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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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북한의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친일파였고, 광복 후에는 공산주의 행보를 보이다 자진 월북하였다.
현재는 야인시대에서 영 좋지 않은 곳에 총을 맞은 것으로 희화화된 것으로 유명하며 실제로 김두한 일행의 총에 맞은 곳은 비슷한 위치인 하복부, 방광과 대장이 있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총을 맞은 장소는 중앙극장이 아니라 광통교라고 한다. 그리고, 연극 도중이 아닌, 연극이 끝나고 나서 당했다고 한다.
2. 생애
2.1. 개요 및 성장 과정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며, '''아오키 진에이'''[5] 는 창씨개명이다. 아버지는 철원 군수를 지낸 심완섭(沈琬燮[6] )[A] 이며, 어머니는 조선 말기에 군수를 지낸 강릉 김씨(江陵 金氏) 김병섭(金秉燮)의 딸[A] 이다[7] . 본관은 청송 심씨(靑松 沈氏) 안효공파(安孝公派)로 잘 알려져 있다.[8]
심영의 증조부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경택(沈敬澤)이었고, 할아버지는 고종 말기에 부사와 통리기무아문에서 개화의 실무담당을 맡아보았던 심상학(沈相學[9] )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그의 집안은 명문가인 청송 심씨 안에서도 가세가 굉장히 흥한 편에 속한다. 다만, 심영의 아버지 심완섭이 서자라는 이유 그 하나 때문에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초기에 노동과 날품팔이로 생활하던 아버지 심완섭은 늦게 돈을 모아, 그 재력을 바탕으로 철원군수직에 올랐다.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으로 자수성가한 케이스.''' 다만 심영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해서[10] 심영은 홀어머니 밑에서 유복자로 성장했다.
경성부에 거주했으며 의정부공립보통학교[11] 를 졸업하고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성제2고보 재학 시절 무용에 관심을 가지다가 학교의 승인 없이 연극 활동과 사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때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복학하기도 했다.
키는 166cm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작지만[12] , 몸무게는 63.7kg이다. 1937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운동을 안 하면 살이 쪄서 취미로 농구와 하이킹을 한다"고 밝힌 바 있고[13] , 연애에 대한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는 이미 결혼하였고, 가정에 대한 불만이 없다고 밝혔다. 다만 심영의 아내에 대해서는 성이 이씨(李氏)라는 사실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14] 집은 재동 46번지에 있었다고 한다[15] .
어느정도 나이가 찬 뒤에 이명희라는 다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 이명희와는 월북 이후에도 해로하였다.
2.2. 일제 강점기때 활동
당시 유명 극단이었던 토월회 연구생으로 입단하면서 연극계에 입문했다. 《연기 초승달》과 《즐거운 인생》에서 데뷔했는데, 대사도 없는 엑스트라 역을 맡았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은 1929년 11월 14일에서 16일에 걸쳐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간난이의 설움》이다. 당시 토월회는 심영의 연기에 대해 크게 호평하며 분발할 것을 주문했다. 이후 심영은 같은해 11월 21일부터 일주일 동안 아리랑 고개에 출연하면서 확실하게 데뷔를 하게 됐다. 1930년 1월 12일, 심영은 남경의 거리 1막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 관계자들 대부분이 반대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이 연극으로 심영은 극단의 간판스타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이 당시 종로 2가 YMCA 근처에서 '카페 멕시코'라는 카페를 운영했다고 한다.
연기력에 대해선 일본에서도 공연을 하는 등 꽤 호평을 받았지만[16] , 이후 라이벌 황철이 부상하면서 인기가 많이 하락했다.
1939년, 심영이 창립한 극단 고협은 1940년부터 만주 위문공연 등으로 '''친일 연극활동'''[17] 을 시작했다. 이후 고협은 본격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창작 친일연극들을 제작하였는데, 《가두》, 《동백꽃 피는 마을》, 《빙화》, 《아름다운 고향》 등이 그것이다. 일제를 미화하고 황민화를 선전하며 전쟁참여를 독려한 작품들로 당시 여러 상을 수상하였으며 친일 연극 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의 간부를 맡기도 하였다. 연극활동과 함께 《복지만리》, 《그대와 나》, 《망루의 결사대》 등 여러 선전 영화들에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중에 《망루의 결사대》는 비적과 일본군이 싸우는 활극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서 비적이란 항일무장세력을 말한다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18] 하지만, 2005년에 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에 의하여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다수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 황민화를 선전한 배우였지만 친일반민족행위를 주도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라는 사유로 친일반민족행위 심의 과정에서 기각되었다.[19]
2.3. 광복 이후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는 극단 혁명극장을 창설하는 등 '''좌익'''으로 활동한다.
1946년, 조선연극동맹[20] 과 서울신문사가 공동으로 개최한 ‘3·1절 기념연극제’에서 박영호[21] 극작, 박춘명[22] 연출, 극단 혁명극장의 《님》을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무대에 올리고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야인시대 드라마에서는 이 《님》이라는 연극이 사회주의 찬양 연극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김두한이 동아방송 인터뷰 링크 에서 한 발언을 바탕으로 창작된 것으로, 당시의 자료#1#2를 보면 실제로는 3·1 운동 당시의 학생들을 소재로 한 연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창작자들의 성향으로 보아 공산주의적 색채가 농후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1946년, 당시의 사회에서는 용인 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 물론 창작자와 연기자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사회주의자라 친일파와 비교적 척을 지고 반공주의에 우익인 김두한이 보기에는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
연극 《님》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1946년 3월 14일 오후 8시 30분경에 광통교 정 중앙[B] 에서 괴한의 권총습격을 받아 하복부에 중상을 입고, 김성진 외과에 입원하였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기사 그런데 하필이면 심영이 권총습격을 당했던 그 장소가 상당히 골때리는 위치였는데 바로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한 경계선인지라 어느 경찰서에서 수사를 해야할지 상당히 애매한 위치였다.[B] 이후 동아방송 인터뷰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은 자신이 심영을 습격한 것이며, 죽지 않은 그를 다시 찾아가 죽이려 했지만 어머니의 애원으로 살려주었다고 회고했다.
여기에는 김두한이 심영의 이름을 '심형일'이라고 말하고 극장과 병원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등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그가 회고한 동아방송 ≪노변야화≫ 라디오 인터뷰 육성 녹음본을 들어보면 '심형일이라고 말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이는 구마적의 본명 사례처럼 김두한이 말할 때 발음이 부정확한 탓에 기록자가 '심영'을 '심형일'으로 잘못 듣고 글로 쓴 내용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병원명의 경우, 최초 신문기사에서는 대놓고 '심영이 김성진 외과에 입원했다'고 밝혔으니, 심영이 우익에 의해 2차 테러를 당할 우려가 있어서 이로 인한 신변문제로 백병원으로 이송했을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야인시대의 의사양반의 말처럼 그 병원에서 안 되어서 백병원으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김두한 일당에게 피격된 후에도 1년 이상 남한에 남아 극단 민중극장을 창설하고 공연을 제작하는 활동을 했으나, 1947년에 좌익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기사1, 기사2 탄압이 점차 심해짐에 따라 어머니와 함께 1947년 말 혹은 1948년 초에 월북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 연기부장 심영은 조선인민군 육군 소좌 계급장을 달고, 서울에 들어왔다. 심영과 황철은 피난하지 못한 연극, 영화인들을 끌고와서 서울예술극단을 만들어 공연을 시켰으며, 후퇴하면서는 이들을 강제로 끌고가 납북시켰다. 최은희도 이때 많은 고초를 겪고 탈출에 성공하였다고 한다.기사
월북한 이후에는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황철과 함께 북한 예술사에서 이름을 날린다. 그가 출연한 작품은 '내고향'(1949),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1952), '정찰병'(1953), '벗들이여 우리 함께 가자'(1960), '두만강'(1960), '다시 찾은 이름'(1963) 등이 있는데, 대부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북한 백과사전의 심영 설명
1952년에 조선연극인동맹 중앙위원 및 북한의 국립 연극극장 배우가 되었다. 1959년에 조선연극인동맹 부총장을 맡았다. 1961년에 조선영화인동맹 위원장 겸 조선문화예술인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고, 같은 해에 북한의 영화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기과장과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을 역임했으며, 1957년에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1964년에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2.4. 말년
친일인명사전에는 1966년부터 평양 연극영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 7월 24일에 지병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사망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귀순 공작원 김용규가 1978년에 출간한 책 '시효인간'에 따르면 # 심영은 1971년에 숙청되어 평양에 소재한 삼신탄광 광부로 추방되어 고생하다가, 기존 사망일인 1971년보다 2년 후인 197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만 이 내용은 반공이 국시였던 1970년대 말에 당국의 감시를 받던 귀순자의 이름으로 출간된 반공수기의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외에 김용규의 서술과 다르게 신상옥, 최은희 부부의 납북·탈북 수기에서는, 심영이 숙청되긴 했으나 연극영화학교 교원으로 강등되어 일선에서 쫓겨나는 수준으로만 숙청되었다고 하며[23] 쓸쓸하게 지내긴 했어도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그들 부부가 직접 심영을 만나지 않고, 북한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책으로 옮겼기 때문에 완전히 사실로 볼 수만은 없다. 이들 부부의 수기에는 월북, 혹은 납북된 문화예술인들의 행적과 근황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이 되었는데, 그 내용들이 잘못된 정보가 적지 않다.[24] 다만 이 수기에 언급된 심영의 경우에는 최은희가 북한에서 직접 만났었던 김연실, 문예봉, 문정복(배우 양택조의 모친)은 심영과 절친한 사이었고, 심영과 동시대에 활동했었던 사람들이다.[25] 따라서 그 기록의 출처가 이들의 증언이라면 신빙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 수도 있다.
3. 비판
심영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유명 연예인으로서 본인의 위치를 악용하여 악랄한 친일행위를 하였다. 태평양 전쟁과 일제를 찬양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비하하고 동포들을 전쟁터와 징용지로 내모는 선전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해방 후에 좌익 활동을 하고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탄압 끝에 월북한 것 자체는 당시의 시대상황상 큰 비판점은 아니나, 이후 6.25 전쟁 중에 수많은 동료 예술가들과 배우들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납북시켜서 이들과 가족의 삶을 망가뜨린 점 또한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판받을 반인륜적 만행이다. 또한 강제 납북으로 인해서 초기의 한국 영화와 연극 등에서 한국 예술의 발전에도 큰 악영향을 미쳤고 좌익 성향에도 이미지에 큰 피해를 준 것도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황철 문서의 평가에 있는 증언들로 미루어 볼 때 라이벌인 황철에 비해 연기력에서는 당대에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출연 작품
- 연극
- 영화
- 아름다운 희성 (1935)
- 바다여 말하라 (1936)
- 은하에 흐르는 정역 (1936)
- 지복만리 (1938)
- 너와 나(君と僕) (1941)
- 망루의 결사대(望樓の決死隊) (1943)
- 드라마
- 라디오 드라마, 《인도의 달》 (1932)
- 기타
- 박향림 노래 메들리 〈코스모스 탄식, 쓸쓸한 여관방, 흐르는 남끝동〉 (1942)
5. 기타
5.1. 성불구자 관련 의혹
야인시대에서의 내가 고자라니 장면 때문에 심영이 고자가 된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가 고자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단 문제의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인 김두한은 심영을 저격했다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디를 어떻게 저격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남겨놓지 않았다. 심영이 고자가 되었다는 설은 1993년에 출판된 책 비밀결사 백의사에서 시작된 주장인데, 이 또한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할 뿐 실제로 그랬는지 어땠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근거는 첨부되어있지 않은 내용이다.#
일단 당시 정황을 기록한 신문기사에서는 '하복부'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걸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아랫배 부근을 맞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사실 이 쪽은 장기가 많아서 이쪽에 저격당했다면 살아남기가 꽤 힘들다. 즉 진짜 낭심을 맞았지만 적당히 하복부라고 둘러댄 것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교차검증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은 말 그대로 아랫배 부근에 맞았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그런것과는 별개로 단순사고가 아닌 명백한 테러를 당한 사건인데도 해당 기사에서 대놓고 김성진 외과에 입원했다고 기록하였고, 잘못하면 심영이 2차 테러를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정보를 담은 기사를 내놓았는데 김두한을 비롯한 우익 세력이 알고도 몸을 사리고자 2차 테러를 저지르지는 않은건지, 아니면 좌익 측에서 실제로는 백병원에 심영을 입원시켜놓고 기만전술로 김성진 외과에 입원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그런 기사를 작성하게 한 것인지는 불명이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저격 사건에도 불구하고 심영은 생존했고 월북했다는 것 뿐.
이제 남은 가능성은 북한에 있는 그의 후손이 증언하는 것 밖에는 없는데[26] 북한쪽 사람이기 때문에 정확한 조사는 불가능하며, 설령 찾아내더라도 입에 담기 쉽지 않은 사실을 정직하게 증언할지도 의문이라 결국은 수수께끼로 오랫동안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남한 한정으로 심영은 고자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남게 될 가능성도 높다.[27][28]
5.2. 그 외
심영이 젊었을 때에 친일 연극을 많이 한 탓인지,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인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매우 싫어하고 까내렸으며, 그 사이에서도 이황이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며 일본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 심영은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월북한 이후, 그에 대해 이야기하던 사람 가운데 '술만 마시면 이이, 이황을 욕하는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다.
1942년, 당시에 스타였던 박향림[29] 과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다. 이때 그는 대사 파트를 맡았다.
'배우 심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국회도서관에도 등록되어 있다.
6. 각종 창작물에서
6.1. 드라마 야인시대에서의 심영
- 심영(야인시대) 문서 참조.
6.1.1. 내가 고자라니에서의 심영
- 내가 고자라니 문서 참조.
6.2. 그 외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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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양극장에서는 서울 1945에서 김일성 역을 맡았던 중견배우 박철호가 연기했다.
7. 관련 문서
[1]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명은 아오키 진에이 (靑木沈影, 청목심영)[2] 좌측은 20대, 우측은 중년기의 사진이다.[3]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이 날에 지병으로 사망하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 해에는 숙청되어 평양에 위치한 삼신구역에 삼신탄광에서 노역을 하다가 197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설이 있었기 때문. #[4] 청송 심씨 25세손 '載'자 항렬이다. 친일파에 월북자인지라 본인 족보에는 '庚戌生'(경술생)이라고 적혀있는 게 전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처우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 게, 비교도 안 되게 악질적인 친일 행동을 한 누구는 아예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졌다.[5] 일본어: 靑木 沈影(신자체: 青木 沈影) あをき じんえい(현대 가나 표기법: あおき じんえ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청목 심영이다.[6] 아내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沈完燮이라고 써져 있다. [image][A] A B 1886년에 태어났다. 심완섭 족보에 '丙戌生'(병술생)이라고 써져 있다.[7] 심완섭 족보에 '配江陵金氏 父郡守秉燮'(배강릉김씨 부군수병섭)이라고 써져 있다.[8] 이 안효공파는 정치적으로 서인 노론에 속했다. 한때 서인의 거두였던 심의겸, 김효원의 반대로 이조정랑에 등용되지 못한 심충겸,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심환지 등이 바로 안효공파 벌족이었다. 따라서 배우 심영은 소설가 심훈보다 9살 어리지만 항렬로는 조카뻘이다.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보면 둘 사이는 먼 친척이다. 실제로 배우 심영은 소설가 심훈의 17촌 조카이다. 참고로 배우 심영의 직계 조상이자, 그의 6대조는 호조정랑을 지낸 심건지(沈健之)로, 예조판서를 지낸 심풍지(沈豊之)의 친형이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의 장인'''이다.[9] 며느리의 족보에는 이름의 한자가 沈相鶴이라고 써져 있다. [image][10] 1968년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설이 있다.[11] 현 의정부중앙초등학교[12] 당시에는 보통 키였다. 1935년에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4cm 정도였으니, 현재의 기준으로 적용한다면 아마도 175~176cm 정도.[13] 당시에 살이 찔 정도로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배우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제법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14] 이 부분은 심영 피격사건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부인 이씨와 함께 귀가하던 중'이라는 언급이 있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김두한에 따르면 당시 심영의 아내가 종각에서 유명한 다방을 했다고 하나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확인된 바가 없다. 다만 후술했던 카페 멕시코가 여기일 가능성이 있다.[15] 당시에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권문세가들의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16] 드라마 동양극장 1회에서 "'''심영씨는 탑스타라 잘 알겠는데''', 차홍녀, 황철은 누구죠?"라는 대사가 나올 정도이니 당시 연극계에서 심영의 위상이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다만 이 행적은 1940년대에 들어, 친일 연극을 하지 않을 경우 연극 자체를 할 수 없었던 당대 상황도 감안을 해야할 것이다.[18]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2009), 《친일인명사전 인명편;2 - ㅂ~ㅇ》, 서울:민족문제연구소, 417-420쪽. 2019년 7월 6일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확인함.[1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Ⅱ》. 서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14쪽.[20] 해방 후에 설립된 좌익계열 연극단체.[21] 박영호는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선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22] 마찬가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며,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하였고 월북하였다.[B] A B 김두한은 머리를 굉장히 치밀하게 썼다. 이 위치가 단순히 다리 한 가운데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로구와 중구의 정확한 경계선이다. 김두한은 종로경찰서와 중구경찰서가 각자 자기네 관할구역을 헷갈리게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머리를 썼다. [23] 숙청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 수 있지만, 무조건 죽이거나 형벌만 보내는 것만이 숙청은 아니고 일선에서의 강등 또는 좌천되거나 직위해제당하는 수준도 숙청으로 포함한다. 이렇게 살아서 숙청당하는 경우는 자신이 쌓아 온 영예를 모두 삭제당하는 기록말살형까지 같이 받는 경우가 많으므로, 죽지만 않는다 뿐이지 살아도 산 게 아닌지라 조선시대의 팽형과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24] 예를 들면, 신상옥의 수기에는 이광수가 김일성의 전향 유혹을 끈질기게 거부하다가 지방으로 쫓겨가 1963년에 사망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 이광수는 1950년 10월에 납북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25] 특히 문정복은 심영과 같은 극단에서 같이 연기하기도 했었다.[26] 만약 고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후손이 있겠냐고 할 수 있는데, 상기했듯 심영은 저격 사건 이전에 이미 가정이 있던 남자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15세만 넘으면 이미 어른이 되었다고 보고 결혼하는 풍습은 당연한 것이였고 심영 또한 그정도 시기에 결혼을 했었기 때문에 친자가 존재할수도 있으며, 설령 없다고 해도 친척 집안의 자녀를 양자로 들이는 경우도 흔했기 때문에 고자가 되었고 안되었고를 떠나 후손이 절대로 없다고 할 수는 없다.[27] 어쩌면 북한에도 심영도 고자의 대명사로 알려질 가능성 있는데, 한류열풍에 의해서 중국을 통해서 북한에도 야인시대가 들어갔고, 2부의 반공성향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몰래 보던 주민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했다. 내가 고자라니 장면을 몰래 본 북한 주민이 있을 가능성이 있어서 심영이 고자의 대명사가 될 가능성이 있다.[28] 북한에서 영 좋지 못한곳울 벌레에 물려서(....) 고자가 됐다는 말도 있다.[29] 오빠는 풍각쟁이야를 부른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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