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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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1] (Αλέξανδρος Υψηλάντης, 1792년 12월 12일 ~ 1828년 1월 31일)는 그리스의 독립운동가이다. 원래는 러시아의 장군이었으나 고국인 그리스의 독립을 위해 자기 안위를 포기하고 투쟁하였다. 그가 1821년에 앞장서서 독립전쟁을 일으킨 결과 그리스는 8년 뒤인 1829년에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2. 생애
오스만 투르크 제국 치하 콘스탄티노플 페네르 지구의 파나리오테스 가문에서 1792년 12월 12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오스만 제국 술탄의 궁정에서 드라고만으로 일하였으며 루마니아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공작이었으며, 할아버지는 같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2]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였고 부유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루마니아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1805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1806년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했다. 15세에는 러시아 황비 페오도로브나의 소개로 러시아 법원에서 일하였다.
1808년에는 러시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기병부대를 이끌며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했고,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에는 클리아스티치 전투와 폴로츠크 전투에 참가하였다. 1813년에는 기병대장으로 승진하여 바우첸 전투에 참가하였고, 드레스덴 전투에서는 포탄에 맞아 오른쪽 팔을 잃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는 외교관으로서 빈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때의 활약으로 러시아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얻었다. 그 결과 1817년에는 러시아 제1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1820년에는 스물다섯의 나이로 '필리키 에테리아[3] 라는 비밀결사의 지도자가 되었다[4] 이때부터 조국 그리스를 오스만의 지배에서 독립시킬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 구체적인 전략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 필리키 에테리아와 협력 관계인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반란을 돕고, 파나리오테스가 공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콘스탄티노플에 첩자를 보내 시민들의 불안을 유발하고, 항구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불태운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 본토로 들어가 펠로폰네소스에서 그리스 독립전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1820년 10월 8일에는 동지들 앞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조만간 시작하겠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용맹을 얘기하면서 그리스 독립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의 계획에 따르면 그리스 독립군이 몰다비아에서 거병할 경우, 오스만 제국은 대규모 진압군을 보낼 것이고, 이에 대해 러시아 제국은 자국 국경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같은 정교회 국가인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었다.[5]
그 계획에 따라 입실란디스는 1821년 2월 22일 러시아와 몰다비아 공국의 국경을 이루는 프루트 강을 지나 몰다비아의 야시로 들어갔다. 그는 2월 24일 '신앙과 국가를 위한 투쟁'을 선언하고 종교적인 의식을 행했으며 저항군 구성에 착수했다. 3월 초에는 야시를 떠나 왈라키아로 이동했는데, 이때 왈라키아 지역군의 지휘관이었던 올림피오스[6] 는 약 1,500명으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와 함께 부쿠레슈티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몰다비아에서 군사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계획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은 그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였다. 신성동맹에 따라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현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입실란디스가 봉기를 일으키기 전 러시아 제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백작(Κόμης Ιωάννης Καποδίστριας)[7] 은 입실란디스의 계획을 듣고 입실란디스가 지원을 요청하자 '그리스 전역을 지옥으로 만들 죄악'이라고 비난하며 입실란디스에게 장군직과 무기를 내놓으라고 명령하였다. 결국 입실란디스가 독단적으로 봉기를 일으키자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입실란디스 장군의 독립운동을 비난하였고 3월 말에는 정교회의 수장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그리고리오스 5세가 입실란디스를 파문하였다.[8][9]
결국 러시아의 도움 없이 싸워야 했지만,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군사행동을 전개했다. 왈라키아 독립군을 이끄는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와 연합하여 군대를 몰고 부쿠레슈티를 향해 진격하여 부쿠레슈티를 오스만 제국에게서 빼앗는 데 성공했고, 훗날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가 배반하자 그를 진압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그가 이끌던 그리스 독립군은 1821년 6월 19일 도나우 강 북편의 드라가사니에서 오스만 제국의 3만 대군에 격파되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그의 군사들 대부분은 1821년 6월 29일 스쿨레니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리스로 탈출하던 중에 체포되었고, 전쟁을 일으켜 유럽의 평화 질서를 깨뜨리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코 테레지엔슈타트의 어느 성에 감금되었다.
1827년에 그리스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니콜라이 1세의 요청으로 겨우 석방되었으나, 1년 뒤인 1828년 1월 31일에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10] 그는 성 마르코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심장을 그리스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심장은 그리스 아테네 아멜리온에 있으며 1964년에 나머지 시신 역시 그리스로 이장되어 아테네 페디온 아레오스 공원의 교회에 안장되었다. 오늘날 성 마르코 공동묘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3. 기타
- 그는 패배하고 죽었지만, 그의 무장독립투쟁은 사실상 그리스 독립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821년 3월 경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입실란디스의 독립 투쟁에 자극을 받은 그리스인들의 봉기가 연달아 일어났고 그들이 맹렬히 싸운 결과 1825년 경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대부분이 그리스 저항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에 오스만 제국과 이를 지원한 이집트군의 맹공으로 그리스 저향세력은 위기에 몰렸으나 이를 지켜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가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하여 1827년 나바리노 해전으로 오스만과 이집트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러시아가 직접 오스만과 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둬 1829년 8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29년 9월 14일에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자치권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고(에디르네 조약), 1832년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성과는 다른 피지배민족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
- 여담으로 그리스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1829년 9월 12일 일어난 페트라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이끌고 오스만군을 격파한 인물은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동생인 디미트리오스 입실란디스(Δημήτριος Υψηλάντης, 1793-1832)였다. 형이 프루트강을 건너면서 시작된 그리스 독립전쟁을 8년 후 동생이 끝냈다는 점 역시 기막힌 인연이다.
- 용맹한 장군이면서도 상당한 수준의 교양인이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문화의 애호자로서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신념 역시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와 리가스 페레오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독립군이 그리스 독립전쟁 와중에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실제로 그리스 독립전쟁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그리고 열강끼리의 신성동맹을 통한 유럽 대륙의 현상 유지를 꾀한 빈 체제의 의도와 달리 열강들이 개별적 이익을 위해 현상 유지를 깨고 그리스를 지원하면서 훗날 빈 체제가 와해되는데 기여를 했다.
- 아테네의 페디온 아레오스에는 그를 기리는 묘석이 있다.# 1869년에 만들어진 이 묘석은 1964년에 그의 유해가 빈에서 아테네로 반환되었을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묘석은 그리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슬람 또는 극좌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자주 훼손된다고 한다. #
- 미국 미시간주 워시트노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입실랜티(Ypsilanti)'라는 타운십이 있다. 재미있게도 이 타운십은 동명의 '입실랜티'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 도시 '입실랜티'는 그의 동생 디미트리오스의 이름을 따왔다.
[1] 라틴 문자로는 'Alexandros Ypsilantis'로 옮겨지기 때문에 '입실란티스'로 표기되지만, 현대 그리스어 발음은 '입실란'''디'''스'에 가깝다. 관련 글.[2] 그리스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리가스 페레오스가 바로 그의 할아버지 밑에서 비서로 일했다.[3] 1814년에 발족된 그리스 독립운동 조직이다. 처음에는 그리스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조직의 목적을 두고 있었지만, 그들의 진정한 이상은 그리스의 독립과 동로마 제국의 재건에 있었다.[4] 과감한 성격의 입실란디스가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자, '필리키 에테리아'의 회원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5] 러시아가 그리스를 독립시킬 경우 숙적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러시아는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된다.[6] 그도 그리스인으로서 '필리키 에테리아'의 회원이었다.[7] 그도 그리스인이었으며, '필리키 에테리아'의 회원이었다.[8] 하지만 이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발생하자 그리고리오스는 당국에 협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트를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술탄 마흐무트 2세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9] 그리고 입실란디스를 비난했던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이후 회개하고 외무장관 직을 사임한 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고 그리스 제1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라 마침내 그리스의 독립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10] 그의 죽음을 장엄하게 묘사한 그림작품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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