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말릴란드

 


[image] '''소말릴란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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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릴란드 공화국
Jamhuuriyadda Soomaaliland
جمهورية ارض الصومال | Republic of Somaliland
'''
[image]
[image]
<rowcolor=white> '''국기'''
'''국장'''
<colbgcolor=#006d21><colcolor=white> '''면적'''
176,120km²
'''인구'''
3,508,180명 (2017년)
'''민족구성'''
소말리인 90%, 기타 10%
'''수도'''
하르게이사(Hargeysa)[1]
'''정치 체제'''
대통령제(5년, 직선), 공화제, 양원제, 다당제
'''대통령'''
무세 비히 압디
'''부통령'''
압디라흐만 사일리이
'''GDP(PPP)'''
GDP
$19억[2]
'''1인당 PPP'''
$347[3]
'''공용어'''
소말리어, 아랍어
'''국교'''
이슬람
'''국가'''
평화와 장수(Samo ku waar)
'''시간대'''
UTC +3 (소말릴란드 전 지역)
'''화폐 단위'''
소말릴란드 실링 (Sl., Sh.)[4]
'''ccTLD'''[5]
.so
'''주요 사건'''
1960년 6월 26일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7월 1일 (소말리아와 합병)
1991년 5월 18일 (소말리아로부터 일방적 독립)
'''여행경보'''
'''여행금지: 전 지역'''
'''링크'''
소말릴란드 공화국 정부
'''위치'''
[image]


1. 개요
2. 역사
3. 언어
4. 정치
5. 경제
6. 사회
7. 외교
8. 군사
9.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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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아프리카에 위치한 미승인국가.
수도는 하르게이사(Hargeysa). 공식 언어는 소말리어이고, 제2언어는 아랍어,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어서 영어도 쓰이고 있다. 국교는 이슬람교다.
표어는 샤하다('알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다')와 '정의, 평화, 자유, 모두에게 민주주의와 성공'.

2. 역사




1960년 6월 26일 영국령 소말릴란드는 5일 후인 7월 1일에 독립하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와 연합할 계획으로 영국으로부터 잠깐 독립했고,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가 독립하면서 소말리아로 합쳐졌다.
하지만 하르게이사를 비롯한 전 영국령 소말릴란드 지역은 모가디슈를 비롯한 소말리아 남부에 비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소외되어 둘 사이 갈등이 빚어졌다. 이런 갈등은 1969년에 무함마드 시아드 바레 대통령이 쿠데타로 집권하면서 심화되었다. 바레는 오가덴 전쟁의 여파로 소말리아 전역이 혼란스런 마당에 자신의 씨족인 다로드-마레한 족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다른 씨족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에 격렬하게 반발한 여러 씨족들 중 3대 씨족인 하비에 족(통일소말리아회의 / USC, 1987년), 다로드 족(소말리아애국운동 / SPM, 1989년), 이사크 족(소말리아국민운동 / SNM, 1981년)이 각자 반군을 구성하고 연합해 바레 정권에 대항했다.
1986년 시아드 바레가 친위대를 동원해 다른 씨족에 대한 탄압에 박차를 가하자 내전도 심화되었는데, 1987년 소말리아 정부는 이사크 족을 상대로 체계적인 인종 학살을 주도해 1989년까지 소말릴란드 지역에서 수만 명의 이사크 족이 사망하고 50만에 달하는 난민이 에티오피아로 몰렸다. 1988년 5월, 소말릴란드의 중심 도시(소말리아 전체에서도 둘째, 셋째 가는 도시)인 하르게이사와 부라오가 소말리아 공군에게 폭격당해 거의 완전 파괴되었다. 이 이전까지만 해도 SNM은 구성원이 이사크 족인 정치 투쟁에 가까웠으나, 학살 이후 씨족 단위로 SNM에 가담하게 됐다.[6]
1991년 반 시아드 바레 연합은 수도모가디슈를 장악하고 바레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결국 내란으로 번졌다. 이 와중에 1991년 SNM은 독립을 선언했고, SNM의 지도자였던 투르Abdirahman Ahmed Ali Tuur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당시만 해도 소말릴란드는 소말리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는데, 정부의 통제력은 약했고 관세와 같은 이권을 두고 씨족끼리 전투가 빈번했다. 결국 1992년 베르베라 항구의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내전에서 크게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1993년, 보라마Boorama에 소말릴란드 전 씨족이 모여 3달간의 평화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각 씨족은 민병대를 해체하고 무기를 회수하기로 합의한다. 그리고 원로들의 투표를 통해 에갈Muhammad Haji Ibrahim Egal이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무장 해제는 대부분의 씨족에서 원만하게 진행됐으나, 이전 집권 세력이던 하바르 유니스Habar Yunis 씨족은 대통령 선출, 특히 베르베르 항구 및 하르게이사 공항의 관세 이권이 정부로 이양되는 것에 반발해 무장 해제를 거부했다. 결국 1994년 또다시 내전이 발발했고, 1996년 10월 하르게이사에서 열린 평화 협상을 통해서야 진정된다. 이때 소말릴란드 헌법이 정립됐으며, 복수정당제, 무장 해제 완수가 결의된다. 2001년 주민 투표를 통해 소말릴란드 헌법이 통과되고 2003년 최초로 대통령 선거가 치뤄진 이래, 무력을 동반한 큰 분쟁은 벌어지지 않아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7]

3. 언어


공용어는 소말리어아랍어이다. 소말릴란드는 표준 아랍어외에도 아랍어 방언이 쓰이는데 이중 아랍어 방언쪽이 널리 쓰이고 있다. 소말릴란드내의 아랍어 방언은 예멘쪽 방언과 유사한 편이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와 영향으로 영어도 쓰이고 있다.

4. 정치


아프리카에서 베냉, 튀니지, 카보베르데, 세네갈 등과 더불어 몇 없는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리고 현재 내전과 군벌들로 무정부상태가 되어 치안 자체가 위험한 소말리아보다는 훨씬 안정적이다. 독립한 이후 2001년 다당제를 도입하였고, 2003년 행정부를 구성, 2005년 의회를 구성하였다.#
공인 정당은 3개로 한정되며, 매 10년마다 정당 3개를 선택하는 선거를 치룬다. 이는 정당 수를 제한함으로써 씨족별 정당이 난립하는 것을 막고 각 씨족이 정치를 위해 협력하게 유도한 것이다. 총 득표율에서 상위 3위에 드는 정당이 공인되며, 각 정당은 총 득표율과 별개로 여섯 선거구 중 최소 네 선거구에서 20% 이상의 득표를 해야 한다. 이 또한 정당이 특정 씨족을 대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의원 후보는 정당에 속해야 하며, 대통령 선거 시엔 각 정당에서 후보를 1명씩 보내 3명이 경쟁하게 된다.
입법부는 양원제로 의회와 원로원(구르티Guurti)으로 구분된다. 둘 다 82명의 의석을 가지고 있으며, 임기는 5년이다. 의원은 총선을 통해 선출되며, 원로는 씨족의 비례대표로 구성된다.
원로원, 곧 구르티는 원로들이 특별히 모이는 회의란 뜻으로, 유래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상설 회의는 아니었다. 현대 소말릴란드의 구르티는 1988년 바레의 학살 이후 이사크 족이 소집한 원로 회의에서 유래했다. 이후 1993년 평화 협상으로 상설화됐으며, 이사크 족뿐만 아니라 모든 씨족의 원로가 원로원에 참여하게 됐다. 원로원은 분쟁을 조정하거나 의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심사하는 일을 맡는다.
2003년 최초로 대통령 선거가 치뤄졌으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다. 2010년 대통령 선거에 다히르 라얄레 카힌 대통령과 제 1야당 큘미헤당의 아흐메드 모하메스 시라아뇨와 정의복지당의 파이살 알리 와라베가 출마했다. # 그런데 푼틀란드에서 넘어온 민병대가 투표소를 습격하면서 4명이 사망했다. # 이 선거에서 큘미헤당의 아흐메드 모하메스 시라아뇨가 4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7년 대통령 선거는 세계 최초로 홍채인식 확인절차를 도입했다. 3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며 대선 이슈는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독립을 인정받을 것인가?"라고 한다.# 대선 결과는 집권당인 평화통합개발당의 무세 비히 압디가 55.1%의 득표율을 얻어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시위가 일어 2명이 숨졌다.#

5. 경제


비공식 환율은 달러 당 6000에서 6500 실링 수준. 여담으로 1,000 실링 동전의 뒷면은 소말릴란드의 국장 대신 '''소말리아의 국장'''이 그려져 있다. 현재는 화폐 인출 기술이 없어 영국에서 인출해오는 중이며, 인플레이션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영국과의 관계 개선 및 기술 탐구에 중점을 둬야한다.
사우디아라비아나 여러 나라에 양, 염소, 낙타 등의 가축을 수출하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소말리아 측에서 이 문제로 사우디아라비아에 항의했으나 가축 수입을 잠시동안 중단했다가 재개했을 뿐이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입장은 소말릴란드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도 없고 가축을 싼 값에 사는 것 뿐이니 소말리아가 그 값에 팔 수 있다면 사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말리아는 연방 자치 행정구역인 푼틀란드를 이용해 싸게 팔고 있다.
또한 레바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과일을 수입하면서 아랍 동맹의 여러 나라와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현재 미승인국이라는 현실과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소말릴란드 실링의 가치가 매우 떨어지기에 국민의 25%가 전자화폐를 쓸 정도로 전자화폐 거래가 활발하다고 한다.#
에티오피아가 소말릴란드 베르베라항에 출자했다.#

6.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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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보듯, 축제까지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소말릴란드의 치안 상황은 소말리아 본토보다 훨씬 안정적이다. 자국 내에서는 치안을 잡고 해외 관광객 유치를 하고자 노력하면서 많이 안정적이긴 하다.
소말릴란드 정부의 치안 유지를 위한 노력과 소말릴란드 해군의 활약 덕택에 과거 해적으로 득만 봤던 푼틀란드와 다르게 인근 영해에서의 해적으로 인한 피해가 크게 줄어들고 있다. 대통령 선거 등 선거제도도 순탄하게 돌아가며, 어느정도 민주 국가로서의 외양은 갖추었다. 무엇보다 소말리아나 아프가니스탄, 예멘과 차원이 다른 게, '''소말릴란드의 씨족들은 평화를 위하여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다'''. 이는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인데, 아프가니스탄 평화유지군으로 간 한국군 채수문 중령의 글을 보면 각 부족에게 무장을 해제할 것을 권유해도 다른 부족들이 먼저 해제하면 따르겠다며 양보하려 들지를 않고 그러다가 다시 무력 충돌을 벌였다고 한다. 이에 견주면 자발적으로 무장을 해제한 이 곳은 엄청난 양보를 한 셈이며, 소말릴란드 씨족들이 무장을 해제했을 당시 유엔 사무부에서 일하던 영국인 데이 보일은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수십여년 동안 내전이 일어난 지역에서 아무리 회유를 해도 무기를 회수하기가 어려운데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은 곳은 소말릴란드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8].
여기도 90년대 중순만 해도 각 씨족들이 AK-47RPG-7을 위시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1993년에 서부의 보로마라는 지역의 장로가 먼저 무장을 해제하겠다며 솔선수범을 보이면서 서서히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 씨족을 시작으로 다른 씨족들도 차츰 무장을 해제했고, 어느 씨족이 총기를 독점하여 지배권을 행사할 것을 막고자 UN 평화유지군의 협조로 10년 가까이 천천히 설득해 가며 총기를 회수하게 하여 7만 정이 넘는 총기와 8천 정이 넘는 RPG-7, 900대가 넘는 기타 무기들을 회수, 유엔 측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2010년, 소말릴란드를 방문한 아사히 신문 취재진이 보로마 지역 장로를 찾아갔는데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여 고향 마을에서 요양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는 먼저 무장을 해제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자 후손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고 밝혔으며, 소말릴란드 정부에서도 국가의 안정에 기여한 공을 인정하여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이 인물은 2012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0년 당시 하르게이사를 방문한 일본 취재진들의 증언에 의하면 환전상이 거리에서 그냥 탁자를 앞에 두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인터뷰를 하니 10여 년전만 해도 총으로 무장하고 철망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 했으며 비무장으로 대놓고 환전상을 한다면 즉시 무장 강도에게 총 맞아 죽고 돈은 다 털렸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소말리아와 달리 평화롭다며 모가디슈에서 어디 이럴 수 있냐고 자랑했는데, 실제로도 모가디슈에서는 거리에서 총 맞아 죽기 싫으면 방탄복 입고 총 들고 나가야 하며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밖에서 나돌아다닐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취재진들도 이 환전상의 말에 공감하면서 소말리아에서는 총 소리가 그치지를 않는데 이쪽은 전혀 들리지가 않으니 정말로 같은 나라였는지 모를 정도라고 보도했다[9].
다만 이렇게 안정을 찾고 있기는 해도 알 카에다로 보이는 것들이 날뛰며 테러를 벌이고 있으며, 동부 국경지대인 사낙, 술 지역을 두고 1998년 푼틀란드 독립 직후부터 푼틀란드와 분쟁이 있다. 민족적으로는 이쪽에 더 가깝다는 푼틀란드의 주장과 옛 식민지 경계선에 따라 국경을 정하자는 소말릴란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데다 양측으로부터 모두 독립적인 연방주의 지역 군벌까지 있어서 상황이 복잡하며, 2008년 12월에는 하르게이사에서 자폭 테러가 벌어지기도 했다. 2014년 현재는 두 지역 모두 소말릴란드 측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분쟁이 완전히 해결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소말릴란드 입장에선 식민지 시절 국경선을 주장하는 것이 정통성과 국제적 합의[10] 측면에서 유리하다 보고 있으므로 양보하기 힘든 사안이다.
국민들이 소말리아로 건너가 해적이 되기를 자처하거나 인재가 해외로 유출되는 현상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것이야 대부분의 빈곤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소말릴란드 정부는 국제적으로 미승인 국가로 취급되어 국제 투자 등에 한계가 많아서 이렇다고 해명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해적 우호 소말리아의 자치지역인 푼틀란드의 경제 상황이 훨씬 나아져, 더 심해지고 있다.
론리플래닛 아프리카 편 2013년판에서 사람들이 많이 안 가는 나라(리비아[11], 차드, 남수단,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등)는 아예 빼버렸다. 그리고 소말리아 역시 수도 모가디슈를 비롯한 지역은 빼버렸다. 원래 론리플래닛은 자유여행자가 다니는 게 도저히 힘든 지역 여행정보는 아예 빼버린다. 그런데 소말릴란드는 하르게이사의 도로와 호텔, 식당 등이 매우 상세하게 나와있다. 남수단이나 앙골라 같은 몇몇 아프리카 국가보다 오히려 치안적으로 낫다고 간주한 것이다.
그리고 소말릴란드는 강간범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하원에서 통과시켰고, 상원에서도 통과될 예정이다.# 뭔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일대는 원래 여성 인권 인식이 미개할 정도로 엄청 낮은 곳이다.[12]

7. 외교




8. 군사




9. 국가


《오래 평화롭게》 (소말리어: Samo ku waar)



[1] 하르게이사는 2015년 통계 인구 110만명으로 소말릴란드의 최대 도시이기도 하다.[2] 2017년 세계은행 발표 수치[3] 2017년 세계은행 발표 수치[4] ISO 4217로 SLSH이다.[5] 국가코드 최상위 도메인(country code top-level domain).[6] 하르게이사에선 근처 추락한 소말리아 공군의 MiG-17을 활용해 당시 학살에 대한 추모비를 세워놨다.[7] 다카노 히데유키, 『수수께끼의 독립국가 소말릴란드』, 글항아리, 2019, p. 404-409, 499-505[8] 먼저 무장을 해제하기를 주저하는 이유는, 무장을 해제하면 이를 기회삼아 주변의 무장한 부족들이 공격해올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다에시의 위협 때문에 각 지방의 부족들과 민병대, 군벌 세력들, 정파들이 통합에 서명한 리비아가 있는데, 이마저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직도 내전이 진행 중이다.[9] 그 밖에도 대통령 청사를 경비하는 병력이 4명에 불과했으며, 경찰이 퇴근할 때 총기를 경찰서에 놓아두고 가야 한다고도 보도했다. 이집트나 튀니지, 모로코 등도 경찰이 총기를 집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10] 1963년 아프리카 통일 기구(OUA), 현 아프리카 연합(AU)은 식민지 시절 국경선을 준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11] 카다피가 물러나면서 입국이 자유로워졌다.[12] 예컨대 요르단 같은 경우는 강간범이 결혼하면 무죄를 해주던 악법을 2017년 8월 1일부터 폐지했는데 이게 아랍권에서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4번째인데, 이 4개국은 아랍권에서 제일 세속적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