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크로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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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의 배우 겸 패션 모델. '''80~90년대 패션계 아이콘'''이자 슈퍼모델 전성기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2. 개요
패션모델을 '''슈퍼모델'''이라고 불리게 한 대표적인 모델로 아직도 슈퍼모델 전성기 탑3를 꼽을 때 언제나 지명되는 레전드 급 슈퍼모델이다.[1] 아재들조차 패션은 몰라도 이 사람은 안다는, 세계적인 지명도의 모델계 여왕.[2] Omega, 메이블린 뉴욕, 펩시 등 유명 브랜드의 아이콘이었다.
80년대 키크고 골격도 크면서 건강한 섹시미의 대표주자. 슈퍼모델의 정의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모델이다. 모델계가 대중에게 인지도를 얻기 시작할 때의 모델로 전성기때도 59kg의 체중이기 때문에 현재 기준으로는 커머셜 모델에 적합한 사이즈. 실험적 패션을 소화해야 하는 하이패션 모델은 깡말라야 하기 때문에, 크로퍼드 자신은 하이패션 모델의 조건을 죽어도 충족시킬 수 없다고 고백한 바 있었다.
플레이보이에 두 번 커버걸이 됐는데, 그의 커리어에 마이너스였다는 평이 많았다. 90년 대부터 모델 트렌드가 하이패션의 케이트 모스 쪽으로 넘어갔고, 안그래도 디자이너들이 커머셜 쪽과의 차별화로 매스티지(명품 대중화) 시대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려 하는 상황에서[3] 크로퍼드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플레이보이 출연으로 크로퍼드의 하이클래스 이미지에 타격이 우려됐다.[4]
16살때 쇼핑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사진작가에 의해 발굴됐다. 모델 에이전시에서 입술 위의 점을 빼라 했지만 점이야말로 신디 크로퍼드 만의 매력포인트가 됐다. 사적으로는 91년 리처드 기어와의 세기의 결혼으로도 유명하다. 물론 대부분이 그렇듯 이혼(1995년)으로 끝났다. 대신 98년의 재혼에서 비로소 제 짝을 만났다.
1987년 마이클 제이 폭스의 코메디 영화 <The Secret of My success>로 영화계의 문을 두드린 이후, 1995년 <페어게임>에서 처음 윌리엄 볼드윈과 공동주연을 맡았으나 악평을 받았고 흥행도 참패했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무려...'''변호사''' 였다. 연기가 워낙 안되다 보니 제작 의도와 달리 윌리엄 볼드윈에게 편집이 몰리는 불상사가 있었다. 그런데도 영화 인터뷰마다 신디 크로퍼드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었다고. 윌리엄 볼드윈도 그 유명한 볼드윈 패밀리의 일원이었건만. 2010년 숀 펜과 나오미 왓츠가 주연한 전혀 다른 내용의 영화 <페어 게임>이 있다. 이름만 같다.
자신의 프로덕션인 크로대디 프로덕션(Crawdaddy Productions)를 통해 피트니스 비디오나 뷰티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아이들 대상으로 피트니스 애니메이션도 제작했는데 무려 코비 브라이언트를 성우로 기용했었다.
2014년 테일러 스위프트의 Bad blood 뮤직비디오에 카메오로 등장했다. 대부분의 반응은 테일러의 디스곡에 전직 슈퍼모델이 끼여서 뭐하는 거냐는 반응. 어쨌든 제시카 알바, 셀레나 고메즈도 같이 카메오 출연을 했기 때문에 뭐 못 나올 것까진 없긴 했다. 외모 관리가 잘 돼 굴욕은 없었다.
3. 외모
1980년대까지 백인 모델은 대개 금발벽안이 주류였지만 그녀 이후로 갈발갈안도 백인 모델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5] 대안우파나 SJW의 편견과 달리 그녀는 라티노가 아니며 멀리는 샤를마뉴로 조상이 이어진다.
1990년대를 주도하던 미국의 슈퍼모델 5인방에서 외모가 가장 완숙하고 라니아 알 압둘라와 안면 윤곽이 닮았다. 빅토리아 시크릿과 계약한 적은 없었지만 미국에서 마릴린 먼로 다음으로 섹스 심볼로 각인되었다.[6]
4. 가족
1998년 5월 29일 전직 모델 랜디 거버(Rande Gerber, 1962, 사진 맨 우측)와 재혼해 1남 1녀를 두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랜디 거버는 뉴욕 출신의 유대인으로, 모델을 은퇴한 후엔 세계 각국에 바, 레스토랑과 호텔 라운지 사업을 하는 <미드나잇 오일 앤 거버 그룹>의 회장이 됐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건 1991년으로 파라마운트 호텔 라운지에 입점한 것이 시작이었다. 따라서 신디 크로퍼드와 만난 건 이미 사업가로 잘 나가고 있을 때였다. 거버 그룹은 2017년 영국 주류 대기업 Diageo로 7억 달러에 매각됐다. 앞으로 10년간 회사 매출에서 총 3억 달러를 더 받는 조건이다.
부모 모두 모델출신에 두 자녀도 모두 모델이다. 장남은 프레슬리 워커 거버(사진 맨 좌측). 99년 생으로 183cm이다. 재밌는 게 엄마와 반대쪽 입가에 큰 점이 있다. 2018년 미국 펩시 광고의 주인공으로, 엄마 크로퍼드가 펩시 슈퍼볼 광고 모델이었던 레거시가 있다. 여자친구는 역시 같은 모델인 케일리 킹(Cayley King)으로 부모끼리도 친한 듯.
차녀 카이아 거버는 175cm의 큰 키, 긴 다리에 얼굴까지 엄마를 빼닮은 딸로, 10세 때 ‘영 베르사체’의 광고 캠페인 모델로 활동 한 적 있으며, 2017년에 캘빈 클라인 패션쇼로 본격적으로 런웨이에 데뷔했다. 2017년부터 엄마의 omega광고를 이어서 하고 있다. 브랜드 메인광고는 같이 하고 젊은 층 대상의 서브 모델은 단독이다. 2018년 5월부터는 한국에도 마케팅이 시작됐다. 오빠의 여친인 케일리 킹과 같은 런웨이에 선 적이 있으며 사이가 꽤 좋은 듯.
5. 여담
- 클라우디아 시퍼와 대니얼 볼드윈이 나온 《페어게임 2》가 2001년 한국에 개봉됐다. 사실 《페어게임》과는 상관도 없는데 윌리엄 볼드윈의 형과 탑모델이 주연했다는 것 때문에 제목만 그렇게 붙인 거였다. 원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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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능하지만 유명인 부모의 이름값으로 날로먹는 금수저모델들에 대한 비판이 패션계에도 만연한데, 크로퍼드의 자녀들은 그런 금수저 모델들 중 몇 안되는 수저 값 하는 모델로 꼽힌다. 특히 딸 카이아는 그야말로 하이패션에 최적화된 프로포션(176cm에 45kg)에, 현대 모델의 워킹과 달리 자신의 현역시절 스타일인 파워워킹을 엄마가 빡세게 가르쳐서인지 신인에 금수저임에도 워킹실력이 준수해 화제가 되었다.
- 쾌걸 조로리 동화 결혼소동 편에서 그녀를 패러디한 신디 크료포드라는 모델이 등장한다.
- 일리노이 주에서 고교 졸업반 시절 무려 노스웨스턴 대학교 화학공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풀타임 모델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기 위해 한 학기만 다니고 중퇴했다. 시카고에서 일하다가 1986년 뉴욕 시로 이주했고 모델 에이전시와 계약했다.
[1] 보통 수퍼모델 탑5에 신디 크로퍼드, 클라우디아 시퍼, 나오미 캠벨, 린다 에반젤리스타, 크리스티 털링턴을 꼽고, 탑3로 신디, 나오미 + 나머지 중 1명을 꼽는다.[2] 슈퍼모델 전성기가 지난 지금은 하이패션과 커머셜 모델의 체형이나 표현자체가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다. 지금 당장 스네자나 오놉카, 칼리 클로스 등의 2천년대 중반 이후 모델랭킹 상위권의 하이패션 모델을 아는 평범한 남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3] 머리 빈 졸부집 아들, 딸 돈 끌어당긴다는 전략으로 선회한 돌체 앤 가바나 같은 브랜드도 있지만, 대부분의 클래시한 스타일의 명품 브랜드들은 이즈음부터 커머셜 라인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모델을 기용하고, 광고 컨셉이나 캣워크 방식도 바꾸어버린다. 90년대 후반부터 하이패션계에서 이전의 밝고 활기찬 캣워크와 섹시한 남녀들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무표정한 깡마른 모델들이 무뚝뚝하게 걷는 것이 대세. 말그대로 움직이는 옷걸이의 역할이 된 것이다.[4] 외국 스타들은 플레이보이 모델은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실상은 이런 이유로 엄청난 개런티를 포기하고 출연을 사절한 유명인이 더 많다. 제니퍼 애니스턴, 리애나, 이리나 샤크, 심지어 패리스 힐튼이 그 예이다. 그리고 인기 하락이나 경제난으로 마지막 기회라도 잡아야 한다는 심정으로 등장하는 위기의 스타들이 플레이보이 모델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다나 플루토, 린지 로언, 나디아 코마네치 등이 그 예이다. 인기절정의 여성스타들이 누드를 공개할 때는 보그 등의 고급 여성 패션 잡지에서 아트 누드의 형식으로 임하여, 몸매 자랑겸 화제도 뿌리고, 이미지도 좀 고급스럽게 만드는 전략을 취한다. 그게 아니면 남성들 눈요기감 이미지의 잡지 대신 좀 더 대중적인, 특히 여성 독자들이 더 많은 배니티 페어 등의 잡지에서 나름 명분있는 컨셉-임산부의 아름다움, 출산 직후 튼 살의 아름다움, 암 투병중 약해진 몸을 그대로 보여주기 등-으로 이미지 상승을 노리거나 말이다.[5] 야스민 가우리가 금발벽안의 백인 모델 위주인 패션계를 갈발갈안이나 흑발흑안도 포함되게한 업적이 이었지민 그녀는 사생활 노출을 꺼렸고 활동기간도 7년뿐이기 때문에 잊혀진 모델이 되었다.[6] 마릴린 먼로는 현재 기준으로는 섹시함보다는 정숙함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마릴린이 활동한 시기가 아직 성적 보수주의가 성행하던 1950년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