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제항공 129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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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한 달전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에서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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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현장
1. 사고의 설명
2002년 4월 15일 오전 11시 45분경 중국국제항공(Air China) 소속 CCA129편 보잉 767-200ER 여객기[2] 가 김해국제공항에서 4.6km 떨어진 경상남도 김해시 지내동 동원아파트 뒤편의 돗대산(해발 380m) 기슭에 추락한 사고이다. 이 곳은 남해고속도로 김해 시내 구간에서 김해 시내 쪽에 보이는 약간 낮은 산. 김해JC와 북부산TG 사이에 있다.[3] 그래서 사고 후 잔해가 치워지기까지 남해고속도로에서 여객기 잔해가 보였다는 얘기가 있다.
사고기에는 한국인 136명과 중국인이 대부분인 외국인 19명 등 승객 155명과 승무원 12명 총 167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이 가운데 129명이 사망하였다. 한국인이 많은 이유는 IATA 규정에는 무조건 자국민에게 비싼 값에 자국 국적기 티켓을 팔아야 되는 규정이 있으며[4] 부산 출발을 통해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을 통한 전세계 환승 연계편까지 제공되기 때문이다.[5] 그래서 동일 노선을 운항하는 대한항공 비행기의 경우 중국 승객이 많다. 같은 이유로 2013년 7월 아시아나항공의 사고 때는 중국인이 많았다. 에어 프랑스 264편의 러시아 비상 착륙 때 승객 대부분이 한국인이었으니 맞는 말이다.
이 사고는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항공사고중 최악의 항공사고이며 1993년 7월 26일에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에서 추락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보다 인명피해가 많이났던 사고이다. 또한 이사고 인해 김해공항 안전문제가 시발점이 되어 김해공항 이전논란에 문제가 되었던 사고이다.
2. 사고의 개요와 원인
건설교통부[6] 는 사고직후 건설교통부 항공사고 조사위원회를 사고현장에 급파했다. 이 사고는 김해국제공항의 관제당국인 한국, 보잉767의 제조국인 미국, 그리고 에어차이나의 소속국인 중국 3개국이 복잡하게 얽힌 사고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군기지이기도 한 김해국제공항의 특성상 관제당국이 한국공항공사가 아닌 대한민국 공군이었기 때문에 더 민감한 사안 이었다. 사고 발생 수 시간만에 중국의 민항총국 조사관들이 한국에 도착했고 이후 FAA와 NTSB 관계자들도 도착했다.
수색과정에서 블랙박스 2기를 모두 발견하는데 성공하였으나, FDR은 심하게 훼손되어 블랙박스 제조사인 허니웰에 요청해 수리를 한 후 한국-미국-중국 3국이 합동으로 자료추출을 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블랙박스 자료가 확보되고 조종사와 탑승자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항공사고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사고조사가 시작되었다.
사고 여객기의 기장 우신루(吳新祿)는 30세로 767 기장으로서의 비행 경력이 289시간이었다. 제1부기장 가오리지는 29세로 767 1부기장 자격을 취득한지 3개월째였다. 2부조종사 후샹닝은 27세로 9개월전 2부기장 자격을 취득했다. 세 명 모두 보잉 767을 운항한 경험이 적거나 면장을 취득한지도 얼마 안된 초보 조종사들 이었다.
사고 여객기는 사고일인 4월 15일 오전 8시 40분(대한민국 시간으로는 9시 40분) 베이징을 출발하여 오전 11시 35분에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이 날 김해국제공항 상공은 짙은 안개가 끼고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상황에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 오전 8시 30분부터 정원 150명 이상의 항공기는 이착륙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 사고 여객기는 회항을 위해 인천국제공항 쪽으로 기수를 돌렸으나, 곧 김해국제공항의 기상 상태가 완화되어 착륙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아 오전 11시 20분 김해국제공항의 관제를 담당하는 공군 제5전술공수비행단에 착륙 허가를 요청했다. 공군은 당시 기상상태가 착륙 제한치를 충족하는 시정(가시거리) 3.2km, 운고 500m, 풍속 10km/h 임을 확인하고, 착륙을 승인했다.[7]
항공기 착륙 시 뒷바람이 강하면 착륙거리가 길어진다. 제한치를 넘을 경우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활주로라도 착륙하는 방향이 바뀌곤 한다. 이 때는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풍이 불었다. 바닷가 지역은 바다와 육지의 비열 차로 인해 낮에는 육지 쪽으로 해풍이 불고, 밤에는 바다 쪽으로 육풍이 불곤 하는데 김해국제공항의 경우 바로 뒷편에 산지가 있고, 남해 바다 쪽으로는 난류가 흘러서 날씨가 더워지는 시기에는 유난히 해풍이 강하게 분다.
보통은 바다 쪽에서 드넓은 김해평야를 바라보며 여유있게 접근하기 때문에 착륙에 별 어려움이 없지만, 남풍이 강하게 불면 바다 쪽에서 접근을 하다 활주로를 끼고 시계 방향으로 빙 돌아서 활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접근을 해야 한다.[8] 이걸 '써클링 어프로치'라고 부른다. 다른 공항 같으면 남풍이 강하게 불 때 처음부터 북쪽에서 접근을 하면 되는데, 김해국제공항의 경우 활주로 북쪽에 바로 산이 있어서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 RWY36활주로는 남쪽에서 접근하면 ILS 의 도움으로 정밀 계기접근을 할 수 있지만, 반대쪽인 RWY18활주로는 시각접근으로 착륙해야 한다.(PAPI가 있음) 심지어 공항 바로 북쪽에 김해 시가지와 산(+고속도로)까지 있어서 몇 초만 도는 타이밍이 늦으면 바로 위험해진다. 비행기는 어느 착륙이던 몇 초만 실수하면 바로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9]
사고 당시 김해국제공항에는 17노트의 남풍이 강하게 불고있어 ILS가 설치된 RWY36 활주로로 착륙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풍향 조건으로 사고 여객기는 관제사로부터 Circling approach 를 지시받고 활주로 서쪽으로 선회하였는데, 선회시 진입각도인 45도 보다 작은 각도로 방향을 틀었다. 또한, 정확히 20초 뒤에 180도 돌려서 마지막 접근을 해야하는데, 김해국제공항에 서클링으로 착륙하는게 처음이었던 조종사들은 30초가 넘도록 턴을 하지 않고 진행했다. 게다가 악천후에 안개 그리고 돗대산에 낮게 깔린 구름까지 심해[10] 이러한 조종사의 정상 선회지점의 착각을 하고 조종사들은 활주로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11시 21분, 겨우 안개와 구름을 빠져나온 129편의 앞에 '''돗대산이 나타났다'''. 조종사들은 복행을 시도했으나 비행기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2초만에 공항으로부터 북쪽으로 4.6km 떨어진 최종 선회 지점인 돗대산의 표고 204m 지점에 충돌했다.
Circling approach 진행 중에 활주로가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면 복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을 기장, 부기장 모두 지키지 않으면서 발생한 전형적인 조종사 과실 사고였다. 또한 조종사들은 18번 활주로 서클링 랜딩을 지시하자 굉장히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편리한 ILS 계기접근만 선호하고, 실제 눈으로 보며 활주로에 접근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신참 비행사들이 이런 종류의 위험한 실수에 노출된다.[11] 또한 에어차이나는 김해국제공항에 운항하는 조종사들에 대해 수동계기착륙 절차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했다.
최대 이륙 중량이 115t에 이르는 여객기가 255km/h의 속도로 산에 정면 충돌하게 되자 여객기는 세 동강으로 분해되었고, 150m를 끌려가다가 주익의 연료 탱크로부터 항공유가 분출되며 폭발하여 화재가 발생하였다. 동체는 폭발을 하고도 50m나 더 끌려가다 겨우 멈췄다. 이 사고가 터지고 나리타발 부산행 JL957 DC-10 항공기를 필두로 일본발 항공편들은 대구국제공항으로 회항했고 중공발 항공편들은 인천, 김포로 회항했다.
이것은 1988년 처음으로 운항을 시작한 중국국제항공의 최초의 항공기 추락 사고로 기록되었고, 한국 땅에서 발생한 항공사고중 가장 희생자가 많은 사고로 지금까지도 기록되고 있다.
한국 측도 과실이 있었다. 김해국제공항에는 세계 여느 공항처럼 MSAW가 설치되어있다. MSAW는 원래는 항공기가 정상고도 이하로 지상에 접근할 때 추락 위험을 경고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해주는 안전장치로 공항 관제소 레이더에 설치해 두고 만약 항공기가 접근하는 도중 과하게 하강하면 관제사와 조종사들에게 경고를 해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김해국제공항의 MSAW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작동 빈도가 굉장히 높았다.[12] 또 ICAO 규정에 따르면 시각과 청각으로 경고를 해야하는데 시각으로만 경고하게 되어있었으며 레이더 화면이 아닌 별도의 오퍼레이터 화면에 경고를 띄우는 방식이라 관제사가 이를 보지 못했다.
또한 해당기체는 구형 GPWS를 장착한 탓에 기어를 내리고 돗대산을 향해 하강하는것을 '''정상적인 착륙 자세'''로 인식하면서 조종사들에게 경고를 하지 않았다. 만약 전자지도를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EGPWS가 장착되어 있었다면 사고를 피했을 거라고 분석했다.
NTSB와 FAA는 항공사고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받아들였다. 중국 민항총국은 조종사 과실과 에어차이나의 부적절한 접근훈련 등을 대부분 인정하였지만, MSAW와 관련한 과실 등 일부 사항에 대해 합의에 실패했다. 한국 측은 MSAW에 대한 부분과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주 요인은 조종사들의 과실이라 주장했고, 중국의 주장은 조종사들이 실수를 했더라도 김해국제공항 측이 MSAW경고를 보고 복행을 지시했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거라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 측이 몽니를 부렸다기 보다는 한국과 중국 양국의 주장 모두 타당한 주장이다. 중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도 심지어 항공사와 같은 국가에서도 사고가 발생하면 이와 같은 사고 책임 공방은 매우 흔하다.[13]
3. 구조 구급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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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직후 부산광역시 및 경상남도 소방본부 소속 119 구조대 1,000여 명과 경찰관 500명이 출동했다. 이후 울산 지역 소방 구조대와 군 병력[14] 까지 총 2천여 명이 사고현장에 긴급투입되어 생존자 구조 작업 등에 나섰으나 험한 지형에다 악천후로 인해 헬리콥터와 소방차, 구조차량의 접근이 불가능해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도착 직후에는 1차, 2차에 잇따른 화재와 폭발로 기체 내 생존자 구조작업은 진행되지 못했다. 심지어 구조대원들의 진입도 폭발 위험으로 통제되었다. 화재가 잦아들은 이후에도 차량 접근이 불가능하여 구조대원들은 생존자를 발견하면 들 것에 태우거나 등에 업고 산 아래까지 이송했다. 당시 구조대원 뿐만 아니라 인근 고등학교 학생[15] 과 주민들도 구조대를 도와 생존자를 후송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부산시 소방본부 관계자는 '여객기가 추락한 대형사고에서 그나마 생존자가 40명 가까이 된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봉사활동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날이 어두워진 뒤에는 사고 현장에 조명등을 설치하고 동체를 해체하는 한편, 인명 구조견까지 투입해 생존자를 찾기 위한 철야수색작업을 벌여 16일 새벽 3구의 시신을 찾아냈다.
대형 사고인데다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한 접근성의 불리, 폭발과 화재로 인해 구조작업이 늦어진 감이 없지 않았지만 구조대와 시민들의 노력으로 총 169명의 탑승 인원 중 40명의 생존자를 구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객들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사고 현장이 지나치게 훼손되어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경찰 측의 우려에 '구조 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냐'는 구조 관계자들의 항의가 있기도 하였다. 해당 사고는 사고를 일으킨 항공사의 소속국인 중국과 사고가 발생하고 대부분의 사상자를 낸 한국, 마지막으로 항공기를 제작한 미국의 세 나라 사이에 사고의 책임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힌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현장 검증을 위해 사고 현장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신속한 구조를 위해 현장을 훼손하느냐의 문제는 항공기 사고 발생 시 언제나 충돌하는 문제이다.
4. 사고 결과
사고 직후 생존자는 40명이었으나 구조 바로 다음날 새벽 3시경 승객 하모 씨가 부산 백병원에서, 5월 2일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화상 치료 중이던 승객 박모 씨가 사망하여 인명피해는 총 167명 중 사망 129명(2명의 실종 포함)에 부상 37명으로 집계되었다. 한편, 추락 이후 화재가 발생했기 때문에 불에 타 버려서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시신들도 많았으며, 그 후 한국과 중국 양국이 DNA 검사를 통해 대부분 신원을 확인했다. 하지만 2명의 시신은 끝내 신원 확인에 실패했다.
이후 중국국제항공은 유족들에 대해 보험사를 통해 8만 위안(한화 약 2억 원)의 보상을 지급하기로 하였으나 유족들이 사고에 대한 중국국제항공의 책임을 물어 항공사의 직접 보상을 요구, 이에 중국국제항공은 이를 재판에 넘겼으나 법원에서는 유족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보상 문제 때문에 유족들은 시신을 바로 안치하지 못하고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의 한 병원에 '''무려 10년 간''' 보관되어 있었다!!! 결국 유골 보관 비용을 중국국제항공에서 부담하기로 최종 합의되어, 사고가 일어난 후 10년도 좀 지난 2012년 10월 27일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묵방리의 추모공원 인근 봉안 시설인 경남영묘원에 안치됐다.
보통 사고가 난 항공편의 편명은 결번처리되고 아예 단항되거나, 아니면 몇 년간 운항을 중단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시민 불편 등을 감안하여 운항중단이 되지 않더라도 아예 사고조사 중 혹은 사고 즉시 영구결번하고 운항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괌 사건을 낸 KE801편, 기체결함으로 인해 사고난 일본항공 123편, 팬암기와 충돌한 KLM 4805편 등이 영구결번이다. 착륙하다 사고가 난 아시아나항공 214편도 사고조사 중 영구결번되어 다른 편명으로 잘 다니고 있으며, 저먼윙스 9525편도 사고 즉시 영구결번하고 다음 날부터는 아예 편명과 항로까지 바꿨다. 하지만 이 사고 후 지금도 중국국제항공의 베이징발 김해행 항공편은 여전히 CA129편이다. 게다가 사고 여객기의 기장은 지금도 살아서 항공기 운항 중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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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지금도 중국 국적 항공사 기장들은 김해국제공항에 착륙할 때마다 생명 수당이 추가로 붙는다고 한다.[17]
한편 김해소방서에서는 매년 4월 15일 사고 현장에 찾아가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조촐한 행사를 지내고 있다. 장지인 경남영묘원에서도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2004년 11월에는 경남영묘원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17에서 터닝포인트(Turning Point)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여기서 나온 에피소드 중 하나로, 중국 관광객을 이끌던 한국인 서익수씨가 그만 중국 호텔에 여권을 놔두고 오는 바람에 중간에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가 와서 여객기에 늦게 탑승하고 그러면서 자리를 더 뒷쪽으로 배정받았는데, 덕분에 관광객 중 90%와 서익수씨는 생존했다고 한다. 사고 전에는 서익수씨의 실수에 의한 일정지연으로 인해 관광객들의 원망을 받았으나, 사고 이후 생존 관광객들은 서익수씨에게 감사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사고 3년 후인 2005년, 건설교통부 항공사고조사위원회는 최종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사고 주 원인은 조종사들의 선회접근 절차에서의 오류와 늦은 복행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주차적으로 에어차이나의 서클링 접근 훈련 미흡과 교육훈련 미실시, 계기접근차트에 높은 지형이 표기되어있지 않은 점, 조종사들의 부적절한 조종과 조종협력을 꼽았다. 이후 권고사항으로 민항총국에 대해 EGPWS 장착과 CFIT사고 예방 훈련을 권고했고, 김해국제공항 관제당국인 대한민국 공군에 레이더 화면에 지형위험 표시와 저고도 경고 절차 수립, 18번 활주로의 계기접근절차 마련, 사고 모의비상훈련, 기상관측소 개선 등의 명령을 내렸다. 기체의 이상이 없었기에 FAA에 대한 권고사항은 없다. 중국은 한국의 MSAW규정관련 권고사항을 제외한 모든 권고사항을 받아들였고, 에어차이나는 이후로 단 한 번도 인명피해를 동반하는 사고를 낸 적이 없다.
5. 사고 이후 신공항 논란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국제선 여객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허브 공항으로써 김해국제공항의 치명적 문제점을 개선할 방법으로 아예 새로 공항을 건설해야한다는 의견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으로 동남권 신공항을 부산광역시에서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인은 결국 홍콩의 카이탁 국제공항의 이름을 본뜬 김해탁이라는 그 악명때문이다. 김해국제공항이 위와 같은 좋지 않은 입지에도 유지되는 이유는 1천만에 달하는 부울경 배후수요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다, 국내선 수요도 거의 포화상태에 이르렀던데다 근본적으로 김해공항의 정체성인 군 공항이라는 점인데,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써 돗대산과 신어산을 방패막이로 삼아 북한의 포격으로부터 비행장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공군 제5공중기동비행단이 설사 민간공항이 신공항으로 분리해 나간다 해도 현 김해국제공항 위치를 고수하겠다고 하는 큰 이유이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민간 공항과 군 공항을 겸해서 쓰기엔 너무 열악하고 한계에 다다른 것이 사실이기 때문.
하지만 그럼에도 이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부울경 각자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핌피현상 때문이다. 거의 이 때부터 동남권 신공항 추진을 위해 부산에서는 열을 올리기 시작했지만 대구광역시 쪽에서는 경상남도 밀양시를 미는 등 강한 신경전이 터지며 엎치락뒤치락했다. 하지만 2011년 3월 25일, 결국 동남권 신공항 입지 선정은 전면 백지화되고 말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동남권 신공항을 재추진하기로 하며, 파리공항엔지니어링 관계자의 공항부지선정 용역에 따라 부지가 확정되는것으로 합의를 본다. 그러나 2016년 6월 동남권 신공항은 다시 무효로 돌아가고,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이 결정이 났을 때 상당수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11월 17일, 정부는 다시 김해신공항 확장안 백지화로 가닥을 잡았다. 현재로써는 가덕도 신공항안이 가장 유력한 상황이다.
2021년 2월 26일에 마침내 가덕신공항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동남권 신공항 논란은 가덕신공항으로 결정되면서 동남권 신공항 논란이 129편 추락사고 이후 19년만에 마침표가 찍혀졌다.
[1] 이 영상에 따르면 승객들 중 한국인 탑승객은 136명이라고 한다.[2] 사고기는 1985년 10월 9일 제작되어 동년 10월 29일 중국민항으로 인도되었으며, 1988년 7월 1일 중국국제항공으로 이관되었다. 엔진은 P&W JT9D-7R4E4 [3] 현재 이 근처에 부산김해경전철 지내역이 자리하고 있다.[4] 노선의 신설, 변경이 까다로운 항공노선의 특성상, 해당 노선에 대한 지분이 높은 항공사가 외국인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거나, 국영항공사가 자국민 덤핑을 통해 독점을 노리는 행위를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실제로 예전에는 많은 국가, 특히 공산권과 같이 폐쇄경제를 택한 국가에선 외국인들에게 높은 항공료를 강요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한국은 외화벌이와 군사정권의 해외여행 제한 정책 때문에 그 시절에 이미 자국민들에게 더 비싸게 팔아먹고 있었다는 슬픈 전설이...[5] 이를 통해 부산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곳이 브라질 상파울루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착한 뒤 대서양을 건너서 간다.[6] 현재의 국토부[7] ICAO기준 이내[8] 지금은 없어진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은 엄청난 난이도의 착륙으로 악명이 높았다.[9] 이 때문에 김해국제공항 에서는 배풍이 불 때의 착륙 기준이 다른 공항에 비해 약간 완화되어 있다.[10] ICAO 규정내의 수치였으나, 역시 서클링 착륙이 처음이었던 조종사들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11] 후방 카메라가 없으면 주차 못하는 초보 운전자와 유사[12] 마치 대한항공 801편의 사고가 났을 때의 괌의 MSAW와 비슷한 상황 이었다.[13] 2001년에 발생한 아메리칸 항공 587편 추락 사고로 아메리칸 항공은 '에어버스 A300의 설계 결함'이라는 주장을, 에어버스는 '아메리칸 항공의 조종사 교육 문제이며, A300의 방향타가 민감한 것은 기체 특성일 뿐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사고 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례 역시 둘 다 타당한 주장이다. A300의 방향타가 비슷한 동급 여객기들보다 민감한 것도 사실이고, 1972년 A300이 비행을 시작한 이후로 방향타를 과격하게 조작하다 추락한 것도 587편이 유일한 사례인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14] 사고 부대인 제5공중기동비행단 (당시 제5전술공수비행단) 병력은 당연히 갔고, 공군 병력만으로는 인원이 모자란지 39사단, 53사단 등 인근 육군부대까지 지원나갔다고 한다. 모 유튜브 유저에 의하면 향토예비군까지 동원되었다고 한다.[15] 다만 고등학생 투입은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6] 대신 B767이 아닌 B737-800이 들어가고 있다.[17] 참고로 위 화면은 중국국제항공이 아닌 중국동방항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