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 전투

 

'''아막성 전투
阿莫城戰鬪'''

'''시기'''
602년 8월(음력)
'''장소'''

신라, 아막성(현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일대)[1]
'''원인'''
관산성 전투 이후 무왕의 반격.
'''교전국'''
백제 왕조 [image]
신라 왕조 [image]
'''지휘관'''
<^|1>해수

건품
무리굴
이리벌
무은
비리야
귀산
추항
'''병력'''
40,000 명
1,000 명 + @[2]
'''피해'''
공격군 궤멸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신라의 대승.'''
'''영향'''
신라에 대한 백제의 가열한 공세 지속.
1. 개요
2. 배경
3. 아막성
4. 전투
4.1. 1차 공방전
4.2. 2차 공방전
4.2.1. 무왕의 분노
4.2.2. 신라, 만인적(萬人敵) 등장
4.2.3. 전투 결과
4.3. 3차 공방전
5. 전투 이후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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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02년, 신라백제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전투. 삼국 시대 후반부를 알리는 전투로, 이 전투를 시작으로 무왕 - 의자왕신라에 대한 맹공을 시작하게 되고 신라 또한 이를 방어하기 위해 서부 전선에 대한 강화를 시작한다.
[image]
▲무왕 재위 당시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화염 표시)
△남원 운봉 지역에 '''아막산성(阿莫山城)'''이 있다.

2. 배경


진지왕이 의문의 폐위를 당하고 즉위한 진평왕은 각종 국가 기관 설치와, 전쟁 영웅을 측근으로 삼는 등의 정치적 수완을 통해 왕권 강화를 이뤄 나가게 된다. 한편 이 시기 신라는 이전 진흥왕 시대에 흡수합병했던 가야에 대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언급된다.

600년 봄 2월 신라임라가 서로 다투니, 천황이 임라를 구원하고자 하였다.

601년 3월 갑신 초하루. 오토모노무라지 쿠이(大伴連 囓)를 고려에 보내고, 사카모토노오미 아라테(坂本臣 糠手)를 백제에 보내어 “급히 임라를 구원하라”고 조칙을 내렸다.[3]

'''《일본서기스이코 천황'''

일본서기의 기록을 참고하면, 당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고구려 - 왜국과 함께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감행했다고 볼수 있다.[4] 하지만 고구려는 돌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신라에 대한 압박 수위를 낮출수 밖에 없었으며, 왜국도 내부 사정이 혼란스러워졌기에 무왕은 독단으로 공격을 감행한다.

3. 아막성


현재 아막성은 남원시 아영면 아영 고원에 그 일부가 남아있으며 시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당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주요 위치 중 하나였으며 인근 4개 성을 거느린 모성(母成)이기도 했다. 실제로 발굴 조사결과 신라계와 백제계 유물이 다수 발견되었다.

4. 전투



4.1. 1차 공방전


602년 8월, 무왕은 병사들을 출전 시켜, 아막성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진평왕이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 방어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소타(小陁),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등 4개 성을 쌓아 서부 전선에 대한 수비를 보강함과 동시에, 신라의 병력이 역으로 백제를 침공한다. 해당 공격로는 현재의 남원 일대였다.

4.2. 2차 공방전



4.2.1. 무왕의 분노


이 소식에 무왕은 크게 분노하며 좌평 해수(解讎)에게 보기 4만의 대군을 주며 아막성 인근 지역의 성들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신라는 파진간 건품(乾品), 무리굴(武梨屈), 이리벌(伊梨伐)과 급간 무은(武殷), 비리야(比梨耶)에게 병사를 주어 백제군을 상대하게 된다.

4.2.2. 신라, 만인적(萬人敵) 등장


아막성 인근에서 벌어진 양측의 전투는 신라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해수는 천산으로 급히 후퇴했다. 신라는 추격을 하다 너무 깊숙히 들어갔다고 판단해 되돌아 가게 되는데,[5] 이때 천산 서쪽의 큰 연못 인근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해수는 신라군의 후위를 맡은 대감(大監) 무은의 병력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공격을 지시했다. 이때 그러자 무은과 추격대 1천의 병력은 당황해 어쩔줄 몰랐고 심지어 지휘관인 무은은 백제군의 갈고리에 걸려 낙마하며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무은의 아들인 소감(少監)[6] 귀산[7]은 누군가가 어서 후퇴하자는 말을 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갔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듣기를 ‘무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귀산은 을 타고 용감무쌍하게 나아가 백제군 수십명을 쳐 죽여 아버지를 구해내는데 성공하고, 자신의 말에 아버지를 올려태운후 탈출케 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직책이었던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을 베어내니 혼란에 빠졌던 신라군의 사기가 급격히 상승하며 전황이 급격히 바뀌게 된다.
용맹하게 백제의 병사들과 맞서던 귀산과 추항은 온몸에 창칼을 맞아 상처입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해수가 이끄는 백제군은 이들의 용기와 신라군의 압박에 결국 물러났다.

4.2.3. 전투 결과


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에 쳐들어왔다. 임금이 장수와 졸병들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 본기 제4 진평왕'''


모든 군사들이 이를 보고 떨쳐나가 공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대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귀산 열전'''


그는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箒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병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해수는 겨우 위기를 벗어나 단신으로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 본기 제5 무왕'''

신라군의 대승이었다. 4만에 달하는 백제군이 궤멸 당했으며, 총 지휘관인 해수는 단신으로 사비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해수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수는 없으나 왕이 분노하며 4만의 병력을 모아 보냈던 것임을 감안하면 대성팔족의 일족임에도 처벌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진평왕은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로 나아가 이날의 승리를 치하했다. 하지만 용맹하게 싸운 귀산과 추항은 온 몸에 난 상처로 인해 신라로 돌아오던 중 숨졌고, 진평왕은 이들의 시신을 보며 통곡하며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뤄주었다. 이후 귀산에게는 나마, 추항에게는 대사로 추증했다.

4.3. 3차 공방전


17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달솔 백기(苩奇)에게 명령하여 병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제27권 백제 본기 제5 무왕'''


38년(서기 616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에 쳐들어왔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 본기 제4 진평왕'''

무왕 17년이던 616년 10월, 달솔 백기 8,000의 병사를 주어 모산성(母山城)으로 쳐들어 가게 했으나, 신라가 이를 막아냈다.

5. 전투 이후


[image]
무왕(6세기말) ~ 의자왕(7세기 초) 시기 백제가 확장한 강역.[8]
이후 진평왕은 고구려와 백제의 끊임없는 침입을 받게 된다. 고구려는 끊임없이 신라의 북경 지역을 침공하며, 백제는 동부 전선 곳곳에 병력들을 보내며 성들 공격한다. 김유신, 알천같은 무장들의 활약이 없었다면 선덕여왕 대에 신라는 망해버렸을 지도 모를 일.
이 전투를 시작으로 진흥왕 대의 영광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6. 기타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황산벌 지역에서 던전 중 하나로 등장한다.

[1]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아막산성(阿莫山城)또는 모산성(母山城)으로, 삼국사기 귀산열전에는 아모성(阿暮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막(莫) 자가 영(英) 자와 비슷해 아영성(阿英城)으로도 기록됐는데, 아영면(阿英面)의 이름이 바로 여기서 딴 것.[2] 일단 확인되는 병력으로 정예 기병 수천명과 무은이 이끌던 추격대 1천 명이 있다.[3] 일본서기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띄고 있어서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신라백제가 왜에 두려움을 떨며 신하국 처럼 행동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어 쓰여 있다.[4] 실제로 진평왕 - 선덕여왕 대에는 고구려백제의 침공으로 양면전선이 형성되며 신라의 상황이 몹시 위태로워졌고 수양제에게 손을 벌려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요청한다. 그리고 수나라는 때마침 수 양제의 야욕과 맞물려 이를 받아들였고 ... [5] 다만 이때 무왕 본기의 기록과 귀산 열전의 기록이 상충된다. 무왕 본기에는 "승리로 인해 기세 등등했던 무은이 1천의 추격대를 이끌고 천산까지 추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신라의 무관 계급으로 17등 관위에서 12번째였던 대사(大舍)의 아래로 추측된다. 소감이라는 직책이 귀산 열전에만 언급되는데 귀산 열전의 기록을 근거해 대감(大監)의 자제 혹은 친밀한 사이에 주어지는 직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로 양분되어 있다.[7] 귀산은 아막성 전투 이전에 추항과 함께 원광법사에게서 화랑의 다섯 규율로 전해지는 세속오계를 전수받은 일화가 있는 인물이다.[8] 신라가 급속도로 위축되던 시기로서,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까지 압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