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욱(1977)

 



정현욱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2
2011
2012


1998 KBO 퓨처스 남부리그 최우수 평균 자책점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62번
최우채(1994)

정현욱(1996~2004)

최재현(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9번
김현중(2005~2006)

정현욱(2007~2012)

김희걸(2013~2014)[22]
LG 트윈스 등번호 19번
김기표(2010~2012)

정현욱(2013~2016)

고우석(201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9번
이우선(2014~2016)

정현욱(2017)

황두성(201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1번
황두성(2012~2017)

정현욱(2018~)

현역


삼성 라이온즈 No.91
<colcolor=#074ca1> 정현욱
鄭現旭 / Jong Hyun-Wook
[1]
출생
1977년 12월 2일[2] (46세)
[image]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장안초 - 건대부중 - 동대문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좌타[3]
프로입단
1996년 2차 3라운드 지명(전체 21번,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6~2012)
LG 트윈스 (2013~2016)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1군 불펜코치 (2017~2019)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20~)
애칭
국민노예
1. 개요
2. 선수 경력
2.1.1. 2004 시즌
2.1.2. 2005 시즌 ~ 2008 시즌
2.1.4. 2009 시즌
2.1.5. 2010 시즌
2.1.6. 2011 시즌
2.1.7. 2012 시즌
2.1.8. FA
2.2.3. 2015 시즌
2.2.3.1. 위암 투병
2.2.4. 2016 시즌
2.2.4.1. 은퇴
3. 지도자 생활
3.1. 삼성 라이온즈 코치
4. 기타
5. 연도별 성적


1. 개요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의 우완 불펜 투수. 현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 코치.
삼성 시절에는 권혁, 권오준, 안지만과 함께 삼성의 허리를 책임졌다. 아래 선수 생활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그야말로 대기만성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선수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고단한 직책을 맡음에도 철저한 몸관리와 성실함을 보여주며 삼성 투수진에게는 그야말로 귀감이 되는 모범적인 선수였다. 하지만 FA가 되어서는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플레이스타일은 직구 중심의 파워 피쳐. 다만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속구, 즉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는다. 정현욱이 던지는 직구는 전부 투심 패스트볼이다. 그런데도 구속이 꽤 나오는 편으로, 잘 나오는 날은 150km도 넘는다. 변화구는 커브와 스플리터를 주로 던진다. 특히 커브 각이 꽤나 좋은 편.
또 다른 특이점은 여타 불펜 투수와 달리 휴식 주기가 굉장히 짧다. 대부분의 불펜 투수는 쉬면 컨디션이 회복되어 구위가 더 좋아지지만, 정현욱은 오래 쉬면 오히려 컨디션이 나빠진다. 선동열, 류중일 모두 이 점을 인정했을 정도. 원래 속구형 투수이기 때문에 오래 쉬면 컨트롤의 감을 잃는다고. 대략 3일 정도 쉬면 감을 잃는 듯.[4] 선동열 감독이 정현욱을 그렇게 쓰다가 혹사한다고 욕먹은 적도 있을 정도..
삼성 시절에는 투수 조장을 맡았다. 고참임에도 스스로 먼저 나서 훈련하는 등 성실한 면을 보이는 데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2군 선수들에게 야구용품을 챙겨주는 등, 후배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거기에 담배나 술을 안 한다.[5] 매 홈경기 전에 경산에서 2시간 동안 훈련하는 등 자기 관리도 철저했다.

2. 선수 경력



2.1. 삼성 라이온즈 시절


[image]
1999년에서 2001년 사이. (출처: 포토로)
초창기에는 불같은 강속구를 지닌 투수로 많은 기대를 받았었다. 그러나 볼만 빠르고 제구가 형편없어 선발과 불펜으로 적지 않은 기회를 부여받았음에도 전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투구 폼도 전성기 시절과는 달리 많이 딱딱하고 엉성하여 더욱 제구가 안 되는 모습이었고, 그렇게 평범하게 볼만 빠른 미완의 대기로 남아 있다가 사라지나 싶었다. 그래도 정현욱을 붙잡아 놓고 키웠던 장본인이 바로 임호균.
여담으로 1998년 시즌 후 해태 타이거즈와의 임창용양준혁, 곽채진, 황두성 트레이드 때 원래 황두성 대신 해태로 갈 뻔했다. 그러나 해태 구단 실무자의 착각으로 황두성이 대신 갔다.[6]
2000년에 2군 생활을 하던 도중에는 김성근에게 맞기도 했었다.[7]

2.1.1. 2004 시즌


2004년에 선동열 투수 겸 수석코치가 부임함으로써, 스프링캠프에서부터 투구 폼 교정과 그의 조련 덕택 이 때부터 조금씩 포텐을 터뜨려 나가기 시작한다. 시즌 중반까지 윤성환과 함께 특급 중간계투로 쏠쏠하게 활약하며 삼성의 막강 허리로서 잘 나가나 싶었는데 시즌 막판 윤성환, 현재윤과 함께 병역비리 사건이 터졌고, 현재윤 등과 함께 구속.
구속된 후 구치소에서 푸시업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방법은 다르지만, 수감 중에도 공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하는 유동훈도 비슷한 케이스.

2.1.2. 2005 시즌 ~ 2008 시즌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되어 단기 징역을 살고 출소한 후, 관련 법규에 따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다. 경산시청에서 복무를 마치고 2007년 8월에 소집 해제되어 마운드로 돌아왔다. 이후 삼성 마운드의 기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황두성 대신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한 걸 생각하면 삼성팬으로서는 아찔한 일.
병역비리로 야구인생이 그대로 끝날 뻔 했으나,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팔굽혀펴기[8]로 체력을 유지했다. 인터뷰에선 "다른 재소자들도 운동을 하는데 운동선수인 내가 운동을 안 하면 어떡하냐." 면서 구슬땀을 흘렀다고. 출소 후 복무하면서 퇴근 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노력은 그대로 빛을 발해 불명예를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하는 원동력이 된다.

2008년 프로야구에서 LG 정재복, SK 정우람과 함께 소위 정노예 3인방 중 수장으로 떠올랐다. 불펜 투수로 주로 나왔음에도 정규이닝을 채웠을 정도로[9] 이닝을 많이 소화한데다 선발, 불펜, 마무리 같은 보직을 가릴 것 없이 등판했기 때문. 선동열 감독의 야구 스타일에 부합하는 투수 중 하나. 다만, 정현욱의 등판 간격을 보자면 혹사라고 하긴 뭐하다. 집중 관리되는 노예인 듯.
한화 마정길과의 호각지세로 마노예 vs. 정노예라고 불리기도 했다. 다만 팀이 유리할 때에는 나오고 점수차가 벌어져 질 듯한 경우 안 나오는 케이스.
이 당시 캐롤 'The First Noel'를 개사한 노예송이라는 응원가가 나오기도 했다. 당연히 처음 나왔을 때부터 비난받고는 바로 사라졌다.

2.1.3.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회에 처음으로 국대에 뽑혔으며 아시아 예선에서 일본국대를 상대로 국민노예라 불릴 만큼 훌륭한 활약을 했다.[10] 심지어 유니폼에 들어간 로마자 성 표기도 JONG(). 모처에선 명성황후를 패러디해 "내가 조선의 국노다"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다.
[image]
이제는 볼 수 없는 전성기 투심 패스트볼
그리고 2라운드가 열리는 미국에 가서 멕시코 타선을 상대로 호투를 했고, 이후 한동안 등판하지 않아 정말 해방되었나 했으나... 베네수엘라와의 준결승에서 다시 등판하여 1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일본과의 결승전에도 5회 무사 1,3 루 위기에 구원등판하여 무실점으로 이를 막아내고 6회에는 일본 타선을 삼자범퇴로 처리하는 등 나카지마 히로유키에게 1실점을 했지만 호투를 펼쳤다. 누구보다도 한국 팀의 WBC 우승을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결승전 10회초 사인이 차단당한 채 임창용의 8구가 이치로를 향해 날아가고…

2.1.4. 2009 시즌


WBC에서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꾸준히 등판하며 초반부 초토화된 삼성의 투수진의 한 줄기 희망으로 자리매김했으나 점점 방어율이 상승,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부상이 아닌 계속된 투구로 인한 피로누적으로 인한 부진이었으며, 11일만에 다시 1군경기에 출장하여 다시 위력적인 투구를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9월 잔여경기 시즌에서 롯데와 피말리는 4위 싸움을 하는 도중, 롯데를 상대로 등판해서 권혁과 함께 두들겨 맞아버렸다. 그리고 한화를 상대로 3:3 상황에서 등판하자마자 4안타 볼넷 1개를 내주면서 방어율 99.9를 찍어버린뒤에 강판당하면서 그날 패배의 원인이 되어버릴 정도로 페이스가 하강.

2.1.5. 2010 시즌


겨울과 봄에 국제대회가 없는 상황 속에서 푹 쉰 결과, 팀내 홀드, 세이브 1위로 2009시즌보다 나은 성적을 보여주며 권혁, 안지만과 함께 안정권 트리오를 결성하며 삼성의 무적 불펜 전설을 완성했다. 구속도 150km/h까지 올랐으며 2009년과 비교해봤을 때 커브도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2009 시즌과 마찬가지로 시즌 막판 피로가 누적되면서 페이스가 다소 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최종 성적은 ERA 3.20 9승 1패 11세이브 12홀드.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5:2로 지던 6회말 2사 2루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다섯 타자를 상대하여 단 한 명도 출루시키지 않고 1⅓ 23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팀은 8회말에 4점을 뽑아 5:6으로 재역전승했다.
10월 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6회초에 권혁이 3실점하여 팀이 스코어 스코어 4:0으로 지고 있던 1사 1, 2루에서 등판하여 3개의 공으로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냈다. 이 날 정현욱은 ⅔이닝 3투구수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4:3으로 패했다.
10월 10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4:2로 앞선 4회말 1사 2,3루에서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1번타자인 정수빈에게 2타점 3루타를 맞고 3번타자인 이종욱에게 1타점 내야안타를 맞아 스코어 4:5를 만들고 말았다. 정현욱은 이 날 1⅔이닝 27투구수 4피안타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이 스코어 4:6으로 지던 8회초에 2점을 뽑아 패전을 면했으며 팀은 9회초에 2점을 뽑았지만 9회말에 3점을 내줘 8:9로 패했다.
정현욱은 2010년 플레이오프 전 경기에 등판하여 5⅔이닝 5피안타 1사구(死球)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1.59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정현욱은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2⅔이닝 3피안타 1사구(死球) 2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6.75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정현욱은 2010년 포스트시즌 9경기 중 7경기 등판하여 8⅓이닝 8피안타 2사구(死球) 7탈삼진 3실점 3자책점 평균자책점 3.24를 기록했다.

2.1.6. 2011 시즌


2011년 시즌 초기, 삼성 불펜진 중 제일 불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월 3일 기아전에서는 8:8 동점상황에서 이범호에게 솔로홈런를 맞았으며, 4월 8일 SK전에서는 1:1 동점 상황에서 차우찬 뒤에 등판하여 정상호에게 투런홈런을 맞았다. 그리고 4월 13일 LG전에서는 박용택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았다.. 이리하여 개막한지 2주도 안되어 3패를 기록하게 되었다. 4월 22일 넥센전에서도 강정호에게 역전 적시타를 맞았다. 카도쿠라 켄이 쌓아놨던 주자라 패전투수가 되진 않았지만. 이렇게 시즌 초, 구위와 구속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제구가 잘 안되는 모습에 '노레기'로 격하되어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차츰 안정을 되찾더니 4월 이후에는 예전의 페이스로 돌아와 팀의 막강 허리의 한 축을 책임졌다. 감이 살아난 5월 이후의 방어률은 0.85(…) 결국 1점대 방어율까지 떨어뜨리며 관리받는 노예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었다.
8월 4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홀드를 기록하면서 16홀드로 LG 이상열과 홀드 공동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8월 7일 롯데와의 경기에서 8회에 등판하여 끝판대장 없이[11] 9회에 롯데의 클린업 트리오를 깔끔하게 막아내며 시즌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2011년에 24홀드로 홀드 2위를 차지하였다.
팀이 시리즈 전적 1승으로 앞선 2011년 10월 26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0:2로 앞서고 있던 8회초에 등판하였는데, 노예 생활을 한동안 하지 못해서 감을 잃었는지, 박재상에게 2루타, 최정에게 볼넷, 박정권에게 안타를 허용하여 폭풍 같이 스코어 1:2를 만들고 끝판대장을 소환하게 만들었다. 끝판대장의 위엄과 대수비로 나온 이영욱의 활약으로 팀이 1:2로 승리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현욱은 예능이 뭔지 아는 선수+잔인한 희망고문 선사자[12]가 되었다. 이 날 정현욱은 0이닝 7투구수 2피안타 1볼넷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99.99를 기록하였는데 이날 등판이 정현욱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그리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했다.
다행히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한국시리즈의 부진을 만회하듯 중간 계투로서 예전같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팀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2.1.7. 2012 시즌


성적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2011년에도 시즌 초에는 부진하다가 5월부터 서서히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지만, 12시즌엔 6월 들어서도 컨디션을 되찾지 못했다.
5월 4일, 한 팬이 새벽에 술집에서 정현욱, 안지만, 오승환을 봤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팀은 침체기에 빠져 있는데 이나 푸러 다닌다며 까이고 있다. 특히 정현욱은 평소에 굉장히 성실한 이미지인데다, 5월 4일 당일 경기에 등판해 1이닝 3실점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보여 더 까였다.
6월 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 전에서 4년만에 선발로 등판했다. 윤성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생긴 선발진의 공백을 메꿈과 동시에 떨어진 정현욱의 컨디션을 오랜 이닝을 던져보며 올려보자 하는 의미의 선발등판으로, 대부분은 60구정도를 던지고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류중일 감독은 80구에서 100구는 던져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 실제로 93개의 투구를 하며 4⅔이닝 3실점을 하였다. 성적만 보면 상당히 좋지 않지만 불펜 투수로 뛰다가 4년만에 선발로 등판한 점도 그렇고, 5회 투아웃까지는 꾸역이지만 상당히 호투하다가 1아웃을 남겨놓고 연타를 맞아 만루 상황에서 강판되었고, 후속 투수가 필승조도 아닌 이우선이 올라와 공 두개로 깔끔히 3점 전부를 분식회계 해버렸다는 점[13] 등등 때문에 정현욱은 그리 까이지 않았다.
그나마 추격/패전조로 내려간 후로는 제 몫을 해주며 2012년 9월에 접어든 후론 방어율도 3점대로 많이 낮아졌다. 그런데 하도 말아먹은 경기의 임팩트가 커서인지 평균자책점'만' 보면 많이 까였다.
팀은 또다시 우승했지만, 본인은 이전 시즌에 비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다만 리그 전체적으로 봤을 땐 여전히 중상위권 성적이라 할 수 있었다.
정현욱은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1⅔이닝 2피안타 1탈삼진 2실점 비자책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1.8. FA


시즌이 끝난 후 FA를 신청. 본인은 4년 계약을 원했지만 구단 측에서는 3+1 계약을 제시하여 아귀가 맞지 않았고, 결국 FA 시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나올 당시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보여주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삼성 팬덤의 분위기는 좋지만은 않았다. 대부분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한 멍한 반응을 보였으며, 일부 팬들은 배신감마저 느껴진다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오히려 2군에서 썩던 신인들에게 간만에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었다며 전화위복이라는 이들도 있었다.
어찌됐건 정현욱은 다른 구단과의 협상을 가지게 되었다. 불펜 사정이 널널하지 못한 KIA한화, NC 등지에서 노릴 가능성이 컸다.[14]

2.2. LG 트윈스 시절


[image]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다르게 2012년 11월 17일, LG와 4년 28억 6천만원에 계약하며 LG 트윈스둥지를 옮겼다. 원소속구단 우선 협상 기한을 넘기자마자 LG 김기태 감독으로부터 함께 하자는 문자를 받았고, 백순길 단장이 직접 찾아와 오랫동안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야구선수로서 어느 정도 황혼기에 접어들고 있는 정현욱에게 4년의 계약기간을 보장한 것이 정현욱의 마음을 움직였을 가능성이 크며, 봉중근이라는 마무리 투수가 있는 LG에서 그나마 부담갖지 않고 하던 필승조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어서 LG행을 선택한 듯[15]. 자녀들 교육 문제도 있고... 보상선수로 이승우가 삼성으로 갔다.
이적 후에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세 가지 표현이 유행했는데, 첫째는 웃음이 나옵니다 ㅋㅋ[16], 둘째는 박수친다[17] 세번째는 그 선수
결과적으로는 이닝이터와 실패라는 평가가 공존하지만 그다지 위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위암 투병이라는 불운까지 겹쳐서 LG의 FA 잔혹사의 일부가 되었다. LG 트윈스/팀 특징 참조

2.2.1. 2013 시즌



전반기엔 그럭저럭 활약했으나, 후반기 들어서 성적이 나빠져 등판 빈도 자체도 적었고, 포스트시즌에는 나오지도 못한 채 팀의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2.2.2. 2014 시즌



꾸준히 등판한 만큼 꾸준히 맞았기에 꾸준히 욕먹었다. 그럼에도 계약 내용에 출전 일수 보장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할 정도로 계속 경기에 출전하는 통에 팬들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데 패전조로 나온 덕에 생각보다 이닝은 많이 먹어서 불펜 과부하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 패전조로 나와서 잘 막은 경기가 꽤 되는 편이었지만,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시즌을 마감했다.

2.2.3. 2015 시즌


재활이 길어지면서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6월 말경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이전의 정현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이 확 빠져버렸다.

2.2.3.1. 위암 투병

링크에 있는 사진에서 보듯이 살이 쪽 빠졌는데, 딱 봐도 운동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메마른 몸이다. 엠팍의 엘지 팬 중 한 사람이 이천에 갔을 때는 등번호를 보고서야 정현욱임을 알아봤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링크 밑의 댓글에서 위암 투병이라는 말이 나온 것.
위암이라는 소문이 맨 처음 나온 건 6월 19일디시인사이드 LG 트윈스 갤러리의 한 유동닉의 댓글이다. 이후 삼갤에 소식이 전파되었고 이 소식이 꼬리를 물어 결국 정현욱 연관검색어에 '정현욱 위암' '정현욱 암투병' 이 뜨기에 이르렀다.
LG 편파 중계로 유명한 사람이 현재 정현욱이 팔꿈치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아프다고 언급했다는 카더라 또한 언급되었다.
현역 선수 중 위암에 걸렸던 선수는 위의 정현석과 (당시 현역인)김상진 선수가 있었다. 김상진은 항목에도 있지만 먹성이 좋았던 것로 유명했다고 한다.
LG의 담당기자인 윤세호 기자에 의하면 2016년 복귀를 목표로 재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2.2.4. 2016 시즌


[image]
2016년 1월 6일 LG 트윈스 신년하례식에 나타났다. 정현욱 '올해는 부활 할게요'
2군 대만 스프링캠프 명단에 포함되었다.
3월 26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시범경기에서 6회초에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해 공 7개로 두 타자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참고로 2014년 7월 8일 두산전 이후 무려 627일 만의 등판이었다고 하며,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잠시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위암 투병 사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2014년 말 뼛조각제거 수술을 하면서 종합검진을 했고, 이 과정에서 위암인게 밝혀졌다고. 수술 후 20kg가 빠졌고, 한때 야구를 놓아버릴 뻔도 했지만 인터뷰를 한 당시에는 치료가 끝났다고 했다.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했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4월 9일 2군 경기에 선발투수로 등판해 5이닝 1실점을 기록했다.
4월 15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647일만에 1군 등판하여 3 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하고 1043일만에 세이브를 올렸다. 대부분의 팬들은 정현욱의 복귀에 박수를 보냈다.
4월 22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대신 코프랜드가 1군으로 콜업되었다.
5월 22일, 컨디션이 좋지 않던 우규민이 내려간 자리에 한 달만에 콜업되었다. 이준형, 코프랜드 등판 경기에 각각 1이닝씩 등판하며 롯데 타선을 틀어막았다. 전성기만은 못하지만 클래스는 여전하다는 것을 증명한 역투.
6월 7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가 26일날 1군으로 올라왔다.
8월 12일 잠실 NC전에서 8회초 진해수최동환이 내보낸 2명의 주자를 모두 분식하여 역전당하고 박민우헤드샷까지 하면서 퇴장한 가운데 등판하여 나성범을 고의사구로 걸러 1사 만루의 절체절명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조영훈박석민을 연속 삼진으로 잡아내며 자칫하면 6월 14일 경기 때의 대량실점이 재현될 뻔할 상황에서 팀을 구원하고 9회초에도 등판하여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처리하면서 팀의 9연승의 발판을 마련한 LG 이적 이후 최고의 호투를 보여주며 승리를 챙겼다. 특히 박석민을 삼진 잡을 때 낙차 큰 커브로 얼어붙게 만든 것은 일품 중의 일품. 그리고 그의 말처럼 16년 LG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2.4.1. 은퇴

부상과 암을 이겨내고 2016년 복귀를 이뤄냈지만 11월 18일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에선 만류했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강해 뜻대로 은퇴를 하게 됐다. 이미 시즌 시작 전에 은퇴를 결심했었다고 한다.

3. 지도자 생활



3.1. 삼성 라이온즈 코치


은퇴 후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 제의를 받았고[18], 이에 동의하며 친정 팀에 코치로 복귀하게 됐다. 대체적으로는 환영하는 분위기로 정정당당하게 못던지는 투수를 포함한 젊은 투수들의 멘탈을 바로잡아 주기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다. 다만 위의 "그 팀" 인터뷰 사건 때문에 거부감을 가진 팬도 일부 있다. 때문에 별명은 "그 코치"로 굳어져가는 모양새.삼갤반응
덧붙여 최훈은 미래를 내다보는데 성공했다.
2016년 12월 2일, 라디오볼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우규민 나오냐 사건에 대해 10분 가량 이야기를 나눴고, 육성으로 "야, 웃음이 나오냐?"를 직접 들려줬다![19] 그리고 2016년 12월 5일, 이번에는 우규민이 삼성과 FA 계약을 맺고 정현욱과 다시 같은 팀에서 뛰게 됐다.
2020시즌 1군 불펜코치에서 1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 메인 투수코치가 된 이후, 투수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훈련인 캐치볼부터 실전처럼 정성들여서 하라'고 주문했고 그것이 유효타로 먹혀들었는지 많은 투수들의 구속이 향상되었다. 최채흥, 원태인, 최지광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키고 그 노성호조차 다듬어서 잘 써먹는 기가막힌 행보를 보이며 아직 시즌 초반이지만 찬양을 받고 있다.
그러나 7월 들어 불펜진이 모두 붕괴하였고 그 과정에서 투수운용과 관련하여 허삼영 감독과 함께 비판 여론이 생기고 있다.
옹호를 하자면, 허삼영 감독과 함께 불펜진을 철저히 관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체력 상의 문제로 불펜진이 붕괴한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많다. 또한 현재 삼성 불펜진은 장필준, 우규민, 오승환 정도를 제외하면 경력이 거의 없는 영건들이다. 그렇기에 시즌이 지날수록 체력이 저하되는 현상은 어쩔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최지광김윤수.

4. 기타


"야 웃음이 나오냐?"
2010년 4월 20일 경기가 끝나고, 하이파이브 할 때 실책성 플레이를 저지른 최형우가 웃으면서 들어오자 확 분위기를 잡는 장면이다. 그 전날까지 삼성은 5연패를 하고 있었다. 그걸 넘어서 비슷한 입모양을 만들 수 있는 온갖 드립이 다 나왔다. 심지어 야갤에서는 "야, 우규민 나오냐?"라는 설까지 나오기도(...). 그리고 그는 정말로 우규민이 나오는 팀으로 갔다. 그리고 우규민은 후에 정현욱이 있는 팀으로 이적했다
2019년 들어서 오버워치의 겐지로 유명한 김혜성 성우의 더빙판도 나왔다.(1분 14초 부터)[20]
  • 안지만이 아프리카tv방송에서 말하길 본인을 pc방에 데려가며 놀란 라이언등의 투구를 보며 "와 폼 진짜 좋지 않냐? "라고 말했다. 안지만은 '와 진짜 야구에 미친사람이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 20대 때는 식욕이 왕성해서 라지사이즈 피자 2판을 그 자리에서 먹어치웠다고 한다. 2군에 있었을 때 별명이 경산 볼파크하이에나. 오죽하면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했을 때, 해태 관계자가 이름 대신 '그 덩치 크고 밥 잘 먹는 선수'라고 지칭했을 정도다. 30대가 된 이후로는 피자 1조각만 먹어도 배부르다고. 어렸을 때는 편식이 심해 약골이었다고 한다. 심판으로 재직 중인 이계성도 삼성선수 시절 한 먹성을 자랑했는데 경산 볼파크에서 숙소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저녁에 정현욱과 둘이서 남은 식당밥을 다 먹어치우고도 배가 안 차 밖에 나가서 감자탕 한 솥을 비우고는 돌아오는 길에 빵을 사와서 숙소에서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계성은 물론이고 정현욱도 그저 그런 2군 유망주에 불과했기에 이를 본 당시 삼성 구단 관계자는 식비 때문에 둘 중 하나는 트레이드 해야겠다는 농담도 했다고.
  • 생긴 것도 그렇고 위에서 나온 "웃음이 나오냐" 링크 발언 때문에 엄청 까칠하고 무서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호호아저씨다. 팬들에게 매우 상냥하고 목소리도 발랄해서 입을 여는 순간 깬다는 반응이 많다. 말주변도 생각보다 좋으며 심지어 말도 무지하게 빠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훗날 은퇴한 후 해설자가 되고 싶다 카더라.
  • 스스로 열심히 하는 선수라는 자부심이 있는지 이런 인터뷰를 했다. 그래서 오버한다고 장난식으로 까이고 있다.[21]
  • 경상북도 고령군 출신에 우락부락한 모습으로 걸쭉한 사투리를 쓸 거 같지만,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서울에서 보내서 사투리 사용을 많이 안 한다. 억양은 좀 있어도 언어 베이스가 서울말이다. 목소리도 쾌활한 스타일.
  • LG 이적 후 강남구 청담동에 전셋집을 구했는데, 평소에 워낙 안 꾸미고 다니다 보니 야구팬들조차 못 알아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 1996년에 프로에 지명된 선수 중 최후까지 남은 현역이었지만, 2016년 11월에 은퇴하면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바로 전에 은퇴한 선수는 장성호.
  • 쥐갤에서는 '떠들어라갑'으로 불린다. 이 인터뷰 기사 제목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정현욱이 온 후 팀은 비밀번호를 끊고 2연속 PS 진출을 했다.
  • 암 투병 이후 복귀한 시점에서의 별명은 암전드가 대표적이다.
  • 후배 동명이인이 저지른 사설 도박 사건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았다. 과거 삼성 구단 동료들이 원정도박을 저지른 과오가 있었는데 사설 도박을 한 정현욱이 다른 정현욱으로 밝혀지자 많은 삼성 팬들이 가슴을 쓸어담았다.

5.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6
삼성
1군 기록 없음
1997
1998
5
7⅔
1
0
0
0
1.000
4.70
6
3
6
2
4
4
1.44
1999
25
78⅔
3
7
0
0
0.300
5.03
80
12
32
56
54
44
1.39
2000
2
5
0
0
0
0
-
3.60
6
1
3
2
6
2
1.60
2001
1군 기록 없음
2002
20
36
1
1
0
0
0.500
4.00
32
2
18
34
20
16
1.33
2003
43
85⅓
4
5
1
3
0.444
4.59
91
6
34
77
47
44
1.43
2004
27
85⅔
4
5
0
1
0.444
3.36
81
8
42
67
41
32
1.39
2005
군복무(공익근무)
2006
2007
11
14⅔
0
1
1
0
0.000
5.52
15
3
11
6
10
9
1.64
2008
53
127
10
4
0
11
0.714
3.40
108
3
56
97
51
48
1.28
2009
62
79
8
5
6
16
(2위)
0.615
3.42
77
8
38
66
33
30
1.43
2010
61
70⅓
9
1
12
11
0.900
3.20
66
3
30
61
31
25
1.31
2011
59
72⅓
4
3
1
24
(2위)
0.571
2.36
70
4
34
52
22
19
1.38
2012
54
62⅔
2
5
0
3
0.286
3.16
57
1
21
48
25
22
1.2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3
LG
54
47⅔
2
5
2
16
(5위)
0.286
3.78
55
4
26
31
23
20
1.68
2014
25
32⅓
2
2
0
1
0.500
4.73
39
4
16
24
17
17
1.67
2015
1군 기록 없음
2016
17
21
1
0
1
3
1.000
7.29
22
4
14
18
19
17
1.52
<color=#373a3c> KBO 통산
(21시즌)
518
826⅓
51
44
24
89
0.537
3.80
805
66
381
641
403
349
1.40
[1] 보통 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로마자 이름 표기를 'Jeong' 이나 'Jung'으로 하는 데 비해 정현욱은 이름을 Jong Hyun-Wook으로 등록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어릴적 여권을 만들 때 영문명을 JONG으로 잘못 적었는데 수정하기도 힘들고 해서 그대로 갔다고 한다.[2] 프로필엔 1978년생으로 나와있는데 실제로는 1977년생이라고 한다.[3] #참조[4]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2011 한국시리즈 2차전. 너무 오래 쉰 정현욱은 컨트롤 난조로 화끈하게 불지르고 오승환을 소환하게 된다.[5] 암이란 게 단순히 술, 담배 안하고 운동 꾸준히 한다고 안걸릴 수 있는 그런 단순한 병이 아니다. 정현욱같은 경우는 해태 관계자가 이름이 생각안나 밥 잘먹는 투수라고 불렀던 일화에서 알 수 있듯 20대까진 폭식으로 꽤 유명했었는데 그 습관이 암을 부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비슷한 경우로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김상진도 폭식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게 결국 위암을 불러왔다.[6] 당시 해태 구단 실무자가 정현욱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그 공 빠르고 밥 잘먹는 투수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원했던 정현욱 대신 황두성이 넘어오자 해태 구단에서는 트레이드를 무를려고 했으나, 이미 입단식을 모두 치르고 유니폼 등번호까지 모두 배정받은 상태에서 그럴 수도 없었다고 한다.[7] 김성근쌍방울에서 해임된 후 2000년에 삼성의 2군 감독을 1시즌 동안 맡다가 1년 뒤 LG로 가게 된다.[8] 하루 1천 개를 했다고 한다.[9] 53경기 등판, 7경기 선발, 127이닝 투구.[10] 5경기 10.1이닝 2실점 13탈삼진 ERA 1.74, 결승 일본전에서 실점하기 전까진 7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실점한 점수 중 1점도 류현진의 분식회계에 의한것이다.[11] 8월 2일 ~ 8월 5일 경기에서 오승환이 4연속 등판했기에 휴식을 위해서 등판하지 않았다.[12] 이 날 양팀의 경기 내용은 심각한 투수전+물빠따 양상이었고, SK의 박희수가 불을 지른 후에는 삼성이 무난하게 경기를 이기는, 타 팀 팬들이 보기에는 지루한 경기라고 할 수 있었다.[13] 즉 정현욱이 올라와 있는 상황에서 직접 실점한 점수는 0점.[14] 특히 KIA의 경우 선동열 감독이 정현욱과 삼성 시절 선수-감독 사이로 한솥밥을 먹으며 삼성 최강 불펜이었던 JOKKA 라인을 구축했던 데다가 불펜야구를 선호하는 선동열 특성상 불펜이 약한 KIA의 팀 사정 때문에 정현욱을 원할 가능성이 컸고, 그리고 한화 역시 김응용 감독이 삼성 감독이던 시절 정현욱과 함께했던 적이 있어서 한화도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실제로 당시 김응용 감독은 정현욱과 김주찬을 FA로 영입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15] 위에서 언급된 한화, KIA, NC에 제대로 된 마무리감이 없기 때문에, 만약 정현욱이 갔다면 꼼짝없이 마무리 낙점이다.[16] 이적 후, 시범경기에서 최형우에게 홈런을 맞았다.[17] 3년 계약을 뿌리치고 LG와 4년 계약을 했을 때, 삼성 라이온즈 단장인 송삼봉의 박수치며 보냈다에서 유래.[18] 정확히는 김태한 코치가 은퇴 후 진로가 없으면 삼성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19] 링크 기준 67분 15초부터.[20] 메인은 모래반지 빵야빵야[21] 2011년까지 정현욱은 야구를 한 지 24년째가 되는데, 1억 개를 던지려면 쉬지 않고 하루에 적어도 11,000개를 던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