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테 파벨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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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Ante Pavelić
안테 파벨리치
생몰년
1889년 7월 14일 ~ 1959년 12월 28일
출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브라디나
사망
스페인국 마드리드 (향년 70세)
재임
크로아티아 독립국 포글라브니크 1941년 4월 10일 ~ 1945년 5월 8일
크로아티아 독립국 총리 1941년 4월 16일 ~ 1943년 9월 2일
정당
권리당 (1910년~1929년)
'''우스타샤''' (1929년~1945년)
크로아티아 국가당 (1950년)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1956년~1959년)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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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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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추축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괴뢰 국가 크로아티아 독립국독재자, 그리고 학살자. '''발칸의 도살자'''라고 불리며[1] 자신의 사병집단인 '''우스타샤 민병대를 이용해 70만 명 정도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자세한 악행은 우스타샤를 참고.

2. 생애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블라디나에서 태어났다. 법률교육을 받은 후 변호사가 되었다. 1915년부터 1919년 사이에 크로아티아 법률당의 서기로 일했는데, 젊을 적에 법률 공부를 하고 1919년에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달마티아의 병합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단체인 크로아티아의 정당 프랑코프치에 입당하였다.
당시에 당은 요시프 프란크에 의하여 지도되었고 1919년에 파벨리치는 당의 비서로 활동하나, 그와 몇몇 당원들은 정치적 사태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자신들이 체포된 부당함으로 소송을 걸었으나 패하였다 한다. 후에 1927년 자그레브 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까지 당내에서 영향있는 비서로 세력을 잡으며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자 지하 비밀조직 우스타샤에 협력하여 조직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왕국로 조직을 옮겼으며 1934년 유고슬라비아의 왕 알렉산다르를 암살하게 되는데, 이 때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그의 소환을 이탈리아에 청하지만,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그쳤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그는 그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헝가리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게 된다.
우스타샤의 수반이 된 파벨리치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게 되고 히틀러와 자신의 조국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하여 공포정치를 자행하게 된다. 그가 세운 정책에 세르비아인들을 비롯한 크로아티아인 이외에 타민족 국민들은 반발하지만 파벨리치는 그들을 학살하며 더 나아가서 조국을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 정교나 이슬람교를 믿는 국민들을 더욱 억압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투쟁 단체 파르티잔과 체트니크가 활동하게 된다.
4월 15일에 자그레브에 도착한 파벨리치는 다음날인 16일에 스스로 수상 겸 외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1941년 4월 30일에 국적법에 의해 모든 비 슬라브계열의 시민은 무국적자가 되어 버렸다.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어졌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 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선 세르비아인에 대한 대량 학살을 실행하였다.
1941년 6월 15일에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에 미국과 영국에 선전 포고한 파벨리치는 1942년 9월에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를 해임한 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1943년에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형식상의 국왕이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에 파벨리치는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어 "수령"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런 악행을 저지르는 파벨리치는 결국 운이 다하여 1945년 추축국들이 패하고 오스트리아를 통하여 로마로 도망쳤다.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재판소로부터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파벨리치는 더 안전해지기 위하여 아르헨티나로 도망쳤고, 독재자 후안 페론의 보안과 고문이 되었다. 고문에 오른 파벨리치는 페론을 설득하여 크로아티아에 남아있던 반공산주의자와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위한 비자 발급을 허용하게 하여 총 3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을 남미로 탈출시킨다.
이런 행동을 벌이면서 안전히 지내던 파벨리치는 1957년 2번의 암살 미수를 경험하며 유고슬라비아 UDBA의 조작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된다. 갈 곳을 잃은 파벨리치는 이후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스페인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57년 4월 10일에 로마스 델 파로말에게 습격당하여 중상을 입은 후 약 2년을 더 살다가 스페인국 마드리드에서 1959년에 사망한다.

3. 둘러보기



[1] 몇년뒤에 파벨리치의 정신적 후손이 발칸의 도살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