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와 잇세이

 


'''사가와 잇세이
佐川一政 | Issei Sagawa
'''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출생'''
1949년 4월 26일 (71세)
일본 효고현 고베시
'''국적'''
[image] 일본
'''신체'''
145cm, 35kg
'''직업'''
작가, 배우
'''부모'''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
'''형제자매'''
준 사가와
'''소속'''
악의 고백
1. 개요
2. 행적 및 만행
3. 그 이후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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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유명한 작가이자 '''무죄로 풀려난 살인마'''.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 커녕 자신의 살인행위를 책으로 써 막대한 돈을 벌고 일약 스타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세계적으로 보면 그가 저지른 식인범죄는 그렇게 드물지는 않다.[1] '''문제는 처벌을 받지 않고 그 후 인기인처럼 다뤄진 게 문제였다.'''
무죄 선고를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구글 재팬 역시 사가와 잇세이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를 '에세이스트, 카니발리스트'라고 소개한다.

2. 행적 및 만행


사가와 잇세이는 1949년 고베에서 태어났고, 와코대학 문학과를 졸업 후 칸사이 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는데, 1981년 6월 11일, 학급 동료였던 네덜란드 유학생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를 잇세이가 독일 시 해석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10cm 이상 짧은 정도인 145cm 정도에 성인 여성의 평균 체중보다도 적게나간 35kg 밖에 되지 않는 남성치고 극단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왜소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178cm나 되는 큰 키에 아름다웠던 르네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image]
피해자의 사진.
그녀가 시를 읽고 있는 도중에 등 뒤에서 목에 소총을 쏴 그녀의 목숨을 빼앗는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저질렀다.[2] 시체를 먹기로 결심한 그는 시신의 둔부부터 깨물었는데, 생각보다 엉덩이가 단단한 나머지 잠시 밖으로 나가서 도축용 칼을 구입해 돌아와 시신을 차례차례 토막내기 시작했다. 둔부의 살을 도려내서 날로 먹은 뒤 매우 맛있다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했고, 가슴을 비롯한 여러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는데 일부는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신체의 거의 모든 부위를 섭취했고 여러 부위의 섭취 과정과 맛에 대한 평가가 자서전에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있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림을 느낄 정도이다.
6월 13일, 남은 시신을 여행 가방 둘에 나눠 담아 불로뉴의 숲에 있는 연못에 유기하려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그의 무거운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옮겨 닮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 무게에 놀랐는지 뭔가 낌새가 이상하지만 설마 그럴까 싶었는지 "혹시 시체를 유기하려 근처 공원에 가시는 겁니까?"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목적한 공원에 도착한 그는 연못에 여행가방을 유기했지만, 우연히 그 공원에서 조깅하던 두명의 목격자에게 유기된 여행가방이 발견되었다.
이후 여행가방에서 나온 토막된 시체 조각을 수사의 시작으로 조사를 펼친 결과, 사가와 잇세이의 짐가방을 옮겨주었던 택시기사의 증언으로 그를 추적하는데 성공, 자택 수사를 진행했고 집안 여러군데에서 조리되있던 인육과 피해자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다급해진 그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일본으로 도주하려 시도했지만, 이틀 후인 6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정신 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져 약 2년 동안 그 곳에서 머물다가,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기소 처분을 받게 되었다.[3] 심신상실로 처벌을 받기엔 부적합하다는 프랑스 법정의 판결에 의해 그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교도소가 아닌 앙리 코란 정신 병원에 무기한 입원 조치되었다. 이 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틈틈이 쓴 소설 "안개속"(霧の中)[4]이 출간되는데, 후에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그리곤 1984년에 국외 추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 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고,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정상인이 맞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본 경찰은 사가와를 재판에 회부할 방침이었지만, 프랑스 경찰 측은 불기소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의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 2년이 채 안된 1986년 8월 12일에 일본에서의 공식적인 처벌 및 기록이 남지않은 채 깨끗이 퇴원하였다.
그는 범행 이전부터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적 도착증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으며, 고교시절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인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자주 의논하기도 했지만, 의사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1972년 와코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인근에 사는 중년의 독일인 여성을 먹을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하였다. 하지만 여성은 수면 도중 기척을 느껴 잠에서 깼고, 습격당하기 전에 매우 왜소했던 사가와를 큰 피해없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이때 당시 경찰 및 피해자 모두 그의 범행은 당연하게도 인육이 아닌 강간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그는 당시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가 지불한 합의금에 고소가 취하되었는데, 이때 그의 식인에 대한 환상 및 집착을 발견해 고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 되었다.
하여튼 이 식인 살인마가 전 세계에 끼친 여파는 생각보다 엄청나서, 당시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에서 일본인을 보고 기겁하는 외국인을 그리기도 했고,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한 어느 한국 사업가가 쓴 책을 보면, 90년 초반에 아내와 결혼을 허락받고자 아내의 처가로 갔더니, 아내의 할머니는 자신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고 할아버지는 사냥용 엽총과 허리춤에 단도를 차고 땀을 흥건히 흘리면서 계속 헛기침을 하시다가 하는 말이 '''"자네... 설마 우리 손녀 잡아먹지 않을 거지?"''' 놀라서 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만 바로 사가와 잇세이 사건이 이탈리아에서 충공깽으로 다뤄지면서, '''아시아인은 서양의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의 생인육을 즐겨먹는 민족'''라는 인식이 이탈리아 깡촌 시골마을에까지 자리 잡았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 국내 언론에서도 많이 보도되었으며, 사설에서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만행과 빗대었을 정도.
일부에선 가십거리로 떠든 일화 밖에 없는데 전세계라는 것은 좀 그렇다고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아시아 황인이 백인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에 인육을 섭취하기 까지한 실로 엄청난 사건이라[5] 당시 언론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십거리로 떠올랐던 사건이다.[6]
가관인 것은 그는 이 식인살인을 바탕으로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92년엔 일본의 정신 나간 방송인과 AV 제작자들은 그를 데려다 천박한 영상물을 찍어 팔기도 했다. 음침한 지하에서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마약에 취하고 변태적인 성 행위를 하는 클럽인데, 그 장면 중 시체를 훼손하며 난교를 하는게 영화의 내용이다. 이후 일본에서 여러 식당에 관한 리뷰를 잡지에 쓰는 저널리스트 활동도 했는데, 방송에서는 이런 점을 눈여겨 봤던지, '''그를 요리방송에 초대해 생고기를 맛보며 평가를 하는 프로를 진행하기도 했다!'''[7] 또 그는 여성의 나체가 주된 그림들을 그려 돈을 벌었고, 2000년대 이후엔 자신의 살인 및 식인 체험담을 여러 매체로 지겹도록 우려먹고도 모자랐는지 직접 만화로 그려 팔아먹기까지 했다. 혐오주의[8][9]
사실 식인 살인사건은 세계 곳곳에서 터지지만, 그런 살인마들은 사형이나 무기징역 같은 처벌을 받는 게 보통이고, 살인범이 회고록이나 기타 그런 걸 낸다 해도, 판매수익은 죄다 피해자 유족에게 가게 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때는 시대가 달랐다고는 해도, 살인마, 그것도 식인 살인마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TV에 나오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웃으며 떠들어대고, 광고에도 나오며 스타처럼 취급받는 경우는 좀처럼 없는 경우라서 더더욱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검경(檢警)에서 정신질환으로 오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책임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해외에선 당연히 아주 신나게 깠고(특히 정신이상으로 놓아준 프랑스 경찰), 일본 내에서도 '어째서 그가 처벌받지 않는가'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 같은 이가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길을 걸어다닌다는 사실에 일본 국민들은 경악했고, 지금도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은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가와 잇세이나 사카키바라 사건과 같은 살인마들이 현재도 무사히 생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살인범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흉악한 범죄를 일으켜도 처벌 하나 받지 않고 거기다 뻔뻔하게 굴면서 살아있는 사건으로는 도쿄 여고생 살인사건이 있다.
정신이상 판정이 오류임이 판명난 뒤에 네덜란드 및 프랑스, 미국에선 입국 금지를 당했는데, 그는 미국에 가고 싶은데 못 간다고 '''징징거렸다.''' 참고로 그의 어머니는 자살해버렸고, 아버지는 사업이 몰락하여 폐인 상태에서 죽었다. 일본에서도 거의 잊혀진 그는 일간지 칼럼니스트로 먹고 살고 있으며, 자신의 식인을 자랑하듯 쓰는 악의 고백이란 책을 내 팔아먹기도 했다. 하는 짓을 보면 백번 죽여도 마땅할 인간 말종인데도, 꼴에 자신은 지옥에 있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악의 고백을 한국어로 번역한 수리(예명)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가서 이 작자를 만났는데, 2000년대 중순에 만나본 그는 그럭저럭 평범한 서민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더라고 한다.
과거 돈 많은 부모 곁에서 호강하던 시절과 달리, 이젠 스스로 벌어먹고 과거엔 돈으로 여자를 만났지만 이젠 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서민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지옥을 운운하니 답이 없다. VICE에서 다큐멘터리로 다룬 바 있는데, 거기 버젓이 나와서 잘난 듯이 인터뷰한 것을 보면, 살인 및 식인에 대해 일절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정말로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추정된다.
참고로 다큐에서 공개된 집 내부를 보면, 방 한쪽에 여자 사진을 도배해놨는데 대부분이 우에토 아야의 사진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보며 정말 맘에 든다고 몇 번이고 말한다. 물론 그게 무슨 의도로 마음에 든다는 뜻인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현재 그의 소원은 서양 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정부가 일본 측에 관련 정보 제공을 거부한 진짜 이유는 장염을 뇌염으로 오진하여 정신이상자로 분류한 의사의 실수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처벌을 면했으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반성하며 속죄하는 태도를 보이며 평생을 살아야 마땅할 터인데,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며 오히려 고인드립까지 하니 욕먹는 것이다.
이 인물에게서 기인해 도시전설애인을 먹은 여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남녀가 뒤바뀌긴 했지만... 2012년 11월 한국에서 발표된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살인범이 자서전을 편찬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여론의 주목을 받는 장면의 모티브는 사가와 잇세이의 사례에서 모티브를 딴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잘생긴 사이코패스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팬클럽까지 생긴 장면은 테드 번디의 일화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살인사건은 화성연쇄살인사건에서 각각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3. 그 이후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마냥 호의호식하며 지낸 건 또 아니었다. 법적 처벌은 면했지만 오히려 사회적 처벌을 아주 철저하게 받았다.
물론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많은 정신나간 러브콜들을 받던 1986년부터 1997년까지는 꽤나 이름을 날리며 벌이도 꽤 짭짤했던 모양이지만, 1997년 이후에도 돈도 벌고 명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쓴 원고는 그 어떤 출판사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여러 출판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자신의 원고를 출간해주길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의 쓴맛을 본 그는 글쓰기 및 그림을 그만두고 구직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흉악범인 그를 고용하려고 하는 기업은 어떤 곳도 없었다. 궂은 일을 하는 단기 아르바이트조차도 말이다.
운 좋게도 그가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본명을 밝히며 면접을 보러온 그의 당당함에 흥미를 느낀 불어 학원 원장[10]이 고용을 하려고 했지만, 학원의 모든 관계자와 선생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여 출근도 못해보고 빛의 속도로 잘렸다.
2005년엔 사업을 말아먹은 그의 아버지가 많은 빚을 남기고 죽었는데, 가족 및 친척들조차 그가 장례식에 오지 못하게 그냥 막아버렸다.[11] 그가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 직후 사망한 사업가의 아들로서 채무자들에게 빚을 모두 갚느라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 했고, 서민 공공 아파트로 강제로 이사하면서 직장도 없이 근근이 살아갔다. 2009년에 미국 & 캐나다 잡지사인 Vice Magazine에서 그의 이후 인생에 대해 인터뷰[12]]를 했는데, '최소한 교도소에선 옷, 밥, 잘 곳을 주지만, 살인자로 낙인찍혀 사회에 내던져지는 건 정말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그나마 인터뷰 당시엔 자신의 글을 적어 보내줄 잡지사가 한 두 군데 정도는 있었던 모양. 위 항목에 나왔듯이 반성은 커녕 잘 놀고 먹으며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것 같지만, 더 자극적이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는 잡지사의 입장으론 이 인터뷰들이 단지 좀더 자극적으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오히려 서민 아파트에 거주한 채 이웃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글을 깨작거려 잡지사에 1년에 한 두번 글을 싣는 것으로 먹고 사는 인생인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긴 힘든 것은 당연하지만 그가 행한 짓거리에 비해 잘 살고 있는 것은 팩트다.
하지만 숨통이 트인 것도 잠시, 2013년엔 뇌경색으로 쓰러져 신경계에 영구 손상을 입은 채 지금까지도 병원에서 링겔 꽂고 누워 있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나마 그를 딱하게 여긴 그의 동생 사가와 준이[13] 고용해준 간병인에 의해 보살핌 받으며 처절히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만행에 비례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고는 하기 힘들다.
한번 감옥에 갔다와 출소한 범죄자들은 뉴스나 매체에 알려지지 않더라도 누군가 한명이라도 알게 되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평생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이것도 강도, 상해, 음주운전 등 그나마 반성하면 용서받을 기회가 조금은 있다고 평가되는 범죄자 한정이다. 저지른 범죄가 간첩 같은 국가반역죄나 아동 성범죄, 살인 같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면 일가친척 전체가 주소지를 떠나는 건 물론, 지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다.[14] 그런데 그냥 흉악범도 아니고 살인범죄자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길거리에 활보하는 것은 법적으로 처벌은 피해갔더라도 문명이 있는 사회에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혹독한 사회적 처벌이 집행된다.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 핵심 살인범 4인방이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다. 게다가 살인범들은 사가와 잇세이와 달리 범행당시 미성년자였고, 법적으로 처벌을 조금이나마 받긴 받았음에도 그랬다.
게다가 사가와 잇세이는 엔자이가 흔한 성범죄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며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뒤 식인까지 한 흉악 범죄자다. 일본이 전과자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곳인 건 맞지만 다른 국가라고 해도 이런 자가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뻔한 이야기며, 공소시효 끝날 때까지 버틴 범죄자들 중에 범죄 사실을 누가 밝혔다면 모를까,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라도 죄를 자발적으로 자백한 자들이 누가 있나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4. 기타


래퍼 비프리의 앨범 'Korean Dream'의 스킷인 "20130804"와 "20130806"은 각각 차와 사무실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들과 하는 내용이다.
리바이어던으로 이름을 알린 루시엔 캐스팅-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이 이 사람과 인터뷰한 영상으로 카니바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록밴드 Stranglers의 La folie는 이 사건을 두고 만들어진 곡이다.
구글에 이 자의 이름을 일본어로 검색해보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나오니 주의 바람.

[1] 미국에서도 제프리 다머 같은 연쇄살인마가 식인을 한 게 드러난 바 있다. 그 밖에 1980년 스웨덴에서도 사소한 싸움 끝에 아내를 죽인 남성이 아내를 영원히 사랑했다며 아내의 시체를 먹은 실화가 있고, 남자는 옥중에서 자살했다.[2] 참고로 이 사건 전 잇세이는 크루즈 배에서 어떤 정육점 주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대화를 하면서 꽤 친해졌다고 한다. 이때 정육점 주인이 고기 자르는 법을 조금 가르쳐줬다고 하는데 이걸 시체를 자르는데 참고했고 심지어 그 정육점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편지를 썼다고 한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3] 사실 이 부분은 Wikipedia 같은 외국 사이트에선 의사의 오진은 언급이 없고, 대신 그의 아버지가 고급 변호사를 고용해 이런 판결이 받아들여졌다고 나와있다.##[4] 네이버 책[5] 게다가 이러한 엽기적인 살인후 식인은 사건 자체가 별로 흔치가 않기 때문에 더 주목 받았다.[6] 현재도 외국에서 수위가 센 사이트 등에선 당시 유출된 사가와 개인의 사진들과 피해여성의 시체 사진까지도 japanese cannibal 등의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굉장히 혐오스러우니 주의.[7] 심지어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테이크 CF까지 일본 TV에서 방송되기까지 했다.[8] 전문 그림 작가를 고용한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그린 거라 그림 퀄리티는 매우 낮지만, 당시 행위의 묘사가 매우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내성이 없는 사람은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9] 참고로 이 트윗을 올린 사람은 일본의 유명 AV 남배우 시미켄으로, 비판은 커녕 "만화 흥미있게 잘봤고 자기는 식분 페티쉬가 있는데 사가와 씨는 하필이면 식인 페티쉬라고, 똥은 어떻게든 구하지만 만약 자기가 식인 페티쉬였다면 그 성벽을 어떻게 억누르고 살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며 사가와 씨가 불쌍하다"라며 동정하는 트윗을 올렸다. 민심이 박살날 수도 있는 수준인데도 문제없이 활동하는 걸 보아 뒷수습은 어떻게든 한 듯.[10] 그가 범행을 저질렀던 곳이 프랑스란 걸 생각하면 이 원장도 어지간히 또라이다.[11] 일본에서는 아무리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더라도 사람이 모자라다거나 사고를 자주 쳤다는 이유로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절도 폭력 같은 단순 잡범도, 중대한 피해를 입힌 과실범도 아닌 극악무도한 흉악범이었던 그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해가 충분히 가는 부분이다.[12] [[https://www.vice.com/en_us/article/7bwvvx/whos-hungry-502-v16n1]|Vice 잡지 인터뷰(영문)][13] 다만 이 동생 사가와 준이라는 작자도 '''제 정신이 아니다.''' 자해를 즐기는 데다 죽지 않고 먹히는 걸 즐기는 여자도 있지 않냐며 형의 범죄를 탓하는 척 하면서도 묘하게 동질감을 보이는 엄청난 변태 마조히스트라고 한다. 그의 동생에 관련된 영상 이쯤 되면 형과 같은 흉악범죄자가 되지 않은 게 신기해보일 정도다.[14] 실제로 사회에서 떠들썩하게 거론된 사건들은 굳이 범인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아도 검찰의 탐문 수사, 이후 재판 과정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서양권은 범죄자와 가족을 구분하는 편이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면 그 가족은 평생 숨어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 범인 가토 도모히로의 동생이 이런 사회적 배척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