'하고 욕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화를 참고 "송 첨지가 죽은 걸 아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삵의 표정이 갑자기 비장해졌다.
그 날 밤 '여'는 학대받는 한국인들의 처지에 억분함을 금하지 못하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여를 찾았다. 삵이 동구 밖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는 삵이란 말에 꺼림칙함을 느꼈으나 의사라는 직업 상 어쨌든 달려가 삵을 살펴보았다. 삵은 허리가 ㄱ자로 뒤로 꺾여서 밭고랑 위에 넘어져 있었다. 여의 응급처치 덕에 간신히 정신을 되찾은 삵은 자신이 그 중국인 지주 집에 찾아갔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삵은 점점 체온이 식어가고 있었다. 죽음이 임박해 온 것이다. 그 때 삵은 여의 손을 잡고 붉은 산과 흰 옷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고국과 동포가 생각이 난 것이다. 황막한 만주 벌판밖에 없건만 죽음이 임박한 삵에겐 있지도 않은 붉은 산이 헛것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삵은 여에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한다. 여는 삵을 위해 애국가를 불러주었고 삵은 그 애국가를 들으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3. 등장 인물


  • 여(余) : 이 작품의 서술자로 직업은 의사이다. 만주에 유행하는 질병에 대해 조사할 겸 또 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겸 해서 1년 기한으로 몽골인 종자와 함께 만주 곳곳을 여행 중에 있다. 조선족 소작농들이 거주하는 XX촌에 들렀을 때 겪었던 일을 그린 것이 이 작품 속 내용이다.
  • : 이 작품의 주인공백수 건달로 삵은 별명이고 본명은 정익호.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인데다 성격이 매우 거칠어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싸움 거는 게 일상인 인물로 1년 전 쯤 갑자기 이 마을에 나타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무전취식을 하고 다녀 마을 사람들에게 암덩어리로 찍힌지 오래다. 그러나 여의 말에 무언가 큰 울림을 받아 비장한 얼굴로 지주에게 달려들지만 하인들에게 흠씬 맞는 것도 모자라 허리까지 꺾이고 밭고랑에 내팽겨쳐진 채로 죽어가던 중 환영을 보고 애국가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 송 첨지 :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족 소작농으로 XX촌의 촌장이다. 어느 날 소출을 싣고 중국인 지주 집에 찾아갔는데 소출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그 중국인 지주 집 하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아 사망한 채로 마을에 돌아왔다.

4. 이 소설의 실체


국어 교과서 등에는 이 소설을 '민족주의 소설'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며 이 소설은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는 그런 민족주의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은 1931년 평양화교 학살에서 영감을 얻어 지은 소설이다. 우선 이 소설에서 악역으로 나오는 이가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란 점에 주목하자.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특성상 중국인이 악역 포지션에 있는 것부터가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다. 보통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민족주의 소설들은 일본인들이 악역으로 나왔지 중국인들이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물론 당시 한국인중국인 간의 관계가 썩 좋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일단 한국인들의 주적일본인이었지 중국인이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인이 악역으로 나온 것부터가 특이한 점이다. 당시에도 중국인을 악역으로 설정한 소설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 최서해소설 홍염처럼 중국인 '''지주'''라는 성격에 더욱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이태준의 '농군'과 같이 조선인과 중국인 간의 문화적 갈등과 같은 좀 더 복합적인 면모에 집중하는 편이다.
또 이 소설 속 주인공인 정익호란 인물은 평소 마을 사람들에게 암덩어리나 다름 없는 존재였고 송 첨지란 인물과 정익호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익호는 이 일을 원인으로 지주에게 대들었다가 맞아 죽었다. 삵이 중국인 지주에게 대들다 죽은 과정은 개연성이 없다. 이상경 선생이 지적하듯 만주의 중국인과 이주한 조선인 사이에서는 문화 차이에 따라 갈등이 일어날 수도 있으나 이런 이야기는 없다. 또한 중국인 지주의 착취 때문에 소작농의 삶이 고통스러울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도 없다. 수전 개간을 둘러싼 물리충돌이나 이것에 개입하는 일본 세력에 대한 묘사도 없다. 그런데 삵은 갑자기 중국인 지주에게 대든다. 삵은 조선인에게 암같은 존재였는데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 다만, 주인공 정익호(삵)은 평소 송 첨지와 아무 인연이나 이해관계가 없었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평판이 나쁜 암덩어리였는데 갑자기 지주에게 대든 것에 개연성이 없다는 주장에는 다소 이론의 여지가 있다. 사실 삵(정익호)라는 인물의 행동양상은 전형적인 협객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무위도식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기생하고 분란이나 일으키는 백수 양아치이지만, 누군가(특히 자신이 기생하던 마을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이 자신의 일도 아니고,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도 없는데도 목숨을 걸고 권력자나 세도가에게 대항하는 것이 바로 동양(한국이나 중국)에서 다크 히어로의 한 전형으로 정립된 협객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다. 즉 정익호가 갑자기 중국인 지주에게 대든 것 자체는 일정한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삵을 바라보는 여의 관점(평소에는 쓸모없는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면서 정작 화를 내야 할 때는 조용히 있는 밥버러지)이나 남을 위한 복수를 해주려다 죽어가는 와중에 붉은 산과 하얀 옷, 애국가로 상징되는 민족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삵의 모습은 고전적-전근대적 협객상을 근대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였다고 인정할 만 하다. 단지 이 단락에도 거론된 다른 문제들, 즉 <당대 조선인에게 있어서 진짜 부조리의 원인인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을 주된 악역 -복수의 대상-으로 등장시킨 점>이나 <조선인과 중국인간의 문화적 갈등, 또는 지주와 소작농과의 갈등과 같은 복합적이면서도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여 독자들에게 왜 중국인 지주가 조선인의 적이며 삵이 하려고 했던 복수는 왜 정당한가를 제대로 납득시킬 수 없었던 점>[2]등으로 인하여 독자가 이런 서사적 구성을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은 이미 옛날부터 지적받은 점인데 김흥규는 1977년에 「황폐한 삶과 영웅주의」(문학과지성, 문학과지성사, 1977.03)에서 이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이런 소설은 김동인의 기존 창작 경향과도 전혀 달랐다. 이전 김동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했고 작품에서 계몽주의스런 요소를 드러내는 걸 부정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런 소설을 쑥 내민 것이다. 1931년 평양 화교 배척 폭동과 학살이 아니면 설명할 수가 없다.
붉은 산과 평양 화교 학살에 대한 연관성과 이에 대한 전문분석은 이상경이 쓴 다음 논문을 참고하자.
이상경, 1931년의 ‘배화(排華)사건’과 민족주의 담론, 만주연구 11, 2011.6, 107~110; 김동인의 「붉은 산」의 동아시아적 수용 - 작품 생산과 수용의 맥락,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249~255
이상경 교수가 김동인의 소설과 달리 호평한 소설은 이태준의 <농군>. 붉은 산은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의 문화적 차이에 의한 갈등이 없다고 혹평했는데 비해 농군은 조선인과 중국인의 문화적 차이가 갈등의 원인으로 설정했다며 호평했다.KCI원문 다운로드

5. 교과서 수록


1975년부터 1988년까지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수록이 되었고, 고입 연합고사 문제로 "붉은 산", "흰 옷"의 의미와, 주제를 묻는 문제로 빈번하게 출제되었다.

6. 본문


-어떤 醫師의 手記-
그것은 여(余)가 만주를 여행할 때 일이었다. 만주의 풍속도 좀 살필 겸 아직껏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그들의 사이에 퍼져 있는 병(病)을 조사할 겸해서 일년의 기한을 예산하여 가지고 만주를 시시콜콜이 다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에 ××촌이라 하는 조그만 촌에서 본 일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촌은 조선사람 소작인만 사는 한 이십여 호 되는 작은 촌이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한개의 산도 볼 수가 없는 광막한 만주의 벌판 가운데 놓여 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촌이었다. 몽고사람 종자(從者)를 하나 데리고 노새를 타고 만주의 촌촌을 돌아다니던 여가 그 ××촌에 이른 때는 가을도 다 가고 어느덧 광포한 북극의 겨울이 만주를 찾아온 때였다.
만주의 어느 곳이나 조선사람이 없는 곳은 없지만 이러한 오지(奧地)에서 한 동네가 죄 조선 사람뿐으로 되어 있는 곳을 만나니 반가왔다. 더구나 그 동네는 비록 모두가 만주국인의 소작인이라 하나, 사람들이 비교적 온량하고 정직하여, 장성한 이들은 그래도 모두 천자문 한 권쯤은 읽은 사람이었다.
살풍경한 만주, 그 가운데서 살풍경한 살림을 하는 만주국인이며 조선사람의 동네를 근 일년이나 돌아다니다가 비교적 평화스런 이런 동네를 만나면, 그것이 비록 외국인의 동네라 하여도 반갑겠거늘, 하물며 우리 같은 동족임에랴. 여는 그 동네에서 한 십여 일 이상을 일없이 매일 호별 방문을 하며 그들과 이야기로 날을 보내며, 오래간만에 맛보는 평화적 기분을 향락하고 있었다.
'삵'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정익호'라는 인물을 본 것이 여기서이다.
익호라는 인물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촌에서 아무도 몰랐다. 사투리로 보아서 경기 사투리인 듯하지만 빠른 말로 재재거리는 때에는 영남 사투리가 보일 때도 있고, 싸움이라도 할 때는 서북 사투리가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런지라 사투리로서 그의 고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쉬운 일본말도 알고, 한문글자도 좀 알고, 중국말은 물론 꽤 하고, 쉬운 러시아말도 할 줄 아는 점 등등, 이곳저곳 숱하게 줏어먹은 것은 짐작이 가지만 그의 경력을 똑똑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여(余)가 ××촌에 가기 일년 전쯤 빈손으로 이웃이라도 오듯 후덕덕 ××촌에 나타났다 한다. 생김생김으로 보아서 얼굴이 쥐와 같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으며 눈에는 교활함과 독한 기운이 늘 나타나 있으며, 발룩한 코에는 코털이 밖으로까지 보이도록 길게 났고, 몸집은 작으나 민첩하게 되었고, 나이는 스물 다섯에서 사십까지 임의로 볼 수 있으며, 그 몸이나 얼굴 생김이 어디로 보든 남에게 미움을 사고 근접치 못할 놈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의 장기(長技)는 투전이 일쑤며, 싸움 잘하고, 트집 잘 잡고, 칼부림 잘하고, 색시에게 덤벼들기 잘하는 것이라 한다.
생김생김이 벌써 남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거기다 하는 행동조차 변변치 못한 일만이라, ××촌에서도 아무도 그를 대척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하였다. 집이 없는 그였으나 뉘 집에 잠이라도 자러 가면 그 집 주인은 두말 없이 다른 방으로 피하고 이부자리를 준비하여주고 하였다. 그러면 그는 이튿날 해가 낮이 되도록 실컷 잔 뒤에 마치 제 집에서 일어나듯 느직이 일어나서 조반을 청하여 먹고는 한마디의 사례도 없이 나가버린다.
그리고 만약 누구든 그의 이 청구에 응치 않으면 그는 그것을 트집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싸움을 하면 반드시 칼부림을 하였다.
동네의 처녀들이며 젊은 여인들은 익호가 이 동네에 들어온 뒤부터는 마음놓고 나다니지를 못하였다. 철없이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람도 몇이 있었다.
'삵'
이 별명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어느덧 ××촌에서는 익호를 익호라 부르지 않고 '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삵이 뉘 집에서 묵었나?”
“김 서방네 집에서.”
“다른 봉변은 없었다나?”
“요행히 없었다네.”
그들은 아침에 깨면 서로 인사 대신으로 '삵'의 거취를 알아보고 하였다.
'삵'은 이 동네에는 커다란 암종이었다. '삵' 때문에 아무리 농사에 사람이 부족한 때라도 젊고 튼튼한 몇 사람은 동네의 젊은 부녀를 지키기 위하여 동네 안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삵' 때문에 부녀와 아이들은 아무리 더운 여름 저녁에라도 길에 나서서 마음놓고 바람을 쏘여보지를 못하였다. '삵' 때문에 동네에서는 닭의 가리며 돼지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밤을 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동네의 노인이며 젊은이들은 몇번을 모여서 '삵'을 이 동리에서 내어쫓기를 의논하였다. 물론 합의는 되었다. 그러나 내어쫓는 데 선착할 사람이 없었다.
“첨지가 선착하면 뒤는 내 담당하마.”
“뒤는 걱정 말고 형님 먼저 말해보시오.”
제각기 '삵'에게 먼저 달겨들기를 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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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동리에서는 합의는 되었으나 '삵'은 그냥 태연히 이 동네에 묵어있게 되었다.
“며늘년들이 조반이나 지었나?”
“손주놈들이 잠자리나 준비했나?”
마치 그 동네의 모두가 자기의 집안인 것같이 '삵'은 마음대로 이집 저집을 드나들었다.
××촌에서는 사람이라도 죽으면 반드시 조상 대신으로,
“삵이나 죽지 않고.”
하는 한마디의 말을 잊지 않고 하였다. 누가 병이라도 나면,
“에익! 이 놈의 병 '삵'한테로 가거라.”
고 하였다.
암종 - 누구나 '삵'을 동정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삵'도 남의 동정이나 사랑은 벌써 단념한 사람이었다. 누가 자기에게 아무런 대접을 하든 탓하지 않았다. 보이는 데서 보이는 푸대접을 하면 그 트집으로 반드시 칼부림까지 하는 그였지만, 뒤에서 아무런 말을 할지라도 - 그리고 그것이 '삵'의 귀에까지 갈지라도 탓하지 않았다.
“흥…”
이 한마디는 그의 가장 큰 처세 철학이었다.
흔히 곁 동네 만주국인들의 투전판에 가서 투전을 하였다. 때때로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하소연을 하는 일이 없었다. 한다 할지라도 들을 사람도 없거니와 - 아무리 무섭게 두들겨 맞은 뒤라도 하루만 샘물에 상처를 씻고 절룩절룩한 뒤에는 또 이튿날은 천연히 나다녔다.
여(余)가 ××촌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송 첨지라는 노인이 그해 소출을 나귀에 실어 가지고 만주국인 지주가 있는 촌으로 갔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송장이 되었다. 소출이 좋지 못하다고 두들겨 맞아서 부러져 꺾어진 송 첨지는 나귀등에 몸이 결박되어서 겨우 ××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란 친척들이 나귀에서 몸을 내릴 때에 절명하였다.
××촌에서는 왁자하였다.
“원수를 갚자!”
명 아닌 목숨을 끊은 송 첨지를 위하여 동네의 젊은이는 모두 흥분하였다. 제각기 이제라도 들고 일어설 듯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구든 앞장을 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때에 누구든 앞장을 서는 사람만 있었더면 그들은 곧 그 지주에게로 달려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가 앞장을 서겠노라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제각기 곁사람을 돌아보았다.
발을 굴렀다. 부르짖었다. 학대받는 인종의 고통을 호소하며 울었다. 그러나 - 그뿐이었다. 남의 일로 지주에게 반항하여 제 밥자리까지 떼우기를 꺼림인지, 용감히 앞서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여는 의사라는 여의 직업상 송 첨지 시체를 검시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는 '삵'을 만났다. 키가 작은 '삵'을 여는 내려다보았다. '삵'은 여를 쳐다보았다.
‘가련한 인생아. 인종의 거머리야. 가치 없는 인생아. 밥 버러지야. 기생충아!’
여는 '삵'에게 말하였다.
“송 첨지가 죽은 줄 아나?”
여의 말에 아직껏 여를 쳐다보고 있던 '삵'의 얼굴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여가 발을 떼려는 순간 얼핏 '삵'의 얼굴에 나타난 비창한 표정을 여는 넘길 수가 없었다.
고향의 떠난 만리 밖에서 학대받는 인종의 가엾음을 생각하고 그 밤은 여도 잠을 못 이루었다.
그 억분함을 호소할 곳도 못 가진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고, 여도 눈물을 금치를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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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이었다.
여를 깨우러 오는 사람의 소리에 여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삵'이 동구(洞口) 밖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여는 '삵'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의사라는 직업상, 곧 가방을 수습하여 가지고 '삵'이 넘어진 데까지 달려갔다. 송 첨지의 장례식 때문에 모였던 사람 몇은 여의 뒤를 따라왔다.
여는 보았다. '삵'의 허리가 기역자로 뒤로 부러져서 밭고랑 위에 넘어져 있는 것을 여는 달려가 보았다. 아직 약간의 온기는 있었다.
“익호! 익호!”
그러나 그는 정신을 못 차렸다. 여는 응급수단을 취하였다. 그의 사지는 무섭게 경련되었다. 이윽고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익호! 정신드나?”
그는 여의 얼굴을 보았다. 끝이 없이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움직이었다.
겨우 처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는 갔었습니다.”
“어디를?”
“그 놈… 지주 놈의 집에…”
무얼? 여는 눈물 나오려는 눈을 힘있게 닫았다. 그리고 덥석 그의 벌써 식어가는 손을 잡았다. 잠시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의 사지에서는 무서운 경련이 끊임없이 일었다. 그것은 죽음의 경련이었다. 듣기 힘든 그의 작은 소리가 또 그의 입에서 나왔다.
“선생님.”
“왜?”
“보고 싶어요. 전 보구 시…”
“뭐이?”
그는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말이 안나왔다. 기운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잠시 뒤에 그는 또다시 입을 움직였다. 무슨 소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무얼?”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 그리고 흰 옷이!”
아아, 죽음에 임하여 그의 고국과 동포가 생각난 것이었다. 여는 힘있게 감았던 눈을 고즈너기 떴다. 그때에 '삵'의 눈도 번쩍 뜨이었다. 그는 손을 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부러진 그의 손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돌이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런 힘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힘을 혀끝에 모아가지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왜?”
“저것… 저것…”
“무얼?”
“저기 붉은 산이… 그리고 흰 옷이… 선생님 저게 뭐예요!”
여는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는 황막한 만주의 벌판이 전개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 노래를 불러주세요. 마지막 소원 - 노래를 해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나왔다. 여는 고즈너기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너기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는 울리어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 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운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갔다.
[1] '나'라는 뜻의 1인칭 한자어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 광화사에서도 주인공의 스스로를 이 1인칭으로 지칭한다.[2] 물론 "이 시국에 개뜬금포로 중국인 악당이라고? 이거 뭐 묻을라고 야료 부리는거 아냐?"라는 의문이 나올 법한 앞 설정과는 달리 이쪽 설정은 "아니 사람이 맞아죽었는데 또 다른 정당성을 굳이 찾아야 한다고?" 싶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