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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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進自動車
1. 개요
2. 역사
3. 역대 임원
3.1. 구 신진자동차
3.2. 거화


1. 개요


1955년부터 1984년까지 있었던 자동차 제조회사이자 자동차 전문 그룹으로, 자동차로 따지면 자일상용차, 한국GM, 타타대우상용차, 쌍용자동차의 전신격 되며, 법인 자체로 따지면 삼성건설의 전신이기도 하다.

2. 역사


1955년, 김제원-김창원 형제가 부산 전포동에 신진공업사를 설립하면서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GMC CCKW 폐차 섀시를 재생한 버스를 만들면서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다. 1957년 신진공업(주)로 새로 출범하고 1960년에는 전포동[1] 버스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1962년에 나온 신진 H-SJ 25인승 신진 마이크로버스는 일명 노랑차[2] 혹은 마이클[3](...)이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면서 엄청난 판매고를 자랑했다.
1963년에 미군 지프 폐차 부품을 이용해서 닛산 블루버드 P310 (새나라 자동차)의 외형을 모방하여 만든 신성호라는 세단은 신진자동차 최초의 승용차였으나 재생 부품을 사용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조악한 품질과 특유의 수작업 공정 때문에 새나라자동차보다 비싼(...) 가격으로 판매가 매우 부진하였으나, 이후에 새나라 자동차가 특혜 시비로 망하면서 새나라 자동차 인천공장(지금의 한국GM 인천공장)을 1965년에 인수하고 그곳에서 토요타와의 기술제휴코로나(1966년), 크라운(1967년), 퍼블리카(1967년) 같은 승용차를 계속 내놓았는데 신진 코로나 승용차는 1960년대 한국의 도로사정에 잘 맞는 자동차로 국내 승용차 시장을 싹쓸이하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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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일본 토요타 자동차와 기술제휴로 만든 FB100LK 가솔린 버스는 폐차 재생부품이 아닌 규격화된 신품 부품만을 사용하여 만든 국내 최초의 대량 생산 기성품 버스로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내버스로 유명했고, 1968년에 내놓은 DB102LC 디젤 버스는 본격적으로 국내에 디젤엔진 버스 시대를 개막하면서 버스 = 디젤엔진 공식을 성립시키며 1970년대 초반에 가장 흔한 버스 중에 하나였다. 버스 이외에도 토요타, 히노자동차와의 기술제휴로 중대형 트럭도 만드는 등 그야말로 한때나마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싹쓸이하던 회사였다.
FB100LK 가솔린 버스, 코로나 승용차, DB102/105LC 디젤 버스의 성공 덕분에 본사는 사세확장에 나섰다. 1966년 신진자동차판매를 세우고 1968년 서울 양평동에 신진자동차운전학원[5]을 세웠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는 하동환자동차까지도 인수 및 업무제휴하여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6] 그 외에 1970년대 초반까지 현대기아[7], 신원개발[8], 한국카이사알미늄[9], 대원안전유리공업[10], 대원강철공업, 코리아스파이서공업[11] 등을 잇따라 세워 그룹을 형성시켰다.
한때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재벌로써 197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국내 최대이자 최고의 자동차 그룹이었고 재계 2~3위를 다툴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걸맞게 신진자동차 역시도 당시 독과점의 폐해와 그로 인한 폭리를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 1969년 경향신문을 인수하여 산하에 두었고, 1968년 학교법인 신진학원을 세워 1970년 신진자동차공업고등학교를 세웠고, 1969년 신진장학회를 세워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최전성기 시절 신진자동차그룹의 위상은 지금의 현대자동차그룹 정도의 위상이었다.
하지만 1969년에 적자투성이 업체 한국기계공업을 인수하면서 망조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더니, 결국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저우 4원칙"을 발표하면서 토요타는 중국 진출을 노리기 위해 배신을 감행하며 철수하였고, 결국 1971년 미국 제너럴 모터스와 손잡아 부평공장을 지엠코리아로 분사시켰으나, 경영악화로 1976년에 한국기계와 세트로 한국산업은행 관리로 넘어갔고, 신진알미늄 역시 율산무역으로 넘어갔다.
반면 모기업 신진자동차공업은 1970년 미국 AMC와 손잡아 지프만 만들다가 1974년 지프사업부를 신진지프공업으로 분사시켰다. 1976년 현대기아와 신원개발을 합병한 후 건설업으로 전환하며 신원개발로 사명을 변경해 자동차와 거리가 먼 회사가 됐다. 이후 신진지프, 신원개발, 코리아스파이서, 신진학원까지 4개 정도만 남아서 불과 수년만에 재계 2~3위를 다투던 신진자동차그룹은 기업 규모가 순식간에 크게 쪼그라들어버린 초라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1978년 모기업 신원개발이 삼성그룹에 팔렸고, 마지막으로 남은 자동차 관련 계열사 (주)거화와 코리아스파이서마저도 경영권 분쟁[12]과 김창원 자신의 해외 도박 파문 등으로 흑자도산하면서 현재는 1개 소규모 학교법인 규모(신진과학기술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신진학원)에 불과한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 훗날 재단도 장남 김준식이 아닌 막내 김용식 에렉스F&B(구 동전개발) 창업주가 이어받아야 했다.
거화는 1984년 11월 20일 동아자동차에 인수됨과 동시에 29년만에 창립자 일가와 결별하게 되었으나 동아자동차도 거화를 무리하게 인수합병한 것이 화가 되어서 쌍용그룹에 인수되어 쌍용자동차 SUV부문이 되었다. 현재도 남아있는 코란도라는 자동차 브랜드가 이 회사의 마지막 유산중에 하나인 셈이다. [13] 코리아스파이서는 1985년 성신지주로 넘어간 후 1998년 '코리아정공'으로 바꿨으나, 2000년 위아에 매각된 후 2002년 한국DTS(현 현대트랜시스)에 합병됐다.
사실 본래 신진자동차는 토요타가 아닌 미쓰비시 자동차와 1965년에 기술제휴를 하려고 했었으나, 이 과정에서 들여왔던 100대의 콜트 1500이 특혜 논란에 폭리 논란이 있었다. 명목상으로 기술검토용으로 도입했었으나 기술검토용으로 도입하기에는 100대라는 댓수는 너무 과했고 정부에서도 당시 파격적으로 면세 혜택을 주는 바람에 정경유착 의혹이 번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진자동차도 이 콜트를 당시 돈으로 대당 35만원(1,300달러)에 도입해서 대당 84만원에 되팔이 하는 폭리까지도 취하였고 폭리로 취한 돈이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이 번지는 바람에 일명 콜트 파동이라고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결국 신진자동차와 미쓰비시 자동차의 기술제휴는 취소되고, 그 와중에 토요타가 잽싸게 신진자동차를 꼬드기면서 기술제휴를 체결했다가 나중에 뒤통수 쳐버린 것이었다. 물론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할 당시에는 토요타가 미쓰비시 자동차보다 당연히 기업 규모도 큰데다가 토요타 코로나가 미쓰비시 콜트 1500보다 상품성도 훨씬 좋고 훨씬 잘팔리는 차종이니 신진자동차 입장에서는 혹할 만도 했겠지만... 그나마 미쓰비시 자동차가 국내 업체와 기술제휴했던 외국 자동차 제조사 중에서는 갑질[14]이 가장 적었던 편에 속했기 때문에 콜트 파동만 아니었어도 신진자동차가 미쓰비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체결하여 운명이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보다 자세한 설명은 대우자동차, 쌍용자동차[15] 문서를 참조할 것.

3. 역대 임원



3.1. 구 신진자동차


  • 회장
    • 김제원 (1963~1971)
  • 대표이사 사장
    • 김창원 (1955~1974)

3.2. 거화


  • 회장
    • 김창원 (1974~1984)
  • 대표이사 사장
    • 진창식 (1974~1976)
    • 신수형 (1976~1977)
    • 박홍규 (1977~1980)
    • 김용식 (1980~1983)
    • 김기섭 (1983~1985)
    • 장두섭 (1984~1985)

[1] 2008년까지 대우버스 부산공장으로 남아있었으며 사무실 건물은 1960년부터 쓰던 건물을 철거 직전까지 계속 사용하였다. 하지만 대우버스 부산공장이 울산으로 이전하면서 해당 부지는 기존의 공장 시설이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부영아파트가 건설중이다.[2] 상당수의 신진 마이크로버스가 노란색 도색으로 출고되었기 때문.[3] 스펀지에 따르면 현재도 밀양시에서는 버스를 마이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4] 다만 이 와중에도 카라반 같은 경우처럼 거의 안팔린 차종도 있었다.[5] 서울 양평동 본원을 비롯해 녹번동, 번동에 학원을 두었고 부산과 대구에도 학원이 있었다. 양평동 본원 자리에는 양평동현대6차아파트가 들어섰고, 녹번동 분원 자리에는 은명초등학교가, 번동 분원 자리에는 수송초등학교(종로구 수송동에 있다가 폐교한 수송국민학교를 계승)와 수송중학교가 개교했다.[6] 이쪽의 경우는 상공부 시책 때문이었다.[7] '기어'의 옛말. 1976년 신원개발에 합병.[8] 건설회사. 이후 삼성그룹에 매각되어 삼성종합건설로 사명을 변경하였다가 삼성물산에 흡수되었다. 여의도 동양방송 신사옥(현 KBS 별관)을 지은 회사가 바로 이곳이다.[9] 미국 카이사, 동방강건 등과 합작해 세운 기업. 경기도 광주군 서부면(현 하남시)에 소재했다. 이후 신진알미늄으로 사명을 변경하였으나 신진의 경영악화로 율산그룹을 거쳐 효성그룹에 인수되어 '효성알미늄'이 됐으나, 1988년 효성금속에 합병되었다.[10] 일본 우치다(內田)안전유리와의 합작사. 이후 경영악화로 한국유리에 인수되었다. 현 한국세큐리트.[11] 미국 데이나(DANA) 사와의 합작사. 인천 부평에 소재했다. 거화의 도산 이후 성신양회에 매각되었다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넘어갔다.[12] 무려 부자 간의 경영권 분쟁이었다. 김창원 회장과 그 아들인 김준식 간의 경영권 분쟁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3] 그 외에 거화 시절부터 개발되어 시제품까지도 공개된 코란도 훼미리가 있었으나 거화의 흑자도산으로 주인이 여러번 바뀌면서 실제 출시는 쌍용그룹에 인수된 쌍용자동차 시절에서야 출시되었다.[14] 토요타는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철수하여 뒤통수를 쳐버렸고, GM이나 AMC의 경우는 지분의 절반을 가져가다보니 갑질은 상상을 초월했었으며 심지어 GM은 경영권을 가지고 다툴 정도였었다. 이들과 비교했을시 미쓰비시 자동차는 이후에 기술제휴를 체결한 현대자동차에게 정말로 잘 해준 편이었다. 현대자동차도 처음 기술제휴를 체결했던 포드의 갑질이 상당해서 그나마 갑질이 덜 했던 미쓰비시 자동차로 기술제휴선을 갈아탔다는 걸 생각하면... 하지만 현대자동차에서 자금 조달 문제로 미쓰비시 자동차에 부품 대금 결제를 주식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가 현대자동차 대주주로 올라서게 되고 현대자동차에서 자체 추진중이던 독자엔진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경영일선에 개입하여 내부적으로 방해를 시도하였던 정황들도 있었다. 결국 미쓰비시나 다른 기업들이나 철저히 기업의 이익에 맞게 행동한 것은 다르지 않다.[15] 신진그룹의 마지막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거화가 동아자동차에 흡수된 후, 쌍용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신진자동차의 직계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대우자동차는 지금은 GM에 완전히 인수되어 한국GM이 되면서 신진자동차 시절의 색채는 아예 사라졌고 쉐보레 브랜드가 되어버리면서 신진자동차는 물론이고 대우자동차 시절의 연혁조차도 사실상 아예 흑역사가 상황이고(쉐보레 브랜드로 통폐합 되면서 자사 최초의 SUV를 1935년의 쉐보레 서버번이라고 홍보 하고 있으며, 신진자동차나 대우자동차 시절 연혁을 그냥 흑역사로 치고 있다.), 또 다른 직계후신이자 한때는 적통으로 여겨졌던 자일대우상용차는 이미 신진자동차 시절의 색채가 거의 다빠진데다가 대한민국에서 생산기지를 사실상 철수하려 하면서 더 이상 신진자동차의 적통이라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나, 쌍용자동차의 경우는 비록 신진자동차 시절의 연혁을 전부 승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승계한 연혁에 대해서는 최대한 존중해주고 있으며 최초 창업자인 김창원 회장 시절에 명명된 신진자동차의 마지막 유산인 코란도라는 브랜드를 지켜내고 있는데다가, 김창원 회장 시절에 착수한 신진자동차의 마지막 프로젝트인 KR-600은 이후 코란도 훼미리로 출시되어 그 후신들인 무쏘-렉스턴(뉴 렉스턴, 렉스턴 II, 슈퍼렉스턴, 렉스턴W)-G4 렉스턴으로 현재도 5도어 스테이션 웨건 형식의 프레임바디 SUV 계보가 이어지고 있으며, 신진자동차 시절 이후 다시 픽업 트럭을 만드는 등 비록 사명은 여러차례 변경되었어도 과거 신진자동차의 색채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