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민(조직폭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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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안상민 (安相敏)
'''출생'''
1958년 6월 7일, 충청남도 서산시
'''학력'''
장충중학교 졸업[1]
'''가족'''
배우자 배정화, 슬하 2남
'''직업'''
조직폭력배
1. 개요
2. 활동
3. 구속
4. 은퇴 이후


1. 개요


전직 조직폭력배. 1958년 6월 7일, 충청남도 서산시 출생으로, 1980~1990년대를 주름잡던 폭력조직 '''안토니파'''의 두목.

2. 활동


어린 시절 언어 장애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놀리자[2] 각종 무술을 익히면서 싸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 초등학생 때도 몇 살 위 형들을 주먹으로 제압하였고 중학교 시절에는 고향 서산을 비롯해 천안, 온양, 예산, 홍성, 당진충남 일대 중학교의 짱들을 격파했다고 한다. 고향에서부터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15세부터 소년원을 전전했으며 20세 무렵에는 서산 지역의 하우스에서 돈을 대주는 꽁지 노릇을 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다가 1983년 한 경매업자를 협박한 혐의로 구속되어 형을 살고 나온 이후부터 서울 쪽으로 진출했는데, 명동의 김태촌과는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 명동 진출이 비교적 수월했다.
본인의 말로는 연장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주먹이 칼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하고 싸움을 했다고. 그리고 맞짱에선 거의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칼에 맞아 죽지 않으려고 전쟁을 나갈 땐 몸에 가죽 보호대를 착용하고 나갔다고 한다.
안토니파의 원래 이름은 안돈이었는데 당시 영화 대부가 유행이어서 자연스럽게 안토니가 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주먹 세계에 있으면서 돈을 좀 벌었는데 자동차올즈모빌 방탄차, 벤츠 500, 푸조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언론에 방탄차를 타고 다니는 폭력계 대부로 소개 될 정도였다. 전성기 때에는 하루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3000만 원씩 들어왔고, 품위 유지비로 한 달에 3000만 원씩 썼다고 한다.

3. 구속


과도한 욕심 때문인지 정치권에도 연루되면서 결국 구속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살인 교사, 특수 강도, 마약, 외환 관리법 위반, 폭력 교사, 총포, 도검류, 화약법 위반. 공갈 협박 10가지의 죄목을 받게 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가진 돈 30억을 풀어 감형되었다고 한다.

4. 은퇴 이후


10년에 걸친 수형 생활을 통한 자기 반성과 아내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7년 은퇴를 했는데 더 이상 주먹 세계에서는 낭만이 있지 않아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아내인데 아내가 자궁암에 걸리고 그만 하라고 부탁하자 과감하게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주먹계 은퇴와 동시에 조직도 해산했다.
최근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이불 가게를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선도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수만 10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삶을 바탕으로 자서전 '''거물'''을 냈는데 이때 번 돈을 선도 사업에 썼다고 한다.
한창 잘나갈 때 초등학교 동창인 여자친구와 결혼해 잘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 중 한 명은 휴게텔 사장으로 알려져 있다.
조양은, 김태촌과는 다르게 건달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뗀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영화텔레비전같은 대중매체들도 최대한 거절한다고 한다. 아직 서산의 행운이불이라는 곳이 있으면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는 조직 폭력배 퇴치에 앞장서는 한편 청소년 범죄 예방을 위한 선도활동에 힘쓰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국 조폭들의 총기 소지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그가 조양은이나 김태촌등과 달리 주먹세계에서 발을 완전히 뗀 후 한 말에 의하면 주먹세계를 완전히 벗어나려면 서울을 아예 떠나야 한다고 한다. 서울에 있으면 유혹때문에 다시금 건달짓을 하게된다고.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선배 주먹들의 환갑잔치가 서울에서 열렸을때도 얼굴만 잠깐 비추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1] 당시 친형이 장충동에서 약국을 했는데. 형의 집에서 먹고자며 중학교에 갔다고 한다.[2] 실제로 안상민의 초등학교 담임교사는 안상민한테 벌을 줄땐 책 읽기를 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