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항공사고 요약도'''
'''발생일'''
1993년 7월 26일
'''유형'''
CFIT, 기상악화, 조종사 과실
'''발생 위치'''
대한민국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기종'''
Boeing 737-5L9
'''운영사'''
아시아나항공
'''기체 등록번호'''
HL7229
'''출발지'''
김포국제공항
'''도착지'''
목포공항
<color=#373a3c> '''탑승인원'''
승객: 110명[1]
승무원: 6명
<color=#373a3c> '''사망자'''
68명
<color=#373a3c> '''생존자'''
48명
[image]
사고 8개월 전에 찍힌 기체(왼쪽)[2]와 사고기의 잔해(오른쪽)
[image]
사고 2년 전, 머스크 항공 시절에 찍힌 사진
1. 사고 개요
2. 사고 진행
3. 사고 원인
4. 사고 결과
5. 여담
6. 관련 항목
6.1. 유사사고[3]

[clearfix]

1. 사고 개요



1993년 7월 26일, 오후 2시 20분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3시 15분 전남 영암군 삼호읍의 목포공항에 도착 예정인 아시아나항공의 OZ733편 B737-5L9 여객기(기체 등록번호: HL7229)(기장 황인기, 부기장 박태환)가 목포공항 착륙을 위해 접근 중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화원반도 야산에 추락한 사고다.
당시 KBS 뉴스 9 동영상 링크
당시 MBC 뉴스데스크 동영상 링크
MBC가 공개한 음성 녹음본 일부(20초부터)

2. 사고 진행



추락 사고 직전 CVR

'''(충돌 47초 전) 부기장: Landing Check List Completed Sir.'''

'''(충돌 46초 전) 기장: Thank you.'''

'''(충돌 31초 전) (GPWS: Terrain!)'''

'''(충돌 30초 전) (GPWS: Approaching Minimums!)'''

'''(충돌 29초 전) (GPWS: Minimums!)[4]

'''

'''(충돌 26초 전) 기장: Flap 30, Green Light[5]

'''

'''(충돌 25초 전) 부기장: Yes, Sir.'''

'''(충돌 24초 전) 기장: 다 지나갔어.'''

'''(충돌 21초 전) 기장: Gear Down, Three Green[6]

Flap...[7] MAXIMUM 브레이크에 놓아야지 되겠고..'''

'''(충돌 17초 전) 기장: 안 되겠다 활주로가 미끄럽겠지..'''

'''(충돌 16초 전) 부기장: 들어간 지 얼마... 지나간지 얼마 안 돼 가지고...'''

'''(충돌 13초 전) (Elevator Trim이 움직이는 소리)'''

'''(충돌 12초 전) 기장: OK..800...'''[8]

'''(충돌 6초 전) 기장: 오 맙!'''[9]

'''(충돌 5초 전) 기장: 어이구...'''

'''(충돌 4초 전) (오토쓰로틀 해제버튼 조작음)'''

'''(충돌 4초 전) (엔진 추력이 급격히 올라가는 소리)[10]

'''

'''(충돌 0초 전) (폭발음)'''

'''End of recording (녹음 끝)'''

사고 당시 목포공항에는 강한 가 내리고 있었고, 오후 3시 24분 사고기는 첫 번째 착륙 시도를 실패한다.[11] 이어서 4분 후인 3시 28분, 2번째 착륙 시도를 했지만 역시 실패하고 다시 10분 후인 3시 38분, 3번째 착륙 시도 역시 실패로 끝난다.[12]
3번째 착륙 시도를 하기 위해 접근하던 사고기는 3분 후인 3시 41분 광주공항의 관제 레이더에서 사라지면서 통신이 두절됐다. 충돌 타이밍에 사고기와 교신하고 있던 광주공항 관제탑에서 갱신된 기상정보를 통보하고자 교신을 시도하였으나, 사고기에서 응답이 없었다.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9분이 지난 3시 50분, 사고기는 목포공항에서 10km 정도 떨어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의 야산에 추락한 채 발견되었다.

3. 사고 원인


악천후, 공항 시설의 부족, '''파일럿의 무리한 착륙 시도'''를 꼽을 수 있다.[13]
특히 목포공항은 VOR/DME와 NDB만 설치되어 계기착륙장치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소규모 공항이었고, 활주로 역시 1,500m로 민항 여객기가 취항하기엔 아슬아슬한 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악천후로 시야까지 제한되고[14] 파일럿들은 계속된 접근 실패에 조바심으로 서둘러 착륙 시도를 했었다. 당시 '''착륙 허가'''를 받지 않고 착륙 절차를 수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거듭된 접근 실패로 조바심이 난 기장은 다소 낮은 고도로 접근을 시도했다.[15] 그러나 결국 활주로 접근선상에 있는 산을 뒤늦게 발견한 후[16] 충돌 4초 전 상승하려 했으나 당시 지상과 불과 110여 피트(33.53m)를 남겨놓고 날고 있었던데다[17] 분당 1,000ft(304.8m)[18]로 하강하고 있었고, 더군다나 평지가 아닌 산 위를 날고 있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선 하강을 멈추는 것만으론 부족하고, 산의 경사보다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이 4초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4초 동안 하강을 멈추고 32피트(9.75m)를 상승하여 762피트(232.3m)까지 올라갔으나, 827피트(252.1m)의 봉우리를 넘지는 못했다.
당시 아시아나는 '''정시 이착륙 세계 1위'''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던 때였는데, 이를 사고의 한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즉 조종사가 이 기록을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착륙을 시도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정시 이착륙이 좋은 항공사를 평가하는 척도처럼 부각되는데 대하여 우려섞인 시선도 있다.[19]

4. 사고 결과


탑승객 110명, 승무원 6명 중 68명이 사망했다. 당시 악천후로 인한 시야 제한으로 목포공항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사고기 추락 현장에서 생존한 승객 2명이 기내에서 빠져나온 후 산 아래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와 신고하면서 사고 사실이 알려져 구조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20]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도 착륙을 방해하던 비가 사고후에는 도움이 되었다. 당시 해남 지역에 비가 내리고 있어서, 사고로 인해 항공유가 누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 덕분에 2차 폭발이나 화재는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중에 추락하는 바람에 구급차가 접근할 수 없어서 목포공항에 전개하고 있던 대한민국 해군알루엣 3 대잠헬기가 긴급 투입되어 부상자를 수송했는데, 문제는 알루엣 3은 경헬기라 기내에 들것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구조 헬기가 아니라 들것도 없는 상황이어서 부상자들을 그냥 서있는 채로 와이어에 매달아 수송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척추를 다친 부상자들이 '''하반신 마비 등의 2차 부상'''까지 입는 일이 발생했다. 또 롱 원피스를 입은 여성 부상자[21]를 와이어로 매달아 올리면서 속옷 상, 하의가 노출된 장면을 기자들이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도해 버리는 흑역사도 있었다. 어린 위키러라면 이해 못하겠지만 당시 방송에서 하의가 노출되었다는 것은 시대상에 비추어 보았을 때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라 인구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22]
아시아나항공의 최초 인명손실 항공사고이자, 첫번째 국내선 사고다. 이 사고로 무안국제공항이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고, 무안국제공항의 개항 후 목포공항은 폐항됐다.
OZ733편은 한동안 결번으로 남아 있었지만, 아시아나항공에서 편명 체계를 싹 갈아엎고 현재는 인천하노이행 노선의 편명으로 운행 중이다.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마천 마을의 주민들이 생존자 구조에 온 힘을 써서 언론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주민들에겐 워낙 충격적인 경험이라서 이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을 행했다고 한다.# 당시 마을 주민 한 명이 4살 아이를 구출하고 급하게 해남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아이가 요절했는데, 이후 집으로 돌아와 자기 손에서 생명이 사라졌다며 끝도 없이 울었다고 한다. (2011.03.22 히스토리후 방송분)

5. 여담


  • 가수 김경호1집 수록곡인 "누명 쓴 아이"는 이 사고로 조카와 이모를 잃은 김경호가 추모하기 위한 노래라 알려져 있다.
  • 한 생존자는 사고 직후 꿈인지 생시인지 흰옷 입은 사람들이 산위로 올라가고, 자신은 산 아래로 내려왔는데 그 때문에 산 것 같다는 증언을 하기도 하였다.

  • 물론 마을에 생존자들을 도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2년 뒤에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와 마찬가지로 인근 마을 주민들 중 일부가 사고 현장에 몰래 들어가 희생자들의 소지품을 뒤져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훔쳐가는 일이 있기도 했다.
  • 아빠의 수첩이라는 책에서, 목포로 출장을 가던 아빠가 이 사고로 죽는다. 그런데 추락 직전 가지고 있던 수첩에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은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에서 따온 것이다.
  • 위에 링크된 MBC 뉴스 동영상 4분 40초 경에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헬기로 여성 부상자를 구조하던 중 여성의 원피스가 바람에 날려 올라가 속옷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날 하루 종일 사고 관련 방송을 할 때마다 이 장면을 여과없이 계속해서 보여줘서 언론사들의 보도 태도에 대한 강한 비난이 나왔다. 시청자들의 항의 때문인지, 아니면 보도국 간부들의 호령이 떨어진 건지 몰라도 다음 날부터는 이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
  • 동아원그룹(당시 운산그룹) 입장에서도 비극적인 사건으로 손꼽히는데, 당시 한국제분 사장 이희영[23]이 이 비행기를 탔다 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는 부친 이용구 회장이 타계한 지 3개월 지난 시점이었으며 생전 사원과 거래처에게 겸손하고 격식을 따지지 않아왔던 성품을 가진 터라 사원들까지도 통감할 정도였다. 그의 장례는 7월 30일 회사장으로 거행되었다.[24]
  • 사고 당일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항공사고중 최악의 항공사고이기도 했으나 2002년에 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가 일어나자 밀려났으며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항공사고중 2위로 기록되었다.

6. 관련 항목



6.1. 유사사고[25]



[1] 승객은 한국인(105명), 일본인(3명), 미국인(2명)이 탑승했다.[2] 1992년 11월에 찍힌 사진이다.[3] 대한민국 조종사들의 전형적인 착륙 고집이나 권위주의(고압적 상하관계)가 영향을 끼친 사고[4] 사고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착륙 결심 고도에 다다랐음을 의미하는 GPWS 신호로 이때 무리하게 접근하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생각했다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5] 플랩이 정상적으로 30도 내려왔음을 확인[6] 랜딩 기어 3개 정상 작동 확인[7] 방금 전 확인해서 생략한 것으로 보임[8] 고도 800ft(243.8m)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나, 자동비행장치 설정 고도는 700ft(213.4m)로 추정된다.[9] 뉴스데스크와 같은 날짜에 방송했던 KBS 뉴스 9의 경우 "오 맙(소사)!!"라고 자막에 표기했다.[10] 이는 기체를 들어서 산과 충돌을 막기 위함이었다.[11] 착륙 접근 실패 자체는 요즘에도 흔한 일이다.[12] 요즘은 세 번이나 착륙에 실패하면 착륙을 포기하고 회항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 당시는 기상 이변으로 회항하면 기장이 시말서를 써야 하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를 계기로 그 규정은 없어졌다. 2007년 이후에는 3번이나 착륙에 실패하고도 회항하지 '''않으면''' 감항 당국에서 보고서를 요구하도록 되어있다. 참고로, 항공사고 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냈었던 KLM이라는 네덜란드 항공사는 (시간 지체시) 기장에게 '''벌금'''까지 물리는 규정이 있었다고 한다. '''비행기가 납치를 당해도!''' 심지어 해고까지 당할 수 있었다. 이 역시 520명뛰어넘는 사고(1977년) 이후로 개선되었다고 하는데...[13] 안전보다는 무리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려는 당시 군 출신 조종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14] 마지막 시도였던 3차 시도 당시 시정은 2,000m였다. 사고기 기종의 최저시정기준은 2,800m이다.[15] 공식 조사 결과에서는 1.5마일 최종 경유지점을 비행컴퓨터(FMC)에 입력하지 않아 실제보다 1.5마일을 더 간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실제로 마지막 시도에서 모든 조작이 2마일 가량 일찍 이루어지고 있었다.[16] 충돌한 봉우리의 높이는 약 827ft(252.1m), 원래 이 산 상공에서 1,600ft(487.7m)를 유지해야 했으나 블랙박스에 의하면 730ft(약 225.2m)까지 내려간 상태였다.(충돌 직전 기장이 "오케이 800"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17] 봉우리보다 97피트(29.57m) 낮게 날고 있었다.[18] 초당 17피트(5.18m)[19] 그 외에도 기장이 그 달에 집에서 쉬었던 횟수도 단 3번밖에 없었다.[20] 산에 충돌하고 마산리 마을까지 내려간 것으로 보아 아무런 부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21] 이분도 들것 없이 매달리는 바람에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하지만 당사자는 이를 원망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구출에 참여한 사람들도 방법이 잘못된 것을 몰랐던 자신들의 무지가 안타까웠다고 말했다.-히스토리후 2011.03.22 방송분[22] 대연각 화재사건때에도 비슷하게 노출 보도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다만 이 때에는 TV가 귀했는지라...[23] 창업주 운산 이용구의 막내아들이다.[24] <작은 창에 큰 빛이... 한국제분주식회사 50년에 얽힌 우리 현대사> - 한국제분. 2006. p160.[25] 대한민국 조종사들의 전형적인 착륙 고집이나 권위주의(고압적 상하관계)가 영향을 끼친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