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환(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재환은 1898년 11월 25일 평안남도 안주군 문곡면 동칠리(현 안주시 운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여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에 입학한 후 훈련을 받았으며, 1924년 9월 박은식의 양자인 같은 학교 학생 박시창·송욱동(宋旭東) 등 몇 명 및 국민혁명군의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白得林) 등과 같이 우창(武昌)에서 우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여 동지 훈련과 광복운동 선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그는 유자명·신공제·김규식 등과 손잡고 중국인, 베트남인, 인도인 등과 난징에서 연합하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고 김규식을 동 연합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여기서 그는 한국부 상무(韓國部常務)로 활약하다가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한·중·영문(韓中英文)으로 발간하여 민족독립의 당위성 및 절박함을 호소하였다.
1929년에는 난징에서 민병길·신익희·김홍일 등 10여 명과 한국혁명당을 조직, 활동하였다. 이어 그는 무력행동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었으며, 나월환 등 10여 명을 중견 단원으로 하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김규식이 김두봉·신익희·최동오 등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할 때 그는 남경한교회(南京韓僑會) 간부로 참여하였다. 1934년에는 남경한교회 주석으로서 의열단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1935년에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교관으로서 군 간부양성에 주력하며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같은 해 여름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당 등 5개의 정당 대표가 난징에서 회합하여 통합당으로 「민족혁명당」을 조직할 때, 그는 실무간부로 활약하였으며 기관지 「민족혁명」을 발간하였다.
1937년에는 민족혁명당 상하이 특별지부장이 되어 김원봉 등 적색분자를 제거하는 청당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약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지도 임무를 띠고 군자금 모집 및 밀정처단 등 후방교란에 활약했는데 같은 해 12월 말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었다.
그 직후 그는 평양으로 압송되었고 193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최종적으로 상고 기각되면서# 평양형무소에서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다시 상하이로 탈출하였으며, 1943년 3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처의 부비서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거주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1977년 5월 11일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