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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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파[2] 등과 함께 7-80년대 범서방파를 이끌고 언론에 3대 패밀리로 불리며 이름을 떨친 폭력조직 범서방파의 두목, 전직 정치깡패.
2. 생애
2.1. 어린 시절
2004년 시사저널에 기고한 김태촌의 못다 한 이야기를 보면 그의 생애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 #, #
전라남도 담양에서 5남 4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김태촌의 가정은 평범했다.[3] 아버지는 목회활동을 하다가 파출소 근무를 했고, 어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파멸을 맞았다. 당시 그의 나이 3살이었다. 여순사건과 빨치산 소탕 작전 때 김태촌의 아버지는 빨치산 즉결 총살 때 차마 이를 집행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총구를 돌려 권총을 쏴 사법 처리를 당했다. 그때부터 김태촌의 삶은 굴곡의 시작이었다.
이후 광산군 서방면(현 광주광역시 북구 일대)에서 자라 초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월사금도 없는 동네 고등공민학교에 들어갔으나 1학년 때 중퇴, ‘아이스께끼통’을 짊어지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다니며 개신교의 교리를 공부하여 신앙심이 깊었다고 한다. 그러나 행상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가 억울하게 깡패들에게 행패를 당하여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을 목격하고는, 신에 대해 큰 실망을 하여 실망감에 교회의 유리창을 부수었다고 한다.
그 후 김태촌은 운동을 시작했으며, 동네의 아이들을 모아 어머니를 괴롭힌 깡패들에게 복수를 했다고 주장했다. 소년시절 세번이나 소년원을 들락거린 과거 때문에 진위를 의심하는 시선도 있지만, 1950년대 ~ 1960년대 초반 광주 서방시장 일대에서 주먹패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기어이 자기 영역을 확보한 작은 몸집의 '''독종''' 김태촌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꽤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로 추정된다. 이 무렵의 김태촌은 한, 두살밖에 차이나지 않는 연장자일지라도 깍듯이 대하며 선배대접을 해주는 소년이었다고 한다.
2.2. 서울로 상경과 항쟁
여느 조직폭력배들처럼 그 역시 20살도 되기도 전에 3차례나 소년원을 들락날락거린 전과 기록이 있다.
소년원을 들락날락 거리며 같은 전남 출신인 조양은을 알게되었다. 김태촌이 조양은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데 (김태촌 1948 , 조양은 1950), 서울로 진출했을 때는 둘 다 스무살을 조금 넘긴 약관의 나이였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나이는 김태촌이 조금 더 많았지만 조양은이 더 빨리 상경해서 전국구 조폭인 조창조-오종철 세력에 편입 되었으며, 특히 신상사파와의 항쟁으로 인하여 조양은이 유명세를 타고 그에 대항하는 적이 많아지면서 조폭계의 핫 아이콘이 되자, 김태촌은 신상사 및 호남계 선배들의 힘을 업고 조양은을 치게 되었다. 여기에 김태촌을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동재가 끼어들면서 김태촌의 서방파,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동재파 소위 호남계 3대 조폭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나이가 지긋이 든 그 둘의 회고담이 재밌다. 조양은은 자기가 주도하여 김태촌, 이동재와 만나서 자기가 큰 형, 이동재가 둘째, 김태촌이 막내가 되기로 하고 항쟁을 끝내자고 했으나, 김태촌이 배신을 하여 항쟁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태촌은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고 이동재는 한참 어린데 무슨 큰 형이 조양은이었냐면서 그때의 만남은 호남 조폭 선배가 불러서 얼굴 한 번 봤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1970년대에 서울에 상경해서 그보다 먼저 서울에 자리잡고 있던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극심한 대립과 항쟁을 벌였다. 1975년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이 일어나자 조양은의 형님인 오종철을 작업하여 불구로 만든 뒤 은퇴시켰다. 한편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후 77년 세력을 확장하다가 체포되었다. 1978년 조창조가 신상사에게 항복하고 사과하면서 김태촌과 조양은도 구치소에서 만나서 화해를 한다.
2.3. 정치깡패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 당시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이철승[4] 신민당 의원의 사주를 받은 김태촌은 수하 조직원 수백여명을 동원해서 대낮에 신민당사를 습격하고, 전당대회장에 난입해서 난투극을 벌이는 등 정치깡패로서 막장행태를 보였다. 이 사건으로 김태촌은 '''신민당 노동국 차장'''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공천 약속까지 받아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 김태촌의 나이 고작 '''25세'''. 아무튼 이것으로 김태촌은 정계진출까지 꿈꾸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7년 다른 사건으로 체포된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이다.[5]
80년에 폭력혐의로 구속되어 86년에 출소한 뒤 김태촌은 민중민주당[6]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총재로 선출된 유한열[7] 의원의 측근이 되었다.
한편 김대중-김영삼 세력이 합작하여 창설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의장권한대행 김상현을 도왔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김태촌은 김상현을 고향 선배로 깍듯이 모셨으며 공천 비용으로 진 빚을 해결하는 데 '''힘을 써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상현이 정권의 표적이 되자 남산에 끌려가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3박 4일 동안 당했다고 한다. 재야민주화운동을 하던 장영달을 숨겨주다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 또 이해찬 국회의원이 민청련 30주년 추모식에서 김근태 의원을 추모하면서 "당시 근태형이 김태촌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봐서 운동권 인사들을 자기 집에서 숨겨주긴 한 모양이다. # 당시 교도소에서 대장 노릇하던 조폭들과 학생운동하다가 교도소에 간 운동권 학생들 사이의 친분은 어느 정도 있었던 사실이긴 하다.
사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 개입한 것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전북 출신인 이철승을 신민당 총재로 만들기 위해선 부산 출신인 김영삼을 제거해야 하고 그래야 이후에 호남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것을 보면 김상현, 장영달을 도왔다는게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자기 고향 사람 도와준다는 측면에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김상현이 의장권한대행이었다는 사실관계도 틀린데,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창설하던 1984년 당시에는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한 상태였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중 이었던터라 김상현이 대리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1985년에는 김대중이 귀국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이 풀렸으므로, 두 사람 모두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던 때다. 김태촌-김상현 관계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확인이 필요하다.
2.4. 범죄와의 전쟁으로 체포되다.
1986년, 상기에 언급됐다시피 6년의 형기끝에 출소한 김태촌, 그러나 바로 또 다시 일을 벌이고 만다. 뉴송도호텔 사장을 칼로 난자한것. 이 사건은 후에 김태촌이 자신과 친했던 박남용 부장검사의 사주로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기사
여담으로 그의 손을 거쳐 전국구 조직폭력배가 된 케이스가 꽤 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안토니파의 보스인 안상민. 그러나 그와 달리 안상민은 주먹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뗀 상태.
1986년의 사건 이후 징역 5년과 보호감호 10년이 선고되어 복역했다가 1989년 1월에 폐암을 이유로 석방되었다. 이 와중에 전락원-정덕진 간의 카지노, 오락실 분쟁에 끼어들어 정덕진 편에서 서서 전락원 파라다이스 투자개발 회장측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에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그해 6월에 서방파를 재결성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1991년 9월 10일에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1992년 2월 14일에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해 형량이 무겁다고 판단되어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7년이 선고되어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2001년에 건강을 이유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아래 언급할 호화 수감생활 논란으로 2002년에 청송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수감 와중인 1999년에 가수 이영숙씨와 옥중결혼을 맺기도 했다.
이후 2004년 09월 14일 법원에 보호감호취소 신청을 했으나 기각된 김태촌은 수기를 쓰고 방송에 나온 이유에 대해 "의리는 없다. 조직폭력배에 대한 영화나 소설속의 이야기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나 소설이 미화하는 것은 믿지 말라. 폭력배의 말로는 비참하다. 청소년들에게 이것을 알리기 위해 수기를 쓰고 방송에 임한 것이다"고 말했다.
2.5. 석방과 말년
여러 차례 징역살이를 해 모두 합쳐 33년을 감옥 신세를 진 김태촌은 이후 2005년 7월, 사회보호법 폐지에 따라 장기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였다. 그러나 이후 또 사건에 휘말리는데 탤런트 권상우의 집을 피바다로 만든다는 협박을 하다 구설수에 올랐다.
폭력배의 말로는 비참하다고 외치며 출연했던 TV 프로그램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또 한 번 술회하며 "나는 권력 하수인이었다"라고 조직폭력배의 수장으로서 그의 삶을 평가했는데, 그는 개심해서 그러한 삶을 살아왔던 과거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난 권력에 이용당했으니 내가 나쁜 게 아니다."는 주장이다.
사건과 관련해 그가 전화로 남겼다는 '''피바다 발언'''[8] 은 인터넷 공간에 오르면서 수많은 패러디를 낳아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유인촌, 믹키유천 등이 본의 아니게 이 패러디의 희생자가 된다.[9] 자세한 것은 나 ○○○인데 항목 참조.
당시 김태촌은 진주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교도소 내에서 그는 교도관에게 뇌물을 증여하였는데, 그 대가로 불법인 휴대전화 사용을 허용받았다. 그 후 그는 배우 권상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일본에서 팬미팅을 할 것을 요구하였고,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다. 검찰은 김태촌이 배우 권상우에게 요구한 팬미팅에 대해서는 강요미수죄를 적용하였고 뇌물 증여는 증뢰죄를 적용해서 공소를 제기하였는데, 대법원에서 강요미수는 무죄로 결론 내려졌고 증뢰죄만 유죄확정 되었다. 강요죄는 '''의무없는 일'''을 행하게 강요하는 것인데, 권상우가 고급 시계를 선물 받았기 때문에 팬미팅에 대한 대가로 볼 수 있어서 김태촌이 의무없는 일을 강요하고자 하는 고의가 없다고 하여서 고의가 조각되어 무죄로 결론 지어진 것이다. 이때 휠체어를 탄 채로 경찰조사를 받고 나오며 권상우에게 전화를 한 사실에 관해 기자들이 질문하자 김씨가 한 말은...
'''"팬의 한 명으로서 전화했습니다."'''
활동할 때에는 국제적 활동도 왕성했는데 1990년에도 야쿠자와 연계하고, 2006년에도 연계하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아 야쿠자와도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부터 폐가 영 좋지 않았다. 40대이던 1989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고, 이듬해인 1990년에는 폐암을 호소했으나 당시 원자력 병원에서는 폐암설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기사에는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는데, 전이 없이 폐 절제 수술이 성공해 결국 2013년까지 생존했다.
2012년에는 심장마비로 중태에 빠져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조직의 부하들이 간호사를 폭행하는 바람에 물의를 빚고 있다.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205/h2012051821302921950.htm
그 뒤 2013년 1월 5일 오전 0시 42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숨졌으며, # 생전 그의 부하 조직폭력배 500여 명이 그의 장례식에 문상을 왔다. #
이에 만약의 사태를 우려한 경찰은 장례식장에 집중감시병력을 대폭 증가시켰으나, 다행히 장례식은 아무 탈 없이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야구 해설가 하일성, 목사 조용기, 가수 설운도 등 많은 유명인들의 화환이 김태촌의 장례식에서 보이기도 했다.
2.6. 사후
그의 후임으로 서방파 두목이 되었다고 '''알려진''' 나모 씨는 2013년 2월 12일에 청담사거리에서 호남 최대의 폭력조직에 의해 납치당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주 후 경찰에 신고했다. 이 희한한 납치사건에 대한 분석이 2013년 4월 27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다루어졌다. 그런데 이 방영분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작 피해자(?)인 나모 씨는 서방파 두목 같은 거창한(?) 타이틀인 사람도 아닌 그냥 단순한 이해관계의 일반인 사업자였다고 한다. 나 씨는 해당 방영분에서 "나더러 조폭후계자라 하는 것은 언론들이 오보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를 납치한 국제PJ파 부두목 조모 씨는 또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장과는 달리, 나 씨는 2015년 10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 기소됐고, 대법원은 2017년 5월 12일 "나 씨가 범서방파의 두목은 아니지만, 조직원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징역 2년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기 때문에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는 것도 곤란하다. 판결에 따르면, 나 씨는 1986년 뉴송도 호텔 사장 황익수씨 피습사건에도 직접 가담해 7년간 수형생활을 했으며, 출소 전후로 범서방파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어 조 씨 측에서는 "김태촌의 양아들인 김모 씨가 김태촌 조직의 현 실세다" 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취재진에서 취재한 결과 김모 씨는 김태촌 조직의 실체라고 하기에는 블러핑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정확한 진실은 오리무중이나 '''엉뚱하게도 이 납치사건이 한 중견 기업을 주가조작한 사건에 얽힌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 기업을 주가조작한 세력 일부가 위 납치사건과 관련된 조직들의 소행이라는 심증이 있다는 것이다. 1990년 후반부터 조폭들은 단순히 폭력조직에서 벗어나서 합법적인 기업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조폭하면 흔히 떠올리는 유흥업소와 주류유통은 물론 건설업에 대금업과 주식거래, 벤처캐피털 등 합법적인 금융업까지 손대고 있다. 물론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여기서도 온갖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하지만 대법원은 2017년 4월 13일 김모 씨에게 중견기업의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고, 다른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를 인정해 집행유예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김 씨에 대해서도 법원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김태촌이 죽고 1년이 지나 2014년 9월 말 범서방파 80명 중 61명이 경찰에 입건되어 범서방파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2016년 9월 초에 해외 도피 중이던 범서방파 부두목이 자살했다고 한다. 위 서술대로 많은 인원이 입건된 상태라 장례식장은 조직원도, 경찰 병력도 없이 한산했다고. 참고로 장례식이 열린 병원은 김태촌의 장례식이 열렸던 그 병원이다.
설상가상으로 2016년 11월에는 그와 옥중결혼한 아내 이영숙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던 와중에 범서방파는 2015년 이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는 박근혜 정부 법조비리 나비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범서방파 조직원들이 일명 "정킷방"이라 불리는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다가 걸렸는데, 거기서 입수한 장부에서 정운호라는 인물의 이름이 거론됐고, 김태촌의 양아들 김 씨는 정운호가 드나들던 정킷방의 투자자였다. 그 이후는 앞의 나비효과 링크를 타고 가면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3. 기타
어린 시절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린 덕분에 병역면제를 받았다. 당시 병역법 기준, 6개월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방위(현재의 사회복무요원), 1년 6개월 이상의 형을 받으면 병역면제였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때문에 종교적 혹은 사상적 이유로 입대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는 판사가 딱 병역면제 수준의 실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죄질이 지독할 경우[10] 3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조직 이름 '서방파'는 김태촌의 고향인 광산군 서방면(현 광주광역시 북구 일대)에서 따와서 경찰에서 붙인 것이다. 언론이나 사법기관에서 흔히 사용하는 'XX파' 식의 단체 이름은 조직 스스로 짓는 게 아니라, '''검·경에서 수사 및 관리 편의를 위해서 붙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명법은 양은이파, OB동재파[11] 처럼 보스 이름을 따거나, 부산21세기파같이 거점이 되는 유흥업소 이름을 따거나, 혹은 용산 빽시디파나 수원 남문파 같이 지역 이름을 따서 짓는다. 조폭들 스스로는 **상인연합회, ##상가번영회 같은 합법적인 단체 이름을 쓰거나 아예 위장기업을 차린다. 그런데 이건 최근 20년 정도의 추세고 더 과거에는 두목이 조직 이름을 짓기도 하고, 활동지역의 유명 지명이나 건물명을 쓰기도 했다.[12] 또한 동급의 조직끼리는 상술된 사법기관이 만든 조직명인 두목이름이 들어간 명칭을 쓰기도 했으니 사실 사법기관 방식과 차이가 없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13] 허나 항상 언론에선 사법기관 쪽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게 통례이다.
사실, 김태촌을 비롯한 조직폭력배들은 노태우 정권의 범죄와의 전쟁(10.13 특별선언)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영화 친구와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게임 회색도시2(선진화파)가 이 시기 조폭들을 소재로 삼았다. 이른바 70~80년대 3대 조폭이라고 하는 양은이파 조양은, 범서방파 김태촌, OB동재파 이동재등이 여기에 꼽히는데, 이들이 매스컴의 영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 졌을 뿐 진짜 전국구급의 보스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옛 오리지날 3대 패밀리들의 후계자들이 진짜 전국구라는 것이다. 김태촌은 신상사, 조일환, 이강환, 정종원, 이승완 등을 꼽았다.
김성모의 조폭만화에서는 '''김고촌'''으로 패러디된다. 다만 외모는 살집이 있어서 실제 김태촌과는 꽤 많이 다르다. 대털에서는 황산의 부탁으로 개나리의 살해를 사주하는 인물로 나오고, 도그캅에서는 '''조직폭력배 출신 경찰관'''으로 나온다 그것도 '''일반 순경이 아닌 경찰서 반장으로'''이다. 그리고 이 김고촌 형사의 조폭 시절 별명이 고촌·치킨 (...) 때문에 등짝에 닭 문신(…)이 있다.'''"징역을 너무 오래 살다 보니 고통스럽다. 보스고 건달이고 조직이고 다 지겹다. 솔직히 나나 조양은이나 무슨 두목이냐. 우리는 평생 교도소나 다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진짜 두목들은 뒤에 있다."''' 그는 자신이 인정하는 주먹계 보스로 정종원, 신상사, 조일환, 이승완, 박종석, 정학모, 이강환 씨 등을 꼽았다. - 커버스토리 주먹계 어제와 오늘
죽기 직전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영상이 남아있다.
[1] 사유는 폭력조직 결성. 징역 형량에 따라 면제 또는 사회복무요원이 될 수 있다.[2] 정확히는 OB동재파로 보스는 이동재(1951년). OB파는 반란, 분열, 해체, 재건 등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계보가 매우 복잡하다. 이동재는 1980년대 후반 양은이파 조직원들에게 습격당해 재기불능의 부상을 입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현재는 슈퍼마켓 사업을 하고 있다. 이후 국내에 남은 부두목급들이 여러 방계 조직을 만들었다.[3] 형제들하고는 우애가 깊은 편이라고 한다. 김태촌의 말년에도 그를 포함해 형제 8명(큰형은 김태촌보다 먼저 죽은 상태였다.)이서 한꺼번에 자주 모였었다고 한다. 참고로 김태촌의 형제관계는 위로 죽은 큰형을 포함해 형 2명, 누나 2명, 남동생 2명 여동생 2명이 있다.[4] 당시 이철승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회의적이었고, 결국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의 지원을 등에 업고 조폭을 동원해서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결국 1976년 전당대회에서 승리하고 총재가 된 이후에는 '참여하의 개혁'이란 명분으로 반독재투쟁은 외면하고 철저하게 유신정권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이후에 민주화세력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몰락한다.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냐면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서울의 봄 시기가 되자 학생들이 이철승 자택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이철승은 이후 노골적인 극우인사가 돼서 과거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하였다. 이철승 대표의 딸인 이양희 교수는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5] 이처럼 정당의 당권 투쟁에 조직폭력배가 개입한 사례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돈과 조직폭력배를 이용해서 야당 내분을 조장하고 친정부적인사 일명 사꾸라로 불리는 의원들을 야당 주류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당 입장에선 자신의 세력을 견제하는 야당이 분열해 여당을 견제할만한 힘을 잃거나, 혹은 자신들끼리 싸우거나, 혹은 야당에서 친여당세력이 당권을 잡으면 상당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1986년 용팔이 사건이 대표적이다. [6] 1985년 신한민주당 내에서 당시 민정당이 주장하던 의원 내각제 개헌 수용을 주장하던 유한열 국회의원 등 12명이 '신보수회'라는 당내 서클을 만든 다음 이듬해인 1986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만들었던 정당이다. 1987년 다시 신한민주당과 합당하였다. 그러나 대표인 유한열을 위시해서 대부분이 다시 민주정의당,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다.[7] 1950년대부터 야당의 거물이던 사쿠라 유진산의 아들. 충남 금산을 정치적 기반으로 여러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90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8] "나 김태촌인데, 내가 지금 너희 집을 피바다로 만들어도 상관 없다 이거지?"[9] 예를 들면 "나 유인촌인데 너네 집 TV에 역사스페셜만 나와도 상관없다 이거지?" 또는 "나 미키유촌인데 하루만 니 방의 침대가 되어도 상관없다 이거지?" 등 다양한 버전으로 패러디됐다.[10] 예를 들면 필리핀 바기오 AT 신학대학교 학위를 돈주고 사다가 그걸로 임관한 학사 42기 2명의 경우, 이미 제대한 이후에 혐의가 밝혀져서 실제로 징역 3년형에 처해졌고 계급도 예비역 중위에서 예비역 병장으로 주저앉았다.[11] "두목 이동재가 광주광역시 OB맥주 공장 일대에서 조직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12] 일제 시대나 광복 초기의 종로 김두한, 동대문 이정재 등의 작명법이 이어진 것.[13] 물론 XX파라고 부르기보다 주로 XX네 식구라고 불렀고, 이 '식구'라는 호칭법은 초기 한국 조직폭력사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져온 방식. 그러니까 거의 백 년 전에도 조폭들은 '누구누구네 식구'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