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image]
중국 작가 루쉰(魯迅)이 1921년에 쓴 근대[2] 소설로 중국 근현대 소설에선 처음으로 유럽이나 여러 나라로 번역, 수출되면서 중국 문학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1947년에 화가인 펑쯔카이(丰子恺,1898~1975)가 만화책도 그린 것을 비롯해 많은 미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아구이, 줄여서 아Q라는 인물의 인생을 그린 단편 소설. 그는 성 밖 낡은 절간에서 살며 마을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번 돈을 술과 도박에 꼴아박는 인물이다. 툭하면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잡부 아Q가 신해혁명에 꼽사리 끼며 인생역전을 할 뻔하다가 (그나마도 도적 패거리와 결탁한 것) 나중에는 하지도 않은 강도짓을 서명으로 자백하며 총살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총살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은 덤이다.
루쉰이 쓴 Quei는 당대 영국인들의 표기를 따랐다고 나오는데, 현재의 한어병음 방안의 gui,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으로는 kuei[3] 에 해당하는 표기이다. 아Q정전 초반부에서 여기에 대응시키려 한 글자들이 "桂(계수나무 계)"와 "貴(귀할 귀)"인데, 모두 현대 한어병음이 gui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루쉰이 주인공의 이름을 아Q라고 지은 이유는 경악할 만한데, 당시 중국인들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마침 변발도 영어로 '큐(Queue)'라고 읽는다.
청나라판 하류 인생. 주인공 아Q는 당시 중국인들의 패배 근성, 노예 근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큐정전은 루쉰이 중국 인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청 말에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지면서도 천조라는 타이틀을 고집하며 근대화를 거부,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허구성을 비판한 작품이다.
아Q는 깡패들에게 얻어 맞아도 '''"나는 얼굴로 주먹을 때린 것."'''이라고 하며 육체적으로는 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저들이 나보다 수준이 떨어지므로 내가 정신적으로는 저들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정신승리법'''을 사용하며,[4] 그 정신승리법이 깨질 때마다 새로운 정신승리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한계가 있는법. 아무리 거짓말을 거짓말로 숨기려고 해봤자 결국 거짓말도 극단에 다다르면 '이건 다 내가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구나.'라는 당연한 진리에 도달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신승리법''', '''정신 승리'''란 말은 이 작품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아Q는 피해 의식도 엄청 강했는데 특히 자신의 대머리, 부스럼(나두창)에 대해 엄청난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을 할 때에만 발끈하다가, 점점 피해의식이 심해져 나중에는 '빛나다', '밝다' 등등의 말까지 자신의 흉터를 욕한다고 생각하여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5]
아Q정전에서 루쉰은 아Q나 소D(샤오돈) 등의 인물상을 통해 당시 중국인의 우매하고 꽉 막힌 성향을 풍자한다. 미장 마을의 하층민들 모두는 깨어날 줄 모르는 당시의 중국 인민들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소D로, 아Q가 조씨 댁에서 식모를 건드리다 쫒겨난 후 아Q 몫의 날품팔이를 하는 인물이다. 소D는 '아Q에서 정신승리만 뺀' 인물로 아Q처럼 왜소하고 별 볼 일 없는 하층민이며 아Q처럼 피해 의식과 노예 근성, 비생산적인 습관에 사로잡힌 자였다. 세간에서는 이런 특성으로 '''"루쉰은 그 당시부터 찌질이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극찬한다. 아Q는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비판, 혹은 비하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판 대상은 하층민들만이 아니다. 하층민들을 억압하는 조씨 일가, 중국인이면서 서양인 행세를 하는 일명 '가짜 양놈' 전씨는 당시의 관료와 외세들의 억압과 그들의 자국 발전에 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아큐의 성희롱을 보고도 낄낄거리는 군중 역시 중국인들을 상징한다.[6]
루쉰이 워낙 중국에서 대접받는 작가인지라 근대 중국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그린 이 소설 역시 중국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한다. 극복해야 할 인간상, 반면교사의 의미로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교육되는 듯하다.
한문이 아니라 백화문(북경어 백화문)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이 소설의 의의 중 하나. 이 소설은 백화문으로 쓰여진 첫 중국어 현대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루쉰은 한문을 몰아내고 좀 더 쉬운 백화문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아무튼 중국 근대를 크게 상징하고 그때의 문학의 시발점이 되는 등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와 함께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비교되지만 이 책은 내국인 작가가 쓴 면에서는 더 의의가 있다.
《아Q정전》의 1981년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Q는 자손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손이 아주 많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아Q의 자손이 있다."''' 라는 씁쓸한 말이 나온다. 요즘에는 normal majority라고 불린다. 아무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남을 욕하거나 남을 따라하며 지성인을 욕 보이는 멍청한 대중을 뜻한다. normal이란 평범하다는 긍정적 뜻 외에도 아무런 특색이 없다는 부정적인 뜻도 있다. 아Q는 종잡을 수 없이 아무 특색이 없다는 것을 풍자한 이름이므로 얼추 들어맞다.
프랑스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맹 롤랑(1866~1944)은[7] 이 작품을 엄청나게 호평했는데, "가련한 아Q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보통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상대도 못하는 중국인들을 다루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 중국인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아Q란 모습은 '''현대인들,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라고 평했다.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의 제목은 바로 이 소설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QAnon이 이 아Q정전의 아Q에 비유되었다. # 이 점이 재조명됨으로서 국경을 초월하고 시대를 앞서 QAnon을 예언한 소설이라 볼 수 있게 되었다.
1. 개요
중국 작가 루쉰(魯迅)이 1921년에 쓴 근대[2] 소설로 중국 근현대 소설에선 처음으로 유럽이나 여러 나라로 번역, 수출되면서 중국 문학을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이고, 1947년에 화가인 펑쯔카이(丰子恺,1898~1975)가 만화책도 그린 것을 비롯해 많은 미디어가 쏟아져 나왔다.
아구이, 줄여서 아Q라는 인물의 인생을 그린 단편 소설. 그는 성 밖 낡은 절간에서 살며 마을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번 돈을 술과 도박에 꼴아박는 인물이다. 툭하면 깡패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잡부 아Q가 신해혁명에 꼽사리 끼며 인생역전을 할 뻔하다가 (그나마도 도적 패거리와 결탁한 것) 나중에는 하지도 않은 강도짓을 서명으로 자백하며 총살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총살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은 덤이다.
루쉰이 쓴 Quei는 당대 영국인들의 표기를 따랐다고 나오는데, 현재의 한어병음 방안의 gui, 웨이드 자일스 표기법으로는 kuei[3] 에 해당하는 표기이다. 아Q정전 초반부에서 여기에 대응시키려 한 글자들이 "桂(계수나무 계)"와 "貴(귀할 귀)"인데, 모두 현대 한어병음이 gui임을 보면 알 수 있다. 루쉰이 주인공의 이름을 아Q라고 지은 이유는 경악할 만한데, 당시 중국인들의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마침 변발도 영어로 '큐(Queue)'라고 읽는다.
2. 아Q의 성격
청나라판 하류 인생. 주인공 아Q는 당시 중국인들의 패배 근성, 노예 근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큐정전은 루쉰이 중국 인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청 말에 서구 열강에게 쥐어터지면서도 천조라는 타이틀을 고집하며 근대화를 거부, 중체서용이니 동도서기니 하는 허구성을 비판한 작품이다.
아Q는 깡패들에게 얻어 맞아도 '''"나는 얼굴로 주먹을 때린 것."'''이라고 하며 육체적으로는 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저들이 나보다 수준이 떨어지므로 내가 정신적으로는 저들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정신승리법'''을 사용하며,[4] 그 정신승리법이 깨질 때마다 새로운 정신승리법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에는 한계가 있는법. 아무리 거짓말을 거짓말로 숨기려고 해봤자 결국 거짓말도 극단에 다다르면 '이건 다 내가 꾸며낸 거짓말일 뿐이구나.'라는 당연한 진리에 도달한다. 우리가 말하는 '''정신승리법''', '''정신 승리'''란 말은 이 작품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아Q는 피해 의식도 엄청 강했는데 특히 자신의 대머리, 부스럼(나두창)에 대해 엄청난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을 할 때에만 발끈하다가, 점점 피해의식이 심해져 나중에는 '빛나다', '밝다' 등등의 말까지 자신의 흉터를 욕한다고 생각하여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5]
3. 의의
아Q정전에서 루쉰은 아Q나 소D(샤오돈) 등의 인물상을 통해 당시 중국인의 우매하고 꽉 막힌 성향을 풍자한다. 미장 마을의 하층민들 모두는 깨어날 줄 모르는 당시의 중국 인민들을 대변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소D로, 아Q가 조씨 댁에서 식모를 건드리다 쫒겨난 후 아Q 몫의 날품팔이를 하는 인물이다. 소D는 '아Q에서 정신승리만 뺀' 인물로 아Q처럼 왜소하고 별 볼 일 없는 하층민이며 아Q처럼 피해 의식과 노예 근성, 비생산적인 습관에 사로잡힌 자였다. 세간에서는 이런 특성으로 '''"루쉰은 그 당시부터 찌질이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극찬한다. 아Q는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비판, 혹은 비하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비판 대상은 하층민들만이 아니다. 하층민들을 억압하는 조씨 일가, 중국인이면서 서양인 행세를 하는 일명 '가짜 양놈' 전씨는 당시의 관료와 외세들의 억압과 그들의 자국 발전에 관한 무관심을 상징한다. 아큐의 성희롱을 보고도 낄낄거리는 군중 역시 중국인들을 상징한다.[6]
루쉰이 워낙 중국에서 대접받는 작가인지라 근대 중국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그린 이 소설 역시 중국의 정규 교육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고 한다. 극복해야 할 인간상, 반면교사의 의미로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교육되는 듯하다.
한문이 아니라 백화문(북경어 백화문)으로 쓰여졌다는 것도 이 소설의 의의 중 하나. 이 소설은 백화문으로 쓰여진 첫 중국어 현대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루쉰은 한문을 몰아내고 좀 더 쉬운 백화문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아무튼 중국 근대를 크게 상징하고 그때의 문학의 시발점이 되는 등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와 함께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로 비교되지만 이 책은 내국인 작가가 쓴 면에서는 더 의의가 있다.
4. 여담
《아Q정전》의 1981년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아Q는 자손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손이 아주 많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아Q의 자손이 있다."''' 라는 씁쓸한 말이 나온다. 요즘에는 normal majority라고 불린다. 아무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그저 남을 욕하거나 남을 따라하며 지성인을 욕 보이는 멍청한 대중을 뜻한다. normal이란 평범하다는 긍정적 뜻 외에도 아무런 특색이 없다는 부정적인 뜻도 있다. 아Q는 종잡을 수 없이 아무 특색이 없다는 것을 풍자한 이름이므로 얼추 들어맞다.
프랑스 작가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맹 롤랑(1866~1944)은[7] 이 작품을 엄청나게 호평했는데, "가련한 아Q를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보통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상대도 못하는 중국인들을 다루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 중국인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 아Q란 모습은 '''현대인들, 많은 사람들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라고 평했다.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의 제목은 바로 이 소설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QAnon이 이 아Q정전의 아Q에 비유되었다. # 이 점이 재조명됨으로서 국경을 초월하고 시대를 앞서 QAnon을 예언한 소설이라 볼 수 있게 되었다.
5. 같이보기
[1] 간체자로는 阿Q正传[2] 서양에서는 2차 대전 종전이 있은 1945년까지를 근대로 취급하나, 중국에선 중화 인민 공화국 정권이 세워진 1949년 이전까지를 근대로 취급하며,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현대'로 칭한다. 다만 아큐정전의 발표 연도는 1921년이므로 어딜 기준으로 봐도 근대다.[3]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구이".[4] 그러나 아Q는 여승이나 어린 아이 같은 "약자"에게는 강한 척하며 폭력을 휘둘러 그들을 괴롭힌다. 청나라 말기에 중국은 서양 열강들에 시달리면서도 월남, 조선 같은 전통적 조공국들에 대해서는 호되게 간섭하면서 근대적 식민국가로 대하려 했던 청나라의 이중잣대가 연상되는 지점.[5] 이러한 설정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명태조 주원장이 자신이 과거에 대머리 승려였다는 점을 글자로 들춰내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문자의 옥에서 따온 듯하다.[6]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웨이주앙 마을에서는 아Q가 처형된 것에 대해서 "'''사형 당할 만하니까 사형 당했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형을 직접 지켜본 성내 사람들은 한술 더 떠서 '''그런데 총살은 참수만큼 재미없더라''', '''그렇게 오랫동안 거리를 조리돌림을 당하면서 노래도 한 곡 못 부르다니 뭐냐''', 이런 것들을 가지고 불만스러워 했다고 나온다. 저자 루쉰이 일본 유학 시절에 중국인들이 같은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영상을 보면서 슬퍼하거나 분노하기는 커녕 시큰둥하고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아 유학을 그만두고 문학으로 전업했다는 일화를 생각하면 이러한 결말은 의미심장하다.[7] '장 크리스토프'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