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비 공방전
1. 개요
위나라와 오나라가 합비를 사이에 두고 겨룬 전투의 총칭이다.
2. 발단
2.1. 합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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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는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중부 차오후호(巢湖) 북쪽에 있는 성도(省都)로 예로부터 중원(中原)과 강남(江南)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노주(蘆州)라 불렀으며 합비라는 지명은 한나라 때부터 불리웠다.[1] 비슷한 이름의 하비 때문인지 서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는 서주도, 예주도 아닌 '''양주(揚州)'''의 구강군이다.합비성은 남쪽으로는 강호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여 (중략)
만총전, 만총의 상소 中
손책이 임명한 여강태수 이술이 양주자사 엄상을 공격하여 죽였을 때, 199년 여강의 매성·뇌서·진란 등이 장강과 회화 일대에서 수만 명을 모아서 일어나 군과 현은 파괴되었다.
당시 조조는 강대한 원소와 막 교전에 들어가기 시작한 참이라 형편이 좋지 않아, 당시 사도연이었던 유복이 동남쪽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겨 그를 양주자사로 파견한다.
과연 유복은 조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진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혼자 몸으로 말을 타고 가 합비의 빈 성으로 가'''' 주의 관소를 세우고, 도망치고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학식 있는 유생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둔전을 보급하고, 제방을 건축해 논에 물을 대고, 성벽과 보루를 높게 만들고, 나무와 돌을 쌓고, 풀 수천만 더미를 엮었고, 물고기 기름 수천 석을 저장하여 전쟁 시 방비 용품으로 삼아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위대한 기적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백성들은 그를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떠돌던 백성들은 강과 산을 넘어 앞다투어 그에게 귀순해 왔다. '''(유복전)'''
무주공산이 되었던 합비는 유복의 위대한 공적으로 인해 무주공산이 되기 이전보다 훨씬 발전하여 위와 오의 관계에서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형주를 제외하면 합비는 오가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거점이었고, 위나라는 합비만 잘 방비하면 오군의 침입은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합비 말고 다른 경로는 오나라 인구 밀집지역과는 멀리 떨어진 길을 통해 돌아가는 경로다. 당시 강남의 오나라에서 북쪽으로 가려면, 서주의 광릉을 거쳐가는 해안길[2] , 합비를 거쳐 수춘으로 진군하는 길, 형주 강릉에서 출발해서 양양과 완으로 가는 길, 이렇게 3개가 있었다.
당장 형주 강릉은 양주 호족연합 체제인 오나라 특성상 합비 수준의 본격적인 진군 기록이 드물다. 그래도 4차 합비공방전 당시 조공으로 광릉길과 함께 들어간 적도 있고 육손이 양양을 찔러보다가 사자가 잡혀서 공격도 못 해보고 천천히 후퇴한다든지 손권이 5만 명 가지고 강하의 문빙을 공격하다가 20일 만에 포위를 풀었는데 오히려 추격해 온 문빙에 의해 격파된다든지. 주연이 5만으로 번성을 포위하고 다른 장수들이 조중, 작피 등을 공격했는데(이것이 작피의 역이다) 한 달 후 다른 사람들이 '번성 튼튼한데 걍 오나라 애들 무시하시죠?'라고 한 것을 사마의가 이를 변방의 근심이라며 군사를 일으켜 도착하자마자 오군이 바로 후퇴한다든지[3] 이후 주연이 조중 쪽을 찔러서 수천 명 규모의 전투를 두 번 치루는 등 아예 공격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예전 이 지역에서 화하를 진동시켰던 관우의 위세엔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고 광릉을 거치는 해안길을 쓰자니 이쪽은 길 주변이 습지가 많고 측면이 노출되는 길이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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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합비가 왜 중요한가를 보면, 합비 - 거소 - 유수구를 통한 장강 진입이 가능한 곳이다. 손권의 중앙 진출(그 과거의 손책의 허창 습격)을 위해서 합비-수춘 라인을 확보해야 비수 → 회수 → 와수를 통해 초를 공략하여 진류/허창 모두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회수에 대한 부분은 앞서말한 회수 방어라인에서 나오듯, 광릉방향으로 가게되면 서주(하비)까지 노릴 수 있다. 추가로 장강이북의 오나라 군대는 여강에 군대를 주둔하여 갇혀있는 꼴이다. 그들이 수춘까지 정복하기 위해서는[5] 육안이던, 합비던 공략을 마쳐야만 한다. 위의 입장에서는 합비가 함락되는 순간 이미 회수 이남 방어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또 지도에서 나오듯이 회수 서쪽과 강하 북쪽은 산맥으로 둘러쳐 있다, 즉 회수 일대는 천혜의 방어선인 것이다.
결국 호족연합체인 오나라 입장에서 양주 호족의 맹주인 손권이 이들의 힘을 집결해서 가장 합리적으로 쓸 만한 정상적 진군 경로가 합비와 수춘을 거치는 길뿐이었다는 것. 합비를 뚫으면 중원에서 화복으로 갈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지고,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과는 가까운 위치이면서 위나라의 수도와는 멀리 떨어진 위나라 변방이라 상대적으로 오나라 측의 보급이 수월했고 호족들 또한 자기들 본거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다른 침공로보다는 호응이 컸다. 거기에 합비 - 수춘 침공을 성공한다면 수춘 바로 앞의 서주, 예주까지도 공략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루트였다. 그외 합비-회수 방어선의 중요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형주 공방전#s-6.3.2 참고
즉 오나라 입장에선 사실상 선택지가 하나뿐이면서도 '''성공한다면''' 최선의 선택지인데 '''오나라 멸망 때까지 성공한 적이 '전무'했다는 게 문제'''.
3. 전개
3.1. 1차 합비 전투(208년 ~ 209년)
208년 적벽대전으로 조조가 손유연합에 대패함으로써 천하를 움켜쥘 듯 보였던 그 기세도 한풀 꺾인다. 이 틈을 타 손권은 세력 확대를 위해 주유를 남군성으로 보내 형주를 차지할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장소는 구강군의 당도현(當塗縣)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기 위해 출발하나 이는 실패로 끝난다.
당시 합비 공격은 손권 자신이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나온 친정이었다. 위나라 군은 거의 대부분이 남쪽 지방의 역병 때문에 제대로 힘조차 못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허나 손권은 한 달이 넘도록[6] 맹공을 퍼부었으며 비까지 내려 성이 무너질 상황이었지만 유복전에 따르면 유복 사후임에도 그의 인망으로 모인 백성들이 자진해서 미리 유복이 준비했단 거적으로 성벽을 덮거나 물고기 기름을 태워 성 밖을 감시하는 걸 돕는 등 민초들이 대대적으로 나서서 치열하게 저항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 공방전에서 조조가 보낸 원군은 고작 장희#s-2와 그가 이끄는 기병 천 명뿐이었지만 장제#s-2는 의도적으로 '보병과 기병 혼합된 4만 명이 벌써 도착해가니 찾아와라'라는 거짓명령문을 보내 의도적으로 손권군에 흘리게 만들었고 여기에 합비로 세 조의 사자를 보내 2조가 잡히자 손권이 퇴각하게 된다. 장제의 의도대로 손권은 이 거짓 정보에 그대로 낚여 당황하여 그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지 않고 없이 퇴각하였다 10만 명이 4만 명이 온다고 하니 급히 퇴각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퇴각시킨 건 장제의 꾀였지만 그 꾀를 부릴 때까지 버텨준 합비 군민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며 결국 이는 이미 죽은 유복의 준비성과 인망이 손권을 패퇴시킨 셈으로 합비의 백성들은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유복을 더욱 그리워했다고 한다.
양주의 관원과 백성들은 더욱 유복을 추모하였고, 동안우(董安宇)[7][8] 가 진양(晋陽)을 지켰을지라도 유복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복전)'''
3.2. 삼국의 정세
이 당시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손권과 유비는 힘을 합쳐 형주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조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형주 남쪽에 4군과 강릉을 빼앗긴 것이 당시의 상황. 자세한 것은 형주 공방전#s-3을 참조.
211년 조조는 종요에게 명을 내려 한중의 장로를 공략하라 말한다. 이에 마초는 불안감을 느끼고 관중의 군벌들을 규합, 조조에게 대항한다.
불안하기로는 익주의 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송이 유비를 불러 견제할 계획을 말하자 장송을 사신으로 보내고, 유비는 이에 촉으로 들어와 211년부터 212년까지는 장로를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민심을 얻기 위해 인심을 후하게 베풀었다. '''(선주전)'''
마초의 봉기를 물리친 조조는 212년[9] 위공(魏公)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권위를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이 해, 장송의 내통 혐의가 드러나 처형당하자 유비는 본격적으로 유장과 전쟁을 벌인다. 213년 방통이 전사하자 제갈량, 조운, 장비가 추가로 파견되었고 다음 해인 214년 갈 곳을 잃은 마초까지 유비에게 합류하여 위용을 갖추자 유장은 마침내 항복한다. 유비가 서천을 점령한 것이다.
213년 조조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인지 다시 한번 군사를 이끌고 유수를 공격해 손권과 대치하는데, 손권은 편지를 보내 조조에게 돌아갈 것을 권하고 조조는 "아들을 낳으려면 응당 손중모 같아야지 유경승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장강 북쪽 해안의 군과 현을 손권에게 탈취당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내지로 이주하도록 명령했다. 백성들은 서로 놀랐으며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10여만 호가 모두 장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주했다. '''(오주전)'''
이후 합비 남쪽으론 오직 환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주광이 지키고 있는 환성을 손쉽게 점령한 손권은 그해인 214년 유비가 서천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빌려준 땅을 돌려받기 위해 제갈근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제갈근과 대면한 유비는 '''"나는 지금 양주를 취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양주를 평정한 후에 곧바로 형주를 다 상여하겠습니다."'''(자치통감)라고 말하므로 인해 손권은 여몽을 보내 장사, 영릉, 계양을 빼앗자 유비는 몸소 5만 대군을 이끌고 공안으로 내려가고, 관우를 익양으로 파견하여 손오동맹에 긴장감이 드높아지며 익양대치가 발생한다.
그런데 215년, 조조가 마침내 장로의 항복을 받고 한중을 손에 넣게 된다. 위협을 느낀 유비와 손권은 결국 상수를 기점으로 형주를 분할한다. 단 여기서 조조는 사마의와 유엽이 이대로 유비가 있는 촉을 밀어야 한다고 간곡히 제안했음에도 말을 듣지 않고 하후연과 장합에게 한중을 맡기고 자신은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철수했다.
3.3. 2차 합비 전투(215년)
3.3.1. 개요
유비와 합의를 맺고 육구로 돌아온 손권은 무려 10만 대군을 동원해 곧바로 합비로 군사를 움직인다. 조조와 조조의 주전력이 한중에 있는 틈에 결판을 내려는 의도였지만 결과는 결국 조조군의 동남방면 사령관 장료에게 제대로 털리고 패퇴한다.
3.3.2. 선제 기습
당시 합비를 지키고 있는 인물은 장료, 악진, 이전 그리고 조조로부터 교서를 받아 온 합비 호군 설제 등과 7000명에 불과한 병사. 이렇게 손권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장료는 설제가 가져온 교서를 뜯어본다. 그 교서의 내용은
이를 본 장수진들은 군사가 10배나 차이나는 적군을 상대로 사령관인 장료와 그 직속인 이전에게 나가 싸우라고 지시한 교서에 당황하였으며 장료는 이 교서를 '원군을 기다리지 말고, 적이 정비하기 전에 기세를 미리 꺾어놓으면 수비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나가 싸우라는 지시일 것이다.' 라고 해석하며 명령을 수행하려 했지만 이전은 숙부 이건을 죽인 게 여포군이란 것 때문에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이때까지도 사이가 최악인 편이었고 악진도 장료를 마땅찮게 봤기 때문에[11] 사령관인 장료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교서와 장료의 지시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이런 반응을 보자 장료가 분노하며
라고 이들을 비판하자 장료의 말을 듣고 뉘우친 이전이 사적 감정을 미루고성패의 기회는 이 한 판의 전투에 달렸소. 여러분들이 만약 의심한다면 나 장료 혼자서 군대를 거느리고 결판을 낼 것이오!
라 말하며 장료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장료는 800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잔치를 벌인 다음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 긴 화극을 쥐고는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격, 수십 명의 장졸과 두 명의 장수를 죽이고는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손권군의 대장기 아래 즉 '''군주인 손권의 바로 앞'''까지 도달한다. 손권과 부하들은 크게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하다가 근처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장료는 손권을 도발했지만 손권은 감히 나서지 못했고, 뒤늦게 그의 군사가 별로 없는 걸 보고 포위섬멸을 지시했으나 장료는 가볍게 포위망을 돌파하고 성으로 귀환했다.이것은 국가의 큰일이니, 그대의 계획이 어떠한지 돌아볼 뿐이고, 내가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공적인 대의를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청컨대 그대를 따라서 나갈 것이다.
심지어 장료는 성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낙오된 병사들이 "장군은 우리를 버리시는 겁니까!"라는 애원을 듣고 '''적진에 뛰어들어 그 병사들도 싸그리 구출해서 돌아왔다'''. 새벽에 시작해 정오까지 이어진 싸움으로 고작 장수 두 명과 천 명도 안 되는 병사들에게 오군은 그대로 깨지고 사기가 곤두박질 쳤으며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12] 이는 각지에서 많은 전투를 경험한 합비의 위군과 수전과 공성전만 경험한 오군의 수준 차이로도 볼 수 있다.
3.3.3. 소요진 전투
손권군은 장료의 농락으로 기세가 꺾여 10만의 대군세로도 합비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10일 만에 풍토병까지 돌자 회군을 명하는데 손권은 무슨 생각인지 최후미 즉 회군병력 중 제일 마지막에 병사 천 명과 장수 몇 명과 함께 끝까지 남은 상황이었는데[13] 장료는 더욱 가관으로 '''한 번 더 공격을 강행한다.'''
장료 측의 기습에 감녕과 여몽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막고 장흠, 진무, 서성, 송겸 또한 적과 싸우며 특히 능통은 자신의 친위대와 함께 손권을 호위하여 싸운다. 손권 또한 직접 활을 쏘며 적에게 대항했다.[14] 손권은 능통과 그의 3백여 시종의 힘으로 포위를 벗어나고 능통은 손권이 포위를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자신의 시종들과 함께 장료군에 돌격한다.
그렇지만 그동안 진무가 전사하고 서성과 송겸이 견디지 못해 퇴각하는 등 모랄빵으로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이때 후방에 있던 반장이 마침 도착하여 도망가던 송겸과 서성의 병사 두 명을 죽여 군사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해 앞의 적과 싸우게 하고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며 군악대한테 어째서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군사들의 정신줄을 챙기려고 든다.
이런 장수들의 희생으로 손권은 나루터에 있는 다리 위로 올라왔으나 다리의 남쪽 부분이 이미 무너져서 3미터 정도나 나무판이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곡리가 말 뒤에 있다가 손권에게 안장을 꼭 잡고 고삐를 늦춰 잡게 한 다음, 채찍으로 말이 뛰는 것을 도와 드디어 진교를 건너뛰게 했다. 그때 하제가 3천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나루터 남쪽에서 손권을 맞이하여 손권은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진무는 전사'''했고 서성은 상처를 입고 창을 잃은 것을 하제가 되찾아온다. 특히 능통은 수십 명을 죽였지만 수많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자신이 친근하게 대우하던 '''3백 시종은 전멸'''하고 그 자신만이 남쪽의 나루터에 도망쳐와 다리가 끊긴 것을 보고 갑옷 입은 상태로 자맥질하여 손권이 있는 배에 겨우 도착했을 뿐이었다.
3.3.4. 패인
215년 합비전투에 관하여, 손권은 이끌고 온 10만군이 정돈이 되면 공성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역병 때문이었다(감녕전). 장료와 800명의 돌격 사건 이후 손권은 10일간 합비를 공격했는데도 점령하지 못했는데 정황상 공격하기 전부터 이미 역병이 퍼지고 있었고 따라서 환성전투처럼 급하게 공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료가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손권의 실수이긴 하지만 역으로 장료는 '집결하기 전에' 역격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손권의 전략은 역병이 가라앉고 10만이 집결하면 공성한다는 전략으로 추측되지만 사실상 손권 머리 위에 조조가 있었기 때문에 손권의 무능으로만 매도하긴 무리이지 않나 한다. 실제 전투를 보면 장료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시점은 개전 초의 기선잡기 800명의 결사대와 10여일 후 퇴각 당시 위엄을 세우려고 군악대와 함께 철수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은 손권을 향한 기습으로서, 물리적으로 800군이 10만 군을 깨뜨린 것은 아니다.
또한 손권을 옹호하자면 '료래료래' 당시에도 손권군의 포진상 손권 스스로가 성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퇴할 때에도 역병 때문에 물러나게 되자 군이 모두 물러날 때까지 소요진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본다면 손권이 앞장서는 리더십을 가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오의 전투력을 낮잡아보는 원인이 되지만, 후에 제갈각의 합비원정 때에도 제갈각은 회전을 벌이고 싶어했으나 위에서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지연전을 펼친 점을 봐도 전투 능력이 위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이다.
3.3.5. 후일담
능통은 자신이 아끼던 시종들이 모두 죽은 것을 알자 펑펑 울기 시작한다. 이에 손권은 직접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아주며
라며 그를 위로한다. [15] 그리고 그날 배안에서 잔치를 벌이니 하제가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며 죽을 때까지 훈계로 삼으라고 말한다. 손권은 그의 눈물 또한 직접 닦아주지만 그 다음에 하제는 다시 반란군의 토벌 명령을 받는다.[16] 그리고 손권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힘껏 싸운 장흠은 탕구장군 유수독으로 승진시키고 아군의 탈주를 막아 앞의 적과 싸우게 한 공으로 반장을 편장군에 제수한다. 또 손권은 전사한 진무의 장례를 직접 임해 진무의 애첩을 순장하도록 한다 . 또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권은 자신의 손가락을 피가 나올 때까지 씹어 일생의 교훈으로 삼고 능통을 침실에 들어오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한다.[17]공적, 죽은 자는 이미 죽었고, 실로 경은 살아 주었는데, 어찌 사람 없음을 걱정하오?
위나라에서는 이런 큰 승리를 기뻐하는데 장료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항복한 오나라 장군에게 묻는다.
그 말에 오나라 장수가 손권이라고 대답하니 장료와 악진은 서로를 쳐다보고 두 말할 것도 없이 서로 말을 타고 추격을 하지만 결국 이때까지 얻은 곳에 만족하고 잃어버린 기회를 한탄할 뿐이었다.아까 보니깐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있었어.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짧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던데, 그게 누구요?
당시 조조도 이 승리를 매우 크게 여겨 장료를 정동장군(征東將軍)에 임명하고, 216년 조조는 손권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유수구 전투) 합비에 들려 장료가 싸운 곳을 순행하며 오랫동안 감탄의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3.3.6. 결과
이 공방전의 패배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면서 강남 병사들의 강북에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줬는데 합비의 방어도는 둘째치고 '''손권이 친히 이끄는 10만의 군대가 고작 7천 명이 막는 성 하나도 떨구지 못하고 역으로 1000도 안 되는 군세에 정면돌파 당하고 손권이 죽기 직전까지 몰리기까지 했다.'''
한편, 삼국시대의 오나라에서는 떼를 쓰면서 말을 안 듣고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장료가 온다!" (遼來遼來)'''[18] 라고 말하면 무서워하면서 눈물을 그쳤다라는 말도 있다. 한마디로, 어린 아이들을 겁주는 망태기 할아버지 같은 용례로 쓰인 셈인데 적벽대전이나 합비 공방전에서 실제로 존재감이 매우 큰 활약을 보여줬던 것을 잘 생각해보면 시대상으로 봤을 때 아이들을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만화 창천항로에서도 이런 일화를 다루는 장면이 있다.#
합비 공방전에서 이어진 216년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100인 결사대를 이끌고 야습을 하여 위군 진영을 헤집고 무사히 돌아온 일이 있었다. 오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준 일화로 이에 손권은
며 감격했다 하니 오나라에 퍼진 장료의 위상을 알 수 있겠다.
3.4. 3차 합비 전투(230년? 233년?)
기록이 상반되어서 두 기록을 모두 적는다.
오주전에서는 230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고, 233년 손권이 합비 신성으로 출병한다.
만총전에서는 230년 손권이 합비로 출병, 233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고, 그해 손권이 합비 신성으로 출병한다.
3.4.1. 오주전의 기록
230년 위가 합비 신성을 쌓았다.
230년 손권이 출병했다는 기록은 없다.
233년 ~ 이 해, 손권은 합비 신성으로 진격하며 장군 전종을 파견하여 육안을 정벌하도록 했지만,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3.4.2. 만총전의 기록
230년,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만총은 예주, 연주의 병력을 소집했고 손권은 군대를 물렸다. 만총은 이것이 계략이라고 판단했고 과연 손권은 10여 일 후 다시 돌아와 공격했으나 만총이 대비를 단단히 해놓았으므로 이길 수 없었다.
233년, 만총은 해마다 손권이 공격해오려는 것을 보고 상소를 올린다.
호군 장제는 "천하에 우리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적군의 연기를 보고 성을 부수는 것으로, 이것은 공격을 받지도 않고 스스로 함락되는 것"이라고 반대를 하지만, 만총이 손자의 병법을 들어가며 다시 한번 상소를 올리자 조예는 이를 승낙한다.합비 성은 남쪽으로는 강호에 다다라 있고, 북쪽으로는 수춘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적이 포위하여 공격할 때 수세에 의거하여 우수한 형세를 차지하는데, 우리 관병이 그들을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적군의 주력 부대를 무찌른 연후에 포위망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적군이 가서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병사들이 가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성 안의 병사를 이동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의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는 기이하고 험준한 요새가 있어 의지할 수 있고, 다시 성을 세워 굳게 지킨다면, 이것은 적을 평질 끌어내서 그들의 퇴로를 막는 것이므로 계략면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해 위군이 합비의 신성으로 옮기자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상륙했다. 이때 손권은 위가 성을 옮긴 것을 오군의 위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병력을 도열하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예측한 만총이 복병을 숨겨두었다가 손권이 이럴때 기습했으므로 오군은 대패하고 손권은 배 위로 달아난다.
3.5. 4차 합비 전투(234년)
주연전에 따르면 손권은 촉나라와 기일을 약속하여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 시기 촉한의 제갈량은 마지막 북벌로 사마의와 대치했다.
234년, 손권은 또 다시 10만 대군[19] 을 이끌고 합비의 신성에 공격을 가하였다. 육손과 제갈근에게는 형주로 나아가게 하는 한편 손소와 장승에게는 광릉과 회음으로 나아가게 하나 역시나 또 다시 만총과 전예의 뛰어난 전략과 조예의 남쪽 정벌 참여로 인해 망가진다. 조예는 내가 가기만해도 손권은 바로 튈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20] 그 와중에 손태는 죽고 오나라 내부에는 질병이 퍼지기 시작해 GG 치고 귀환. 덕분에 후위대를 맡은 주연과 반장은 신나게 고생한다. 그리고 손소도 당연히 귀환을 타고 육손은 피해를 안 입고 귀환하면서도 약탈을 해가는데 덕분에 위의 많은 투항자를 얻었으나 배송지는 이 사건을 두고 두고두고 욕을 한다. 전문은 손권/인간 사냥 참고.
이때 만총은 급히 달려가서 수십 명의 장사를 소집하여 소나무를 베어 거(炬: 싸리나 갈대 같은 것을 묶어서 길을 밝히거나 화톳불을 놓는 물건)를 만들고, 마유(삼씨로 만든 기름)를 흐르게 하여 바람 방향에 실어 불을 놓아서 성을 공격하는 적의 무기를 불태웠으며, 화살을 쏴 손권의 조카 손태를 죽였다. 때마침 조예의 친정 소식이 들리니 손권은 또다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위진전에 따르면 위진이 조예에게 조언한 기록도 있다.
이 전투가 진삼국무쌍 시리즈 2편과 4편, 5편에서 위 vs. 오의 결전이 되는 '''합비신성 전투'''.
3.6. 5차 합비 전투(253년)
이건 손권이 아니라 제갈각의 공격이다.[21] 상세한 것은 제갈각, 혹은 장특 참고.
4. 오나라는 왜 실패했는가?
합비가 가진 커다란 의미, 강동의 뛰어난 제장들과 많은 병력 숫자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족족, 정말 족족이란 말 외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싸우는 족족 패배했다. 압도적인 세력의 차이로 패배했다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이미 여러 조사에서도 밝혔듯이 합비공방전에서는 위나라의 군세는 결코 오나라보다 많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상당히 열세였다.[22] 다만 유리한 지형을 끼고 방어전을 펼치면 원래 군세가 적어도 기본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그럼에도 승리하지 못한 결과 오나라의 중원 진출은 성공할 수 없었으며, 오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강동 구석의 작은 세력에 머물러 천하를 주도하는 세력이 되지 못했다.
어째서 오나라는 실패했을까? 보통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꼽는다.
4.1. 손권의 군사적 재능
총사령관 손권의 군사적 재능이 분명히 부족했다. 자세한 것은 손권#s-4.1 항목을 보도록 하자.
물론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료, 이전, 악진이라는 백전노장 조합인 것도 어느 정도 감안할 필요는 있지만, 결과가 너무 심하게 안습했다. 결국엔 손권의 군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성전은 어려운 싸움이다. 천하의 항우나 우에스기 겐신 같은 사람들도 공성전에선 의외로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다만 공성전 때문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은, 야전에서도 장료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에게 처참할정도로 털렸다는 것.
손권 자신은 장료가 활 잘 쏘고 말 잘 타는 장수라고 칭한 것 등 무재는 나름 뛰어났지만 총사령관일뿐 아니라 한 나라의 군주였기에 선봉으로 싸우진 못했고, 나름 뛰어난 무재를 지녔다고 해도 장료와 비교할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23] 총사령관으로서 더더욱 중요했던 군략에서도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손권이 성공적으로 군사 작전을 행했던 이술의 반란을 격파할 때나 조조와의 유수구 전투를 감안하면, 손권의 군략이 절대적으로 낮은 정도는 분명히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인 손견이나 형인 손책에게는 한참 못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손견은 (아무리 원술이 사재 탈탈 털어 줬다지만) 동탁 휘하의 서량기병을 이겼었고, 동탁 토벌전에선 혼자서 다른 제후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일단 최정예에 해당할 중앙군의 일원으로 서량쪽 변장 한수 토벌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손책이 강동을 평정한 것, 주유가 평지에서 조인이랑 대등하게 싸운 것을 보면 분명히 손권의 문제가 없다고 할 순 없을 듯 하다.
통상적으로 강남군이 강북의 군대에 약한 것은 중국의 전통이었고, 이를 기병 중심의 북부와 보병 중심의 강남의 병종차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조비의 기록을 본다면 오군은 유수구 쪽에서 장강 도하한 위군한테도 졌었기에, 이를 감안했을때 기병과 보병의 병종차 문제인지까지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4.2. 세병제(世兵制)
손오 세력은 세병제를 군사 제도로 사용하였는데, 손오식 세병제는 타국의 병호제와는 달리 손권이 오왕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장수들에게 봉읍이라는 명칭의 일정한 토지를 분배하고, 그 토지의 수입과 주민들로 독자적으로 군비를 갖추게 하여, 유사시 손권의 소집에 응하도록 하는 체제였다.[24] 즉, 손권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수들이 저마다 군비와 군제, 사용하는 무기에 이르기까지 독자적으로 조직한 사병을 이끌고 손권의 지휘하에 연합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요컨데 손오의 군대는 이때까지도 촉나라나 위나라와는 달리 중앙집권적인 정치가 아닌 호족의 영향이 한나라 말기 때와 비교해 별반 약해지지 않은 만큼 반동탁 연합군과 그 맹주인 원소의 축소판이 오나라의 호족들과 오왕인 손권인 셈이었다. 이는 장수(호족)들이 스스로 전쟁준비를 하기에 중앙 측에서 군비 부담이 적다는 경제적 이점이 있지만 그만큼 통솔이 잡히지 않아 호족들과 분쟁이 생기면 그대로 분열이 될 가능성이 높고 각개격파에서 대처하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특히 방어전 같은 상황이면 자신들의 이권을 위협받으니 호족 측도 활발히 지원했지만 오의 지역을 넘어선 점령은 대부분이 중앙 측이 득보는 구조라 호족 측에선 어쩔수 없이 참전하는 상황이라 의욕이 없어 총공세에선 상당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고, 중앙측도 마냥 이득이라고 보긴 힘든 게 이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다간 중원전체도 아니고 오나라 안에서 군벌을 양산할 위험성도 있었다. 즉 중앙 측은 군벌의 양산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면서도 활약을 시키지 못하는 애매한 입장이었고 호족 측도 중앙을 위해서 자기 군세를 날리기 싫은 총공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완전히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유방이 60만 제후군을 한꺼번에 거느렸으면서도 제후들이 모인 군대이기에 지휘 체계가 엉망이라 수수 전투에서 항우의 3만 군사에 한번 갈려 분열되자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도 못해보고 패퇴당한 예도 있고, 먼 훗날 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숫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유하고도 군벌 집합체의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패퇴하고 대만으로 쫓겨간 예도 있다.
4.3. 강북과 강남의 차이
적벽 전투에서도 그렇고, 북방군은 강남으로 내려오면 전염병 등으로 힘 한번 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걸 반대로 적용하면 강남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남군은 장강 이남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전투력을 과시했지만 일단 홈 그라운드를 벗어나면 전투력이 이상할 정도로 감소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후와 풍토적인 문제도 있고, 중원에서부터 시작해 사방을 모두 평정했던 조조의 군사들이 장강의 페널티를 입지 않고 제대로 전력을 풀로 발휘할 수 있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기병의 비중이 적은 강남군이 평지인 합비 방면에서, 조조군의 기병과 맞서기가 쉽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는 의견이 있는데 2차 합비공방전의 경우 장료의 보병 800명으로 패배한 것이라서 그렇게 설명하기에도 뭣 하다. 게다가 합비공방전은 대다수 공성전이었는데 기병이 개입할 여지가 부족하고 뻔히 위군이 괴멸된 거 아는 상황에서 장제에 낚시에 낚이기까지 했다. 조예가 온 순간에 도망간 4차 공방전은 말할 것도 없고...사실 합비전 자체가 워낙 삽질이 많은 전투라.
오군의 여러 차례의 실패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합쳐진 결과로 보인다. 어떤 자는 손견[25] 이나 주유가 있었더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예상을 해 보기도 한다.[26] 물론 이 또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고, 또 손견은 돌격대장 스타일이라 항상 맨 앞에 섰다는 점과 주유는 합비가 아닌 파촉을 노렸다는 걸 생각해 보면 알 수 없다.
사실 중국 강남인들이 좀 이상할 정도로 싸움에 약한데[27] 이 전통이 꽤 오랜 기간 이어진다. 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등의 혼란기에 강남 국가는 언제나 경제, 문화 면에서는 번영했지만 군사적 성과는 지지부진 하다가 결국 밀리기를 반복했다. 중국 역사상 강남에서 일어나서 화북을 정복하는데 '''완전히'''[28] 성공한 왕조는 명나라밖에 없다.[29] 오나라는 단지 이 레이스의 첫타를 끊은 것뿐.
4.4. 대전략의 부족
사실 중국 남쪽 국가들 가운데 동진, 유송, 남송 등의 국가들은 최소 회수 인근, 최대 산동까지 진출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이는 화북이 분열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그 역량이 아직 재정비되지 않은 시기, 화북의 역량이 약해진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 물론 오나라도 수춘에서의 전란때를 후대에 노리긴 했으나 한중공방전을 전후 위나라 각지에서 반 조조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이 황제가 있는 허창까지 반란군이 들쑤시는 등 조조 위왕 즉위 이후 위나라의 위상이 흔들릴 때 오히려 촉을 공격하고 위에 종신하여 위나라의 권위만 세워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5. 기타 창작물에서
5.1. 창천항로
[image]
'''장료가 온다!!(遼來來)'''
합비 전투를 유명하게 한 계기가 된 만화. 료래래(遼來來) 또한 이 만화를 통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위의 2차 합비 전투에 나온 만화도 창천항로의 한 장면이다. 작중의 장료무쌍을 보면서 괜시리 쪽수 믿었다가 제대로 개털린 오나라 병사들의 장료에 대한 공포를 간접체험 할수 있다.[30] 여담으로 위 장면의 경우, 이마가 좀 튀어나온 양반이 손권.
5.2. 삼국지 영걸전
아군이 참전하지는 않으나 4장에서 선택지에 따라 발생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제갈량의 진언에 따라 손권이 합비를 공격하도록 요청하거나, 요청하지 않을 수 있는데, 전자를 선택했다면 손권군이 장료군이 완성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고 이벤트로 언급되고, 후자를 선택했다면 손권이 금 2,000을 주고 이후 완성 전투를 치르기 전에 장료의 지원군을 격퇴해야 한다. 이때 손권은 어부지리를 노리겠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스토리에 별 영향은 없다.
5.3. 삼국지 조조전
장료, 이전, 악진이 강제출진하며 조조는 출진 불가능. 삼국지연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개로 가며, 태사자가 부하를 잠입시켜 내부의 혼란을 유도하지만 장료가 이를 눈치챈다. 그리고 선택지가 뜨는데 서문을 열 경우 태사자와 주위 부대가 혼란에 빠지고 남문을 열 경우 손권 주위 부대가 혼란에 빠진다. 연의대로 서문을 열면 더 많은 병력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만 남문을 열면 손권, 정보, 노숙, 장굉 4명의 적 무장을 혼란에 빠드릴 수 있어서 까다로운 적 무장을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손권을 격퇴시키면 노숙과 장굉도 같이 퇴각한다.[31] 서문을 열었을 경우, 태사자를 죽이지만 않으면 남쪽의 부대가 구원하러 오지 않지만 남문을 열었다면 태사자가 구원하러 오기 전에 빠르게 전멸시키고 미리 유리한 진형을 짜야 한다.
2차 합비의 무위는 이후 연의에서 처럼 유수구 전투의 전초인 소요진 전투로 표현된다.
실제로 연의처럼 장료, 이전, 악진이 한때 의견이 갈렸다거나 또는 장료, 이전이 기습하여 오군을 격퇴하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다.
5.4. 진삼국무쌍 시리즈
5.4.1. 합비 전투
2편에서는 장료의 함정에 의한 태사자 사망이 주요 이벤트. 오군 시점에서는 이벤트 발동을 저지하기 위해 장료를 격파한 후 하후돈을 잡아내는 것, 위군 시점에서는 이벤트를 발생시켜 태사자를 제거하고 나서 남쪽의 감녕을 제압하는 것이 승부수이다.
3편에서는 총대장이 손권이 아닌 손견이다. 덕분에 소사교 서전트 점프 이벤트도 손견이 가져갔다. 안습. 오군 시점에서는 소사교 붕괴 이벤트와 함께 출현하는 이전을 격파하고 난 후에, 강화 상태로 등장하는 장료를 막아내야 한다. 위군 시점에서는 손견을 두 번 격파해야 한다. 1차 격파하면 일시 퇴각했다가 본진에서 재등장한다.
여담으로 양군의 아군에게 유리한 이벤트들을 세어보면 조조군 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소사교 붕괴 이벤트를 보고, 오군 사기 저하 이후에 장료가 뭘 하기는커녕 아무것도 없다.[32] 감녕이나 육손이 원군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플레이어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군 군단들은 그냥 막 썰린다. 아군들의 사기 저하나 고전 등의 정보 이력밖에 안 날아온다.[33] 반면에 오군은 강화 상태 장료만 때려잡는 데 성공한다면 아군 부대들이 적군을 알아서 청소하고 있다.
무쌍모드 한정의 얘기지만 오군 시나리오 5장(혹은 6장)의 번성 쟁탈전을 클리어하면 소사교 붕괴 후에도 손견이 도망가지 않고 도리어 복병을 불러내서 반격까지 한다. 초반부터 유리하게 진행해서 장료만 신속하게 몰아내면 전투 끝까지 매우 쉽게 클리어가 가능하다.
4편에서는 위군은 동쪽과 남쪽의 중립거점 점거 후 12시 방향에서 등장하는 감녕 격파, 오군은 조창, 우금 등의 원군 부대와 다섯 번 등장하는 장료 막아내기가 핵심이다. 오군 시점에서의 장료와 위군 시점에서의 감녕은 모두 사기가 최고인 상태로 출현해서 바로 아군 총대장인 손권 또는 조조를 향해 돌진하므로, 신속하게 잡아내지 못하면 총대장 패주로 패배하게 된다. (게다가 강화 상태라서 까다롭다.) 그야말로 "위에는 장문원, 오에는 감흥패". 오나라 플레이시 이 스테이지에서 유니크 무기를 얻는 무장은 능통인데 장료을 4번 격파하는 것이 조건이다, 문제는 장료가 손권한테 돌진을 하는데 능통이 장료를 잡는 도중에 손권이 대신 장료를 격파하기 때문에 십중팔구 유니크 무기를 얻는데 실패한다. 그것도 능통이 직접 격파해야 하는데 물론 이부분만 넘기고 2번, 3번은 오나라군과 멀리 있기 때문에 쉽지만 4번은 감녕이 있기 때문에 좀 쉽지가 않다.
위군 모드에서 장료로 플레이시 장료로 적장 셋 혹은 적병 250씩 격파할 때마다 적군 사기하강 이벤트가 일어나며, 적장 아홉 또는 적병 750을 격파할 시 오군이 겁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지고 손권이 놀라는 이벤트가 있다. 참고로 장료의 유니크 무기을 얻기위한 조건이다. 얻는 방법은 10분이내 조인이 오기전에 이 이벤트을 발동시키는 것.
5편의 합비 전투는 그냥 장료가 킹왕짱 최강이다. 장료가 CPU일 경우 일시적으로 전장을 이탈했다가 7분 가량 지나면 돌연 나타나 여몽 부대[34] 에 기습을 가하는데[35] 오군 전체 사기가 곤두박질 치는데다 '''강화된 장료'''가 적군을 분쇄하고 있다. 만렙 플레이어가 전서 쓰고 들쑤시고 다니는 것만큼 적을 죄다 발라버리고 있다(!!!). 초반에는 다소 많이 밀리는 위군 측에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구세주, 신님. 오군 측에는 극악 난이도라는 선물을 안겨준다.
정사가 아닌 손견 무쌍 모드에 들어간 번외편 합비 전투도 존재한다. 손견 무쌍모드라 이번엔 오군이 많이 불리한 상태로 시작해서 동서쪽의 합비거점 둘을 차지해야 한다. 조조, 하후돈, 조비 등 고유 무장들이 추가로 나오고 장료 또한 원군으로 등장해서[36] 오군을 힘들게 만든다.
진삼국무쌍6에서도 등장하며, 위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전후편 모두 장료로 플레이하게 되고, 오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전편은 감녕, 후편은 능통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위나라 시나리오는 그야말로 장료의 삼국무쌍. 합비성 위에서 밀려오는 오군을 보고 있다가 걱정하는 이전과 악진을 다독이며 간지나게 뛰어내려 적을 향해 돌진하는 장료의 포스가 압권이다. 장료의 성능이 워낙 좋고[37] , 오군이 숫자만 많지 별거없기 때문에 마음껏 쓸고 다닐 수 있다.
반면 오나라 시나리오에서는 감녕의 100인 결사대가 모티브인 전편은 그럭저럭 할 만 하지만, 후편은 능통이고 감녕이고 다 장료한테 쳐발리고 손권의 굴욕의 다리뛰기가 등장하는 시나리오이니만큼 굉장히 어렵다. 감녕과 손권 둘 중 하나만 당해도 게임오버가 되는 상황인데, 일단 감녕과 손권이 가까이 붙어다니질 않는데다가 위군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도망가기에도 벅차고 아군은 완전히 멘탈이 붕괴되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다. 거기다가 장료는 잡아도 두 번 부활하고 세 번째로 등장할 때는 공방 업그레이드까지 되어 있다. 장료를 세 번째로 잡아야 감녕까지 무사히 도망치면서 클리어. 시리즈 사상 가장 높은 난이도의 합비 전투라 할 만 하다.
7편에서는 위나라 시나리오에서는 이전과 악진이 공식적인 무장으로 등장하면서 위나라빠 입장에서는 감동적이다.[38] 시작할 경우 장료가 조조의 명에 따라 직접 맞서 싸워야한다고 하자 이전은 반박하며 무시, 그러자 장료 혼자서 나가 싸우며 이를 걱정한 이전과 악진이 직접 나서게 된다. 장료로 플레이하던, 이전/악진으로 플레이하던 장료가 서쪽 요새에서 오군 복병에 의해 고전할 때 원군으로 합류. 이후 퇴로까지 끊고 신나게 들쑤시면서 개박살내는데 과거까지 장료 한명과 나머지 클론들로 진행하던 시리즈에서 어엿한 정식무장이 된 세명으로 오군을 들쑤시는걸 즐기면 감회가 새로울 정도.
오나라빠 입장에서는 사실모드면 여전히 공격하다가 장료의 난동으로 소사교 끊기고 가후의 본진 습격으로 퇴각하다가 장료 기습받고 태사자 전사해 후퇴하는 안습한 상황이지만 IF모드를 진행하여 노숙과 주유가 살아있는 상태로 돌입하면 노숙이 탈출로인 소사교를 지켜내고 주유의 지시대로 합비 공략 및 손견과 손책의 증원으로 장료를 격파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끝나는 다른 세력의 IF와는 달리 손권 특유의 상대방 깔아뭉개기가 여실히 나와 전작에 이어 장료 팬들의 불편한 심기를 자아낸다. 뜻은 달라도 서로를 인정하는 유비, 조조나 상대를 그냥 깔끔하게 끝내는 사마의, 사마사나 진삼국무쌍7에서 전작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마소와는 달리 손권은 상대방을 농락하고 비하하는 면모가 많아 게임에서도 여지없이 안티를 불러오는 경향이 짙다.[39]
8편에서도 등장한다. 하지만 위나라 스토리에 경우 전작만큼의 임팩트는 없다. 여기에 참전한 장료, 이전, 악진은 합비 전투에서 개인 스토리가 끝난다. 오나라에 경우 6편처럼 결국 못 이긴다. 특이하게도 시즌패스 2에 포함된 DLC IF 스토리 중 하나인 서서의 스토리에서는 형주를 온전히 손에 넣은 유비가 손권과 함께 건업에서 합비로 진군해 이겨버린다.
5.4.2. 합비신성 전투
신성 전투는 2편부터 나오는데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신성전투에는 손권과 만총이 싸운 것과 후에 제갈각과 사마사가 싸운것이 있는데, 전자는 2,4,5,7편에서, 후자는 6,7편에 등장한다.
여담으로, 소수의 위군이 다수의 오군을 이겼다는 것을 반영하기 위해서 인지, 성들이 하나같이 기동요새인 것이 특징. 원격 조종으로 성문을 여닫는 것은 약과에, 컨베이어 벨트, 커다란 선풍기와 가시 함정, 불을 뿜어내는 조각상 등등...
진삼국무쌍 2부터 등장. 여담으로 234년의 합비신성포위전의 테마곡이 있다. 제목은 The Men of Intelligence. 노래를 들어보면 공방전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사운드가 매력적이다. 진삼 팬들에게 명곡 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 뒤의 몇 무쌍 작품들에서 중간 중간 나오고 있는 BGM이다. 진삼국무쌍에서 명곡이라 불리우는 BGM들 중 리메이크가 안 되고 꾸준히 진삼국무쌍2에 나왔던 음원으로 게임에 나오는 것을 보면 명곡이 맞는듯 하다.(또 다른 합비신성전투 테마곡으로는 Blast From The East) [40]
적벽대전급의 맵 크기 90% 가량이 전부 성일 정도로 크고 아름답다는 말밖에 안 나올 정도의 규모에다 열몇개나 되는 성문들로 도배되어 있을 정도. 오군측으로 플레이하면 그 성문 하나하나 아작을 내야 하며,[41] 위군측으로 하면 '''이미 성문이 모두 열려있고''' 중앙 호숫가에 들어가면 오군 복병이자 궁병 '''수백명'''이 활질하고 있는데,[42] 이런 오군을 모두 없애야 한다.
4편 역시 시작하면 거대한 성이 있는데 바깥쪽 외성, 중간의 성, 안에 내성이 또 있는 3중 성벽이다. 오군으로 시작하면 일단 외성을 제압한후, 중성으로 들어가 안을 제압해 아군이 충차로 중성의 정문을 뚫을 수 있게 도와주고, 이후 내성으로 들어가 사마의와 조비를 잡으면 완료. 중간에 서쪽의 막혀있던 길이 뚫리며 견희가 빈집털이를 시도하니 주의. 위군의 경우에는 어째선지 오군이 중성까지 들어와 있는 상태로 시작한다. 오군을 몰아내며 선단 위의 손권을 잡으면 클리어. 역시 감녕이 중간의 성의 일부분을 무너뜨리고 빈집털이를 시도한다.
5편도 그 크기가 만만치 않긴 하지만 바깥의 성벽은 좀 작은데, 성 안으로 들어가면 진짜 지옥[43] 이 시작된다. 정면에 자동 컨베이어 롤러가 발동해서[44] 오군을 밑에 있는 호수로 떨어뜨리고[45] 서북쪽과 동남쪽에는 화염포탑 지옥이 있다. 위군은 당연히 아무 피해도 없지만 오군에게는 문자 그대로 화려한 헬게이트. 근데 이렇게 강력한 함정들이 위군 시나리오로 하면 아군 보정 덕분에 '''공기화'''된다. 바로 북쪽의 신비나 동쪽의 전예가 사망하는 순간 그 지역의 불함정이 정지하기 때문. 정문쪽의 롤러도 전투 개시후 6분 가량 방치하면 육손이 '''"엌ㅋㅋㅋ위군노 함정와 장식데스네"'''하면서 뚫어버린다. 이래저래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합비신성전이다. 그래서 수라모드 올전공 클리어 유저들의 뒷목을 잡게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6편에서도 합비신성전투가 있지만 위의 전투가 아니라 사마사vs제갈각의 합비신성전투가 나온다. 동흥에서 위나라의 침공을 격퇴하고 역공을 가했지만 오히려 대패했고 이는 제갈각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7편은 다시 위 VS 오의 최종결전 스테이지로 복귀. 오나라 사실 루트에서의 최종 스테이지로 나온다. 거대한 성과 오버 테크놀로지스러운 함정들은 여전하다. 다만 여기서 오가 패해야하는 것이 맞는데 오 사실 루트 마지막인지라 오가 대승을 거두는 것으로 나와 논란이 일기도.[46] 하지만 이겨도 위는 건재한데다 조비는 잠깐 내주겠다고 했으니 머지않아 뺏길거란 복선을 남겼다.
한편 진 스토리에서도 등장. 6편과 같이 제갈각이 합비신성으로 쳐들어오고, 사마사가 지휘하는 위군으로 성 안까지 쳐들어온 오군을 몰아내는 전투다. 스테이지가 시작하면 성 내부의 대부분에 오군이 들어와있는데 이를 원격으로 성문을 닫아 성 외부의 오군과 분리시키고, 안의 오군을 각종 함정들을 작동시키며 섬멸해나간다음, 다시 성문을 열고 나와 제갈각을 잡아주면 클리어. [47]
5.5.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많은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합비를 도시로 구현하지 않아서 주로 수춘을 합비라고 여기고 합비 공방전을 치뤄야 한다.[48] 그런데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수춘과 건업은 거리가 꽤 멀다. 정말 강 하나 코 앞에 두고 대치하는 실제 합비와 건업과 비교하면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 삼국지11 같은 경우 육지[49] vs해상전 식으로 간접경험할 수 있지만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팬들이 염원중 하나가 바로 합비성과 합비신성 구현일 정도다.
삼국지 11 파워업키트의 결전제패 모드에서 난이도 3짜리 캠페인으로 등장한다. 장료, 이전, 악진의 3부대로 손권의 대규모 군세와 맞서야 하는데, 전장이 수비측에게 불리하기로 악명 높은 수춘이라 이벤트를 활용하지 않으면 클리어하기 힘들다. 우선 장료로 능통의 부대를 먼저 퇴각시키면 (일기토를 거는 게 쉽다.) 감녕 부대도 뒤따라 퇴각하며, 최대한 공성병기 접근을 억제하며 '''장료 부대로 적군을 계속 궤멸시키면'''[50] 연쇄적으로 료래래 이벤트가 떠서 숨통이 트인다. 다음에는 클리어 조건대로 손권 부대만 격파하면 끝. 사실 수공으로 적을 수장 시키는게 가장 편한데, 일단 시작했을 때 악진의 부대를 제방쪽으로 보내고 최대한 빨리 능통의 부대를 없에는데 주목한다. 그동안 장패의 부대는 진을 수리하게 둔다. 능통의 부대를 쓰러뜨리면 장료와 이전은 손권을 집중 공격하고, 장패도 적이 수춘에 붙는다 싶으면 합류시킨다. 그 때쯤 되면 제방이 터져서 무장들은 올킬이 되는데, 내정 지역쪽의 주이가 남긴 하지만 어차피 그쯤 되면 손권이 걸레짝이 되므로 큰 의미는 없다. 클리어하면 장료가 동료들과 팀워크로 얻은 승리를 서로 치하하며, 손권이 감녕의 위로를 받고 정신승리와 더불어 퇴각한다.
삼국지 13 영걸전 모드의 요래합비는 장료가 주인공으로 손권을 합비에서 격파하는 내용을 다뤘다. 기본 도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수춘 밑에 거점으로 합비가 등장한다. 오나라 입장에서 여강과 건업을 통해 수춘을 공격하려면 반드시 합비를 지나야 한다.[51] 그래서 시나리오 모드에서도 오나라나 강동의 국가가 수춘을 먹기 위해 합비에다가 대규모 병력을 꼴아박는것을 볼 수 있다!! 위나라와 같은 중원과 하북을 모두 차지한 세력이라면 굳이 장료라는 먼치킨이 없어도 합비로 압도적인 물량을 보내 강동에서 오는 북진을 저지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PK에선 여기다가 요새지를 지어 실제 공성전이 가능해져서 진정한 합비 공방전을 실행할 수 있다.
5.6. 삼국전투기
역대 삼국지 2차 창작물중 합비 전투에 대해 가장 상세하게 그려내고 많은 공을 들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총 5차례의 합비 전투가 그려진다. 애초에 삼국전투기 자체가 최훈이 밝히듯 '장료가 주인공인 삼국지'인데 그 장료가 맹활약하는 전투니까 소홀히 그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5.6.1. 합비1 전투
1차 합비 전투에서는 장제가 손권으로부터 합비를 사수해내는 정사 루트를 따라가는 듯하였으나, 장제의 계략에 속아 돌아간 뒤 한동안 공격을 가하지 않는 정사와 달리 장제에게 속은 것을 깨달은 손권이 직접 선두에 서서 합비를 공격하던 중 장료가 지원군으로 도착하여 손권을 격퇴하는 연의 루트를 섞어내었다.
1차 합비 전투에서 장료가 송겸에게 중상을 입히고 '''손권을 사로잡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태사자와 주태가 손권을 구출해낸다.
이후 태사자가 계략을 이용해 합비를 점령하려하자 장료가 이를 역이용해 태사자를 죽이고 손권이 물러가며 1차 합비 전투가 마무리된다.
5.6.2. 합비2 전투
[image]
'''장료 무쌍'''
2차 합비 전투에서는 삼국전투기 연재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하게 그려냈다.'''[52]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조조의 교령을 확인하는 장료, 이전, 악진은 교령을 따르는 입장과 따르지 않는 입장으로 갈리는데, 장료가 단독으로 교령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손권에게 야습을 가한다.
손권군에게 야습을 가하면서 단번에 대장기 근처까지 돌입하고 손권을 지키려고 막아서는 진무의 창을 못쓰게 만들고, 진무의 복부에 원월도를 박아넣는다. 이에 진무가 목숨을 걸고 원월도를 붙잡고서 서성과 하제에게 장료를 잡으리고 외치자 장료는 '''진무를 가로로 두동강내며 죽이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서성과 하제의 공격을 튕겨낸다.'''
이후 이전과 악진이 교령에 따르기로 하며 악진이 성을 지키는 동안 이전이 퇴로를 열어 장료가 무사히 빠져나오게 돕는다.
이에 손권은 퇴군을 결정하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후방으로 퇴군하기로 결정하는데, 이를 놓치지 않고 장료와 악진, 이전은 손권의 후미를 찌른다.
장료를 저지하기 위해 여몽은 서성과 반장을 보내 장료를 저지하게 하고, 하제에게 방어선을 만들라고 지시하지만 장료는 서성을 한 칼에 베어 중상을 입혀 낙마하게 만들고 방어선을 붕괴시키고 여몽의 필사적인 저항을 뚫어 손권을 추격한다.
장료가 오는 것을 파악한 능통은 손권을 장흠이 지키는 소요진을 대피시킨 뒤 방어선을 꾸려 수하들과 함께 장료와 맞서지만 자신은 장료에게 중상을 입고, 장료에 의해 수하들은 전멸한다. 장료의 공격은 장흠의 필사적인 저항과 여몽이 장료의 후발대를 저지, 그리고 감녕의 측면 공격을 당하고 나서야 중지된다.
5.6.3. 성산 전투 ~ 오장원 전투
성산 전투와 오장원 전투 파트에서 각각 짧게 나오는데, 성산 전투 파트에서는 공손연에게 당하여 바보취급 받게 된 손권이 흥분해서 합비를 치다가 만총이 파놓은 간단한 함정에 걸려 패퇴했다고 그려진다.
오장원 전투 파트에서는 손권이 합비 신성을 공격하자, 만총이 이를 지원하려 하지만 지원을 갈 경우 손권이 후방을 노릴 것이라는 전예의 만류로 만총은 합비 신성을 방치하며 지켜본다. 허나 손권에 의해 함락 직전에 놓이자 만총은 조예에게 서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하고 조예가 원군을 보낸다는 답변을 보내자 합비 신성을 구원하러 나와 손태를 죽이고 손권을 격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5.6.4. 합비 신성 전투
제갈각이 동흥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합비 신성을 공격하며 함락직전으로 몰아넣지만 장특의 거짓말에 속아 시간과 전력을 낭비하고, 관구검에게 공격을 받아 패퇴한다.
[1] 중국사 내내 화북 지방에서 강남 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루트는 세 가지가 있었다. 합비를 위시한 회하 일대를 돌파하는 길, 양양성 일대를 통과하는 길, 마지막으로 사천 지방을 건너 양자강 상류에서 내려가는 길. 후대의 영락제가 회하를 직접 돌파해 강남을 점령했으며, 원나라는 양양을 점령하는 루트를 이용했다. 전국시대 진(秦)이 초를 공략하는 데 쓴 길이 사천으로 우회하는 길.[2] 춘추시대 오,월이 이 루트로 서주를 넣고 산동반도의 제나라와 패권을 겨뤘다. 한때 지도에 표기된 낭야가 월나라의 수도였던 적도 있을 정도. 손책의 경우 죽기 직전 허도기습 당시 광릉태수 진등과 싸운 적이 있다. 반면 손권은 별로 안 써먹고 조비가 두 번 이쪽으로 온 적이 있는데 뭐 결과는 알다시피 4차 합비공방전 때 조공 병력이 이쪽으로 좀 가긴 한다.[3] 선제기에는 주연 상대로 무려 만여 기를 참획했다고 기록했는데 선제기는 뻥과 과장이 많은 기록인지라 이 또한 믿기 어렵다. 다른 기록에선 그냥 한 달간 포위하다가 물러난 정도이고 자치통감에선 오군이 밤에 몰래 도주했는데 추격하여 많이 노획하고 돌아왔다는 게 전부다.[4] 합비 안 거치고도 해릉 라인으로 서주방향 북진은 가능하고 여몽 논의에서도 이쪽을 의식한 발언은 나오는데, 합비가 버티고 있는 이상 물길에 뒤가 잘리게 되는 모양새가 된다. 위군이 장강 이남에 기습적인 병력 드랍은 가능해도 물길을 상대가 쥔 이상 다 죽을 거 아니까 안 하는거랑 비슷한 논리. 합비 자체가 오에겐 교두보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위나라 입장에서는 오를 감시하고 남정을 할 경우 전초기지가 되는 곳이다. 합비가 위나라에 있는 이상 오는 합비를 뚫어서 위의 관측망을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합비에서 서주를 공략하든 장강 중류로 나아가든 결정할 수 있다. 합비가 없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은것이다. 합비를 무시하고 북진한다? 막말로 죽고 싶다면 그리해도 된다. 나머지 한 가지 방법은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양번을 뚫는 건데 여기도 관우가 한 번 대대적으로 천하를 뒤흔든 이후론 그야말로 통곡의 벽.[5] 수춘은 허창까지 이어지는 물길의 나누어지는 요지이다.[6] 유복전에는 100일이라 표기되어 있고 그 외의 자료엔 단지 한 달 이상이라 적혀있다.[7] 중국 춘추전국의 인물. 진(晉)나라가 귀족들간의 내전으로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로 쪼개질 때의 사람이다. 진양성을 다스리며 조양자(趙襄子)를 섬겼으며 성벽을 튼튼히 수축하고 군수품을 비축하는 등 방어준비를 튼튼히 해서 훗날 내전기에 조양자가 진양성을 거점으로 지씨, 위씨, 한씨의 공격을 3년 넘게 우주방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의 우주방어 끝에 지씨가문은 조씨가문의 공작으로 한씨와 위씨가 배신하는 바람에 끔살[8] 합비공방전 당시 유복이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동안우도 진양 공방전 당시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지백에게 포로로 잡혀 등용제안을 받자 스스로 자결 한 것.[9] 혹은 213년[10] 호삼성은 이것에 대해 "장료와 이전은 용감하고 날카로워서 그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였고 악진이 진중하여 그에게 지키도록 하였으며 설제는 문리이므로 전투를 하지 말게 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11] 악진과 장료는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했는데 이런 감정의 골이 있는 것에 대해서 처음부터 조조군에 있던 자신(악진)보다도 항장 출신임에도 자신 이상의 지위에 앉은 장료에 대한 시기로 보는 의견이 있다.[12] 더욱 가관인 건 이게 그나마 여러모로 보정 받은 연의도 아니고 '''정사 장료전에 있는 '사실''''이라는 점.[13] 자신이 가장 뒤에서 병사들을 지키며 싸우겠다고 주장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전에 장료에게 당한 굴욕 탓에 한 번이라도 장료에게 엿을 먹이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14] 이때 장료가 손권을 눈여겨보지만, 적 장수 중 무예가 뛰어난 한 명으로 생각했다. 상세한 것은 후일담 참조.[15] 이후 능통은 정사에서의 활약이 없다. 정사 능통전에는 237년에 49세로 죽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20년 전이자, 합비 전투 이후 2년 뒤인 217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것은 능통 항목 참고.[16] 하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 전문은 하제 참고.[17] 이것으로 사신을 능통의 침실에 넣었다로도 해석 가능하다.[18] 遼來遼來 = 한국어로 "료 라이, 료 라이"라고 읽는다.[19] 하지만 만총전에 따르면 이 10만 대군이라는 것은 '손권이 스스로 부르던 숫자'이다. 즉 뻥튀기.[20] 삼전에선 제갈량이 위협적인데 왜 우리 치느냐고 손권이 징징대는 장면이 있다.[21] 그리고 손권은 1년전에 이미 사망했다.[22] 이 때문에 장료가 명장으로 칭송받는 것이다.[23] 능통과 뭇 장수들의 희생, 장료가 손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면 퇴각전에서 손권이 죽거나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높았다.[24] 손권의 오왕 즉위 후 손권은 절도라는 새로운 관직을 신설하여 군량을 비롯한 군수물자의 보급체계를 중앙정부의 재량으로 일원화하는 것을 시도하게 된다.[25] 조조와 원소가 힘을 합치고도 이기지 못한 동탁과 여포를 이겨서 세상을 크게 놀라게 했다. 손견의 군사적 재능은 오히려 조조보다 한 수 위였다.[26]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주유도 오나라 장수들중에서 수전뿐만 아니라 육전에도 상당히 능했다.[27] 춘추전국시대 때부터 그러했다. 초나라는 전통의 강자라지만 덩치 큰 샌드백 신세였기에 초장왕 이후로 제대로 된 육전에서 싸워 이긴 기록이 별로 없다. 오-초전쟁이나 오-월전쟁은 강남인끼리 치고박고 싸운 것이니 논외. 다만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후일 동진의 환온의 북벌이나 유유의 북벌 같은 꽤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으며 남송도 40여 년간 몽골의 본대를 막아내었다.[28] 비록 유방에게 패했지만, 항우의 초나라 군대가 북벌에 성공해 진나라를 멸망시킨 사례가 있다.초나라는 중심지가 장강보다 북쪽에 있었지만.[29] 왕조를 제외하면 장제스 시절 북벌에 성공한 중화민국도 있다.[30] 오죽하면 위의 장면에서 오나라 병사들이 돌파당하며 생긴 '''피의 길'''이 1년이 지난 후에 조조와 장료가 무용담 주고받을 때에 그대로 남아있을 정도.[31] 여기서 장굉을 격파할 경우 장굉은 '''사망 처리''' 된다.[32] 손견을 유인하는데 료라이씨(CPU)가 한다는 대사가 '큭, 과연 강동의 호랑이...일단 후퇴하자!' [33] 심지어 이게 초급 난이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34] 이 전투에서 여몽은 오군의 최고 주력.[35] 장료가 기습하기 전에 여몽을 없앴다면 손권을 기습한다![36] 정사 이벤트의 기습 영상 및 이벤트가 따로 없을 뿐이지, 아군과 장료가 접촉하면 "장료다! 장료가 왔다!"라며 오군 전체 사기 저하가 뜨는 건 마찬가지다.[37] 6편의 장료는 진삼국무쌍 시리즈에 나온 모든 장료를 통틀어 사기캐이며, 6편의 모든 캐릭터를 다 따져도 강캐다.[38] 이때 장료를 도우러 오는 이전이 '숙부'의 일을 언급하는데 장료와 이전의 사이가 나쁜 자세한 원인을 밝히는 장면은 삼국지 관련 작품을 거의 통틀어도 이 장면 말고는 거의 없다. 끽 해야 이문열 삼국지 정도.[39] 애초에 손권 자체가 말년 노망으로 안티가 많은 것이 특징인 반면 진삼국무쌍에서는 유난히 조조 vs 유비의 양극성 구조가 짙기 때문에 더더욱 어중간해진 오나라 세력이 까이는 경우가 많다. 손권은 특히 그 중 첨병에서 까이는 빈도가 높은 것일 뿐.[40] 다만 이 두 BGM은 장료가 미쳐 날뛰는 2차 합비 공방전이 아닌 합비신성에서 벌어지는 사마의vs육손 구도의 일종의 가상 시나리오에 가깝다. 2차 합비 공방전 BGM은 Surprise Attack(오)와 Wallcrusher(위).[41] 모든 성문을 개문시키는 방법이 있긴 하다. 위군 총대장이 있는 곳 바로 앞의 정자가 있는 중앙 호숫가에 아군이 도달하면 모든 성문이 한꺼번에 열린다. 하지만 중앙 정자로 통하는 입구는 좌측 끝의 샛길에서 이어지는 통로인데 다른 성문이 모두 닫혀있기 때문에 일부 소수무장을 제외한 전원이 그 왼쪽 입구로 진군한다. 다른 성문앞에서 대기한다거나 그런거 없다. 때문에 플레이어 무장이 중앙 정자까지 가는 경로의 장수들을 다 격파하지 못하면 결국 아군은 진군을 못한채 멍때리고 있다가 사기 높은 적들에게 하나 하나 잡혀죽을 뿐이라 결국 눈앞의 적들을 다 잡아야 한다. 한마디로 그게 그거.[42] 삼국무쌍 시리즈 3편까진 절대 활 무시하면 안된다. 맞으면 무조건 경직인데다 데미지도 폭발적이기 때문에. 3편에선 목표 조준이 똥망이 되는걸로 그나마 많이 너프 됐지만 2편에서 활만으로 적 총대장을 잡고 적을 쓸어버릴 정도로 조준 밸런스가 사기적이었고 파괴력도 월등히 강했다.[43] 오죽하면 함정 발동시키는 만총의 입에서 '''"올 테면 와 봐라! 이곳 합비신성은 절대적 마성이니라!!"''' 라고 선언까지 할 정도.[44] 해당 롤러의 문짝에 데미지가 들어갈수록 롤러의 속도가 점점 미칠듯이 빨라진다. 나중엔 '신속'계 장수가 말을 타고 달려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지경. 이 때문에 정면에서 깨려면 분신극 지우개 감녕이나 똥사기 손상향의 5way 화살이 아닌, 순수하게 본인의 완력으로만 야금야금 깨야하는 육손일 경우 심각하게 고생하게 된다.[45] 호수에 떨어진다고 죽거나 데미지를 입는건 아니지만 뺑 돌아서 다시 기어 올라와야 되는데 이게 엄청 긴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 수라모드에서 물에 떨어지면 그 사이에 아군의 1/3 가량이 궤멸당해 있을 정도.[46] 촉 마지막 루트에서 오장원에서 승리를 거둬 사마의를 죽이기 직전까지 가지만, 그 때 제갈량이 죽어 급히 후퇴해 어느정도 연의를 반영한 것과는 대조적.[47] 합비신성의 모든 성문을 지키는 것이 IF 조건이며, 제갈탄이 이 전투에서 자기보다 더 혈족에 의해 개노답 본성을 보이는 제갈각을 보며 각성하게 된다.[48] 삼국지9와 10에서는 적벽대전 시나리오 이후 합비 지역에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49] 이때 손권쪽은 도시의 시설물을 파괴할 수 있다.[50] 세 무장이 서로 친애무장 사이라 의외로 버티기 쉽지만 이 특성 때문에 원호공격으로 막타를 뺏기면 좀 난감해지는 면도 있다.[51] 덧붙여 요충지의 중요성이 '''극대화'''된 13pk에서 합비의 요충 레벨은 5로 최고 수치. 즉, 여기에 방책이나 병량고 박은 뒤 병력 주둔시키는 걸로도 여강의 북상에 빅엿을 먹일 수 있다.[52] 특히 2차 합비 전투에서는 작가 청설모의 도움도 받아 삼국전투기의 9컷 분량을 사용하면서 능통과 능통의 수하들을 박살내는 연출을 해주었으며 이 정도의 작화력은 한중 전투에서 조운이 황충을 구해낼때 다시 한번 나타난다. 둘 다 기록에 나왔던 무쌍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