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전쟁

 


[image]
'''열 흘 간에 걸친 교전 끝에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소속 T-55 전차, 1991년 7월 7일'''
[image]
''''폭풍 작전' 당시 아드리아 해 해변에서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측 반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크로아티아군, 1995년 8월 5일'''

일자별 전황
1. 개요
2. 역사적 배경
2.1. 중세
2.2. 제1, 2차 세계대전기
3.1. 내전의 발단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
3.2. 슬로베니아 전쟁(열흘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
3.3. 보스니아 전쟁(1992년 4월 6일 ~ 1995년 12월 14일)
4.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또 다른 불씨 - 코소보 전쟁(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1일)
5.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6. 결과
7. 관련 대중매체
7.1. 영화
7.2. 서적
7.3. 만화
7.4. 게임
8. 둘러보기


1. 개요


세르보크로아트어: Ratovi u bivšoj Jugoslaviji / Ратови у бившоj Jугославиjи
슬로베니아어: Vojne v nekdanji Jugoslaviji
알바니아어: Luftërat në Jugosllavi
발발 1991년 3월 31일 ~ 종료 2001년 11월 12일
1991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련의 전쟁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단순 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규정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유고슬라비아란 국가가 이미 없어진 이상 더 이상 내전으로 정의하기 힘들다. 위키피디아의 "Yugoslav Wars(한국어판: 유고슬라비아 전쟁)"라는 항목명이 대표적.
일각에서는 1998년에서 1999년에 벌어진 코소보 전쟁을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자도 있다. 따라서 1995년 보스니아 전쟁을 끝으로 1995년 12월에 종료되었다는 주장이다. 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에서 있었던 충돌을 근거로 1991년 3월을 발발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2.1. 중세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원래 고대 로마 시대에는 일리리아로 불리던 곳으로서 게르만족서유럽으로 이동한 이후 움직이기 시작한 슬라브족은 7세기에 이 일대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랑고바르드 왕국, 사산 왕조, 아바르 칸국, 이슬람 제국 등 외부 세력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정신없는 사이 일대에 눌러앉았다. 슬라브족은 계속 동로마와 연합 또는 침략을 반복해 가며 세력을 확장했고, 원래의 일리리아계 로마인들은 동화하거나 쫓겨나서 이곳은 완전히 슬라브족의 차지가 된다.
이곳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남슬라브족으로서 폴란드-체코와 같은 서슬라브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와 같은 동슬라브족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데, 교회의 대분열 이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서쪽은 가톨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의 동쪽은 정교회의 영역이 되면서 슬라브족의 종교도 동서에 따라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이후 14세기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해 15세기에 합스부르크령으로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일부를 제외한 지역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이 된다.
사실 민족적 갈등의 뿌리는 오스만 제국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고, 가톨릭-정교회가 갈라진 동서방 기독교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 때 종교적 갈등이 고착화되었고, 오스만이 이런 종교적 갈등을 이용하여 이교도 지배민족인 남슬라브족을 교묘하게 분리 지배했다. 여기에 남슬라브족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은 이슬람교가 우선인 오스만 제국 내에서 우대를 받고, 경제적, 정치적 우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또 다른 민족적 갈등을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었다.
오스만 시절 이 지역의 민족적 갈등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예를 들어, 크로아티아인이나 보슈냐크인이나 세르비아인이나 서로의 종교 축일에 서로를 방문해 축하하며 함께 축제음식을 나누고, 각 민족간의 통혼도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발칸 지역에서는 종교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개 세개씩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 중세 기독교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유럽에서 최초로 대규모이단 사냥과 서방기독교 세계 내부의 종교 전쟁, 학살이라 할만한 알비파 십자군카타리파 또한 원래 보스니아 지방의 보고밀파에서 전파 된것이 정설로 통할 만큼 발칸 반도, 특히 몬테네그로-보스니아 산악 지대는 애초에 강력한 정복 제국들의 행정력이 닫지 않아 종교적으로 굉장히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였다.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회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아티아 여성이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하고 남편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이슬람 법정을 찾아가 이혼판결을 받아내는 사례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이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무슬림이다!"라며 관리들을 쫓아내고 그러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라!"라며 다시 징집관을 보내오자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니들 행정문서 잘못된 거 아님?"하고 거부하는 알바니아 마을 이야기도 그렇고 민족주의 시대 이전에 이 지역은 가톨릭과 정교회와 이슬람이 나름대로 공존하고 있었다.
정교회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Άγιος Ηλίας ο Αρδούνης)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금 좀 덜 내겠다는 요량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했다가, 아토스산을 여행하고 나서 그곳에서 신성한 체험을 하고 수도생활을 8년 동안 하고나서 고향인 칼라마타로 돌아온 그에게 시장에서 한 튀르크 군인이, "이보게 무스타파(일리아스의 무슬림 이름), 자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 왔는가?"라고 묻자, "나는 더이상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라네."라고 답하고, 그러자 도시의 관리들이 그를 배교혐의로 고발해 처형했는데 화형대의 불길에도 불구하고 전혀 몸이 타지 않아 결국 칼을 맞고 죽었고, 죽은 일리아스의 몸이 밤이 되도록 밝게 빛나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슬람에서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당시엔 워낙 이슬람인 척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 많아서 신성시된 경우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지역에 대해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우대 정책을 펼치고 그에 따라 편의를 위해 이전에 이 지역에서 이단교파인 보고밀파를 믿던 남슬라브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급속히 이슬람으로 갈아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지배 민족인 튀르크인은 본진 아나톨리아와 수도 코스탄티니예 근방인 그리스와 불가리아 일대에서 주로 살았지 유고슬라비아 일대까지 대거 이주하지는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은 튀르크인보다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남슬라브족을 통해서 투사되었다.[1] 오스만 치하에서 기존에 있었던 정교회-가톨릭 갈등이 증폭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이슬람교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제국 내 백성들을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을 형성하게 하고, 토착 종교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애매한 구분만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톨릭 지역, 정교회 지역, 이슬람 지역 등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지역의 슬라브족은 대체로 정교회-가톨릭-이슬람의 신앙에 따라 민족도 갈려서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인,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나 혈통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19세기에 등장한 범슬라브주의는 피지배 상태에 처한 남슬라브인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슬라브 민족 공동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모든 남슬라브인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였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그 사상이 발전되어 정교회키릴 문자 이외의 다른 슬라브 하위문화를 부정하는, 러시아 동화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정교회를 믿던 세르비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우군으로 성장하였다.
한편 가톨릭이 주류 종교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계 슬라브인들은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갖은 탄압을 당하던 폴란드인의 사례를 예시로 들며 이에 거부하였다. 이후 이들의 주장은 19세기의 급격한 국제 정세속에서 슬라브인이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존속할 방법은 오스트리아라는 든든한 배경 아래에서 자기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로 확장되었다.[2]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시에, 헝가리 왕국의 헝가리인처럼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둘 다 지닌 양면적인 성격의 정치 사상이였다.
제국의 남슬라브인은 보헤미아 왕국의 체코계 슬라브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폴란드계 슬라브인과 연대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본래 지배민족에 속하였던 독일인과 대타협 이후 제국 내부에서 상당한 수준의 입지를 가지게 된 헝가리인들에 의해 이들의 정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와 같은, 제국의 실권과는 거리가 있던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정도로 그쳤다.[3]
전체적인 구도로 정리하자면, 19세기 발칸반도의 슬라브족 문제는 크로아티아를 소유한 오스트리아 제국, 세르비아를 영향력 하에 둔 러시아 제국, 보스니아를 소유한 오스만 제국의 삼파전 구도로 진행되다가 러시아-튀르크 전쟁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산 스테파노 조약의 대안으로 선택된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4]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일대일 구도로 전환되었다. 발칸 문제로 인하여 크림 전쟁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는 머지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된다.[5]

2.2. 제1, 2차 세계대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발칸 반도의 남슬라브족들은 통일된 국가주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몬테네그로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였던 마케도니아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19세기 말부터 슬라브주의를 기치로 하여 새로운 통합 국가를 건설하려는 남슬라브족 통합 운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남슬라브족 통합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이후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승국이었던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합병하여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은 몬테네그로도 합병하면서 1929년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오랜 외세의 지배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종교와 역사적 배경을 가지게 된 발칸의 남슬라브족들은 이질적인 다른 민족이었다. 복잡한 다민족 국가답게 타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대립, 공산주의자본주의 이념 대립, 민주주의파시즘 충돌이 매번 지속되어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다.
이에 알렉산다르 1세 당시 유고슬라비아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해 입헌군주제에서 전제군주제로 전환하고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강압적 독재 정치를 시도하여 유고의 혼란을 잠재우려 했으나, 결국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불가리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혼란 속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들인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협공을 받아 페타르 2세 국왕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영국으로 달아나고 독일 국방군에게 점령당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여러 괴뢰국으로 쪼개져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독일군과 나치의 하수인들이었던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에 항거하는 체트니치, 파르티잔 등의 무장 게릴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 중 요시프 브로즈 티토, 밀로반 질라스 등 공산계 인사들이 이끄는 파르티잔이 강력한 주도권을 잡아 세를 불려 결국 소련의 도움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1944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킴과 동시에 이듬해인 1945년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3.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집권


전쟁이 끝나자 유고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파르티잔은 군주제 폐지와 망명 중인 페타르 2세 국왕의 군주 지위 박탈 등을 선언하고,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티토를 연방의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공산 독재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공산화 과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소련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48년 소련의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고의 코민포름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며 공산권에서 축출했다. 코민포름에서의 축출 이후 티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집중했는데,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중립, 비동맹을 표방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적으로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제3세계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 시기 유고는 티토의 지도하에 자주적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티토는 1953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티토는 복잡한 민족과 종교들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해,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에서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공산, 자본 진영 어느 한쪽의 눈치도 안 보고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MiG-21 전투기, 프랑스아에로스파시알 가젤 경공격 헬리콥터 같은 최신예 무기들을 사오고 외교적으로도 안정되는 등 큰 번영기를 누렸다. 문화산업도 크게 발달하여 락밴드아이돌도 많이 배출했고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3. 연방의 붕괴


[image]

3.1. 내전의 발단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


1980년 5월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해 온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사망하면서 티토 집권 아래 잠재되어 있었던 민족과 지역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는 6개 공화국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구성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이행되었다. 그러다 1991년 크로아티아 대표인 스체판 메시치가 연방대통령을 맡았지만 연방의 실권은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에게 있었기에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고 그 해에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탈퇴했기에 메시치도 사직했다. 이후 메시치는 크로아티아의 2대 대통령도 역임했다.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은 오일쇼크로 인한 성장저하와 1980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외채 폭증으로 일어난 경기침체, 그리고 물가 상승에 무기력했다. 그나마 외채 문제는 제3세계의 지도국이라는 타이틀 덕택에 상당부분 탕감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2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끌어안고 있었으며 매년 2배가 넘는 물가상승과 10% 이상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경제성장이 정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외채 위기는 또한 1950~70년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던 경제의 지역별 불균형 발전문제를 쟁점화했다. 그리고 이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던 티토 격하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들은 물론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거나 민족주의자들이 지도자로 등극하게 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각 공화국 간의 갈등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물론 매년 수백만명 가량의 해외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유고슬라비아 곳곳으로 놀러와 휴양을 즐기거나 올림픽을 열거나 내전 시작 1년전인 1990년에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개최하는 등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지역이기주의로 점점 분열되어 가고 있었고, TV방송과 신문을 비롯한 매스미디어도 민족주의자들의 차지가 되는 바람에 상대 공화국과 자치주에 경제위기의 책임을 몰면서 국론분열에 일조했다.
1989년 동유럽의 공산 독재 정권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유고슬라비아도 대세에 따라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가 슬로베니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탈퇴로 붕괴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 의한 붕괴는 민족 간의 갈등 해소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우선 당시에 막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 및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집권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부터가 시대상을 이용해서 코소보와 몬테네그로, 보이보디나 공산당 서기장 자리를 친 밀로셰비치 인사로 채웠으며 이에 대응하여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민족주의 열풍이 강화되었다. 이후 1990년 12월 23일의 선거에서 각 공화국은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각 구성국은 지역 경찰력으로 위장한 군 병력 창설 및 독자적 외교 행보를 하면서 연방정부의 대표성은 급속히 무너져 갔다. 즉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91년 6월 25일에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각각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하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연방 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이에 따라 세르비아 주도의 연방정부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사실상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3.2. 슬로베니아 전쟁(열흘 전쟁)과 크로아티아 전쟁


연방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슬로베니아로 진격하자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지역 방위군 등을 모아 게릴라전으로 대항했고, 슬로베니아와 인접한 크로아티아에서도 저항군을 조직해 맞서면서 인민군과 크로아티아군 간 충돌이 치열해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군에 의해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이 학살당한 과거를 내세워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에 반대하여 1991년 8월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차지하던 크닌 등 크로아티아 중부 지역에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RSK)을 수립, 분리 독립을 선포하고 세르비아와 국경을 접한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도 세르비아인 민병대[6]를 결성해 인민군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군에게 저항하면서 사태는 복잡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크로아티아 전역을 점령해 연방을 유지하려던 연방정부의 전략이 실패하면서 차선책으로 실행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국민의 90% 이상이 슬로베니아계로 구성된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연방정부는 고작 개전 열흘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휴전)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짧은 전쟁의 별칭이 "Ten Day War"(열흘 전쟁)인 이유다.
사상자는 인민군 사망 44명, 부상 146명에 슬로베니아군 사망 18명, 부상 182명이었는데, 인민군은 모두 현지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사상자 다수가 슬로베니아 출신이었다.
슬로베니아가 독립 선포 날짜를 하루 앞당겨서 인민군의 진군은 전쟁이 일어난 지 24시간 뒤인 6월 26일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 내부의 인민군을 항복시키는 데 집중하는, 기발하면서도 다소 위험한 전략을 사용했으나 다행히 연방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전쟁은 빨리 끝났다.
이 과정에서 4,693명의 인민군과 252명의 경찰이 슬로베니아군에 포로로 잡혔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포로가 된 인민군과 경찰들은 (휴전기간부터 이미) 무장해제 후 세르비아로 돌아갔다.
결국 이렇게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한 인민군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양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게 되었고, 여력을 크로아티아로 집중시켜 독립 방해 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인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과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인 민병대를 지원하는 등 무력 공세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 내전 초기 크로아티아군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는데 육군력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공군은 더욱 상태가 불량했다. 게다가 1991년 9-11월 시점만 해도 크로아니아 영내에 (고립되기는 했지만) 인민군 기지가 곳곳에 있었다. 크로아티아군은 임시로 농업복엽기 안토노프 An-2폭격기로 이용했으며 내전 발발 직후에 내려진 국제사회의 대유고 군사 무기 금수 조치를 피해 냉전 붕괴 후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로 경제난에 빠지면서 다른 나라에서 팔기위해 내놓은 다른 동유럽권 국가들의 MiG-21 전투기와 Mi-24 공격 헬기 같은 여러 공산권 국가의 군용기들을 밀수 거래를 통해서 들여오기도 했다. 그리고 1991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때로는 전투를 통해, 때로는 EC 등이 개입된 협상을 통해 크로아티아 내의 인민군 기지를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인민군 인원 중 일부를 자기 군대로 흡수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군은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척 사기가 높았으며 외국 PMC의 도움을 받아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인민군과 크로아티아 간의 전투가 치열해져 가던 1991년 9월 남부의 마케도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모든 군사력을 크로아티아에 집중시키던 연방정부는 마케도니아의 이탈을 저지하지 못해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한편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국경 지역 도시인 부코바르에서는 인민군, 동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민병대와 크로아티아군의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는데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본토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인 부코바르를 함락시키기 위해 1991년 8월에 1차 공세를 펼쳤으나 크로아티아 측의 격렬한 저항과 시가전에 약한 인민군의 전략 미비로 인해[7] 인민군은 부코바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9월 말이 되면서 인민군의 작전 사령관으로 지보타 파니치 사령관이 부임해 부코바르 전선에 파견되었고, 파니치 사령관은 부임하자마자 인민군의 작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조직을 해결하기 위해 새 본부와 지휘 통제 체계를 수립하는 개편을 단행하는가 하면 중장갑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주요 전력으로 전투를 벌이는 전략을 취하며 10월부터 2차 공세를 재개했다. 크로아티아군은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의 반격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저항은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의 강력한 공세에 의해 돈좌되었고 결국 11월 3일 겨울 부코바르가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에게 함락되면서 부코바르 전투는 크로아티아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 인민군 등 모두에게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며 크로아티아의 패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전투에서 부코바르를 점령하고 승리한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들 역시 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들을 내며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본래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는 부코바르를 함락시킨 다음에 오시예크 등 동부 크로아티아의 도시들을 점령하고,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까지 진격하려는 군사 작전 계획까지 수립하고 있었는데 부코바르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워낙 커서 결국 크로아티아 내 도시 추가 공격을 백지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1991년 11월 시점에서 자그레브 공격을 백지화한 근본적인 이유는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상황이 1991년 10월 14일 라도반 카라지치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디스전[8]이 벌어질 정도로 심각해졌던 때가 부코바르 점령 때와 겹쳤다.
1991년 11월 부코바르가 함락되고 두브로브니크, 자그레브 등지에서도 인민군과 세르비아인 민병대들의 공세와 공습에도 크로아티아 측의 저항 역시 만만치 않았고, 결국 연방정부는 이듬해인 1992년에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하지만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의 주도권 유지를 명목으로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에 대한 지원은 지속되어 크로아티아와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괴뢰국가인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간 군사적 대치는 이어졌으며 뒤이은 보스니아 전쟁에 크로아티아 역시 참전하는데 뒤에 보듯 그렇게 순수한 목표만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실제 휴전은 1995년 8월, 공식적으로는 1995년 11월 12일의 에르두트 협정 이후 전쟁이 끝을 맺었다.
크로아티아는 수도 자그레브, 유명한 관광지 두브로브니크, 플리트비체 호수 등 전 국토가 폭격 대상이 되어 독립을 위해 큰 대가를 치렀다. 특히 플리트비체 호수에선 첫번째 내전 사망자가 여기서 나왔는데 이 충돌이 공화국 선포 전인 1991년 3월에 있었기 때문에 위의 유고 내전 발발 시기조차도 논쟁의 여지가 생기게 된다.
4년에 걸친 연방정부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으로 양방 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2,0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약 25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크로아티아군은 당시 장비도 열악했고 조직력 및 숙련도도 형편 없어서 크로아티아군이 그나마 군대다운 군대가 된 것은 1995년 이후의 일이다.
결국 이 전쟁에서 크로아티아군 사망자는 세르비아군의 두 배, 부상자는 일곱 배에 이르렀고, 그나마도 세르비아군 부상자에 포함된 크라이나 공화국군이 전체 세르비아 사상자의 3/4에 달했다.
연방 해체로 인민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많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계 출신 군인들 대부분이 연방에서 독립한 모국이자 신생국가의 군대인 크로아티아군과 슬로베니아군, 마케도니아군으로 편입/재편되었고, 그나마 인민군에 남아 있던 이들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 의해 모두 배제되면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서 세르비아와 싸우거나 제3국으로 망명했다. 원래부터 인민군 내에서 압도적인 인구 비율을 자랑하던 세르비아계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또한 세르비아는 정규군을 대규모로 투입하기보다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나 현지 자치공화국 군대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들은 세르비아 마피아 출신 등등 범죄자들도 많았고 기강도 별로 좋지 못했다. 준 제노사이드 경향을 보인 이 전쟁에서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 의도는 어느정도 적중했다. 국제 사회는 세르비아 자체에는 직접적인 책임을 크게 묻지 않고 민병대 지원 및 학살 지시에 직접 가담한 것이 확인된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과 라트코 믈라디치, 라도반 카라지치 같은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선에서 그쳤다.
마침내 같은 해인 1992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마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결국 연방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그해 4월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과 함께 국명에서 사회주의를 제거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즉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종전은 아니고, 무척 끔찍하고 참혹한 두 차례의 전쟁이 남아 있었다.

3.3. 보스니아 전쟁(1992년 4월 6일 ~ 1995년 12월 14일)


연방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세 민족과 두 나라, 미국과 나토, 러시아가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기도 했다. 항목 참조.

4.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또 다른 불씨 - 코소보 전쟁(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1일)


연방 내 각 공화국들이 연쇄적으로 독립한 상태에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세르비아 공화국 내 코소보 자치주 역시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벌어진 전쟁이다. 항목 참조.

5.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국제전으로 번진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의 전쟁사적 의의가 있다면, ''''공군만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미국과 NATO의 압도적인 힘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외교적 압박이 동원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치 외교적 압박은 여느 전쟁에서도 늘 있는 문제라 공군만으로 승리했다는 표현에 크게 무리는 없다.
그리고 새로운 정밀탄약 JDAM의 등장 역시 의미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반에 등장해 1990년대 초반 걸프 전쟁에서 꽃을 피운 LGB(레이저 유도탄)는 중동 전선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LGB의 유도 레이저가 악천후, 연기, 습도 등에 상당히 취약해서 날씨가 나쁘거나 연기 등이 심한 지역에서는 유도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미군은 관성 항법 장치와 위성 항법 장치(GPS)를 한데 묶은 유도장치로 탄약을 목표로 조종하는 JDAM을 개발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최초의 실전 투입인 코소보 사태에서는 B-2 폭격기만이 이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되어 JDAM이 없는 미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새로운 기술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NATO군을 속인 유고슬라비아군의 기만전술 및 장비은폐술의 향상도 의의가 있다. 고가의 유도장비를 허접한 구조물로 속여낸 기만-은폐술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더욱 발전했고, 북한도 코소보 사태 종전 후 현지에 무관을 파견해 정보를 습득했다고 한다. 참호 파놨다가 무진장 얻어맞은 걸프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
또한 '지상군의 아웃소싱' 경향이 드러난 것도 이 전쟁이 최초였다. 미국 등 서방국들은 공군과 같은 첨단 장비 위주로 작전을 수행하고, 지상군은 가급적 쓸만한 무장세력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1999년 코소보에서는 코소보 해방군(1~2만명 참전, 1700~4000명 사망)이, 2001년 아프간전에서는 북부동맹,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쿠르드 민병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는 리비아 반군이 그 역할을 했다. 첨단 전쟁 앞에서 지상군의 역할이 상당히 반감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쟁은 지상군이 목표를 점령해야 끝나기 때문에 지상군이 전혀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폭격 기술의 발달과는 별도로 공군의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나게 한 전쟁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두 사례 모두 공군의 대대적인 투입하에 거둔 승리인 것은 맞지만 그 세부사항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정치적 압박을 무기로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에 가까웠다. 만일 세르비아가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작정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면 NATO 공군이 정말 효과적으로 세르비아군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실제로 NATO에서 공습을 선전한 것과는 달리 세르비아군의 중장비와 병력은 상당수가 무사히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객관적인 지표로 보았을 때 NATO에서 직접 정예 지상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 공군만으로 세르비아군을 멈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더군다나 세르비아가 동원한 것은 본격적인 정규군도 아니고 대다수가 세르비아 계열 민병대 등의 비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점수가 더욱 깎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공습은 지상군과 연계했 을때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공군 단독으로 공습을 시행한다면 공포효과 이상의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결과도 될 수 있다.
물론 NATO군이 공습을 못했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공군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로 일어난 일이었다. 가격대비 화력이 매우 좋은 육군과는 달리 공군은 한 소티당 들어가는 돈이 화력에 비해 정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육군의 경우 목표지점에 자주포 한 대만 동원한다면 그 자주포를 이동시키는 데 드는 기름값만 제하고서 수십 발의 휴행탄을 모조리 쏟아부어 박살을 낼 수 있지만, 공군의 경우에는 자주포탄 두세 개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두어 개 떨구는 데 상당한 양의 고급 항공유가 소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복귀 후에는 부단한 고급 정비를 필요로 한다.
단독작전에서의 현대 공군의 한계를 최초로 체감해 본 것이 유고 내전이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겠다.
한편 코소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전쟁의 두 핵심 당사자 가운데 세르비아의 밀로세비치는 코소보 전쟁에서 무능함을 드러냈고 민족주의자들과 연정이 깨진 상황에서 2000년 대선에서 재집권을 도모하다가 개표과정에서 이상함을 느낀 야당지지자들의 시위로(볼도저 혁명) 쫓겨났고,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1990년대 중반까지 경기침체로 반감이 커지며 지지율이 떨어지던 상황에서 1999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떴고 2000년 대선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당이 참패하며 야당에게 정권을 내주며 씁쓸한 마무리를 지었다. 이후로 연방 붕괴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함께 연방에 잔류하기를 결심했던 몬테네그로는 (애초에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때 드러났듯) 코소보의 독립 요구로 촉발된 코소보 전쟁의 영향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2003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으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모든 정치적 주도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양보하는 등 몬테네그로의 이탈을 저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몬테네그로는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강행했다. 당시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결정한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대표팀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참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2006년 월드컵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의 마지막 월드컵이 되었다.

6. 결과


이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결성 61년 만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총 6개의 국가들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2008년 2월에는 세르비아에 속해 있던 코소보마저도 세르비아 측의 반발을 무릅쓰고 독립을 선언했고 독립했다. 그런데 다른 구유고권 국가들과 달리 코소보는 국가승인에 대한 입장이 각 나라들마다 달라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단 세르비아는 다른 국가들의 경우 독립 인정은 가능해도 코소보 독립만큼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9]
8년에 걸쳐 진행된 이 전쟁은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붕괴로 이끌었다. 특히 탈냉전 과정에서 나름대로 평화적,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되거나 구성국들이 분리 독립된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물론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같이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한 나라도 있었지만) 폭력적인 전쟁과 인종청소와 같은 잔혹한 방식으로 찢어졌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처럼 평화적으로 구성국들을 해체, 분리 독립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따로따로 살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유고는 세르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본국의 세르비아인들과는 별도로 오래 전부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아오면서 주민들 대다수가 토착화된 상태였다. 오죽하면 크로아티아 본토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거주지에 가로막혀 세르비아 본토와 월경지처럼 분리된 있었던 세르비아계 거주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헌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던 세르비아계 중에는 본국인 세르비아를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다음으로 '''엄청나게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내전 당시 전쟁을 피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로 피난 온 사람들을 세르비아 정부에서 배려하기는커녕 2등 시민, 하층민 취급하며 홀대하고 차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 참여나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이웃을 죽이기를 거부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반역자나 스파이로 몰고 보슈냐크계 주민들과 함께 학살하였다.
이 전쟁기간 동안 내전은 수많은 인권유린과 유혈학살 등 참혹한 파괴 행위로 점철되었고, 전쟁 전 서로 친구, 이웃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전쟁이 터지자 민족, 국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기를 맞대고 서로 죽여대는 참극이 벌어지며 긴 시간 동안 연방 구성국들의 분열과 갈등을 촉진시켰다.
연방 소속 국가들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연쇄적으로 분리독립하자 연방의 주도국이던 세르비아는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시절 누렸던 발칸의 맹주국 지위를 그리스에게 넘기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실제 발칸 국가들의 군사력 서열 역시 그리스>크로아티아>불가리아>세르비아 순이다.).
더욱이 연방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저지른 학살과 전쟁범죄로 인해 세르비아는 전쟁범죄국가, 폭력살인국가라는 국제적인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크로아티아도 전쟁 중에 학살 및 각종 인권 유린을 저지른 바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우스타샤 정권 아래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전례도 있었고,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아예 크로아티아계를 활용해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나마 전쟁에서 가장 정상적인 부류였던 보스니아도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것과는 별도로 일부 군인들이 보복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10] 현재 국제사회가 이 세 나라의 당시 군부 책임자들을 모두 처벌하는 이유가 다 있는 셈. 그리고 그 평화적으로 연방에서 독립했던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도 연방에서 분리독립하기 이전 유고 내전 초반기에 크로아티아 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속해있던 일부 마케도니아계와 몬테네그로계 인민군 장교/병사들이 세르비아계 출신 장병들과 함께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에 대한 학살 등 전쟁범죄를 직간접적으로 저지르기도 했다.
[image]
미국 국무부가 2000년에 배포한 전범 지명수배 전단. 위에서부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1993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인종청소'의 전범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7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정권을 재장악하는데 성공했으나 2000년 민중 봉기로 물러났으며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로 신병인도되어 재판을 받다가 2006년 옥사하였다.[11] 하지만 2008년 이 재판소에서 45명의 세르비아인, 12명의 크로아티아인 및 4명의 보슈냐크인이 보스니아에서의 전범 재판으로 기소되는 등, 전쟁 범죄 처벌과 내전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마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정 최고형이기 때문이다.
[image]
'''왼쪽의 변장한 카라지치, 오른쪽의 변장하지 않은 카라지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지도자이자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 박사는 전쟁이 끝나자 재빨리 모습을 감춘 채 베오그라드에서 '드라간 다비치'라는 가명을 쓰며 대체의학 전문가로 평범하게 살아 갔다. 흰색 턱수염을 잔뜩 기르고 강연을 하기도 하고 잡지에 글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를 영적 탐험가라 칭하며 자신의 웹 사이트에 심리학 및 에너지 분야 연구자라는 소개글을 올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지명수배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는 마을 선술집에도 자주 드나들며 악기를 연주하며 술집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선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인터폴에 의해 2008년에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고 있다.
스레브레니차를 비롯한 보스니아 내전에서 학살의 주도자였던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군 사령관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군 기지 내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이 주택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공격에 대비하여 지은 안전가옥이였다.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재판에서 대량학살, 대량학살 공모 및 인간을 상대로 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교적 개방된 공간에서 염소까지 기르며 살아 갔다. 참고로 믈라디치는 자신이 기르던 염소들에 과거 보스니아에 주둔했던 UN 사령관의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다가 2001년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 재판장에 서게 되자 자취를 감추었으나 결국 도주 16년 만인 2011년에 체포되었다.
다른 전범들의 경우 체포되거나 안 잡히기도 했는데 우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이끌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에 대한 학살을 주도했던 고란 하지치와 밀란 루키치의 경우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비아와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는데 우선 밀란 루키치의 경우 2005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고, 하지치는 세르비아 국내에서 7년간 도피생활한 끝에 2011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세르비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유고전범국제재판소에 신병이 인계되었다. 한편 내전 초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를 지휘하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벨리코 카디예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국방장관은 크로아티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민간인 지역 공습 등 인민군이 일으킨 전쟁범죄를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유고슬라비아전범재판소(ICTY)의 용의자 명단에 올랐는데 1999년 코소보 전쟁 종전 이후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 푸틴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러시아 망명생활을 이어가다 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은 채 2014년 노환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12]
한편 내전에서 전범 혐의로 재판을 받던 사람이 법원에서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 크로아티아군 사령관이었던 슬로보단 프랄략(72세)이 2017년 11월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자 갑자기 일어나더니 '''“난 전범이 아니다”를 외치면서 독약을 마신 후에 '''“지금 독약을 마셨다”''', '''“나는 전쟁범죄자가 아니다. 이번 선고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재판부가 프랄략을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시켰으나 결국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90년대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맞닥뜨린 (걸프전에 이은) 두 번째 시험대였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의 경찰"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만방에 드러냈지만, 내실이 크지 않은 성과와 여러 망신살로 반전 세력 등에게 '전쟁광'이란 비판과 국내 입지 약화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은 행정부 단독(즉, 대통령 권한)으로 치러진 것이었고, 당시 공화당이 우세였던 미국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의회의 동의가 필수적인 지상군(육군) 투입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오늘날 시리아 내전에서도 드러나듯 이런 문제는 정당 성향보다는 의원 개개인의 의견에 따라 갈리는 측면이 있지만, 미 상하원의 다수 의원들은 전쟁, 그것도 행정부 독단으로 치러지는 전쟁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클린턴의 개입은 뒤에 벌어지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비하면 나름의 근거(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등)가 있었지만, 상대방의 전쟁범죄를 근거로 이쪽에서의 참전과 살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패권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상황에 직결되는 문제다. 1994년 북핵문제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가 공군 폭격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다. 당시 한국은 군대의 현대화가 제대로 안 된 상태였고 북한은 반대로 전투력이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경제적인 손실도 상당했을 것이다. 미국이 북폭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이다.
2013년 현재 시리아 사태에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즉각적인 개입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미국 내의 반대 여론은) 정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등' 같은 것"이란 것이란 주장으로, 요약하면 개입할 때 국내여론 걱정으로 개입하지 못하면 나중에 여론이 반대로 흘렀을 때 대통령만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경제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결국 불개입으로 결론났다.
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무차별 공습과 국지전을 수행할 러시아군을 파병하고 군사장비를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과 ISIS들을 토벌하며 시리아 내전을 정부군의 우세로 이끌어 터키와 시리아 간의 불화를 이용하면서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터키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등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재장악하게 된다. 이것은 미국이 중동 통제를 못하게 된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적 실책이 되었고,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7. 관련 대중매체



7.1. 영화


  •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
  • 10분 동안에 (10 Minutes, 2002)
  • 그르바비차 (Grbavica: The Land Of My Dreams, 2005)
  • 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2001) : 포스터에 낚이지 말자. 국내에서 개봉될 때 코미디 영화로 속였다.
  • 더블 스나이퍼 (Shot Through The Heart, 1998)
  • 해리슨의 꽃 (Harrison's Flowers, 2000)
  • 비상 전투 구역 (Guerreros, 2002)
  • 에너미 라인스 (Behind Enemy Lines, 2001)
  • 헌팅 파티 (The Hunting Party , 2007)
  • 프리티 빌리지, 프리티 플레임 (Pretty Village, Pretty Flame, 1996) : 놀랍게도 세르비아에서 만든 영화다. 그것도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인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단순 Remove Kebab 같은 내용이 아닌 세르비아인 시각으로 본 영화이다.
  •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 1997)
  • 세이비어 (Savior, 1998)
  • 피와 꿀의 땅에서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2011)
  • 레니게이드 (Renegades, 2017)
  • 피스메이커 (The Peacemaker, 1997)
  • 크리스 더 스위스 (Chris the Swiss, 2018)

7.2. 서적


  • 안녕 요정
  •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발칸의 음모

7.3. 만화



7.4. 게임



8. 둘러보기




[1] 다만 이는 세르비아 역사학계를 포함한 동유럽의 역사학계 다수가 민족주의 사학의 영향 아래에 강하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2] 사실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를 비롯한 보헤미아계 슬라브인들의 주도하에 형성되어 체코인들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3]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생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슬라브의 3중 제국을 구상할 정도로 제국의 존속에 슬라브인의 입지 향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였고, 사라예보 사건도 이러한 목적을 지니고 보스니아에 접근하다가 최후를 맞은 사례이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켰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멸망이 몇십년 정도는 멀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4]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속했으나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이였다.[5] 당시 국제적 긴장 상태는 비스마르크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6] 한편 이들 동부 크로아티아 지역의 세르비아인 민병대들은 나중에 점령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의 장악지들을 들어 월경지 형태로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병합했다. 원래 세르비아 본국에 합병하려 했으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국제 여론을 의식해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7] 내전 발발 이전 당시 인민군은 정규전과 산악전 중심의 군사 전략을 펼치며 군사훈련을 벌였다.[8] 해당 영상에 나온 대사는 대충 다음과 같다. 라도반 카라지치: 보슈냐크인(무슬림) 놈들 독립 선언 한 번 해 봐라. '''다 죽여버리겠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보슈냐크인, 헝가리인, 알바니아인, 마케도니아인까지 그 어떤 바보도 유고슬라비아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세르비아 놈들이 무슬림 학살 열심히 해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9] 실제로 세르비아에선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는 상주 대사관이 각각 있는데 코소보만은 대사관이 없다.[10] 심지어 이들은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가 일방적으로 학살하였다는 등의 여론조작까지 펼쳤다.[11] 본래 세르비아는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헤이그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로 보내 처벌하지 않고 정권 붕괴 후 루마니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총살처형된 이웃국가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같이 세르비아 국내에서 재판, 처벌할 것을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 제안했었지만 코소보 전쟁에 무력 개입을 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강대국들과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로부터 전쟁 피해를 입었던 보스니아 등 옛 연방에서 분리독립한 주변국가들이 반대하였다.[12]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연방 군부 인사들 중 온건파로 분류되어 있었지만(실제로도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유엔과 유럽연합의 휴전 중재안을 수용하기도 하고 슬로베니아 전쟁 발발 초기에는 슬로베니아에 대한 무력 진압 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다소 실용적인 면모도 보였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수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던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