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유카리(정치인)

 

'''일본 중의원 (오사카 11구)'''
'''제46대'''
이토 노부히사

'''제47대
사토 유카리'''

'''제48대'''
히라노 히로후미



'''일본국 총무부대신'''
}}}}}}
'''아베 내각'''
'''제30-31대'''
오쿠노 신스케
사카이 마나부

'''제32대
스즈키 준지
사토 유카리'''

'''제33대'''
하세가와 가쿠
데라다 미노루
'''((とう ゆかり
사토 유카리
'''
'''출생'''
1961년 8월 19일 (63세)
도쿄도 세타가야구
'''국적'''
[image] 일본국
'''학력'''
후지세이신 여자고등학교 졸업
조치대학 외국어학부 프랑스어학과
컬럼비아 대학교 정치학부 졸업
컬럼비아 대학교 국제공공정책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과정 수료
뉴욕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과정 수료
'''직업'''
정치인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중)
'''1''' (참)
'''의원 대수'''
44, 47, 48 (중)
22 (참)
'''지역구'''
도카이 권역 비례대표 → 오사카 11구 → 긴키 권역 비례대표 (중)
비례대표 (참)
'''현직'''
중의원
'''약력'''
닛코 솔로몬 스위스 버니 증권 근무
JP모간 증권 근무
크레딧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 증권 경제조사부장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
도카이 권역 비례대표 중의원
일본 참의원 (비례대표)
오사카부 제11구 중의원
긴키 권역 비례대표 중의원
1. 개요
2. 생애
2.1. 정치 활동
3. 기타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2. 생애


1961년도쿄도 세타가야구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이후에도 계속 세타가야구에서 살았다. 시즈오카현에 위치한 후지세이신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조치대학 외국어학부 프랑스어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로 편입해 정치학부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공공정책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뉴욕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미국 유학 이후에는 닛코 솔로몬 스위스 버니 증권, JP모간 증권, 크레딧 스위스 퍼스트 보스턴 증권 등 여러 외국계 증권사에서 이코노미스트로 근무했다. 이 당시 그녀는 각종 신문과 경제지에 기고나 인터뷰를 받았으며, 경제에 대한 강연을 개최하거나 텔레비전 경제 프로그램 등에도 출연하는 등 꽤 잘 나가는 증권계 인사였다.

2.1. 정치 활동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이른바 ‘우정 해산’으로 치뤄진 2005년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자민당의 후보자 공모에 응모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그런데 정계 입문 전 그녀는 고이즈미의 우정 민영화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 기고를 통해 낙제점을 준 적이 있다(...).
어쨌든 이 때 그녀는 자민당으로부터 당시 고이즈미의 우정 민영화에 반대한 인물들 중 한 명인 노다 세이코[1]의 지역구인 기후현 제1구에 이른바 ‘자객 공천’ 성격으로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토 유카리는 '''출마 지역구인 기후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것이다.'''[2] 한마디로 완전히 낙하산 후보인 셈. 본인도 이 점을 알고 있었는지 공천을 받은 뒤 '''‘2월에 관광으로 라이트 업 시기에 시라카와고[3]에 갔을 때, 기후현에 몇 번이든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또 오게 되다니!’라는 기분이라고 말하며''', 없는 연고를 최대한 만들어냈다(...). 그리고 선거 유세 기간에는 아예 '''“기후에 시집 가는 기분으로 왔습니다.”'''(...)라며 기후역에서 연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거 결과 무소속으로 출마한 노다 세이코가 당선되고, 사토는 2위를 기록했지만 석패율 구제로 당선되어 어쨌든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다가 노다 세이코가 자민당으로 복당한 이후인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자신의 출신지인 세타가야구가 속한 도쿄도 제5구로 지역구를 바꿔 출마했다. 하지만 이 때는 전국적으로 민주당 돌풍이 불고 있던 시기라 결국 민주당의 데즈카 요시오에 밀려 낙선했다.
중의원 낙선 1년 후인 2010년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자민당 비례대표로 출마해 당선되어 참의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참의원 임기 도중 뜬금 없이 중도 사직한 후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는데, 45회 총선거 때 출마한 도쿄도 제5구가 아닌 이번에도 연고가 전혀 없는 오사카부 제11구에 출마한다. 하지만 현역 의원인 유신당 이토 노부히사와 민주당 히라노 히로후미를 꺾고 당선된다. 민주당, 유신당 후보와의 3파전 구도에서 일본 공산당 후보가 10% 가까이 득표하면서 야권 표가 분산된 것이 호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기후현 → 도쿄 → 오사카를 거치며 중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역구 철새(...)가 되었다.[4] 그나마 도쿄는 자신의 출신지이지만, 기후현과 오사카는 해당 지역에 아무런 연고도 없어 사실상 자민당 당적만으로 당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지역구인 오사카부 제11구에 출마하나 이번에는 민주당 출신 무소속 후보인 히라노 히로후미에 밀려 2위를 기록해 석패율 구제로 당선되었다. 당초 출구조사 결과 1위로 예측되었으나 뒤집힌 것이다.

3. 기타


  • 아버지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재학 중 학생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참전한 후 전역해 일본정공에서 근무했다. 어머니 사토 미도리는 탐정이었으며, 아버지가 회사 퇴직 후 어머니의 탐정 일을 도왔다고 한다.#
  • 금수저다. 부모님과 형제자매 모두 현재 사망한 상태라 자신이 가족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재산 상속으로 현재 도쿄 도내에 다수의 주택과 택지, 산림 등의 부동산과 주식 등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주식의 경우 본인은 자산 운용엔 관심이 없다며 상속받은 주식 이외에는 주식 투자를 하고 있지 않다.
  • 2006년 동료 의원인 에사키 요이치로[5]와의 불륜 논란이 터졌는데, 이것 때문에 에사키는 이혼했다. 물론 사토는 극구 부인하고 있다.
  • 돌싱이다. 과거 TV 아사히 앵커와 결혼했으나 이혼했으며, 슬하의 자식도 없다. 다만 재혼할 생각은 있는지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결혼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 나이에 비해 꽤 동안이다.
[1] 여담으로 노다 세이코도 사토 유카리가 미국 유학을 가기 전에 다녔던 조치대학 외국어학부를 졸업했다. 사실상 조치대학 동문들 끼리의 싸움인 셈.[2] 물론 노다 세이코도 기후현에 연고는 없지만, 정치 활동은 현의회 의원 시절 때부터 기후현에서 시작했다.[3] 그런데 시라카와고는 사토가 출마한 기후현 제1구가 아닌 기후현 제4구에 속한다(...).[4] 한국으로 예를 들면, 충청도 → 서울 → 부산 순으로 지역구를 옮긴 셈이다.[5] 에사키 데쓰마의 이복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