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와 시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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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前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현재 일본빙상연맹 부회장이며 피겨 스케이팅 해설 위원도 병행하는 중이다.[2]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쿨뷰티라고 불렸으며, 2000년대 이리나 슬루츠카야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러츠 점프를 정석으로 뛰는 몇안되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시그니처 기술은 레이백 이나 바우어이다.
2. 선수 경력
2.1. 노비스~주니어 시절
이전에는 피겨 스케이팅에 나이 제한의 개념이 없었다. 선수들은 어린 나이에도 노비스/주니어 대회와 시니어 대회를 함께 출전하였다. 1993-94 시즌, 1994 트리글라브 트로피[3] 노비스 부문에서 우승했다.
1994-95 시즌, 1994 네벨혼 트로피와 1994 그랑프리 생제르베[4] 에서 우승했다. 1994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하고 1995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7위에 올랐다.
1995-96 시즌, 네벨혼 트로피와 1995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했다. 1996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작년과 동일하게 7위에 올랐다.
2.2. 1996-97 시즌
1996 전일본 주니어선수권에서 우승하며 3연패를 달성하였고, 1997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는 8위를 했다.[5]
이후 12월에 열린 1996 NHK 트로피에서 7위를 하며 시니어 그랑프리 데뷔를 했다. 이듬해 1월에 열린 1996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수구리 후미에에 이어 2위를 했다.
2.3. 1997-98 시즌
1997 NHK 트로피에서 6위, 1997 나치온스 컵에서 7위를 기록했다. 1997 전일본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자국에서 열린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쇼트에서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을 성공시키며 선전했으나, 프리에서는 2번의 점프 실수로 인해 최종 13위를 기록했다. 올림픽이 끝나고 열린 1998 세계선수권에서는 22위를 기록했다.
2.4. 1998-99 시즌
1998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9위, 1998 NHK 트로피에서 8위를 기록했다. 1998 전일본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하고 1999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 시즌부터 신설된 1999 사대륙선수권에서 6위를 했으나, 함께 출전한 수구리 후미에가 더 높은 순위(5위)를 기록해 세계선수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2.5. 1999-00 시즌
1999 슈파카센 컵, 1999 NHK 트로피, 1999 전일본선수권에서 모두 5위를 기록했다.
2.6. 2000-01 시즌
2000 컵 오브 러시아에서 7위, 2000 트로피 랄리크에서 9위를 기록했다. 2000 전일본선수권에서 5위, 2001 사대륙선수권에서는 6위를 기록했다.
2.7. 2001-02 시즌
2001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4위, 2001 트로피 랄리크에서 6위를 했다.
2001 전일본선수권에서 2위를 했으나, 올림픽에는 수구리 후미에와 온다 요시에가 출전했다.[6] 대신 본인은 2002 사대륙선수권 출전 기회를 얻었다. 프리 스케이팅 경기 초반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플립에서 실수를 하여 메달권에서 멀어지는 듯했지만, 막판에 트리플 토룹-트리플 토룹-더블 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은메달을 땄다.
2.8. 2002-03 시즌
2002 컵 오브 러시아에서 5위, 2002 NHK 트로피에서 3위를 하며 2002-03 그랑프리 파이널에도 진출해 4위를 기록했다.
2002 전일본선수권에서는 동메달, 2003 타르비시오 동계 유니버시아드와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 게임에서 모두 우승했다. 2003 사대륙선수권에서 2위, 2003 세계선수권 프리 스케이팅에서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더블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하며 최종 8위를 기록했다.
2.9. 2003-04 시즌
2003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 3위, 2003 스케이트 캐나다에서 2위, 2003 트로피 랄리크에서 2위를 하며[7] 그랑프리 파이널에 진출했다.
2003-04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3 전일본선수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4 세계선수권에서는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더블 룹, 트리플 살코-트리플 룹 컴비네이션 점프를 성공시키며, 그 당시 엄청난 기술로 커리어 처음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사토 유카 이후로 10년 만의 일본 여자 싱글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추후 인터뷰에 의하면, 시즌 내내 계속되는 부상과 집안 형편으로 은퇴를 고민하였으나, 이 대회 우승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2.10. 2004-05 시즌
2004 NHK 트로피에서 금메달, 2004 컵 오브 러시아에서 은메달을 따며 2004-05 그랑프리 파이널에도 진출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4 전일본선수권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2005 세계선수권에서는 부츠 문제와 부상으로 크게 부진하여 9위에 머물렀다.
2.11. 2005-06 시즌
2005 트로피 에릭 봉파르와 2005 컵 오브 러시아에서 동메달을 땄지만 합산 포인트에 밀려 파이널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2005 전일본선수권에서는 수구리 후미에, 아사다 마오[8] 에 이어서 3위를 하며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다.
2.11.1.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경제적인 사정으로 은퇴를 하려고 했으나 주변 지인들의 권유를 받아 올림픽을 출전을 결심했다. 러시아에서 모로조프 코치에게서 전지훈련을 받으며, 타라소바에게는 안무 수정 및 점검을 받았다.선수 생활 마지막 경기라는 각오를 하고 올림픽에 출전했다. 올림픽에서는 당시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사샤 코헨과 이리나 슬루츠카야를 꺾고 우승했다. 그녀가 우승후보가 아니였어도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채점제가 시행된 첫 올림픽이라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스핀, 스텝, 스파이럴에서 아직은 레벨 1이나 2를 받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라카와는 피나는 노력으로, 올림픽 전 경기에서 스핀 레벨 4, 스텝 레벨 3, 스파이럴 레벨 4를 받은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만약 상위권 선수들이 모두 클린했다고 해도, 역시 비점프 요소에 강한 아라카와가 금메달이다. 프리 2위 사샤 코헨, 3위 이리나 슬루츠카야, 4위 수구리 후미에, 5위 키미 마이즈너[9] 모두 스텝과 스핀 레벨이 2였다. 그러므로 이 점이 승부의 갈림점이였던 것이다. 이 결과를 본 선수들이 이후 비점프 레벨을 신경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올림픽 다큐멘터리를 보면 아라카와가 러시아 훈련 당시 타라소바가 주구장창 레벨 4를 외치며 혹독하게 굴릴 때, 아라카와가 그놈의 레벨 4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많은 팬들은 토리노 동계올림픽이 구채점제였다면, 수구리 후미에가 은메달을 땄을거라고 추측한다.
2. 빙질이 역대급으로 좋지 않아서, 은반 위에 누가 오래 서 있나 대회가 되었다. 프리 경기 때는 클린 선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상위권 선수들 중에서도 아라카와 시즈카, 수구리 후미에, 키미 마이스너 외에는 다들 넘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고, 엎어지는 정도였다. 최악의 빙질 적응을 잘한 수구리와 아라카와가 더블링으로 처리한 것 이외에는 실수가 없었다. 김연아도 선수들이 빙질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러 번 인터뷰를 하였다. 그래서 다양한 빙질에서 타보는 경험은 굉장히 중요하다.
3. 앞 선수가 망하는 것을 보고 본인은 안전빵으로 타서, 어부지리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당시 프리 경기 막그룹 순서는 엘렌 게데바니스빌리 - 사샤 코헨 - 아라카와 시즈카 - 수구리 후미에 - 키미 마이즈너 - 이리나 슬루츠카야였다. 아라카와 시즈카는 원래의 구성으로 경기했으며, 빙질에 맞게 난이도를 조정하는 것도 선수의 능력이다.[10] 쇼트 프로그램에서 사샤 코헨과 이리나 슬루츠카야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아라카와는, 역대급 최악의 빙질 상태에서 트리플 룹을 더블로 처리하는 실수를 제외하고 클린하며 금메달을 우승했다. 사실 이리나 슬루츠카야와 사샤 코헨이 금/은메달 후보로 정해진 상태인데다가, 아라카와 시즈카, 수구리 후미에, 카롤리나 코스트너가 동메달 싸움을 하는 형국이었다.
여담으로 일본 내부에서도 떠오르는 안도 미키를 더 밀어 주는 분위기였고[11] , 아라카와는 노장 선수로 취급 받았는데 그녀가 일본의 유일한 토리노 동계올림픽 메달을 따게 되면서 일약 스타로 오르게 되었다. 후일담으로 올림픽 직전 인터뷰에서 이토 미도리는 수구리 후미에, 아라카와 시즈카, 안도 미키 중 누가 메달을 딸것 같냐는 질문에 모든 면이 안정적인 아라카와 시즈카 라고 답했다.
3. 은퇴 이후
일본의 유일한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로서 해설가로 활동하였는데, 선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선수들의 실수를 칼같이 잡아내곤 했다. 심지어 일본에서 사랑해 마지 않는 아사다 마오의 점프에서 프리로테이션, 언더로테이션, 투풋 랜딩, 롱엣지를 모두 잡아내어, 마오타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현재도 해설가로 활동하는 중이다.
2018년 1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다카하시 다이스케와 함께 인천시에서 성화봉송 릴레이를 했다. 해설자 자격으로 내한하여 사쿠라이 쇼와 함께 올림픽 개막식을 참관하기도 했다.
2018년 4월 일본인으로서는 이토 미도리와 사토 노부오에 이어 3번째로 세계 피겨 스케이팅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4. 특징
유연성이 뛰어나다. 일본 선수 답지 않게 수준 높은 트리플 러츠를 구사했으며[12] , 프리 로테이션이 심하지 않은 점프를 잘 뛰었다고 호평을 받았다. 또한 예술적인 부분에서는 일본 여자 선수들 중 스즈키 아키코,사토코 미야하라와 함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지 않는 거의 유일한 선수였다.[13] 엣지 컨트롤 실력도 상당하여, 수준 높은 레이백 이나바우어를 구사했다. 특히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보여주었던 레이백 이나바우어는 당시 토리노때 센세이션 했으며, 아직까지도 일본 방송에서 회자될 정도로 임팩트가 컸다.
5. ISU 공인 최고 점수
6. 수상 기록
[1] 성장은 가나가와 구에서 했다.[2] 아라카와가 이 때 딴 메달은 일본의 유일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메달이자, 아시아 대륙의 첫 여자 싱글 올림픽 금메달이었다.[3] 1992년부터 개최되었으며 처음엔 노비스, 주니어 부문만 열렸다. 시니어 부문은 2002년부터 열렸다.[4] 이 대회의 ‘그랑프리’라는 단어는 現 ISU 그랑프리 시리즈와는 관련이 없다. 그랑프리 시리즈라는 포맷이 생기기 이전에, 독일의 네벨혼 트로피와 프랑스의 그랑프리 생제르베를 묶어서 ‘컵 오브 알프스’ 라는 시리즈를 구성했었다. 이 두 대회의 결과를 합쳐 트로피를 수여했다.[5] 당시에는 주니어 세계선수권이 이듬해가 아닌 당 해 11월에 열렸다.[6] 이 시즌 온다의 국제대회 성적이 아라카와보다 더 좋았다. 아라카와는 2개의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입상하지 못했으나, 온다는 2개의 은메달을 따고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진출했다.[7] 상위 2개 대회의 등수만 반영[8] 당시 연령 미달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안도 미키가 출전했다.[9] 프리 스케이팅에서 트리플 러츠-트리플 점프를 성공시켰으나, 비점프 요소를 잘 챙기지 못했고 구성 점수가 낮았다.[10] 이 당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일본 빙상연맹이 아라카와에게 프리 스케이팅 점프 구성을 높이라고 압박을 주는 부분이 나온다.[11] 당시 안도 미키는 3-3 점프와 쿼드러플 살코를 구성하는 등, 고난도의 점프를 구사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하필 올림픽 시즌에 체형 변화가 오면서 점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결국 3-3과 쿼드러플 점프를 모두 실패했다.[12] 단, 플립도 러츠처럼 아웃엣지로 뛰는 이른바 '립퍼'였다. 플립은 중립에 가까운 인엣지로 뛰어야 하며, 자세한 내용은 플립 점프 문서 참조.[13] 아사다 마오, 이토 미도리, 안도 미키 등의 모든 상위권 선수가 "점프만 뛰지 연기는 없다"고 비판받는 것과는 대조된다. 특히 안도 미키의 경우 해설가가 직접적으로 "이 프로그램은 점프 밖에 없네요"라고 비판할 정도로 심각하게 점프만 있는 프로그램을 보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