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다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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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 Lionel Dahmer'''
제프리 라이어널 다머
1960년 5월 21일 ~ 1994년 11월 28일
1. 개요
2. 생애
3. 살해 행각
4. 체포
5. 최후
6. 여담
7. 관련 서적


1. 개요


미국연쇄살인 '''범죄자'''. 별명은 '''밀워키식인종(Milwaukee Cannibal).''' 신체는 185cm, 82kg, Rh+ O형.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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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위스콘신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의 아버지 라이오넬은 분석화학 박사였다.[1] 가정 폭력과 빈곤이 동반된 불행한 성장기를 거치는 대다수의 연쇄살인범에 비하면 제프리 다머의 생활 환경은 평범한(?) 편이었다. 다만 폭행까지는 당하지 않았어도 부모의 심각한 방임/방치와 애정결핍 속에 성장하기는 했다. 학교 친구들은 다머가 우울하고 어울리기 힘든, 특이한 외톨이였다고 기억했다.
제프리 다머의 아버지인 라이오넬[2]은 십대 시절,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십대였을 때, 열등감과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살인·방화·폭파 충동을 느꼈으며, 이러한 자신의 성향이 아들, 제프리 다머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의 어머니 조이스는 정서불안으로 약물을 상용하고 있었는데 임신 중에도 우울증입덧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모르핀이나 바르비투산염 알약을 하루 26개나 먹었다. 다머 부부는 이 문제로 자주 다투었다.
산후에도 어머니의 약물의존증은 계속되었고, 제프리 다머는 박사 학위 공부로 바쁜 아버지와 자식에게 무관심한 어머니의 방임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외향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박사 학위를 받고 가족과 함께 이사를 간 오하이오에서 그는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3] 이사를 마치고 2달 후에, 6살 어린 남동생, 데이비드가 태어났지만, 공통점이 없어서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4] 특히 가정불화가 심하여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은 어린 제프리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부모님이 언쟁을 벌일 때마다 그는 집을 뛰쳐나와 죽은 동물을 해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IQ가 145 일정도로 지능은 높았으나 학교 수업에는 무관심했고, 선생님에게 매우 예의 바르고 폭력적인 성향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교성이 없어 친구가 적었다.[5] 고등학교 때부터 알코올 중독이 심각해[6] 서류 가방에 술을 숨겨와서 교실에서 마셨다.[7] 가정불화와 성적 취향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갖고 있던 그가 의지할 것은 술밖에 없었다. 게다가 주변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한때 어머니의 발작을 흉내내며 광대처럼 행동하여 아이들의 관심을 잠깐 끌기도 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그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어머니가 동생 데이비드를 데리고 집을 나가면서 다머는 완전히 고립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과학교재로 놀면서 인근의 숲에서 동물과 곤충의 사체를 수집해 표본을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다머의 친구는 나중에 다머와 함께 곤충을 수집한 것을 회상했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좋아하던 여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녀에게 자신이 채집한 올챙이를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머의 친한 친구에게 올챙이를 줘버린 걸 알게 되어 격분, 친구의 집에 몰래 들어가 올챙이가 있는 어항에 엔진오일을 넣어 올챙이를 죽였다고 한다. 로드킬을 당한 동물들의 사체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였는데[8] 처음엔 화학자인 아버지의 산성용액으로 사체들을 녹여 오두막이라고 불리는 곳에다 뼈를 보관했으나 이를 본 그의 아버지가 우려의 목소리를 내자 숲 깊숙한 곳으로 동물 시체를 가져다 놓았다.[9]
다머는 일찍부터 자신이 게이라는 걸 알았다. 첫 성경험은 14살이었고 이웃집에 사는 소년이었다. 그 경험은 생각보다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과 관계 맺는 것보다 죽은 사람에 더 관심이 많았다. 시체에 대한 집착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머는 몇달 동안 집앞을 매일 지나치는 젊은 남자를 주시했다. 쓰러진 그의 몸을 어루만지고 성행위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야구방망이를 들고 수풀 속에 숨어 남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자 결국 다머는 이 생각을 단념한다. 운 좋게 남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3. 살해 행각


1978년, 그의 아버지 라이오넬[10]과 냉전 중이던 그의 어머니 조이스가 결국엔 아버지와 이혼하며 둘째 아들인 데이비드를 데리고 위스콘신으로 떠나며 그의 광기가 폭발했다. 이후 집에 혼자 남겨져 살게 되었는데 보통 이때부터 살인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머는 6월 18일[11] 길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당시 19세의 힉스를 살해했다. 잘생기고 마른 체구에 머리가 길고 셔츠를 벗어 허리에 묶었던 힉스는 다머가 성적인 환상을 품어온 이상형[12]이었다.[13] 다머는 힉스에게 맥주와 마리화나를 제안했고 힉스는 다머의 집에 가는 대신 집까지 태워다달라는 약속을 받았다.[14] 그리고 후에 힉스가 떠나려하자[15] 그의 머리를 바벨로 내리쳐 기절시킨 후에 목을 졸라 살해하고 다음날 지하실에서 해부한 후 뒷마당에 매장했다. 몇 주 후에 시체를 다시 꺼내 뼈를 양손망치로 부수어 집 뒤에 흩뿌려 증거를 인멸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토막낸 시체를 차 트렁크에 싣고 쓰레기장에 유기할 계획이었지만 새벽 3시에 차를 중앙선을 넘으며 비틀비틀 운전하며 가다가 음주단속을 하는 경찰에게 걸려 범죄가 발각될 뻔했다. 트렁크에 검은색 비닐봉투에는 뭐가 들었냐는 질문에 천연덕스럽게도 "집에 가족들이 다 나가고 없는데 쓰레기차가 오는 날에 깜빡하고 쓰레기를 못버려 쓰레기 냄새때문에 잠이 안와 버리러 가는중이다" 라고 둘러댔고 경찰들은 별 의심없이 중앙선 위반 벌금만 내게 하고 다머를 가게 한다. 겁에 질린 채 돌아온 그는 힉스의 시체를 일주일이 넘게 트렁크에 처박아둔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매일 술을 마시고 수업에도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기숙사 룸메이트의 말에 따르면 친구가 없었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비틀즈 노래나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보드카를 마셨다고 한다. 학비는 모두 아버지가 대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2주에 한번씩 매혈을 하거나 룸메이트들이 수업을 갔을 때 그들의 물건을 몰래 훔쳐서 전당포에 팔아 돈을 챙겼다. 게다가 이유없이 화장실 벽을 부순적도 있다고 한다. 결국 한학기만에 퇴학당했다. 대학에서 쫓겨난 후 다머는 알코울 중독이 심각하여 매일 술에 취해 있었다. 아버지는 다머에게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취직하거나 미군에 입대하라고 했지만 다머는 거부하고 술에만 빠져살았다. 결국 이를 참다못한 아버지에 의해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 조치되기도 하였다. 그는 육군 의무병으로 입대했고, 이 때 후반기교육 과정에서 인체 해부에 대해 배우게 된다. 서독에 주둔하던 육군 제8보병사단 제68기갑연대 2대대에 배속되어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또한 육군에서 담배를 배웠는데 하루에 한갑씩이나 피워댔다. 헌데 이 무렵 부대 주변에서 살인사건이 몇 건 발생하였고, 제프리 다머의 범행이 드러난 뒤에 이 사건들도 그가 한 일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범인이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복무 중 동기들과 시비가 붙어 싸움을 했는데 이때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 결과 고막이 파열되어 10년이 넘게 지나서도 귀에 통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군생활을 하며 성격이 잠시 밝아졌으나, 결국 음주벽으로 2년 만에 전역하게 된다.[16] 하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아버지와의 불화가 갈수록 심해졌고 술에 취해서 거리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체포되다가 60달러의 벌금과 10일의 구류를 살다가 나왔지만 이럼에도 제프리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다머에게 돈을 대주는것을 거부하자 제프리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한동안 할머니 집에 살았다. 제프리의 할머니는 손자에게 애정을 주며 손자를 교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제프리는 할머니한테는 공손하게 굴며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밀워키에 정착하여 아파트를 얻어 독립했고 혈장센터에 취직했지만 술에 취하여 알몸으로 공공장소를 다니는 추태를 부려 10개월만에 해고된다. 그러다 1985년 1월에 밀위키의 암브로시아 초콜릿 공장에 취직해서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는데 그는 동성애자로서 게이바에서 만난 남자들을 자기 집으로 끌어들여 살해하고는 그 시체를 해체하고 식인행위도 서슴지 않았다.[17]
의외로 그가 일찍 잡힐 뻔한 적도 있다. 1991년 5월 30일에 그는 동남아 라오스 출신의 '''코네락 신사솜폰(Konerak Sinthasomphone, 1976년 12월 01일생)'''이라는 14살 소년에게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면 돈을 주겠다고 하며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수면제를 탄 콜라를 마시고 정신을 잃자 다머는 언제나 그랬듯이 소년을 성추행하였다. 다머는 이후 술을 마시기 위해 외출을 했고 그 사이 소년은 가까스로 도망쳐서 경찰에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다머는 그 소년을 자신의 애인이라 주장했고, 경찰은 ''어, 그래?'' 하고는 소년을 도로 다머에게 내주었다. 당시 두 명의 흑인 소녀들을 포함한 세 명의 목격자들은 이 소년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다머를 두려워했으며 다머가 소년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고 증언했으나 경찰들은 그들을 무시했다. 그리고 제프리 다머는 이 소년이 19세라고 거짓말까지 했다.[18] 그리고 경찰관들은 일지에 '''애인들끼리 가볍게 다투었음'''이라고 기록하고 그 자리를 떠버린다. 이후 소년은 다머에게 잔혹하게 살해된다. 후에 신문에 난 신사솜폰의 실종광고를 본 한 흑인 소녀의 어머니가 경찰에 전화를 걸어 소년에 대해 물었지만 그들은 다머가 소년의 애인이며 그들의 성적 지향, 성적 취향은 자신들이 알 바 아니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이후 두 달간 다머의 범죄는 극에 달했고 후일 수사 과정에서 밀워키 경찰은 언론과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고 이들의 책임을 인정했으나, 소년의 죽음에 대해 대가를 치른 건 살인을 저지른 제프리 다머 한 명뿐이고 역시 소년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할 이 경찰관들은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해임에 대한 항소심에서 승소했으며, 경찰 노조에서 '''직업을 되찾기 위해 정당하게 싸운 올해의 경찰관'''으로 선정되어서 사람들의 분노는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둘중 한명은 게다가 2005년에 밀워키시 경찰청장까지 승진했다. 훗날 공개된 911상담기록에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두 사람은 애인 사이에요. / 정말이에요? / 그럼요. /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애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니까요 / 부인, 다시 말씀드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는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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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가족은 동양인인 이유로 고작 단돈 85만달러밖에 보상을 못받았다. 참으로 잔혹하게도 이 사건 몇 년 전에 '''신사솜폰의 형'''을 납치해서 성추행한 죄로 처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경찰들이 최소한 두 사람의 신분만 확인했으면 어이없이 죽는 일은 막았을 것이다. 이때 받은 형량은 징역 1년. 이 사건 직후 다머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은 정신질환자로 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며 정상인이 될 때까지 사회로 복귀시켜서는 안 된다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성추행 사건 이후 연쇄살인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므로 사회로 풀려나는 대신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면 그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4. 체포


'''"증오심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병이 들었거나 사악한 인간, 이 둘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둘일지도 모릅니다."'''

다머의 살인행각은 1991년 7월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1991년 7월 22일, 트레이시 에드워즈[19]는 제프리 다머의 유혹을 받아서 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프리 다머가 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마시고 정신줄을 놓아가는 과정에 다머가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고 칼을 들이대며 '''"네 심장을 칼로 잘라먹을 거야."'''라는 말을 듣고 가까스로 탈출하였는데 집 근처에서 순찰하고 있는 경찰관 2명은 수갑을 차고 도망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탈주한 범인이라는 생각에 그를 잡았다. 그러자 그는 경찰에게 '''"웬 미친 놈이 자신한테 수갑을 채우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며 그를 잡아달라고 말했다. 경찰은 이때도 안일하게 넘어가려다가, 민간인이 수갑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나 그 전 소년의 일도 있고 하여 일단 다머의 집에 가게 된다.
경찰이 집에 도착하여 다머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를 묻자 이번에도 그는 태연하게 연인들끼리의 일이었다며 수갑의 열쇠를 주며 사건을 조용히 무마하려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은 그래도 집을 수색하겠다고 말한 뒤 한 명은 다머의 옆에 남고 한명은 집에 들어 갔는데 들어가자마자 지독한 썩은내와 배설물의 냄새가 났으며 경찰관은 다머가 찍었던 희생자들이 고문당하는 사진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 사진들 속에는 희생자들의 인육이 들어있는 냉장고도 찍혀 있었는데 한 경관이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가 '''잘린 사람의 머리'''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 바깥에 있는 동료에게 '''"그 새끼를 지금 당장 체포해"'''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때, 제프리 다머는 그 동안 보였던 차분한 모습과는 180도로 다른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경관들에게 반항했으나 이런 데에는 이골이 난 경관들이 격렬하게 반항하는 다머를 제압하고는 그의 집에서 자세한 조사를 벌였는데 집안에는 그가 살해한 사람들의 해체된 시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집안에 있는 먹을거리는 과자 몇 봉지를 제외하곤 인육뿐이었다고 한다.
이 사이트에는 그가 죽인 피해자들의 정보가 있다. 링크

5. 최후


잡힌 후에도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던 다머는 술이 깨고 나서야 경찰조사에서 그가 한 일들을 모두 자백했다. 그는 피해자가 오면 일단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을 먹인 후 그들의 몸을 묶었다. 이후 항문에 고문을 가하거나 눈알을 팠으며, 신체를 자르거나 드릴로 머리에 구멍을 낸 후 염산을 뿌려 뇌를 녹이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것은 상대를 마음대로 조종하고자 하는 실험의 일환이었다고 하면서 한번은 성공했다고 주장했지만 거짓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머는 이 모습들을 모두 카메라로 찍었고 피해자의 시신을 잘라서 요리해 먹은 후 남은 시신들은 냉장고에 보관하거나 벽에다가 묻어 버렸다. 이에 경찰이 다머의 집 벽을 파자 시체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다머는 피해자들의 머리를 염산으로 녹여 해골을 만들기도 했으며, 해골들을 모아 두고 자위를 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다머가 중증 정신질환자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심신상실이나 미약으로 가면 어떻게든 감옥에 가더라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 그러나 배심원들은 그가 정상은 아니라도 법적 심신미약은 아니라고 결론지었고 위스콘신주는 사형제도를 시행하지 않기 때문에 다머는 1992년 2월 15일 합산형으로 징역 937년, 사실상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에 다머는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심리학자들은 다머에게 경계선 인격장애가 있다고 진단했고, 검사에서 높은 반사회성과 우울감, 낮은 자존감을 보였다. 한편 테드 번디와 같이 언론에 모습이 드러나면서 많은 여자들에게 결혼해달라는 편지를 받았고 돈을 보내는 여성도 있었다. 수감 후 잔인한 범죄 행각과는 달리 교도소에서는 의외로 정상적인 모범수로 생활했다. 벌을 받은 건 단 한번뿐이었는데 언어장애가 있는 교도관의 말투를 따라해서였다. 또한 감옥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일을 하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고 교도소에서 세례도 받게 된다. 심지어 ''"하나님은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심지어 저의 죄까지도"'''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 처음에는 다른 살인마들과 다르게 솔직하게 인터뷰에 답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비슷한 질문을 받자 퉁명스러워졌다. 다머는 인터뷰를 하는 대가로 기자에게 패스트푸드나 담배를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생전에 한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 상당히 뚱뚱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연히 교도소의 흑인 죄수들은 흑인만 골라 죽인 다머에게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죽이고 싶어했기 때문에 교도관을 옆에 붙이고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교회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다머에게 한 재소자가 칼을 휘둘러 목을 베었지만 칼이 부러져 경미한 부상에 그쳤다.
하지만 결국 1994년 11월 28일에 살해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죽인 건 흔한 흑인 갱단이나 페도필리아 사냥꾼 등을 자처하는 자들이 아닌 정신병자 크리스토퍼 스칼버였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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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스칼버(Christopher Scarver). 키가 191cm이다
크리스토퍼 스칼버는 1969년 7월 6일 생으로 1990년 6월 1일 한 백인 남성을 총으로 쏴서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었다. 정확히는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다머와 인종 관련 문제로 시비가 붙었고 이 와중에 변기 뚜껑에 머리를 난타당해 죽었다는 게 스칼버의 주장.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살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어서 죽여 봐. (I don’t care if I live or die. Go ahead and kill me.)'''[21]
사실 어느 정도 예견된 결말이었다. 흑인이나 동양인, 그것도 힘없는 남자 혹은 소년들만 골라 죽여온 백인 연쇄 살인범을 흉폭한 재소자들 사이에 던져 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22] 이 때문에 다머의 변호사는 그를 아동 성범죄자나 살인범 등과 마찬가지로 격리 수용할 것을 원했고 판사도 그 쪽으로 판결을 내리려 했지만 다머 본인이 거부했다. 마지막으로 교도소 측이 그를 강제로 격리수용하여 참사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2년 만에 제프리 다머 본인의 요구로 풀렸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다머가 죽은 후 당연히 시신은 집에 보내졌다. 다머의 부모는 또 고민에 빠졌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의 뇌를 연구하게 하여 이 살인마 연구에 도움을 주자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냥 조용히 화장해 주자고 했고, 결국 그의 시체는 간단한 장례 후 바로 화장되었으며,[23] 살던 아파트는 1992년 11월에 철거되었다. 그의 남은 자산은 피해자 배상에 쓰였는데 대부분 피해자 가족들이 태워 없앴다고 한다.

6. 여담


제프리 다머의 십대시절 별명은 그의 성 Dahmer와 발음이 비슷한 더머(Dumber 바보)[24]였다. 한국에서 나온 번역책에서는 다머저리라고 초월번역했는데, 영어 발음으로는 어떻게 불러도 더머로 불리니 본인 입장에서도 나름 많은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외국에선 성때문에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NBA 농구선수 루디 게이도 성인 Gay[25]때문에 커리어 초창기 그의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유니폼이 팔리지 않는 불운을 겪었다.
이 사람의 영국판으로는 데니스 닐슨이 있다. 범죄시기도 서로 엇비슷하다.
케샤의 첫 번째 미니 앨범에서 카니발(Cannibal)이라는 곡이 있는데, 가사 중 다머 얘기가 나온다.

'''"나한테 너무 잘해주면, 널 죽여버릴지도 몰라. 그래, 제프리 다머처럼 해버릴 거야"'''

'''"Be too sweet and you'll be a goner. Yep, I'll pull a Jeffrey Dahmer"'''

심플한 팝곡에 이렇게 무서운 범죄자가 나오는것도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12살 아이들이 가사의 다머를 검색하다가 정신적 대미지를 입는 해프닝을 다 포함해서 완전 A급 충격이다.
케이티 페리의 다크 호스(Dark Horse)라는 곡에서도 피쳐링을 맡은 Juicy J의 가사 중 다머 얘기가 나온다.

어, 그녀는 짐승이야, 카르마라 불려. 네 심장을 꺼내먹을거야, 제프리 다머처럼

Uh, She's a beast. I call her Karma. She'll eat your heart out, like Jeffrey Dahmer.

역시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를 라임 맞추는데 썼다.
사우스 파크의 제작자들이 만든 뮤지컬 The Book of Mormon의 곡 'Spooky Mormon Hell Dream'에서 제프리 다머가 지옥에서 등장한다.
살인마에 열광하는 여성 팬들이 제프리 다머에게도 당연히 있다. 구글에 제프리 다머의 이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handsome이니, 귀엽다느니(cute) 같은 단어가 붙을 정도. 체포되고 첫 재판을 받을 무렵인 1990년대의 한창 마른 모습[26](이 문서의 사진.)은 안경을 벗으면 외모가 잘생겼다, 모델같다는 평을 받으며 일명 True crime community라고 불리는 그 쪽 바닥에서는 인기가 많다. 그 사례로, 그가 체포되고 재판장에 첫 모습을 드러내자 외모에 반한 여성 팬이 뉴스에 출연해 당당하게 그의 귀여운 모습에 반했다고 인터뷰한 적도 있다. 그나마 제프리 다머가 게이인데다 다소 일찍 죽어 리처드 라미레즈테드 번디처럼 팬과 결혼하는 사례는 없었다.
애니메이션 해즈빈 호텔에 '제프리 씨의 인육 요리 프로그램'이라는 TV 프로가 존재하는데 사진 속 악마는 빼도박도 못할 제프리 다머 본인.

7.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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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다머(My Friend Dahmer) - 더프 백더프 글,그림, 강수적 역, 미메시스
미메시스에서 나온 이 만화는 다머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만화가 더프 백더프의 다머에 대한 회고록이다.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제프리 다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저서, 각종 자료들을 분석해 만든 이 만화는 제프리 다머를 가장 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책들 중 하나이다. 나무위키에 기재된 많은 설명이 이 책에 기반하였다.
책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영화가 2017년에 개봉하였다.

[1] 그의 아버지는 후일 아들의 성장과정을 담은 A Father's Story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자신의 교육 방법에 대한 변명 같은 게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키웠는지 서술해놨다. 그래도 살인자가 되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애가 짤막짤막하게 표현되는데 그 짤막한 표현이 슬프다.[2] 1936년생으로 아들이 죽은 지 한참 뒤인 현재도 살아있으며, 어느덧 80대의 노인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아들 관련한 문제로 출연하였다.[3] 그의 아버지는 래리 킹과의 인터뷰에서, 내성적인 아이의 마음 안에는 (악한)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을 수 있으며, 부모가 깊은 대화를 통해 내성적인 아이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 계속해서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4] 남동생의 이름, 데이비드는 제프리가 붙인 이름이다. 내성적인 제프리가 뭔가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싶던 그의 아버지의 결정이였다.[5] 사실 제프리의 학교 친구들도 그가 단순한 괴짜가 아니라 '''섬뜩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잘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다머와 평범한 대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었다고 한다.[6] 이른 아침부터 취해있는 경우가 많았고 10분 만에 맥주 6캔을 비울 정도였다.[7] 이유는 술을 마시는 걸 가족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음주를 남에게 숨기는 것은 알콜중독자들의 흔한 행태이다.[8] 그는 로드킬 동물을 담을 쓰레기봉투를 겉옷주머니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9] 그가 살아있는 동물들을 잡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다머는 살아있는 개를 죽일 생각으로 유인해본 적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당시 그는 그 개를 그냥 돌려보냈다고 했다.[10] 라이오넬은 아내 조이스의 요청으로 접근금지 처분을 받아 집을 나간 상태였다.[11] 그의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간지 며칠이 안돼서였다.[12] 두 번째 희생자인 스티븐 투오미는 첫 희생자 스티븐 힉스와 몹시 비슷한 분위기로, 역시 마른 체구에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가진 남성이었다. 이 이후로 일관적으로(마지막 희생자를 제외하고는) 유색인종이 희생자가 된 것으로 보아 범행의 용이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13] 다머는 후에 "나는 차를 몰고 한없이 달리고 싶었다.'라고 회고했다. 힉스는 게이가 아니었고 둘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까지 퍼져있는 잘못된 이야기이다. 둘은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후에 다머는 힉스를 살해한 후, 그의 시신을 애무하며 자위행위를 했다.[14] 1970년대 히피 문화에서는 조금도 이례적이지 않은 풍경이었다.[15] 이 날은 힉스 아버지의 생신이어서 가족들과의 저녁식사 약속이 있었다.[16] 미 육군의 계약 기간은 2년부터 시작해 연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입대도 쉽고, 중범법자나 본인이 원하는게 아닌한 계약기간 역시 지켜 준다.[17] 피해자 중에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인 사람들도 있었다. 주목할 점은 그가 노린 범행 대상 18명 중 이름과 용모에서 유럽계 백인임을 알 수 있는 피해자가 단 3명이고(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17번째 희생자) 나머지는 전부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계였다는 점이다. 다만 인종차별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취향으로 보인다. 또는 신사솜폰의 사례처럼 백인이 아닌 인종은 실종이 되더라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렸을 수도 있다.[18] 이 소년은 당시 제프리 다머가 투여한 약물에 의해 정상적인 행동이 불가능했다.[19]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살아남았다. 이후 그는 제프리 다머를 잡은 영웅으로 불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20년 뒤에 노숙인을 다리에서 던져 죽였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20] 당시 제프리 다머 옆에 있던 살인죄로 복역중이던 백인 재소자 제시 앤더슨(1957년 5월 3일생)도 같이 살해당했는데(앤더슨은 병원으로 이송, 이틀 뒤 1994년 11월 30일 사망한다.) 이 자는 1992년 4월 21일 아내를 흉기로 찔러서 살해한 뒤 흑인 강도가 저질렀다고 뒤집어 씌웠다가 발각되어 제프리 다머처럼 무기징역을 받은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인종 문제로 살해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인데, 확실치는 않다.[21] 살해한 재소자 크리스토퍼 스칼버의 증언인데다 그가 정신분열증 환자였기 때문에 100퍼센트 신뢰하기엔 무리가 있다. 스칼버는 이후 제프리 다머와 제시 앤더슨을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서 두 건의 무기징역을 추가로 선고받고 현재도 복역 중이다.[22] 미국 교도소 내에서 미성년자 강간범의 지위는 최하 중의 최하이다. 같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극도로 경멸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들은 정작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는 위축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조직 폭력배나 강도범 등 폭력 성향이 있는 재소자들에게는 마약사범과 더불어 가장 만만한 먹잇감이다. 이런 범죄자를 괴롭히는 강력 범죄자들의 주장으로는 자기는 어린이를 학대한 범죄자를 응징해서 정의를 구현하는 거라고 그러는 거라고 말하지만 교도소 내에 존재하는 '존중'문화 때문인 것도 있다. 다큐멘터리 '갱스터 파라다이스'를 보면 수많은 교도소 중에서도 공통된 문화가 '존중'인데 누군가를 방해 하지도, 방해 받지도 않는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존중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를 공격하여 자신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보여 줘야하고,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약자인 아동 성범죄자나 마약사범을 공격하는 것이다. 다만, 미국의 범죄자 유형을 보면 아동 성범죄자보다는 마약사범의 숫자가 월등히 많은데 연약하고 숫자가 널려 노리기 쉬운 마약사범들을 내버려두고 아동 성범죄자가 더욱 많은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보면 아동 성범죄자를 더 악질로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은 사실인걸로 보인다.[23] 그의 장례식 추도사는 교도소에서 그를 세례 준 로이 랫클리프 목사가 맡았다.[24] 덤 앤 더머할때 그 더머다.[25]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단어[26] 1991년 쯤에 다머가 다니던 초콜릿 공장에서 무단 결근으로 인해 해고되었고 체포될 때까지 6년 동안 직장이 없어 아버지에게 돈을 받는 것으로 의존하며 살았는데 지갑 사정도 넉넉하지 않고 당시에 정신 상태가 한창 맛이 가버려서 피해자들의 인육이나 과자 외에는 음식을 잘 먹지도 않아 살이 빠져버린 것. 당연히 식사를 규칙적으로 주는 교도소에 들어가자 원래 몸으로 돌아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