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경식

 


'''CJ그룹 초대 회장
손경식
孫京植 | SOHN KYUNG-SHIK
'''
'''국적'''
[image]대한민국
'''본관'''
밀양 손씨
'''출생'''
1939년 9월 15일 (84세),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
'''소속'''
CJ그룹 회장
CJ 대표이사 회장
CJ제일제당 대표이사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부모'''
아버지 손영기[1]
'''형제'''
누나 손복남[2]
'''학력'''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MBA
1. 생애
2. 기업 활동
3.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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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939년 서울에서 손영기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손씨이다.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5학년 때 6.25발발을 지켜봤고, 1.4후퇴 때 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시로 피란을 갔다. 이후 부산광역시에 피난 와 있던 경기중학교로 입학했는데 당시 천막을 치고 공부했다고 한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 검정고시를 통과해서 이후 3개월만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합격해 수재로 떠오르기도 했다.[3] 대학 졸업 후 1961년 한일은행에 입사해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4]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2. 기업 활동


1968년 귀국해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삼성전자 설립에 기여했다. 1973년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이사로 옮긴 뒤 부친을 보좌하다 1976년에 부친 손영기 사장이 사망하자 1977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제일제당의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후 삼성그룹과의 분리 과정에서 제일제당이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해결사로 활약했다. 삼성이라는 초거대 기업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 나온 제일제당이 큰 위기 없이 현재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그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 또한 외삼촌이면서 자신의 '경영스승'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그룹의 주요 결정이 있을 때마다 허심탄회하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CJ에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1995년 제일제당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하고 1996년 그룹 출범과 동시에 그룹 총수가 됐다. 2005년 11월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이 중도 사퇴하자 대신 회장직을 맡았다.
2008년, 3년 임기의 대한상의 회장에 재선임됐다.
한국능률협회, 산업기술진흥협회, 식품공업연합회 등을 맡으며 우리나라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해온 그는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재계와 정계를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5] 한국경제 홍보대사 역할도 잘 해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6] 상공회의소 회장 재임시 CJ그룹 회장직은 유지했지만 그룹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실형 및 수감, 유전병 등으로 인한 건강 악화로 회장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사임하고 그룹 경영에 복귀해 비상경영 체제를 이끌었다. 손 회장의 상공회의소 회장 사임 당시 박근혜 정권의 압력으로 그만 뒀다는 의혹이 있다. 손 회장의 사임으로도 모자라 이미경 부회장의 경영 일선에서의 퇴진을 요구 받았다.
박근혜 정권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때의 이맹희 회장처럼 대통령을 독대하고 사면 논의 후 출연금을 냈다는 진술을 했으며 최순실 청문회에서도 박근혜 정부의 부당한 외압을 밝혔다.
2018년 3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되었는데 전경련이 해체된 이후 이 단체가 기업집단을 대표함에 따라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 이야깃거리


인맥이 엄청나기로 유명하다. 대외 직함만 70여 개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주한미군을 비롯해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두텁다. 주한미국대사관 또는 미국 관련 단체가 개최하는 행사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초청받고 있다. 2018년 들어서는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2018년 9월에 열린 2018 남북정상회담 평양에 경제인 대표단 일원으로 방북하였다.

[1] 경기도지사, 농림부 국장, 안국화재 사장.[2] CJ그룹 고문, 이재현 회장의 어머니.[3] 자타칭 '서울법대 3대 천재' 중 1인으로 꼽힌다.[4] 첫 사회 생활을 은행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꼼꼼한 업무 스타일을 갖고 있다.[5] 이명박 정부 후반에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 자리는 강만수, 사공일 등이 맡았던 자리이기도 하다.[6] 다만 대한상의 직원들로부터의 평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