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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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3년 3월 28일 17시 29분 당시 부산직할시 북구 덕천2동 경부선 구포역에서 북쪽으로 700m 떨어진 하행선에서 서울발 부산행 제117호[2] 무궁화호 열차가 탈선 및 전복하여 78명 사망, 198명 부상(중상 54명 경상 144명)을 기록한 대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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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혹은 '''구포 무궁화호 참사''' 줄여서 '''구포참사'''라고 통칭한다.
당시 KBS 9시 일요현장 동영상
당시 MBC 뉴스센터 동영상
2. 상세
2.1. 사고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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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피해가 많은 대형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열차를 운전한 기관사가 생존'''[3] 한 덕분에 일련의 전후 상황이 상세히 파악 가능했다. 당시 117호 무궁화호는 전역인 양산 물금역을 지나고 구포역[4] 정차를 앞두고서 시속 85km 속도로 해당 구간을 통과 중이었다. 그러다가 사고 지점 100m 전인 덕천 2동 빅토리아호텔 뒤 덕천천 앞에 이르렀을 적에 사고 지점의 선로 지반이 무너지는 모습을 기관사가 발견하여 비상 급제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제동거리가 부족했던 탓에 결국 견인 기관차였던 7116호, 발전차와 무궁화호 객차 2량이 무너진 지반으로 '''전부 곤두박질'''쳤다. 뒷차량도 탈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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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의 신속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기관차 뒤에 연결된 객차 2량은 구덩이에서 전복하여 충돌하였다. 특히 기관차에서 가장 가까웠던 맨 앞의 객차는 '''각종 기계들로 가득 찬 단단한 쇳덩이와 같은 발전차[5] 와 직결된 상태에서 충돌'''하였다. 서행 중도 아닌 85km/h의 속도로 중속 주행 중에 100m 전방에서 갑자기 노반이 무너져 내린 상황이다보니 기관사가 제대로 손쓸 겨를도 없이 그 속도로 거의 그대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고와 동시에, 무겁고 단단한 발전차가 상대적으로 강성이 약한 객차를 철갑탄처럼 뚫고 들어갔고, 결국 발전차와 직결된 객차는 '''사진과 같이 휴지처럼 구겨질 정도로 끔찍하게 파손'''될 수밖에 없었으며, 인명피해 또한 이 객차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당시 보도나 후일담에 의하면 형태가 심하게 훼손된 시신 잔해를 수습하는 등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첫 사진에서 왼쪽 아래쪽에 있는 차량이 발전차량이다. 객차 뿐만 아니라 앞의 기관차도 반을 날려먹었을 정도인데도 외형이 멀쩡한 만큼 사고 당시의 무게와 에너지량은 상당했을 것이다. 이때 경찰과 철도청, 부산직할시 공무원, 인근 군부대, 민방위 대원 등이 동원되어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곧 날이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린 데다 사고 현장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정체를 빚는 등[6] 구조작업이 늦어져 인명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7] 당연히 해당 기관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애초에 기관사가 할 수있는 조치가 없었기 때문.'''
2.2. 사고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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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에는 삼성종합건설의 미허가 구조변경 사실이 적용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는 '''노반 바로 아래'''에서 발파, 붕괴되었다.
사고 당일 MBC 뉴스센터의 꼭지 중 하나.철도청의 긴급대책본부 구성을 전하는 기사이다. 58초 경 사고 원인으로 ' '''우리청과 협의 없이 삼성종합건설에서 노반 25m 지하에 한전 전선관 매설작업 중 노반침하''' '라고 분명히 적혀 있다.
선로의 지반침하, 즉 땅이 꺼진 이 황당한 사건의 원인은 사고 당일 밝혀졌다. 당시 사고현장은 한국전력이 1989년 12월부터 2백억 원을 들여 화명동 북부산변전소-감천동 남부산변전소 간의 345kV 4회선 지중선로 지하전력구 공사현장이었으며 1994년 6월 완공 예정인 곳이었다.[8] 설마설마 했으나 실제로 지반 아래에서 지하전력구 설치를 위해 '''발파''' 작업을 했음이 드러났다. 그것도 시공사인 '''삼성종합건설 맘대로.''' 하는 짓만 놓고 보면 '''영화에서나 보는 열차 테러나, 공성전에서 성벽 아래로 땅굴을 파 붕괴시키는 원리와 동일하다.''' 실제로 공항의 경우 이런 방식의 폭파 테러로 주요 시설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활주로나 계류장 밑으로 지하차도를 잘 파지 않는다. 김포공항만 해도, 지하차도를 뚫으면 부천까지 5분도 안 걸리지만, 이런 문제로 뺑 돌아가는 것이다. 소사대곡선이 여길 지나가는데, 최대한 공항 바깥쪽으로 돌게 공사중이다.
실제 발파는 하도급을 받은 한진건설이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삼성종합건설의 지시 하에 일어난 일이라 책임은 한진과 삼성종합건설에게 있었다. 이들은 철도청과 어떠한 협의나 통보도 없이 공사를 수행한 것이었다.
철도법에는 선로 밑 발파 작업은 커녕 선로 주위에 나무도 함부로 못 심게 되어 있다. 선로 지하물의 공사와 설치는 철도청 철도건설창(현 국가철도공단)이 하도록 되어 있다. 즉 시공사가 법을 무시하고 공사를 진행한 100% 인재였다.
2.3. 사고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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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여명의 승객 중 2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후속 조치로 선로 30m 근처 공사는 교통부에 신고를 해야 하고 벌칙 조항도 강화되었다.
이 사고로 삼성종합건설 '''사장''' 남정우와 김봉업 한전 지중선사업처장 및 현장관계자 허종철 등 공사 관계자 16명이 구속되었으나, 대법원은 회사 대표진급 6명에 대해서 과실치사상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버렸고, 이들의 뇌물공여에 대해서 집행유예로 2심에서 유죄로 인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사고 이후 연이은 대형참사가 지속되는 상황이 되어 가면서 엄정한 법집행을 해야 할 사법기관에서 책임이 가장 큰 경영진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점차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특히 관련자 중 남정우 삼성종합건설 대표는 사건 후 삼성신용카드로 전보됐다.
결국 시공사였던 삼성종합건설은 당시 법률상 최고 기간이었던 6개월 영업 정지를 당했고, 해당 기간동안 국내 수주는 불가능해졌다. 그외에 2천 5백 50만원의 과징금을 물었고 6개월 영업정지로 인해 예상되는 수주 손실액이 1조원이었다. 이후 삼성종합건설은 삼성건설로 사명을 바꾸었다가 1996년 삼성물산에 흡수되어 '삼성물산 건설부문'이 됐다. 사실상 이 참사의 영향으로 엄청난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내고자 내린 그룹 차원의 자구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름만 바꿔봤자 똑같은 놈임은 다 알았기에, 삼성물산은 부산 지역[9] 에서 쓰레기 기업으로 낙인이 찍혔다. 실제로 삼성물산은 구포 참사 이후 10년 가까이 부산권 지역에 아파트를 비롯한 각종 건설 사업과 관련하여 얼씬거릴 수 없었고[10] 부산 삼성의료원 혹은 삼성 실버타운 같은 부산지역에서 건립을 계획했던 것들이 모두 엎어졌을 정도로 그 후폭풍이 대단했다 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로 삼성 브랜드는 구매하지 않거나 기피하는 사람도 생겼으며, 특히 이건희를 씹어죽일 놈이라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삼성건설이 싱가포르 등 동남아에 먼저 진출한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삼성건설은 국내 공사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입찰을 받지 못 해 해외 진출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전까지의 해외 진출은 토목플랜트 분야가 대부분이었지만, 아파트등 주거와 사무용 건물이 타깃임이 특기할 점이었다.
3. 여담
- 인명 피해도 심각했지만 국내 철도망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경부선이 끊긴 대형 사고였기에 철도 여객 및 화물 수송에 큰 차질을 빚기도 했다. 단순한 열차 충돌 사고가 아닌 철도 노반이 무너져 내렸기에 복구에도 시간도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사고 현장이 경부선에서 종점인 부산역에 가까운 구간이어서 수송 차질이 덜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사고 직후에는 부산역에서 출도착하는 경부선 열차들을 긴급 우회시킬 수 있는 동해남부선 분기구간을 활용한 우회 운행을 유도했으며, 이후 사고 현장 인근 부지에 임시 선로를 가설하여 해당 구간을 긴급 복구 시키고 열차를 통행하게 했다.
- 무려 78명 사망, 200여 명 부상을 입은 참사의 여파는 사실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유는 3개월 뒤 한강 영화촬영 헬기 추락 사고, 그 다음달에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가 각각 일어났기 때문이다.
- 이 지역에 한동안 유령열차 이야기가 생겨났었다. 아이가 깔렸다며 발을 동동 구르며 구해 달라는 젊은 여자의 유령이 나온다거나, 바퀴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등의 소문이 돌았다. 이는 영화 레드아이의 소재로도 써먹었다.
- 서태지와 아이들 4집 1996,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때 뮤직비디오에서도 등장하였다.
- 해당 사고가 났던 장소는 현재도 열차들이 통과한다.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덕천역 7번 출구 기점으로 서쪽에 위치하고 펌프장 저수장을 북쪽으로 약간 끼고 있는 경부선 선로 구간, 화명생태공원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종주자전거길이 위치한 부근이다. 당시 사건을 전한 신문에 의하면 선로 앞쪽에 호텔이 있었다고 한다.
- 14년 뒤인 2007년 6월 4일 가좌역 선로 지반침하 사건이 일어나 유사한 사고가 생길 뻔했다. 다행히 사건이 일어나기 3분 전에 열차가 모두 통과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고양차량기지와 수색차량기지에서 경부, 호남선 KTX 및 새마을, 무궁화 열차가 출고되지 못하여 열차 운행에 큰 혼란을 빚었으며 통근열차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 19년 뒤인 2012년 6월 3일 천안역에서 지반 침하 사고가 일어났다. 원인은 선로 밑으로 지나던 지하차도 공사로, 이 사고로 회차를 하던 전동차가 탈선을 하여 10시간 동안 장항선에 헬게이트가 열렸다.
- 부산 도시철도 3호선의 구포철교~구포역(도시철도)~덕천역구간이 사고지역 바로 인근의 경부선 노반 아래로 통과한다. 다만 3호선 해당 구간의 시공사는 삼성물산 건설부문인데 문제는 이 기업이 구포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삼성종합건설의 후신이다(...).
- 1994년 3월 28일 구포 열차 참사 1주기 때, 지하철 총파업 사태가 터지며 열차가 운행중단 되는 일이 있었다.
- 사고발생 약 9개월 후인 1993년 12월 21일,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다. LGV 북선(LGV Nord)에서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여파로 추정되는 노반 붕괴가 일어났고, 그 위를 TGV 7150호 열차(레조 511편성, 10량)가 294 km/h로 통과하다가 탈선한 것. 탈선 이후, 정말 기적적으로 잭나이프 현상 없이 약 3 km를 미끄러지면서 얌전히 정차하는데 성공했고 인명피해는 경상 1명으로 집계되었다.
[1] 현재는 #1213열차가 해당 열번을 사실상 계승 중이다.[2] 당시 본 열차는 12시 45분 서울역을 출발해서 17시 41분 부산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3] 사진을 보면 기관차 전면은 거의 멀쩡하다. 오히려 엔진이 있는 후부가 박살났다.[4] 현재와 달리 사고 당시에는 화명동 일대가 개발 바람이 불기 전이라 화명역은 없었다.[5] 이곳에 탑승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원 사망했다.[6] 해당지역에 금곡대로와 백양대로가 있지만 금곡대로는 사고 1년전인 1992년 7월부터 부산 도시철도 2호선 덕천역 구간 건설, 백양대로는 1992년 8~10월부터 구명역 및 구남역 구간 건설 착수로 인해 혼잡한 상태였다. [7] 구조가 늦어짐으로써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는 바람에 사고난 다음주에 하나회 콤보로 이미 김영삼에게 찍혀있던 이필섭 합참의장이 책임지고 경질되었다. 뭔말이냐면 구포참사와 같은 전국구 대형재난은 당시 합참의장이 행안부(당시 내무부)장관과 함께 실질적인 지휘자이기도 하니까(...)[8] 여담이지만 해당구간 지중화 건설은 당초 예정보다 3년이 더 소요되어 1997년 4월 30일에 완공됐다고 한다.[9] 아이러니하게도 부산 부전동에 한때 계열사였던 제일제당 설탕제조 공장이 있었다.[10] 다만 아래 문단 이야깃거리에 있는 것처럼 사고 구간을 지하로 관통하는 부산 도시철도 3호선 본선 구간을 삼성건설의 후신인 삼성물산 건설부문에서 1998년에 수주를 받아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