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6세 구스타프

 



'''Carl XVI Gustaf'''
'''이름'''
칼 구스타프 폴케 후베르투스
(Carl Gustaf Folke Hubertus)
'''출생'''
1946년 4월 30일 (78세)
스웨덴 하가 궁
'''신장'''
181cm
'''재위'''
스웨덴 국왕
1973년 9월 15일 ~ 현재
'''배우자'''
실비아 좀멀라트 (1976년 결혼)
'''자녀'''
빅토리아, 칼 필립, 마들렌
'''아버지'''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어머니'''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지빌라
'''형제'''
마르가레타, 비르지타, 데지레, 크리스티나
'''서명'''
[image]
1. 소개
2. 칭호
3. 어린시절
4. 결혼
5. 국왕으로서의 삶
5.1. 스카우트
6. 가족관계
6.1. 조상
6.2. 자녀
7. 기타
7.1. 훈장
7.2. 상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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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국왕. 1946년 4월 30일생. 풀네임은 칼 구스타프 폴케 후베르투스(Carl Gustaf Folke Hubertus)이다.
스웨덴 북쪽에 있는 하가 궁에서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지빌라의 사이에서 5명의 아이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가 비행기 사고로 구스타프가 9개월이 되었을때 죽어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다.
어머니 지빌라 왕자비는 후에 시누이가 되는 잉리드 공주[1]의 주선으로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와 만났다. 근데 둘이 결혼할 당시 독일나치가 대두되었고, 지빌라 왕자비의 아버지이자 칼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카를 에두아르트[2]T-4 프로그램에 가담할 정도로 나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이었다.[3] 이때문에 안티 나치였던 지빌라 왕자비는 나치 지지자였던 아버지때문에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 둘의 결혼은 나치 행사로 치루어졌기에 스웨덴 왕족들 모두 둘의 결혼식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근데 지빌라 왕세자비가 결혼한 후 딸만 내리 넷을 낳는 바람에 왕위계승자를 낳아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막내인 칼 구스타프가 태어났지만,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아버지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다섯아이를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 지빌라 왕자비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던 사람은 시아버지이자 국왕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였다고.
'''심지어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손자 칼 16세 구스타프가 태어났을 때도 왕세자였다!!!!'''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증조할아버지가 살아있었기 때문. 찰스 왕세자2020년 현재 '''75살'''이고, 구스타브 6세 아돌프가 즉위할 때 나이가 68살이니까 찰스와 거의 다름없다.
할란드 공작 베르틸은 릴리안 데이비스라는 웨일즈 출신의 평민 이혼녀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베르틸의 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고령이었고, 맏형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손은 아들이 없었으며 둘째형 시그바르드와 남동생 칼 요한은 평민과 결혼하면서 왕자 칭호를 박탈당하는 바람에 릴리안과 결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지빌라 왕세손비가 칼 구스타프를 낳으면서 왕위 계승자에서 좀 멀어졌으나 형의 사망으로 베르틸 왕자가 1살밖에 안된 어린 칼 구스타프에 이어 다시 스웨덴의 제 3왕위 계승자가 되어버렸다.
또한 만약에 노령의 국왕과 왕세자가 연달아 사망할 경우, 어린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올라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섭정이 필요하고 결국 남아있던 스웨덴 가족 중 섭정이 될만한 인물은 베르틸밖에 없었다. 결국 베르틸은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했고 이런 삶은 받아들였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안과 헤어진 건 아니고 결혼하지 않은 대신 동거를 시작했으며, 릴리안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례는 스웨덴 왕실에서 베르틸과 릴리안 이전에 이미 있었는데, 베르틸의 숙부였던 쇠데르만란드 공작 빌헬름은 아내인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4]이혼한 뒤[5], 평민 이혼녀인 잔느 드 트람코트와 사랑에 빠졌다. 허나 구스타프 5세는 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빌헬름은 결혼하지 않고 그녀와 동거했다. 또한 아버지가 없는 칼 구스타프의 아버지 역할을 했었다. 정작 칼 구스타프의 어머니 지빌라 왕자비는 아들에게 정을 안줬다.

2. 칭호


[image]
[image]
국왕 즉위 이후 사용한 문장
1950년부터 그의 즉위까지 얌트란드 공작으로서의 문장
  • 스웨덴의 칼 구스타프 왕자(1946년 4월 30일 – 1946년 6월 7일)
  • 얀트란트 공작 칼 구스타프 스웨덴 왕자(1946년 6월 7일 – 1950년 10월 29일)
  • 스웨덴 황태자 얀트란트 공작(1950년 10월 29일 – 1973년 9월 15일)
  • 스웨덴 국왕 폐하(1973년 9월 15일 – 현재)
칼 16세 구스타프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인, 고트인과 기트인인, 벤트인의 신의 은총에 의한 왕"(영어: By the Grace of God King of the Swedes, the Goths/Geats and the Wends, 스웨덴어: med Guds Nåde Sveriges, Götes och Wendes Konung, 라틴어: Dei Gratia Suecorum, Gothorum et Vandalorum Rex)라는 칭호을 사용한 마지막 왕이다. 이 전통적인 호칭은 구스타프 바사에 의해 1544년 세습 군주제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어 왔다. 칼 16세 구스타프는 대신 평이하고 소박한 칭호인 "스웨덴의 왕"(스웨덴어: Sveriges Konung)을 선택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종식시켰다.

3. 어린시절


그는 어려서는 왕궁에서 개인적으로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후 기숙학교로 보내졌으며, 1966년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칼 구스타프는 스웨덴 육군과 스웨덴 왕립 해군 및 스웨덴 공군에서 2년 반의 교육을 마쳤다. 이후 1966년부터 1967년 겨울 동안 세계 일주 항해에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68년에 스웨덴 육군과 왕립해군, 공군에서 모두 장교로 임명되어 이후 육군과 공군에선 대장을, 해군에선 중위 직위에도 오르기도 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는 또한 웁살라 대학에서 역사 , 사회학 , 정치학 , 세법 , 경제학을 전공 했고 나중에 스톡홀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여담으로 구스타프는 스웨덴 농업과학대학, 왕립기술원, 스톡홀름 경제대학원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핀란드 에보 아카데미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
구스타프는 차법원 제도, 사회 조직과 제도, 노동조합, 고용주 협회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따랐으며 또한 그는 의회와 정부, 외교부의 일을 면밀히 연구했다. 구스타프 왕세자는 또한 UN 주재 스웨덴 사절단과 스웨덴 국제 개발 협력기구 (SIDA)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런던에 있는 은행과 그곳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 그리고 프랑스의 스웨덴 상공 회의소에서 근무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있는 알파라발 공장에서 일했다. 1970년,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 스웨덴 대표단을 이끌고 스웨덴을 대표했다. 추후에 서술하겠지만 젊은 시절부터 구스타프는 스웨덴 스카우트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4.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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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인 실비아 왕비와 함께 찍은 사진
'''1972년 올림픽이 열리는 뮌헨에 갔다가 3살 연상의 독일/브라질 여성 실비아 좀멀라트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으나 당시 스웨덴 왕위 계승법은 여자는 왕이 될 수 없고, 남자는 왕족이나 왕족에 견줄만큼 신분이 높은 여성이 아닌 다른 여성과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을 박탈하는 엄격한 귀천상혼제가 적용되었었다. 이는 여성 왕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로 인하여 그 때 스웨덴에는 칼 구스타프와 그의 삼촌인 할란드 공작 베르틸 이외에는 모두 왕자 칭호를 박탈당하거나 사망하여서 왕위계승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칼 구스타프의 친할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당연히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방해했는데, 칼 구스타프는 실비아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구스과프 6세가 승하하자 칼 16세 구스타프로 즉위하면서 계승법을 바꿨으며[6] 결국 의회의 승인을 얻어 1976년 6월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은 1976년 6월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올로프 순드비 웁살라 대주교가 거행하였다. 그렇지만 사실 결혼식은 전날 저녁 로얄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에 의해 선행되었는데, 이 공연에서는 스웨덴의 유명한 팝그룹 아바가 스웨덴의 미래 왕비를 기리기 위해 "댄싱퀸"을 공연하였다.
운 좋게 친할아버지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왕위계승 서열 1위의 왕세손이었던 칼 구스타프는 평민과 결혼했다가 귀천상혼에 걸려서 계승권을 잃을 판이었다. 덕분에 스웨덴에서 군주의 역할이 엄청 감소했다. 이를테면 스웨덴에서는 1975년부터 총리(국회에서 선출)를 국회의장이 최종적으로 임명·면직하고, 총리가 직접 장관을 임명·면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바로 법률로 성립되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국왕이 총리·장관을 임명·면직하고, 국회에서 가결된 법안을 승인하는 등 상징적인 절차를 밟았다. 물론 실제로는 이미 결정된 걸 국왕이 상징적으로 추인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스웨덴 국왕은 이런 형식적인 권한도 빼앗겼다. 물론 신임장(특정인을 외교사절으로 파견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에 사인을 하는 등 국가원수로서 몇 가지 역할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다른 입헌군주국의 군주들에 비하면 역할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다음엔 부모같이 길러준 숙부 커플을 정식으로 결혼시켰고, 릴리안은 '할란드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어 정식으로 스웨덴 왕실에 입성했다. [7] 이후 구스타프와 그의 가족은 1980년에 스톡홀름 서쪽의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와 부인은 여전히 스톡홀름 왕궁에 사무소를 유지해왔다.

5. 국왕으로서의 삶


1973년 9월 15일 칼 구스타프는 할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가 사망하자 스웨덴 왕이 되었다. 9월 19일, 그는 임시 각료 회의에서 요구되는 왕권 보장(스웨덴어: Konungaförsäkran)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연설을 하는 왕궁의 전당에서 의회, 외교단, 법원 등에 모습을 드러냈다. 국무회의와 홀에서의 기념식은 모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식이 끝난 후, 그는 발코니에 나타나 사람들이 모인 것을 인정했다. 국무회의에서 국왕은 자신의 이름이 칼 16세 구스타프일 것이며 직함은 스웨덴 왕일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국왕의 표어로 '''"스웨덴을 위해, 시대와 함께"'''[8]를 채택했다.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809년부터 국왕의 권력를 대체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비록 왕은 서류상으로는 거의 독재자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의회의 영향력은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오르고 1974년에 만든 새 정부수립기구는 1975년 1월 1일에 처음 발효되었고 공식적으로 새 국왕의 대부분의 공식 정치력을 박탈하여 1917년 의회정부를 수립한 이래의 새로운 관행을 규정하였다.
새로운 정부는 왕이 주로 대표적이고 의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줄였다. 이전에, 왕이 총리를 임명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항상 의회에서 다수당이나 연립여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되고 왕이 서명하는것이었다. 칼 구스타프가 만든 새로운 정부 수립기구채택 이후 총리 후보자는 의회 의장에 의해 지명되고, 그 후보가 의회에 의해 선출되면 의장이 서명하는것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들은 법이 되기 위해 왕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그는 스웨덴의 국가원수로서 해외를 국빈 방문하거나 국빈대접을 하고, 4년마다 있을 정부 교체 기간(총선기간) 동안 열리는 특별위원회, 총리 및 내각과 정기적인 정보위원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맡고 있다. 외무부 회의를 필두로 스웨덴 주재 외국 대사들의 서신을 받고 스웨덴의 서신을 외국에 서명한다. 또한 그는 이런 유형의 국가 원수로서, 중립을 지키므로 그는 스웨덴의 선거에서도 자발적으로 투표에 기권한다.
또한 구스타프는 스웨덴의 육군, 해군, 공군의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73년 즉위 당시 군대의 총사령관, 즉 최고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군사 전문가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 그의 초기 계급인 육군과 공군에서의 장군과 해군에서의 중위에서 당연직인 장군과 제독이 되었다. 1975년 1월 1일 발효된 1974년 정부수립기구의 규정에 따라, 왕은 더 이상 헌법상 의무적인 군대의 최고 사령관을 맡지 않지만, 그는 더 이상 군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장군 계급은 가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칼 16세 구스타프는 아마도 매년 노벨상의 발표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의 손에서 노벨상을 받은 첫 번째 수상자는 일본의 에자키 레오나였다.

5.1. 스카우트


칼 구스타프는 놀랍게도 세계 스카우트 연맹의 명예회장으로 스웨덴과 해외에서 스카우트 활동에 자주 참여한다. 그는 정기적으로 세계 잼버리를 방문하는데, 예를 들어 스웨덴이 주최하는 태국의 새터십에서 열린 2002년 세계 잼버리, 영국 하이랜드 파크에서 열린 2007년 세계 스카우트 100주년 기념식 등이 있다. 또한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열린 1981년 내셔널 스카우트 잼버리에 참석하여 1982년 월드 스카우트 위원회가 월드 스카우팅에 대한 예외적인 서비스로 수여한 세계 스카우트 운동의 유일한 공로인 브론즈 울프상을 수상하였다. 제22회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에도 참석했다. 2011년 8월 6일 폐막식에서 4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을 했다. 밴드 유럽도 그를 위해 "The Final Countdown"을 불렀다. 칼 구스타프 왕은 웨스트 버지니아에 있는 2013년 미국 잼버리의 보이 스카우트에 출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압둘라 국왕과 함께 칼 구스타프 국왕은 평화의 전령 프로그램을 지지해 왔다.

6. 가족관계



6.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칼 16세 구스타프
(Carl XVI Gustaf)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Prince Gustaf Adolf, Duke of Västerbotten)
구스타프 6세 아돌프
(Gustaf VI Adolf)
구스타프 5세
(Gustaf V)
바덴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Baden)[9]
코넛의 공녀 마거릿
(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코넛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10]
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타 공주
(Princess Louise Margaret of Prussia)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녀 지빌라
(Princess Sibylla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Charles Edwar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11]
발데크피르몬트의 공녀 헬레나
(Princess Helena of Waldeck and Pyrmont)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공녀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Princess Victoria Adelai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Friedrich Ferdinand,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공녀 카롤리네 마틸데
(Princess Karoline Mathil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6.2. 자녀


[image]
실비아와의 사이에서 장녀 빅토리아 잉리드 알리스 데지레 왕세녀(1977년생), 외아들 칼 필립 왕자(1979년생), 차녀 마델라이네 공주(1982년생)를 낳아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2010년에 결혼한 왕세녀가 2012년에 에스텔 공주, 2016년에 오스카 왕자를 낳았고, 2013년에 결혼한 마델라이네 공주가 2014년에 레오노르 공주, 2015년에 니콜라스 왕자, 2018년에 아드리엔 공주를 낳았다. 2015년에 결혼한 칼 필립 왕자는 2016년에 알렉산더 왕자, 2017년에 가브리엘 왕자를 낳아 현재 총 7명의 손주가 있다.
1녀
스웨덴의 왕세녀, 베스테르예틀란드 여공작
빅토리아 잉리드 알리스 데지레 (Victoria Ingrid Alice Désirée) 1977년 7월 14일 ~ 현재
결혼
이름
베스테르예틀란드 공작
올로프 다니엘 베스틀링 (Olof Daniel Westling) 1973년 9월 15일 ~ 현재
결혼
2010년 6월 19일
자녀
1녀
이름
외스테르예틀란드 여공작
에스텔 실비아 에바 메리 (Estelle Silvia Ewa Mary) 2012년 2월 23일 ~ 현재
1남
이름
스코네 공작
오스카 칼 올로프 (Oscar Carl Olof) 2016년 3월 2일 ~ 현재
1남
베름란드 공작
칼 필립 에드먼드 베르틸 (Carl Philip Edmund Bertil) 1979년 5월 13일 ~ 현재
결혼
이름
베름란드 공작부인
소피아 크리스티나 헬크비스트 (Sofia Kristina Hellqvist) 1984년 12월 6일 ~ 현재
결혼
2015년 6월 13일
자녀
1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알렉산더 에릭 후베르투스 베르틸 (Alexander Erik Hurbertus Bertil) 2016년 4월 19일 ~ 현재
2남
달라르나 공작
가브리엘 칼 발터 (Gabriel Carl Walther) 2017년 8월 31일 ~ 현재
2녀
헬싱란드와 예스트리클란드 여공작
마델라이네 테레제 아멜리에 요세피네 (Madeleine Thérèse Amelie Josephine) 1982년 6월 10일 ~ 현재
결혼
이름
크리스토퍼 폴 오닐 (Christopher Paul O'Neill)[12] 1974년 6월 27일 ~ 현재
결혼
2013년 6월 8일
자녀
1녀
고틀란드 여공작
레오노르 릴리안 마리아 (Leonore Lilian Maria) 2014년 2월 20일 ~ 현재
1남
옹에르만란드 공작
니콜라스 파울 구스타프 (Nicolas Paul Gustaf) 2015년 6월 15일 ~ 현재
2녀
블레킹에 여공작
아드리엔 요세피네 알리스 (Adrienne Josephine Alice) 2018년 3월 9일 ~ 현재

7. 기타


1980년에 스웨덴 의회에서 장남상속법을 폐지하고 절대적 맏이계승제를 택했기 때문에 현재 장녀인 빅토리아 왕세녀가 1순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으며, 그녀의 맏이인 에스텔 공주가 2순위 왕위계승권자이다. 사실 칼 16세 구스타프 본인은 외아들 칼 필립 왕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의회가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여서 빅토리아 공주가 왕세녀로 책봉됐다. 역사적으로도 스웨덴은 군주보다 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던지라 아무리 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듯. 하지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서 칼 필립 왕자를 매우 편애했으며 정작 왕세녀 빅토리아는 홀대를 받았다.[13]
그러나 정작 이렇게 대놓고 편애를 받으며 자란 칼 필립 왕자는 한때 파티걸로 유명했던 여동생 마들레이네 공주처럼 철없이 노는 것만 즐겼다. 착하고 소탈한 성품을 지닌데다 열심히 공무를 수행하여 칭송받는 왕세녀나 비록 왕년에 철딱서니없이 굴고 왕족로서의 의무보다 파티를 더 좋아해서 가십란을 장식하는 등 말이 많았지만 약혼자와 시끄럽게 파혼한 뒤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아동단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동생 마들레이네 공주에 비해 칼 필립 왕자는 '''워낙에 존재감이 옅어서 놀아도 티가 안 났다.''' 사실 왕실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스웨덴인들조차 종종 "하나뿐인 왕자는 대체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일은 하긴 하는거냐?", "자동차만 좋아한다." 등으로만 회자할 정도니 '''무존재'''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유럽 왕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올랜도 블룸을 닮은 잘생긴 왕자"[14]라고 언급해주기는 하는데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러다 2010년부터 누드모델이자 방송인, 요가 강사 출신인 아동복지사업가 소피아 헬크비스트와 교제하기 시작하며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피아의 대외적인(?) 직업인 '아동복지사업가'는 사실상 이미지 세탁용이라는 얘기가 있다. 참고로 헬크비스트의 과거 행적이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메테-마리트 못지 않게 난잡해서 말이 많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누드모델로 일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사실상 성인방송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수위 높은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리얼리티 쇼에서 3위를 차지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때 번 돈으로 뉴욕으로 와 요가 강사로 일하고 회계 등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뉴욕에서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진 못했는지 사생활에 대해 좋지 못한 루머가 있다고. 뿐만 아니라 당장 구글에 검색만 해 봐도 누드모델 시절에 거의 전라 상태로 찍은 화보가 수두룩하다.
당연히 어머니인 실비아 왕후는 물론 여동생인 마들레이네 공주 그리고 그밖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했으나 2010년부터 동거까지 하며 열애했고, 2013년부터는 같이 공식석상에 나왔으며 2014년 6월에 약혼을 발표했다. 그리고 2015년 6월에 마침내 소피아와 결혼식을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아가 임신 소식을 발표했으며 2016년 4월에 첫아들 알렉산더 왕자를 출산했다.
칼 16세 구스타프가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하얀 데다가 탈모 때문에 실비아 왕후보다 훨씬 늙어보인다... 근데 탈모는 젊었을 때부터 있었다.
실비아 왕후와 만나기 전에 바람둥이로 아주 유명했다. 법까지 바꿔가면서 결혼하고도 난봉꾼 기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은 모양인지 1990년대 후반에는 모델 카밀라 헤넨마르크와 불륜 관계였으며, 2010년 출간된 <칼 구스타프 16세 - 군주가 되길 원치 않은 군주>라는, 구스타프 왕에 대한 소문들을 추적 및 정리한 책에 의하면 "스트립 클럽과 불법 클럽, 그리고 모피 코트 속으론 알몸인 여인네들. 여자들은 그저 식후에 커피와 함께 제공되는 디저트용이었다." "구스타프 왕은 또 세르비아 마피아 밀레 마르코비치가 스톡홀름의 국립 경찰청 아래 지하 클럽에서 베푼 파티에 친구들과 함께 참석해 벌거벗은 여성들과 섞여 자쿠지를 즐기고 짝을 맞춰 '문에 이름표가 붙여진 방들'에서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생활 도중에 부부끼리 각자 스캔들도 있었으며, 국왕 부부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함께하고 사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별거하고 있다는 것이 스웨덴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그러나 책이 나온 후에 80% 이상의 국민들이 왕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고 답변했으며, 50% 이상의 국민들이 '''왕가의 사생활을 조사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스웨덴 내에서도 분위기가 제법 험악했으며 조기 퇴위 압력도 받았으나 마침 타이밍 좋게 '''현재 스웨덴 왕족들 중 가장 평판이 좋은 왕세녀에스텔 공주를 낳으면서''' 일단 입헌군주제 폐지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미지는 작살났으며 그동안 다소 조용했던 스웨덴 왕실 이미지에도 먹칠했다. 그래도 에스텔 공주의 탄생 이후로 조금씩이나마 분위기가 나아지려는 찰나 칼 필립 왕자가 '''전직 누드모델과 결혼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이 양반에게 굴욕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상점에서 빅토리아 왕세녀 등 자기 자녀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서 수표로 지불하려고 했는데, '''수표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상점 점원이 물건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칼 16세 구스타프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꺼내들어 점원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수표 확인을 한 걸로 간주하고 겨우겨우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올 수 있었다.[15]
한국과 인연도 깊다. 1991년 강원도 고성군에서 열린 보이스카우트 세계 잼버리 참석차 비공식 방한한 적이 있으며 2009년 7월에는 스웨덴을 국빈 방문한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을 영접했다. 2012년 5월에는 답례로 국빈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영접을 받아 무궁화대훈장을 받고 여수 엑스포를 관람했다[16]. 2018년 2월, 평창 올림픽을 맞아 또 다시 방한하였는데 여자 컬링 결승전[17], 바이애슬론, 아이스하키, 남녀 크로스컨트리 같은 주요 경기를 빠짐없이 관람하며 선수들과 어울리는 등 소탈한 행보로 주목받기도 했다. # 금메달을 획득한 스웨덴 컬링 대표팀과 사진도 남겼다.#
또한 구스타프와 그의 부인2014년, 2016년, 2018년 등 하계 및 동계 올림픽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스웨덴 왕실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동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 모델인 포르쉐 911 몇 대를 소유하고 있으며, 빈티지 볼보 PV444, 페라리 456M GT, AC 코브라 및 기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그와 그의 미래의 아내를 찍은 첫 사진은 그의 포르쉐 911에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2005년 여름, 그는 노르코핑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번 사고는 심각한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벤더 벤더'로 묘사됐다. 아들 칼 필립 왕자도 그의 이런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자동차광으로 유명해서 2013년에 영암 레이싱 대회에 방문하기 위해 내한한 적도 있다. 사실 칼 필립은 그냥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드라이버이기도 해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STCC에 출전하기도 했다. 성적은 볼품없는 편.
2019년 10월 7일(현지시간) 왕실 성명을 통해 '''칼 필립 왕자의 두 아들과 딸 마들렌 공주의 세 자녀에게 스웨덴 왕족으로서 받는 직함과 금전적 혜택을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앞으로 왕족 직함을 사용하지 않고 왕가의 일원에게 주어지던 봉급을 수령할 수 있는 자격도 잃고 공식적인 왕실의 의무도 따를 필요가 없게 되지만 왕실 구성원으로서 주어지는 공작 작위는 유지된다. 다만 '이론적인 왕실 구성원'으로서 왕실 친목 모임에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발표가 왕족의 직함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스웨덴 왕실의 넓은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
딸 빅토리아 왕세녀와 아들 칼 필립 왕자처럼 난독증이 있다고 한다.
2020년 11월 27일, 아들 칼 필립과 그의 부인 소피아 헬크비스트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

7.1. 훈장


[image] 스웨덴: 구스타프 5세 왕의 90세 생일 훈장
[image]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의 85회 생일 훈장
[image] 스웨덴: 다니엘공작에게서의 빅토리아 왕세녀의 결혼 훈장
  • 외국 훈장[18]
[image] 그리스: 구세주 대십자사[19]
[image]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훈장[20]
[image] 노르웨이: 올라프 성인 훈장[21]
[image] 네덜란드:
  • 오렌지 왕가 훈장 기사 대십자사
  • 금궤 1등 훈장
[image] 독일: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 특별 등급
  • 기사단 단네브로크 훈장
  • 코끼리 목걸이를 한 기사
  • 3성 훈장
  • 바이에스터 훈장 대십자사
[image] 루마니아: 루마니아의 항성 훈장
[image] 룩셈부르크: 나소 가문의 금사자 훈장 기사 대십자사
[image] 리투아니아: 비토타스 대왕 훈장
[image] 말레이시아: 왕위 훈장
[image] 멕시코: 아즈텍 독수리 훈장
[image] 바티칸: 교황 비오 9세 훈장
[image] 브라질: 남십자 훈장
[image] 브루나이: 브루나이 왕족 훈장 기사대십자사
[image] 불가리아: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 대십자사
[image] 벨기에: 레오폴트 1세 기사단 대십자사
[image] 스페인:
  • 제1183회 황금 양털 기사단
  • 찰스 3세 훈장 깃이 달린 기사대십자사
[image] 슬로바키아: 화이트 더블 크로스 훈장
[image] 슬로베니아: 특례 훈장
[image]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훈장
[image]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 해방군 훈장
[image] 오스트리아: 봉사훈장
[image] 요르단: 후세인 빈 알리 훈장
[image] 우크라이나:
  • 자유의 여신상 회원
  • 현자 야로슬라프 왕세자 훈장 깃이 달린 대십자사
  • 공로대장, 1급
  • 제963회 가터 기사단
  • 로열 빅토리안 체인의 수령자
[image] 이집트: 나일강 훈장
[image] 일본: 국화 훈장
[image] 에스토니아: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 흰별 훈장
[image] 칠레: 공로훈장 칼라
[image] 크로아티아: 공로훈장 칼라
[image] 태국: 라자미트라브혼 훈장
[image] 포르투갈:
  • 검의 성 제임스 훈장
  • 헨리 왕자의 훈장
[image] 폴란드: 흰 독수리 훈장[22]
[image] 핀란드: 흰 장미 훈장
[image] 프랑스: 군단 훈장 대십자사
[image] 아이슬란드: 팔콘 훈장
[image]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image] 헝가리: 헝가리 공화국 공로훈장

7.2. 상


수상
  • 외국
세계 스카우트 운동 기구: 청동늑대상
[image] 일본: 일본 스카우트 협회 황금 꿩상(1980년)
[image] 필리핀: 마킹 산상
명예군직
[image] 영국 해군 명예 제독, 영국 해군 (장년: 1975년 6월 25일)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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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에 덴마크프레데리크 9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현재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 덴마크의 베네딕트 공주, 그리스의 아네-마리에 전 왕비가 잉리드의 딸들이며 칼 구스타프하고는 사촌 사이.[2]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로,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유복자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 당시 독일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3] 당시 상당수의 유럽 왕족들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나치 때문에 반나치 활동에 앞장섰다.[4]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 동생 파벨 대공(1860~1919)과 첫 부인 알렉산드라 공주(요르요스 1세의 큰딸. 1870~1891) 사이의 1남(드미트리 대공, 1891~1942) 1녀 중 장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가 귀천상혼하자 바로 윗 형인 세르게이 대공(1857~1905)이 입양하였다. 세르게이 대공의 부인이 엘리자베트 대공비이며(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언니), 드미트리 대공은 이후 펠릭스 유스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암살을 주도하였다.[5] 둘 사이에서는 아들 하나(레나트, 1909~2004)가 태어났으며, 아들은 이혼 이후 친가(스웨덴)에서 자라났고 1930년대 이후에 모자가 가끔 만났다고 한다.[6] 그래서 귀천상혼이 폐지되자마자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잃었던 친척들이 자기들의 계승권을 돌려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7] 베르틸 왕자는 1997년 84세로 세상을 떠났고, 릴리안 왕자비는 2013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8] 스웨덴의 국장이기도 하다[9] 빌헬름 1세의 손녀이다.[10] 빅토리아 여왕의 3남이다.[11] 빅토리아 여왕의 4남이다.[12] 스웨덴 국적이 아니어서 작위가 없다. 이 때문에 스웨덴 국적을 얻으면 공주의 남편으로서 작위를 받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집안 대대로 이어져온 본인의 금융업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겠다며 작위 수여를 스스로 거부했다.[13] 빅토리아 왕세녀는 저런 부모밑에서 홀대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왕세녀로서 공무에 성실하고 성격도 좋은데다 부모와 사이도 괜찮아서 대인배 취급을 받는다. 가끔 보면 위태로운 왕실을 왕세녀 가족만이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14] 다른 나라 왕자들과는 달리 칼 필립 왕자는 헤어스타일이 다소 긴 편. 그리고 수염때문인지 단정하게 보이질 않는단 말을 듣고 있다[15] <세계의 대중매체3> 212p (강준만 편저)[16] 참고로 2019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에 국빈 방문하였을 때 칼 16세 국왕은 보통 스웨덴 국왕이 패용하는 국왕 전용 훈장 대신 이 무궁화대훈장을 착용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했다고 한다.[17] 대한민국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이 나온 그 경기다.[18] 가나다 순[19] [image][20] [image][21] [image][22]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