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
Slobodan Milošević
'''
<color=#ffffff><colbgcolor=#000000> '''출생'''
1941년 8월 20일
[image] 세르비아 군정청 포자레바츠[1]
<color=#ffffff> '''사망'''
2006년 3월 11일 (64세)
[image] 네덜란드 헤이그
1. 개요
2. 생애
3. 약력
4. 역대 선거
5. 평가
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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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정치인. 그리고 포퓰리스트.
집권 동안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인종 학살을 자행, 2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300만 명을 난민 신세로 만들었으며 한때 제3세계의 주도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파탄내고 8개 소국으로 쪼개지는 데 크게 일조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1980년대에 이미 외채 문제로 인해 어려운 상태였지만 이를 감안해도 유고슬라비아의 산업 기반을 절단내서 아주 나락으로 떨어뜨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 건 밀로셰비치임에 틀림없다. 그가 개입한 범죄로 유고슬라비아 전쟁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그리고 코소보 전쟁 당시의 수많은 전쟁범죄 등이 있다.
내전의 주 원인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였는데, 밀로셰비치가 실제로 독재자에 전쟁범죄자인 것은 맞지만 과거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나 이라크 사담 후세인, 캄보디아 폴 포트,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 우간다 이디 아민 같은 독재자들처럼 대놓고 폴란드, 이란, 베트남, 핀란드, 에티오피아, 탄자니아같은 이웃한 주변국가들을 일방적으로 침략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배타적 대세르비아 민족주의 사상을 더욱 부추겨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 다른 구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이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의 빌미를 제공하여 사태를 악화시킨 인물이었던 셈이었다. 그러니까 밀로셰비치가 아니었으면 유고슬라비아의 급격한 해체와 이로 인한 피바다 대신, 구성국 간 질서있는 이별을 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밀로셰비치의 존재에 관계 없이 유고슬라비아 해체 자체를 막기는 어려웠다. 특히 1990년 3월 크로아티아에 반공산 민족주의 정권인 프라뇨 투지만의 민주 크로아티아당이 집권[2]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멸망은 투지만이 집권한 시점에 확정[3]됐다. 밀로셰비치는 투지만이 집권한 크로아티아의 분리독립을 막아야 한다며 전쟁을 일으켰는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전쟁하는 틈을 타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까지 줄줄이 독립을 선언해버렸다.
밀로셰비치는 투지만 집권 이후 벌어지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위기에서 갈등을 조정하고 나라를 합치기보다는, 본인도 투지만처럼 민족주의 열풍에 편승하여[4] "세르비아인이 아닌 타 민족을 다 죽이거나 2등 국민화시켜서 '''세르비아인들만의 유고슬라비아'''를 만들자"고 선동했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는 권력 기반이 약했음에도 10년의 집권 기간 동안 유고슬라비아 일대를 인간 도살장으로 만들 수 있었다.

2. 생애


1941년 8월 20일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군정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교회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공산주의자 교사였다.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인 스베토자르 밀로셰비치(Svetozar Milosević)는 몬테네그로 출신으로 종교 교리를 가르치는 성직자였는데, 밀로셰비치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자신의 가정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2년에 자신의 머리에 권총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어머니 스타니슬라바(Stanislava)는 열성 공산당원이었는데, 그녀 역시 1974년 거실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삼촌은 유고슬라비아군의 육군 장군이었는데, 그 역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밀로셰비치의 악마적이고 잔인한 성격이 이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밀로세비치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이데올로기 위원회(SKJ)의 장으로 활동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 이반 스탐볼리치를 만난다. 스탐볼리치는 SKJ에서 밀로세비치의 지위를 상승시켜주는 등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밀로셰비치는 1964년에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취득 후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 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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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인 미라냐 마르코비치 밀로셰비치와 함께. 오른쪽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96년 찍은 사진이다.
밀로셰비치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했던 미랴냐 마르코비치(Mirjanja Marković)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세르비아 공산당 출신의 강경 노선파로, 베오그라드 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밀로세비치가 권력을 얻기까지 그의 정치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인 마르코(Marko)와 딸인 마리야(Marija)가 있다. 1960년 학교를 떠나면서 밀로셰비치는 베오그라드의 경제부 고문 역할을 담당했고, 1968년에 이르러 밀로세비치는 테크노가스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테크노가스는 정부가 운영하는 가스 회사로 그의 대학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테크노가스의 사장이 되었고, 스탐볼리치의 후원에 힘입어서 1978년 베오그라드 연합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밀로셰비치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외국으로 나갈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고 파리뉴욕을 자주 갔는데, 이는 그의 영어 능력이 향상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83년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최고 간부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이듬해 1984년에 그는 세르비아 공산당 제1서기장을 역임했다. 그는 뭇 세르비아인이 그랬듯이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책에 내심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코소보보이보디나에도 자치권을 준 1974년 헌법을 세르비아의 발목을 잡는 족쇄라고 생각하였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1987년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가 터뜨린 불만에 대해 세르비아계 편을 들어 알바니아계에 대한 진압을 지시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거물 정치 인사가 되었고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그 해 스탐볼리치를 당내 선거에서 축출한 후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당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발흥하던 민족주의와 경제난[5]을 이용해 세르비아계가 많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반 관료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를 진행시켜 세르비아 내부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그리고 연방 구성국인 몬테네그로의 공산당 서기장을 친 세르비아계 인물로 바꾸며 연방내 8개 행정구역 가운데 4개 행정구역을 통제할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1389년에 벌어진 코소보 플리에 전투 600주년 행사를 진행했으며 또한 코소보의 자치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과거 티토 시절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민족주의 행보였다. 이렇게 되자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내에서 밀로셰비치와 그를 지지한 세르비아에 대한 반발이 대규모로 일어, 두 나라에서도 이전부터 밀로셰비치와 대결한 밀란 쿠찬 슬로베니아 공산당 서기장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대통령이 되었고, 크로아티아에서 프라뇨 투지만의 민주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며[6] 민족주의 노선을 더욱 강경하게 띄었기에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국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 사회민주주의와 좌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김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세르비아 지부도 세르비아 사회당으로 재편되었는데 말이 사회민주주의지 실상은 그냥 세르비아 패권주의나 다름없었다. 어찌됐건 첫 자유총선에서 마침내 밀로셰비치는 65%의 득표를 얻어 세르비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세르비아에서 실시했던 선거 중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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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2일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스릅스카 공화국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날짜 출처
밀로셰비치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한 김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대한 반감을 고조해 나가며 인기몰이를 했고, 1991년에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에서 열흘만에 사실상 패배한 것은 물론 크로아티아와의 전쟁도 지리하게 늘어졌지만 1992년 5월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연립정당과 합쳐서 과반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12월에 치러진 세르비아 대선에서 밀로셰비치는 53%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진행되던 티토 격하 운동에도 편승했다. 사실 티토 시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거리낌없이 진행한지라 편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건 그 밀로셰비치도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전쟁 초기에는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했으나 1993년 5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뤄진 아테네 합의[7]를 적극 주장하여 스릅스카 공화국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엄청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관련 영상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올인할 것을 주문했으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이슬람 숙청이 먼저이고 영토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수 없다며 아테네 합의를 파기해버린다. 그러자 밀로셰비치는 1993년 말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고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전쟁에서 수비 +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 학살에만 집중하다가 미국한테 폭격 맞고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했다.
사실 세르비아 총선과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과반의석의 확보에 실패했지만, 극우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8]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고 여론 조작을 통해 대세르비아주의를 고취했다. 당시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RTS(이전 JRT 베오그라드)는 밀로세비치의 측근인 듀산 미테비치가 장악했고 RTS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타 공화국을 비방하며 세르비아인을 선동하는 것은 물론, 영상을 조작하거나 타 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의도적으로 과장 및 왜곡하여 보도하면서 타 공화국과의 화해를 주장하거나 과거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의견을 표하는 인사들을 반역자 또는 매국노로 몰아갔다. 물론 이러한 보도내용에 반발하는 기자들을 해고시킨 건 덤이었다. 듀산 미테비치는 1992년 시위발생으로 인한 경질차원에서 물러났지만 RTS는 2000년 불도저 혁명 직전까지 밀로셰비치의 입이 되던 방송사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사들은 상대적으로 TV에 비해 밀로세비치의 언론 장악에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당시의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어느 정도 편승하여서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밀로셰비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다른 공화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한 뒤에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 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는 굉장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또한 배타적이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써의 임기를 마친 후 연방 대통령로 직책을 옮겼는데[9] 연방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도 철권 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전쟁코소보 전쟁 당시에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를 세운 다음 수용소에 사람들을 투옥시킨 후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세르비아군은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거나 살해했다. 살해 당시에 손톱을 뽑거나 눈알을 빼낸 후 죽였으며, 여성들에게 모욕을 줄 목적 또는 종교적 신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간을 하는가 하면 피해자들에게 강제로 이물질을 먹이는 고문을 가했는데 이 때 인육을 먹이는 만행을 벌이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들을 총살시키거나 생매장을 시키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자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럽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다. 이 학살로 인해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해 땅에 매장당했다.
학살 뿐만 아니라 독재자답게 부정부패에도 열심이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1인당 GDP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동안[10] 횡령한 돈이 무러 '''10억 달러'''나 되었다. 횡령한 양으로도 필리핀마르코스, 인도네시아수하르토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학살극을 주도한 것과는 별개로 정치가로서는 꽤나 유능하기는 했다. 1995년 보스니아 전쟁 때는 서방이 경제 제재를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는가 하면 코소보 전쟁 때에도 몇 차례에 걸쳐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보스니아 전쟁이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에서도 민병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 전쟁 범죄의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도 보여줬으며, 국내 정치에서도 1996년 세르비아 지방선거에서 야당에게 수도 베오그라드 및 제3 도시인 니쉬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하는 등 실리적인 모습도 보였다.
1999년에 코소보 지역에 알바니아계 무장단체를 탄압하고 이 과정에서 학살을 벌였는데 학살 자체야 2000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재선을 염두에 둔것이지만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결국 신 유고연방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코소보 공습에서 생각보다 선전하기는 했지만 얻은 것이 없었고 그간의 경제난 때문에 국민들이 지쳐 있었기에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선거결과를 조작해 2차 결선투표를 강행하려 했다. 원래는 야당 후보가 과반수를 조금 넘는 50.3%의 득표율로 결선 없이 당선될 예정이었지만, 밀로셰비치는 야당 후보가 얻은 표를 48.9%로 조작한 뒤 결선 투표에서 세르비아 급진당 등 극우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방 대통령에 재선되려 했다. 이에 반발하여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중장비를 이용해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및 국회, 정부청사를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무려 3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2000년 10월 5일에 끝내 자신이 세르비아에 불러온 결과를 인정하고, 13년간 차지했던 권좌에서 물러났다.[11]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호응했던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를 몰아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르비아인들이 대세르비아주의를 추종한 결과가 경제 파탄과 국제위상의 추락(제3세계를 주도하던 국가에서 전범국가로 추락), 국가의 전반적인 약체화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전쟁, 전쟁, 또 전쟁을 했는데 10년 동안 세르비아 땅은 계속 줄어들고, 세르비아 국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기만 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밀로셰비치가 선전을 해댔는데 왜 정작 세르비아 땅이 줄어든단 말인가? 이 점이 세르비아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199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광풍 아래에서도 세르비아인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밀로셰비치에 비판적인 야당과 인사들도 존재했다.[12]
그는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강력한 야당을 만들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며 국내에 남아 정치를 계속할 것을 표명했다. 또한 밀로셰비치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13]는 선거기간 내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미국의 정치도구에 불과하다며 밀로셰비치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아닌 자국내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사형당한 세르비아의 인접국가인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 같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법원에서 재판하여 국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14][15] 그래서 밀로셰비치가 극적으로 사임한 데에는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 등 구 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주창한 새 총리이자 전 베오그라드 시장인 조란 딘지치의 조치로 인하여 2001년에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전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앞서 언급한 대로 2000년에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듬해인 2001년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되었다. 코슈투니차는 밀로셰비치의 처우를 놓고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밀로셰비치를 위시한 구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인도를 주창하던 조란 딘지치 전 총리와 심한 갈등을 빚었는데, 유고 국내 처벌을 빌미로 밀로셰비치를 봐주는게 아니냐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국들과 밀로셰비치 시기 내전을 치뤘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구유고권 주변국가들의 의심과 불신마저 가중되자 결국 밀로셰비치에 대한 유고 국내 처벌 주장을 철회하고, 밀로셰비치의 헤이그 전범재판소 인도를 허락했다.
2002년부터 밀로셰비치는 재판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며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자랑스럽다." 는 망언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의 재판을 담당했던 영국 출신 변호사인 스티븐 케이는, "밀로셰비치는 재판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이 재판을 모두 치르고 감옥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고 밀로셰비치가 살아있을 상황을 말하기도 했다. 밀로셰비치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 내 UN 안전 지대에서 8,400여 명의 이슬람교도를 대량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지난 2002년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투옥 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다가, 2006년 3월 11일 64세의 나이로 헤이그 감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이날 밀로셰비치가 그의 감방 침대 위에서 죽어 있는 것을 교도관이 발견한 뒤 상부와 의료진에게 보고했으며, 곧이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네덜란드 법의학 연구소로 시신을 이송해 사체 부검과 독극물 검사를 지시했지만 사인은 자연사인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기 전에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 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밀로셰비치는 그동안 고혈압과 심장질환 등의 증세로 수 차례 러시아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 요청했으나, ICTY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해 요구를 거절했다. 그의 지지자들과 유족들은 밀로셰비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ICTY에 있다며 분노를 표했다. 밀로셰비치가 속했던 세르비아 사회당의 한 간부는 밀로셰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서기장도 그의 러시아행을 막은 것은 실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처벌을 주장했던 스티페 미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그가 재판의 말미에 받아야 할 선고를 받지 못한 채 먼저 죽은 것은 유감이라 말했다. 또한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간부는 희생자들에게는 좌절이고 정의에는 역행하였다는 말을 남겼으며, 희생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밀로셰비치가 단죄할 기회가 없어졌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부인이던 마르코비치도 2019년 4월에 사망하였다.#

3. 약력



4. 역대 선거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0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선거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사회당
'''3,285,799 (65.34%)'''
'''당선 (1위)'''
'''초선'''
1992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
세르비아 공화국
'''2,515,047 (53.24%)'''
'''당선 (1위)'''
'''재선'''

5. 평가


세르비아에서의 평가는 50대 50. 집권 이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인의 생존권을 내세우며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웠는데 이것 자체는 티토 사후인 1980년대부터 세르비아 내부에서 이미 확산될 만큼 확산되어 있어서 밀로셰비치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지도자로써의 역량은 한참 부족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나마 세르비아 본토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16] 연방 구성국들에 거주 중이었던 수만의 세르비아인들이 전쟁통에 사망한 것은 물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학살극까지 벌일 만큼 우세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특히 반인륜 행위는 안 하느니만 못해서, 차라리 안 했으면 유고연방 해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던 걸 제 스스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밀로셰비치가 주도한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인한 내수 붕괴는 세르비아 경제의 급속한 악화를 초래했으며 거기에 NATO의 공습으로 인해 코소보마저 상실하게 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했다. 게다가 코소보 공습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학살이었는데, 보스니아 학살로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 셈이다. 일반적인 국가라면 보스니아에서 그 난리 치고 패했을 때 바로 탄핵당해 쫓겨나거나 패전에 책임지고 하야했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2000년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다. 그나마 밀로셰비치의 폭정으로 인해 얻은 수확이라면 밀로셰비치 실권 이후에 집권한 코슈투니차나 진지치, 타디치, 니콜리치, 부치치 등 세르비아의 대통령이나 총리들은 밀로셰비치처럼 대놓고 전쟁이나 학살같은 막장행보를 걷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17]
세르비아의 극우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은근히 밀로셰비치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동정하는 여론도 있다고 한다. 아예 세르비아의 일각에서는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아니라며 밀로셰비치가 잔인한 학살자였다기보다는 연방에서 분리독립하여 이탈하려던 다른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일으킨 전쟁이 장기화되던 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도 자신과 비슷한 취급을 받아야 하지만 왜 같이 취급을 안하냐면서 하는 억하심정으로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이었을 당시 유고 내전 발발 직전에 대세르비아주의를 대놓고 선동하여 알아서 각 유고 연방 소속국 내부의 분리독립세력들에게 독립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물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에 대해 무기와 군사훈련을 지원, 인종청소 등의 민족 대량 학살을 확대했다. 특히 독립 막겠다고 군대 보낸 건 그렇다 쳐도 제노사이드는 내전 중인 국가의 정부가 다 이런 짓 하는 것도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밀로셰비치 정부 시절 세르비아 중심의 신유고 연방과 전쟁 중에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스릅스카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등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부의 세르비아계 반란 정부들과 싸웠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전 대통령,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 코소보의 하심 타치 총리 등도 많은 학살과 약탈 등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이 전쟁 자체가 국가지도부에 한정해서는 무고한 피해자가 없는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세르비아 측의 진압 자체에 대해서는 국제법적으로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18] 하지만 밀로셰비치가 가장 많이 거론되고 비난받는 이유는 자기네 국가 내부에서만 학살을 저질렀던 저 지도자들과 다르게 밀로셰비치는 저 모든 지역의 분쟁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전쟁범죄를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부패하고 무능하며 포퓰리즘적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에 매몰된 지도자와 특정 사상 혹은 신념에 매몰된 국민이 짝짜꿍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준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6.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세르비아 중앙세르비아 브라니체보 구 포자레바츠[2] 당시 민주 크로아티아당(현 크로아티아 민주당)은 '''크로아티아인의 크로아티아'''를 주장하면서 보스니아까지 합병하자고 주장하여 전쟁 위기를 고조시켰다.[3] 그래서 유고슬라비아의 존속을 바라던 사람들은 밀로셰비치보다는 투지만을 더 욕한다. 실제로 투지만은 유고슬라비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위해 1990년 집권 직후 온갖 정치 공작을 했다. 특히 보이보디나 자치주코소보의 분리독립까지 선동하고 지원하여,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세르비아 치하에 남긴 했지만 코소보는 정말로 세르비아한테서 독립해버렸다. 그리고 투지만도 보스니아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수만 명의 보슈냐크인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자행했기 때문에 밀로셰비치를 욕할 처지가 못 된다.[4] 이 외에도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모두 민족주의에 편승했다.[5] 1980년대 중반에 가격자유화를 실시한 이래로 물가상승률은 민족주의 세력의 발흥이라는 변수가 겹쳐 매년 올라 1989년에 유고슬라비아의 물가상승률은 1000%를 넘어섰으며 1990년에 중앙정부 차원에서 물가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화폐개혁 및 긴축정책을 단행하지만 이 때문에 기업들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각 공화국에서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에 반발하여 분열만 가중시켰고 결국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물가상승이 멈추게 된 것은 1994년의 일이었다.[6] 크로아티아는 1970년대 초반에 티토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축출된 상태였던지라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밀로셰비치에 대한 반발을 하며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기는 했으나 세르비아 공산당이나 슬로베니아 공산당과는 다르게 투지만 급의 거물급 대권주자를 보유하지는 못했고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재집권하게 된 것은 2000년 총선이 되어서부터였다.[7] 보스니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후 분리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하는 것.[8] 다만 밀로셰비치와 쭈욱 같이 행보를 같이 한 것은 아니었고 중간중간에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안했다를 반복했으며 밀로셰비치가 축출되기 직전에는 이미 세르비아 사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여 따로 대통령 후보를 낸 상태였다.[9] 신유고 연방 대통령 직위는 세르비아 대통령, 몬테네그로 대통령 등 구성국 대통령들을 후보로 하여 선출하는 직위였다. 당연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세르비아 대통령이 당선될 게 뻔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밀로셰비치는 연방 대통령 직위에 70% 이상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밀로셰비치는 본인이 연방 대통령 자리에 당선된 이후에 뭔가 쫄렸는지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여 결선투표제를 채택한 직선제로 선출 규정을 바꿨다.[10] 물론 전쟁을 몇년씩 해대고 경제제재까지 받으니 당연히 생산활동이 막혀서 줄어들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나마 물가 폭등은 1994년 유고슬라비아 디나르화를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시키면서 겨우 진정되었지만 국제재제가 2000년까지 남아있었기에 전후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은 것은 매한가지였다.[11] 비슷한 시기에 밀로셰비치의 적수라 불러졌던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도 아시아발 경제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하락하는 가운데서 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투지만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2000년 대선에서 결선진출에 실패하고 총선에서도 사민당에게 대패해 정권을 내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민족주의로 떴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다니 기묘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밀로셰비치의 정당인 세르비아 사회당은 세가 큰것은 아니지만 2008년 이래로 연립정권에 창여하는 여당으로 장기 집권하고 있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후에 투지만에 대한 크로아티아인들의 평가가 올라가면서 사회민주당과 정권을 주고받는 거대양당으로 복귀하기는 했다.[12] 특히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조란 딘지치 세르비아 총리.[13] 사실 이 사람도 티토 시절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해서 징계를 당한 적이 있었고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외채위기와 물가상승에 허덕이던 시절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세르비아 지식인층으로부터 명성을 얻었는데, 이 때문에 밀로셰비치한테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점이었다. 다만 연정에 합의한 세르비아 급진당과는 다르게 코슈투니차는 결국 야당의 길을 걸었다. 물론 세르비아가 지난 10년간 벌인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열심히 변명하는 건 밀로셰비치나 코슈투니차나 마찬가지였다.(...)[14] 포악한 독재자였지만 루마니아 국내에서만 반대파 탄압과 고문, 살인, 인권유린을 저지르던 차우셰스쿠와 달리,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 시절 과거 구 유고 연방에 속해 있다 연방 붕괴로 분리독립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주변 발칸 반도 신생국들의 내전에 개입, 침범하여 제노사이드를 주도했던 전범이었기에 정권붕괴 이후 루마니아 신정부에 의해 자국내에서 사형당한 차우셰스쿠와는 그 급이 달랐고, 구 유고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학살 등 유럽과 서방세계에 남긴 전쟁범죄의 규모와 경악성도 1970, 80년대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통치하면서 남긴 악영향보다 더 거대했다.[15]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우셰스쿠 부부를 총탄 셰레로 총살시켜버려가며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던 세르비아의 옆나라인 루마니아조차도 코슈투니차의 밀로셰비치 국내 처벌 주장에 대해 찬성, 지지했냐면 더더욱 아니었다. 외려 이들도 외교 성명 차원에서 밀로셰비치와 카라지치 등 유고 전쟁 전범 인사들에 대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인계를 주장했으며, 당시 세르비아의 지도층들의 태도를 비난했다.[16] 물론 경제파탄이 났지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물가상승은 1994년에 독일 마르크화의 페그제를 채택하면서 어느 정도는 땜빵했고, 세르비아 자체가 농업의 비중이 높았던지라 식료품의 자급자족은 가능했기 때문에 경제제재에도 식량부족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석유는 별로 안나서 연료는 죄다 수입해야 했지만 이것도 밀수로 대충 땜빵은 했다. 심지어 이 석유 밀수의 상대방은 '''러시아보리스 옐친'''이었다. 그래서 오래 버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수준이 대폭 떨어지고 수출길이 꽉 막혀서 공장들이 문을 많이 당아서 실업률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결국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한테 세르비아에 대한 석유, 천연가스 수출 제한을 압박하자 옐친은 밀로셰비치한테 연락을 하여 석유 공급 중단을 통보했고 결국 밀로셰비치가 전쟁을 그만뒀다.[17] 당장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와 보스니아의 한트샤르에게 자국민들이 학살당한 과거사와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분리독립을 시도하려던 연방국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들에게 벌인 인종청소 등 학살 행위로 인해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처지로 변해버린데다 밀로셰비치의 치세 동안 전범국이라는 국제적인 지탄까지 받아야 했으니 밀로셰비치 정권 이후 세르비아의 지배층 인사들이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필연이었다.[18] 밀로셰비치가 기소된 원인은 전쟁범죄지, 전쟁 행위 자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