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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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설적인 뮤지션으로,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의 한 명이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뮤지션 27위,[3] 어클레임 뮤직 평론가가 선정한 1980년대 최고의 뮤지션 1위[4] 에 선정된 뮤지션이며 '''네오 소울과 얼터너티브 R&B의 시발점이 된 뮤지션'''[5] 이기도 하다. 또한 '''까칠한 천재''' 이미지를 구축시킨 아티스트로도 유명하다.
마이클 잭슨, 마돈나와 함께 19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다.[6] 하지만 선정성이 짙은 가사나 난해하기 그지 없는 퍼포먼스, 한국에선 통할 수 없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음악성향 등에 의해 그의 음반이 국내에 정식으로 들어오지 못한지라 국내에서의 인지도는 전자의 둘에 비해 거의 전무한 편이다.[7] 한국에서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는 위대한 전설로 대우받지만, 프린스의 경우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프린스는 이 둘 못지않게 위대한 전설로 대우받는다.[8] 대중음악을 설명 할 때 반드시 들어가야하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종합해서 경지에 오른 춤, 수많은 기타리스트들이 극찬하는 탁월한 기타 연주 실력은 물론이고, 수많은 악기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싱어송라이터로서 작사, 작곡, 편곡까지 전부 혼자 했으며, 완벽주의의 극한인 프로듀싱 능력, 카피가 불가능한 가성을 활용한 창법 등 역사상 최연소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프린스의 재능과 역량은 말이 안나오는 수준이다. 심지어 본인의 음반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수에게 곡을 주고 프로듀싱을 해서 수많은 히트곡과 스타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까다롭기로 유명한 마일스 데이비스가 '''자신과는 음악 스타일이 잘 맞지 않아 공동작업을 마무리지을 수는 없었지만, 21세기는 프린스와 마커스 밀러같은 멀티 플레이어가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자서전에 남긴 적이 있었을 정도의 뮤지션이기도 하다.
2. 연주 실력
독학으로 악기연주를 익혀서 30가지 이상의 악기를 프로급으로 소화할 수 있다. 악기를 소화하는 능력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부분은 기타인데, 제프 벡이 '''흠잡을 데가 딱히 없는 기타리스트'''라고 극찬했으며, 스티브 바이가 '''세상엔 수많은 속주 기타리스트들이 있지만,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영혼까지 드러내는 자는 손에 꼽습니다. 영혼을 드러내는 수준의 연주자 중 한 사람이 프린스입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독보적이다.[9] 마이클 잭슨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검은 옷과 모자 그리고 은색 장갑이라면, 프린스의 경우에는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프린스의 마크를 본딴 보라색 기타를 멘 모습일 정도로 그 애정과 실력이 남달랐던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프린스는 공연의 대부분을 기타와 함께 진행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기타히어로 제작사 측에서 기타히어로 프린스 버전을 내려고 프린스에게 제의를 하자 프린스는 바로 거절했는데, 그때 프린스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는 건 나도 잘 알지만, 아이들이 게임이 아닌 실제 기타를 배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기타에 대한 그의 철학과 자부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베이스 기타 역시 당대의 베이시스트들 중 프린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하다. 빅터 우튼도 레슨 비디오에서 "프린스 스타일의 프레이즈를 늘 연습했죠. 그는 정말 끝내주는 베이스 연주자라고요!"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다만 너무 재능이 다방면으로 많고 성에 대한 노골적인 퍼포먼스와 가사, 패션, 기행으로 무장한 팝스타라는 이미지가 굳건해서 기타리스트를 포함한 악기를 소화하는 실력에 대해서는 대중들에게 저평가가 이루어졌다. 롤링 스톤지에서는 저평가된 기타리스트 중 1위로 평가한 적이 있다.
3. 음악적 특징
팝과 록 음악, 소울, 펑키, 재즈, 블루스, 일렉트로닉, 신스팝 등이 혼합된 뭐라 딱 꼬집기도 힘든 음악이 특징. 심지어 1996년에 발매한 앨범인 ''Emancipation''의 수록곡 ''Face down''에서는 직접 랩까지 소화하기도 했다. 스티비 원더조차도 프린스를 일컬어 '''어떤 음악이든 할 수 있는 뮤지션'''이라고 할 정도였다. 전 매니저에게 내가 랩을 배워야할까 라며 물어보기도 했을 정도로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실제로도 대중음악의 범주안에서는 사실상 거의 모든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을 했다. 이를 자신이 개척한 장르인 Minneapolis sound[10] 라는 용어로 통틀어 이야기하지만, 사실상 저 용어는 프린스의 음악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는 노래, 춤, 작곡, 편곡, 프로듀싱, 밴드를 조율하고 이끌어가는 것을 모두 다 잘하는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데뷔작인 1978년작 'For You' 앨범은 '''작곡, 편곡, 프로듀싱에 연주까지 전부 혼자'''했다. 작사도 하나의 곡을 제외하고(이나마도 공동작사) 모두 직접 했다. 당시 나이가 '''19세'''였다.
가사에 성적인 문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예를 들면 프린스의 대표작인 Purple Rain에 수록된 Darling Nikki에서는 '''잡지 보면서 자위했다'''는 가사가 여과를 거치지 않고 대놓고 나온다. 이는 과격한 가사가 담긴 음악 앨범(대표적으로 힙합이나 익스트림 메탈 계열)에 붙는 Parental Advisory 딱지가 등장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For, to, you, I를 각각 4, 2, U, Eye[11] 식으로 쓰는 등 가사 짓는 센스도 독특하다. 자기 노래 뿐만 아니라 여성 가수인 시네드 오코너(Sinéad O'Connor)에게 제공해준 곡인 "Nothing Compares 2 U'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여리지만 짜릿한 목소리와 펑키한 기타의 사운드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표곡으로는 'Prince & The revolution'의"Kiss" 가 있다. 이 는 Tom Jones의 곡을 자신의 스타일로 바꾼 곡이다.
4. 활동
전반적으로 음악가로 재능을 펼친 시기가 너무 짧았던 아쉬움이 남는다. 1987년 Sign 'O' the Times 발매 이후로 대중의 비난이 계속되고 개인적 문제가 복잡해지면서 의미있는 작업물이 현저하게 줄었다. 1987년은 프린스가 첫 앨범을 발매하고 10년이 되지 못한 시점이고 1980년 그의 첫 번째 명반 Dirty Mind 발매부터 7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였다.
최고의 히트작은 1984년 'Purple Rain'. 직접 주연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음반은 빌보드 앨범차트 24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만 1300만장이 팔렸다. 이 음반에서 9분이 넘는 대곡 'Purple Rain', 'Let's Go Crazy', 'When Doves Cry', 'I Would Die 4 U' 등이 싱글차트를 휩쓸었다. 이어서 바로 다음해 'Around The World In A Day' 음반으로 차트를 점령했다. 이 시절이 프린스의 최고 전성기.
자신의 최대의 히트 앨범과 동명이자 자전적인 스토리를 담은 영화 Purple Rain에도 출연, 영화도 나름 흥행했다. 당시가 바로 리즈시절이며, When Doves Cry, Let's Go Crazy를 모두 싱글 차트 1위에 랭크시키는 기염을 토하고, 앨범도 천만 장이 넘는 슈퍼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에 미발표곡이 1000곡 정도가 쌓여 있었다고 하는데 프린스 팬들은 이를 'The Vault'라고 부른다. 본래 1000곡을 전부 차례로 발표하려고 했으나, 음반사에서 프로모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고 한다. 사실 이런 문제들이 아래 서술하는 음반사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되어,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로 여겨지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처음엔 단순히 댄스가수로 오인되었지만, 곧 그가 싱어송라이터이자 대단한 기타리스트 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팝뮤직계의 슈퍼스타로 부상했지만, 음반사와의 갈등으로 1990년대에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프린스가 기행의 상징이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소속사와의 기나긴 분쟁인데, 프린스의 창작 욕구와 재능은 다른 뮤지션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숫자의 곡을 만들게 했고 프린스는 이 음악들을 엮어서 꾸준히 앨범으로 발매하고 싶어했다.[12] 그러나 소속사는 앨범의 희소성, 판매량등을 고려해 2년에 한 번 정도 발표하기를 원했다. 열받은 프린스는 '그럼 prince 명의로만 안 내면 되겠네 ㅇㅇ'라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수 년동안 법정소송을 벌였다. 실제로 1996년에 공개된 앨범의 수록곡인 Face Down으로 이때 갈등을 벌인 Warner Bros. Records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얻는 수익을 포함한 권리가 적다는 항의를 늘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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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매된 앨범인 Come의 표지에는 Prince 1958-1993이라고 나와있는데, 즉 「'''너희가 알던 프린스는 93년에 죽었다.'''」 이런 뜻. 계속되는 소속사와의 불화로 뺨에 노예(slave)라고 문신을 새기더니 아예, Prince라는 이름을 버리고 남성과 여성의 성 기호를 조합하여 만든 기호로 자신의 이름을 대신했다. 당연히 그런 기호의 이름 자체는 없었기 때문에[13]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은 TAFKAP(The Artist Formerly Known As Prince), 즉 "한 때 프린스라고 알려졌던 아티스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때 기자가 '뭐라고 읽어야 됩니까'라고 했더니 '읽지마라(no need to read)'라고 해버렸다. 현재는 분쟁 해결 후에 이름을 되찾았다.
음반사와의 분쟁이 특히 아쉬운 이유는 이 때 프린스가 이름을 바꾸고 낸 첫 음반인 The Gold Experience가 프린스의 90년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점이다. 실제로 몇몇 팬들은 Come 앨범 대신 이 앨범을 홍보했다면 90년대 프린스의 암흑기는 없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다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음악들이 점점 더 난해해지고, 연주곡으로만 이루어진 앨범이나 종교적 색채가 짙은 앨범들을 발매해서 팬들이 꽤 떠나간 것도 한 몫 하긴 했다. 이 때문에 Come 앨범, 90년대 후반에서 00년대 초반 앨범들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받기도 한다.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암흑기를 거치며 대중들은 점점 그를 잊어가는 듯 했지만, 2004년 'Musicology'를 내놓으며 빌보드 앨범차트 3위와 더블 플래티넘 획득 그리고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2개 부문 수상)했으며 그해 가장 많은 공연 수익을 올린 아티스트가 되는 등 완벽하게 부활했다.
차기작인 '3121' 앨범(2006년)으로는 대망의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탈환, 역대급 천재의 클라스는 변치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2007년에는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폭우 속에서도 변함없는 라이브와 기타연주를 보여주었다. 특히 비가 내리는 와중에 퍼플레인이 울려퍼졌던 이 짧은 공연은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슈퍼볼 하프타임쇼" 1위를 차지했다. 미국 내에서 슈퍼볼 하프타임쇼의 비중과 이 쇼의 단독 참가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음악적으로 프린스의 위치가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한 이벤트였다.
연이어 2007년에는 Planet Earth 앨범을 발매하여 빌보드 앨범차트 3위를 기록하고, 2008년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 상을 수상했다. 투어도 전석을 매진시켰고, 2009년에는 Lotusflow3r / MPLSound로 빌보드 앨범차트 2위와 빌보드 탑 R&B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탑 인디 앨범 차트 1위를 거머쥐었다. Lotusflow3r / MPLSound 앨범은 대형유통사를 거치지 않은 인디 앨범으로는 이례적인 성공이었다.
Planet Earth 앨범은 영국에서 개최된 콘서트의 티켓과 함께 부록으로, 20Ten 앨범은 영국의 데일리 미러 2010년 7월 10일자에 부록 개념으로 동봉하여 배포하는 방식 등으로 '새로운 릴리스 방법을 시도해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오피셜 릴리스가 많이 뜸해졌다. 프로젝트 말아먹기의 제왕답게[14] 2009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DVD, 20Ten 디럭스 앨범, Welcome 2 America 앨범[15] 등등이 연이어 취소되고, 이 아저씨 뭐 하나 싶었을 즈음 '3rdEyeGirl'이라는 3인조 여성 밴드를 조직하고 2013년에 복귀했다.
2013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엔 헤드라이너로 출연한다는 소식이 뜨자마자 티켓팅이 불지옥이 되는 마술을 보여주었다. 공연장에서 신보 CD를 나눠주며 '니네 그거 들으면 공연장에 올 수밖에 없을걸?'이라는 패기를 자랑하며 여전히 뛰어난 보컬과 자유자재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 기타 연주를 보여주며 그가 왜 투어만 했다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수익을 내는지 증명하였다.
공식 유튜브 채널도 개설하고, 라이브 스트리밍(3rdEyeTV)도 열면서 이제 드디어 앨범이 나오나 싶었지만 결국 2013년도 디지털 싱글만 계속 발매하다 그냥저냥 지나갔다. 사실 발매된 노래들만 모아 보면 앨범 하나 정도 분량이 나오긴 한다.2013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DVD도 찍긴 했는데 발매소식은 없다. 라이브 콘서트 음원도 발매한다고 했지만 역시 감감 무소식. 이쯤되면 남아있는 팬들이 불쌍할 지경. 결국 프린스 데뷔 이래 정규앨범간 발매 간격 최장기록을 경신한 2014년에 앨범을 낸다고 한다.
그래도 2014년도에 들어서는 슈퍼볼 직후 방송된 미드 New Girl에 출연하여 신곡도 선보이고, Arsenio Hall Show에도 출연, 각종 잡지에도 표지에 등장하는 등 미디어 노출이 늘긴 했다.
2014년 9월 Art Official Age과 Plectrumelectrum이라는 두 장의 앨범을 동시에 발매, 각각 펑크와 하드락에 특화된 앨범으로, 두 장 모두 빌보드 앨범차트 탑10에 랭크시켜버렸다! 예상을 깨고 과거의 적이었던 워너 브라더스와 재결합하여 발표한 앨범이었기에 과거의 앨범들을 리마스터 [16] 해줘서 내주지는 않을까 하고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시기였다.
2015년엔 볼티모어 폭동 사건의 도화선이 된 프레디 그레이의 사망을 기리며 그를 추모하는 공연인 Rally 4 Peace을 열고 볼티모어 폭동사건을 주제로 한 노래인 Baltimore를 발매하고, 2015년 그래미에서는 올해의 앨범 시상자로 나와서 기립박수를 받고 시상식 소감 처음부터 '''앨범은 중요합니다. 책과 흑인의 생명처럼요.''' 라며 Black Lives Matter를 대놓고 언급하고 박수를 받았다. 여전히 사회적인 언행을 멈추지 않는 뮤지션임을 보여주고 2016년에도 멋진 신보를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5. 사망
사망 6일 전, 집으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 독감 같은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일리노이 주에 비상 착륙을 한 후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고, 이후 증세가 호전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지시각 2016년 4월 21일, 미네소타 카버 카운티에 있는 프린스의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소식은 TMZ가 최초로 보도하였으며, 이후 AP에서 공식적으로 보도하였다. 초기에는 황색언론으로 악명이 높은 TMZ발 찌라시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으나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17] 향년 57세.“He’s with our son now.”
- 마이테 가르시아(Mayte Garcia), 프린스의 1처
경찰이 구체적인 사망원인을 수사했으며,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었다. 다만 TMZ가 기사화한 바에 의하면, 위의 비상착륙 후 입원했던 병원에서 약물 과다복용 문제로 마약 중화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 병원에서는 입원하여 24시간 동안 경과를 볼 것을 권유했으나 1인실이 없어 입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진통제(아편계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하는데, 자택에서 펜타닐 성분의 약품이 발견됐다고 한다. 의문인 점은 사망 전 약물 조사에서는 펜타닐 성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약물을 지속적으로 투여한 것이 아닌 갑작스럽게 많은 약물을 투약해서 사망에 이른 것이다. 거기다 그가 약물을 거래한 흔적인 처방전 등이 발견되지 않아서 그의 죽음에 의문점이 생겼다. 그의 집에 펜타닐 말고도 9정의 약품이 더 있던 터라 펜타닐을 다른 약으로 오인해 섭취하다 약물 과다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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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미국지역 한정으로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구글 두들이 게시되었다. 의미는 당연히 Purple Rain.# 그 외에도 세계 곳곳의 랜드마크에서도 그를 추모하는 보랏빛 조명을 켰다.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그가 생전 거주하던 미네소타 지역의 팀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 구장인 타깃 필드.#
데이빗 보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음악이 아이튠즈를 포함한 음원사이트를 독식했듯이 별세 이후 프린스의 히트곡들이 아이튠즈 차트를 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사태가 벌어졌다. 1500위의 사이에 100곡이 랭크되고 10위권을 죄다 프린스의 음악들이 독식한 순간도 있었을 정도였다.
4월 23일, 친지와 일부 지인들만이 참석한 상태로 장례식을 치루고 화장되었으며, 그 유해는 비공개로 보관된다고 밝혔다. 생전에 살았던 페이즐리 파크의 자택 겸 스튜디오가 박물관으로 전환해서 팬들을 위한 장소가 될 것이라고 유족들이 발표했다.
칸 영화제에서 추도 기획을 실시한다고 한다.
2016년 빌보드 시상식에서 생전 친구였던 마돈나가 추모공연을 하였다.#
공교롭게도 주치의의 프로포폴 남용으로 사망한 마이클 잭슨처럼 약물 오남용으로 사망했다.
유투브의 리액션 채널 Fine bros에서 청장년층의 리액션 패널인 'Adults react'에게 프린스의 승천을 기리기 위해 뮤직비디오인 1999, When doves cry, Purple Rain(live)를 보여주며 추모 리액션을 보였는데, 청년세대들은 음악의 거물이였던 그를 기리고, 장년세대는 왕년에 익숙한 프린스의 노래와 퍼포먼스를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추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식 석상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점차 늘어가던 그였기에 그의 죽음은 더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6. 여담/이것저것
- 섹스어필, 파티 기행, 젠더스왑한 패션[18] 과 어떤 음악이든 섭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When Doves Cry에서는 아예 베이스를 없앤 후 키보드와 드럼의 반복만으로 음악을 설계하는 실험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 신장이 157cm인데 왜소증을 제외하자면 남성 연예인들을 통틀어 아마도 최단신이다.[19] 이 키 때문에 하이힐을 즐겨신고 다닌지라 게이 의혹을 받은 적도 있고[20] 하이힐을 즐겨 신은 결과 엉덩이 쪽에 무리가 가서 진통제로 버티기도 했다. 작은 키 때문에 상당히 신경이 쓰인 탓인지, 1990년대에 같이 활동하였던 The New Power Generation의 경우, 비슷한 키의 멤버로만 모집을 하거나 자신이 앞에 서서 원근법의 차이로 키 차이가 눈에 띄지 않게 촬영하는 등의 제약이 있었다. 2001년 공식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된 프린스가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수혈을 금지하는 교리 때문에 수술을 거부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본인은 수술 진단 자체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 "저 키로?" 싶겠지만, 고등학교까지는 농구선수였다. 포지션은 포인트 가드로 실력도 출중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가수가 된 후에도 농구에 대한 애정이 많아서, 고향팀인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경기를 자주 관람하러 왔다고 한다. 게다가 본인이 팀버울브스 팬이기도 했다.
- 역시 키 탓에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에디 머피의 형 찰리 머피가 프린스에게 초대받았는데, 157cm인 프린스가 농구시합을 제안하자 185cm였던 찰리 머피는 비웃었으나 게임이 시작되고 프린스에게 처참하게 깨졌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00% 실화라고 한다.
- 마성의 매력이 있는지 킴 베이싱어, 마돈나, 카르멘 엘렉트라 등 당대 최고의 여자 연예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1996년 발렌타인 데이에 자신의 백업싱어 겸 댄서인 마이테 가르시아[21] 와 결혼해 10월에 아들 그레고리를 얻었으나, 아기는 두개골 이상으로 뇌가 자라지 않는 파이퍼 증후군을 가져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사망했다. 마이테 가르시아는 한동안 프린스의 월드 투어 세션으로서 동행했다.
- 플레이보이라고 하지만 실제 성격은 극히 소심하고 낯가림이 많다고 크리스 터커가 토크쇼에서 말한 바 있다. 자신이 있다는걸 파티에서 알려주기 위해 특유의 가성을 쓴다나 뭐래나(...)
- 프린스는 얼터너티브 R&B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아티스트이다. 프린스는 얼터너티브 R&B에서 가장 큰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아티스트 The Weeknd에게 2015 AMA에서 최우수 R&B/Soul 앨범상 수상자 호명 및 상을 건내주었었다. 이 것이 프린스의 생전 마지막 시상이었다. 프린스가 사망한 이후에 치뤄진 2016 BBMA에서 The Weeknd가 Top Hot 100 Artist 부문 수상을 하며 수상 소감으로 "AMA에서 프린스가 상을 건네줄 때의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5년 뒤인 2020 AMA에서 앨범 <After Hours>로 다시 한 번 최우수 R&B/Soul 앨범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위켄드는 수상 소감에서 "지난 번 위대한 故 프린스[22] 에게 상을 건네받았었다. 내가 끊임없이 R&B 장르에 도전을 하는 이유가 바로 프린스였다. 그리고 이 상을 그에게 바친다."라 밝히기도 했다. 해당 발언은 프린스의 공식 유튜브 채널 커뮤니티와 SNS에 업로드되었다.
- 악당 전하(His Royal Badness)라는 별명이 있다.
- 강한 영혼은 규칙을 초월한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그의 행적과 맞물려 그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 50대의 나이임에도 엄청난 동안을 유지했다. 딱히 얼굴이 극적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성형 논란도 별로 없는 편이다.
- 비욘세한테 리허설때 음정이 안 맞다고 혼내는 패기를 보여 준 적도 있다.[23] 단순히 혼내는 것이 아니라 비욘세가 하도 프린스를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니 '긴장하지 말고 크게 질러보라'고 격려해주면서 리허설을 이끌어갔다고 한다.
- 유튜브에 프린스 레볼루션 TV라는 채널을 개설, 자신의 뮤직비디오나 콘서트 영상들을 올려왔었는데 NPG 뮤직 클럽이라 하여 온라인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를 열고 온라인 음원 사업에 뛰어들면서 프린스 레볼루션 TV에 있는 영상들은 죄다 '프린스가 자신의 곡이 유튜브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원곡이 막혔습니다.'라는 친절한 안내문구와 함께 원곡 대신 엉뚱한 다른 가수의 곡이 흘러나오게 됐다. 당연히 댓글은 각종 욕설로 도배가 돼있던 상황. 그나마 이 공식 유튜브 채널마저도 칸트러버시 뮤직과의 법적 문제로 인해 아예 폐쇄되었고, NPG 뮤직 클럽도 망했다. 2014년 현재는 프린스 명의로 하나, 3rdEyeGirl 명의로 하나 2개의 유튜브 채널을 다시 개설했다. 주로 라이브 공연 영상을 올리거나 새로 발매하는 음원들을 간단한 영상으로 홍보하는 편이다.
- 제임스 브라운에게는 다급하게 모자를 벗으면서 고개숙여 인사할 정도로 깍듯하게 모시다시피하지만, 그래미 어워드에서 퀸시 존스가 평생 공로상을 받을 때는 입을 삐죽 내미는 등 정말로 호불호에 대한 표정을 숨기지 않는다. 선배들도 존경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듯하다.
-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서는 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이 가지고 있던 음반들을 좀비한테 던지는데 그 때 친구가 프린스의 최대 히트 앨범인 'Purple Rain' LP판을 던지려고 했을때 주인공은 그 앨범만큼은 안돼!라며 친구를 말렸다.
- 드라마 뉴걸 시즌3는 한 화를 프린스 주제로 만들었으며, 프린스가 카메오로 나오기도 했다.
- 2014년 10월 22일 라디오 스타에서 박준형이 언급했는데, 전세계에서 계약서에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라는 조항이 붙은 3명의 인물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24]
- 이적이 펑키함과 섹시함을 가장 충실하고 세련되게 담은 곡으로 프린스의 'Kiss'를 뽑은 적이 있다. 긱스 활동 중에는 프린스의 Erotic City를 표절한 듯한 곡을 내놓기도 했다.
- 신해철은 자신의 라디오에서 '20세기에 태어난 흑인 모차르트'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 미네소타 바이킹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 관중석에 자주 모습을 비춘 적이 있었고, 본인이 바이킹스 팬이라고 밝혔던 적도 있었다고. 프린스 사후, 모든 미네소타 스포츠 구단들은 프린스 추모 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다[25] . 특히 미네소타 바이킹스같은 경우에는 Purple Rain을 변형해 Purple Reign[26] 이라는 슬로건을 밀고 있다.
- 스티븐 스필버그는 마이클 잭슨이‘불타는 숲속의 새끼 사슴’이라면 프린스는 '어두운 동굴의 사자’일 것이라고 했다.
- 1980년대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로 미디어에서 언급됐다.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프린스의 팬이었다고 한다. 마이클과 프린스는 싱글 'Bad'의 듀엣과 관련해 모여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프린스가 그때 부두술사 인형을 가지고 와서 마이클은 자신을 저주하려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외에도 같이 탁구를 쳤다고 프린스가 자서전에 언급했다. 'This is it' 공연을 앞두고 마이클 잭슨은 이번에 내가 쉬면 신은 그 재능을 프린스에게 줄 것이라 말했다고 하는 주위 증언이 있는데 사실 여부는 모른다.
- 한편 프린스가 마이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일화도 있다. 프린스는 2004년 라디오쇼 'Doug Banks Morning Show'에 출연해 진행자가 말하는 단어를 듣고 한 단어로만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코너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천재(Genius)'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어 마이클의 여동생 자넷 잭슨에 대해서도 질문을 받고는 '천재의 여동생(Genius' sister)'이라고 답했다고... 또 마이클의 사망 당시 프린스와 함께 있었다는 토크쇼 진행자 Tavis Smiley에 의하면 마이클의 사망소식을 들은 프린스는 공연 리허설도 취소하고 밴드 맴버들을 전부 집으로 돌려보낸 후 자기도 집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며칠 동안 누구에게도 말도 걸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프린스의 키보디스트였던 O'Neal이 밝힌 바에 따르면(출처) 프린스 역시 마이클 잭슨에게 영향을 받았고 이 둘은 악감정 없이 서로를 존경했으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 베트남계 미국인 가수인 뚜언 아인은 프린스 비슷한 느낌의 외모라는 이유로, 한 정체불명의 서양사람에 의해 아시안 프린스라는 인터넷 팬 인물로 왜곡된 적이 있다. 게다가 아시안 프린스의 노래로 알려진 것들은 또 다른 베트남계 미국인 가수들의 곡을 끌어와서 실제로는 뚜언 아인 본인의 노래가 아니다.
- 2U 나 4U 같은 식으로 문장을 비슷한 발음의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으로 표기하였는데 이는 프린스가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슨가족에 까메오로 참가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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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8년의 시즌 20의 Treehouse Of Horror 19의 두번째 에피소인 'How to get Ahead in DEAD - Vertising'. 이 에피소드에서 라이센스 비용과 조건을 맞추기 싫어하는 광고업자의 의뢰를 받은 호머 심슨에게 조지 클루니, 닐 암스트롱과 함께 끔살당하는 역할.[27] 추가로 이 에피소드 이전에 시즌 3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Stark Raving Dad' 에 마이클 잭슨 대신[28]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무산된 적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8년의 시즌 20의 Treehouse Of Horror 19의 두번째 에피소인 'How to get Ahead in DEAD - Vertising'. 이 에피소드에서 라이센스 비용과 조건을 맞추기 싫어하는 광고업자의 의뢰를 받은 호머 심슨에게 조지 클루니, 닐 암스트롱과 함께 끔살당하는 역할.[27] 추가로 이 에피소드 이전에 시즌 3의 첫번째 에피소드인 'Stark Raving Dad' 에 마이클 잭슨 대신[28]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무산된 적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
- 정엽 라디오에 출연한 바버렛츠가 프린스 공연에 조명 장비를 납품하던 회사 관계자의 말을 인용했는데, 뮤지션의 삶에서 지치고 권태를 느낄 때 프린스의 하루를 되새겨보라는 것이었다. 프린스는 점심 쯤 일과를 시작했는데, 점심 어쿠스틱 팬미팅 1시간 - 그보다 더 큰 규모 팬미팅 2~3시간 공연 - 사운드 체크 3시간 - 본 공연 - 애프터 파티 - 다시 잼 세션(애프터 파티의 애프터 파티)에 이르기 까지, 이걸 매일같이 몇 십년(...)을 해왔다고 하니 말그대로 뮤지션들의 뮤지션이라고 할 만 하다. 참고로 원래부터 프린스 팬이었던 정엽은 일화를 듣고난 뒤 그 동안 자신이 상상했던 프린스는 꽤나 여유롭게 생활할 줄 알았지만 온 시간을 빡빡하게 음악에만 온 시간을 들여 인생을 바쳤다는 것에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래리 그래엄이나 메이시오 파커 같은 펑키 음악의 거장들을 자택으로 초청해서 잼[29] 을 하며 놀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삘 받으면 음반 내고 이 양반들을 다 이끌고 월드 투어를 다녔다.
- 본인의 히트곡 말고도 샤카 칸, 패티 라벨, 마돈나[30] , 뱅글스[31] , 시나 이스턴[32] , 쉴라 E[33] , 마티카[34] , 셀린 디옹[35] , 시네이드 오코너[36] , 테빈 캠벨[37] , 노 다웃 등에게 곡을 써 주거나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시네이드 오코너에게 준 Nothing compares 2 U는 빌보드 차트 1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서 팀 버튼의 배트맨(1989년 영화) 등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프린스의 음악을 들어봤다면, 아마도 이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38] .
- 영화 쪽에도 손을 대서 Purple Rain 말고도 Under the Cherry Moon,[39] 비디오 영화 3 Chains o' Gold, 퍼플 레인의 후속작인 Graffiti Bridge 총 4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 4작품은 전부 자신의 신곡을 사용한 뮤지컬 영화다. 그런데 이쪽에는 별 재능이 없는지 전부 평이 영 좋지 않으며, 그가 감독까지 맡은 Cherry Moon, Graffiti Bridge는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에서 극딜을 먹이기도 했다.[40]
- 유니버설 픽처스가 프린스의 음악들을 차용한 뮤지컬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맘마미아 형식으로 나온다.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 For You (1978)
- Prince (1979)
- Dirty Mind (1980)
- Controversy (1981)
- 1999 (1982)
- Purple Rain (1984)
- Around the World in a Day (1985)
- Parade (1986)
- Sign 'O' the Times (1987)
- Lovesexy (1988)
- Batman (1989)
- Graffiti Bridge (1990)
- Diamonds and Pearls (1991)
- Love Symbol Album (1992)
- Come (1994)
- The Black Album (1994)
- The Gold Experience (1995)
- Girl 6 (1996)
- Chaos and Disorder (1996)
- Emancipation (1996)
- Crystal Ball / The Truth / Kamasutra (1998)
- Newpower Soul (1998)
- The Vault: Old Friends 4 Sale (1999)
- Rave Un2 the Joy Fantastic (1999)
- The Rainbow Children (2001)
- One Nite Alone... (2002)
- Xpectation (2003)
- N.E.W.S. (2003)
- The Chocolate Invasion (2004)
- The Slaughterhouse (2004)
- C-Note (2004)
- Musicology (2004)
- 3121 (2006)
- Planet Earth (2007)
- Lotusflow3r / MPLSound (2009)
- 20Ten (2010)
- Plectrum Electrum (2014)
- Art Official Age (2014)
- HITNRUN Phase One (2015)
- HITNRUN Phase Two (2015)[41]
- Piano & A Microphone 1983 (2018)[42]
- Originals (2019)[43]
7.2. 참여 앨범
- The Time - The Time (1981)
- What Time Is It? - The Time (1982)
- Vanity 6 - Vanity 6 (1982)
- Ice Cream Castles - The Time (1984)
- The Glamorous Life - Sheila E. (1984)
- The Family - The Family (1985)
- 8 - Madhouse (1987)
- 16 - Madhouse (1987)
- 24 - Madhouse (1988)
- Gold Nigga - New Power Generation (1993)
- 1-800 New-Funk (1994)
- Exodus - New Power Generation (1995)
7.3. 라이브 앨범
- One Nite Alone... Live! (2002)
- Indigo Nights (2008)
8. 싱글
8.1. 빌보드 핫 100 1위
- When Doves Cry (1984)[44]
- Let's Go Crazy (1984)[45]
- Kiss (1986)
- Batdance (1989)
- Cream (1991)[46]
8.2. 빌보드 핫 100 2위
- Purple Rain (1984)
- Raspberry Beret (1985)
- U Got the Look (Duet with Sheena Easton) (1987)
8.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Little Red Corvette (1983)
- Delirious (1983)
- I Would Die 4 U (1984)
- Pop Life (1985)
- Sign o' the Times (1987)
- I Could Never Take the Place of Your Man (1987)
- Alphabet St. (1988)
- Thieves in the Temple (1990)
- Diamonds and Pearls (1991)
- 7 (1992)
- The Most Beautiful Girl in the World (1994)
8.4. 빌보드 핫 100 11위~20위
- 1999 (1982)
- Partyman (1989)
- I Hate U (1995)
[1] 프린스라는 예명(藝名,stage name)은 본인의 원래 이름 중 퍼스트 네임에서 따왔다. 이는 마돈나도 마찬가지다.[2] 현재는 에릭 베넷의 부인이다.[3] Rolling Stone, 함께 80년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인 마이클 잭슨이 35위 마돈나가 36위이다. 다만 롤링 스톤은 로큰롤 중심의 음악 매체이기 때문에 팝 음악가들에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4] Acclaimed Music[5] 네오소울의 메이저화에 기여한 디안젤로와 맥스웰이 가장 크게 영향 받았던 뮤지션이 다름 아닌 프린스다. 심지어 디안젤로는 대놓고 Do me baby의 파트 중 일부를 대놓고 샘플로 갖다 쓰고 자랑스러워 했을 정도. 네오 소울의 시대가 지난 2010년대에도 영향력은 여전해서 미겔 등이 프린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6] 우연인지 셋 다 1958년생 동갑이다. 그리고, 셋은 서로가 사적으로도 특이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7] 최고 전성기던 80년대 국내의 검열과 금지곡 정책 때문에 정식 발매된 음반이 거의 없다. 이런 검열 제도는 1996년에야 폐지된다.[8] 프린스는 롤링 스톤스, AC/DC와 함께 영미권에서의 인지도에 비해 한국 인지도가 안습인 음악가 순위에 반드시 꼽히는 아티스트이다.[9] 실제로 스티브 바이는 프린스의 굉장한 팬이다.[10] 신스 팝 및 뉴 웨이브의 요소가 결합된 펑크 록[11] 심지어는 이것도 👀 와 같은 기호로 표현하기도 했다.[12] 실제로 프린스의 디스코그래피는 상식을 초월한다. 80년대를 풍미한 가수의 디스코그래피가 정규작만 39개이며 2000년대 이후 발표한 정규작만 16개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을 정도.[13] 편의상 Love Symbol이나 Prince Symbol로 부르긴 한다. 'The Artist'이나 'Symbol'도 그 때 만들어진 이름[14] 실제로 앨범 제목, 트랙리스트만 알려지고 발매되지 않은 앨범들이 꽤 많다[15] 가칭. Welcome 2 투어 당시 라이브로만 선보인 신곡들이 있어 20Ten 디럭스가 아닌 새 앨범을 발매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결국 그런거 없었다[16] 놀랍게도 아직 과거 앨범 리마스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뮤지션이기도 하다.[17] 공교롭게도 TMZ는 2009년에 또다른 흑인 팝스타인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최초로 보도한 적이 있다.[18]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이힐.[19] 앵거스 영과 키가 같다.[20] 게이설이 계속 퍼져나가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곡들은 모두 여성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고 밝히기까지 했다.[21] 15살 연하다.[22] 원문: The late(故), great Prince[23] 그도 그럴게 Purple Rain 앨범 같은 경우 전부 라이브 녹음인데다 격렬한 춤을 추면서도 전곡은 물론이며 특유의 애드립 부분이라도 음정 하나 안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린스의 완벽주의에 걸렸으니 그냥 넘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프린스는 연배로 보아도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비욘세가 어렸을 때 이미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므로 비욘세가 프린스를 우상으로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 [24] 나머지 두 사람은 탐 크루즈, 마이클 잭슨이었다고 한다. 박준형이 스피드 레이서 촬영 때 탐 크루즈가 옆 촬영장에서 촬영하고 있어서 신기해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이유는 탐 크루즈의 계약서에 "다른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라는 조항이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한다.[25] 더구나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Lets Go Crazies'는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미네소타 와일드가 각각 터치다운과 골 득점시 사용하고 있다.[26] 의역하자면은 세상을 보라색으로 물들여라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27] 참고로 이때 나온 BGM은 토킹 헤즈의 Psycho Killer다.(...)[28] 정확히는 자신이 마이클 잭슨이라고 믿는 환자[29] 코드만 정해두고 하는 즉흥연주다.[30] 4집에서 듀엣으로 부른 "Love Song"[31] "Manic Monday"[32] "Sugar Walls", "101" 등[33] "The Glamorous Life", "A Love Bizzare"[34] "Love...Thy Will Be Done"[35] "With This Tear"[36] "Nothing Compares 2 U"[37] "Round and Round"[38] 이 영화에서 잭 니콜슨의 조커의 이미지 구축에도 크게 일조했던 게 프린스의 음악이다. 대표적으로 조커가 부하들과 미술관에서 반달리즘을 저지를 때 흐르던 'Partyman'과, 후반부에서 조커가 퍼레이드를 하며 고담 시민들에게 돈을 뿌릴때 나왔던 'Trust' 는 배트맨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귓가에 남는 곡. 프린스가 배트맨 tv시리즈의 주제곡을 재해석하여 극중 사운드와 믹싱한 경쾌한 댄스곡 'Batdance'도 유명한데, 이 곡의 뮤직 비디오에서는 조커와 투페이스, 배트맨의 분장을 한몸에 두른 프린스의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Batdance'는 영화의 인기에 힘입에 빌보드 핫100차트 1위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 시나 이스턴과 듀엣으로 부른 발라드 'The arms of Orion'도 빼놓을 수 없는 명곡이다.[39]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이 작품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참고로 그녀는 이 작품으로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에서 '최악의 여우조연상', '최악의 신인상'에 후보로 오르는 굴욕을 맛보았다. [40] 체리 문은 무려 5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나마 Graffiti Bridge는 5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수상은 면했다.[41] 생전 발매된 마지막 앨범. Black Is The New Black이라는 앨범을 작업하고 있었지만 중단되었다.[42] 사후 첫번째 정규 앨범[43] 사후 두번째 정규 앨범[44] 5주 1위, 1984년 빌보드 연말 차트 1위[45] 1위 할 당시 국내에서는 방송 금지곡[46] 그의 마지막 빌보드 싱글 차트 1위 곡. 프린스가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넌 끝내주게 멋진 사람이라는 내용의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