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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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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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만들어진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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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에서 소설의 삽화로 사용된 그림
耶律楚材
1190~1244
1. 개요
몽골 제국의 정치가. 중국어 발음은 예뤼 추차이(Yélǜ Chǔcái)[1]
자는 진경(晋卿)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호는 담연거사(湛然居士). 별명으론 옥천노인,[2] 우르츠사하리[3] 등이 있다.
2. 알려져 있는 생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율씨, 즉 거란 황족 출신이다. 야율아보기의 후손으로 당시 거란족의 요나라는 이미 망했고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칭기즈 칸에게 무참히 관광타던 중에 임관하게 되었다.[4] 정복된 자들의 입장에선 가히 마왕이라 부를 만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칭기즈 칸에게 늘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다니 인물은 인물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칭기즈 칸이 '나를 따르면 요의 원수를 확실히 갚아주겠소'라고 말했을 때 '제 조상이 다 금에서 벼슬을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원수랍시고 주군을 물어뜯겠습니까?'라고 꼿꼿하게 뻗댄 사람이니 알 만하지만.
이처럼 깐깐한 데가 있고 철저하여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근거도 없는 모함을 받아 포박당해 오고타이에게 끌려왔을 때 그게 당치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칸이 그걸 풀어주려고 했으나,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잡혀왔을 것인데, 아무 해명도 없이 풀어주면 원칙이 바로 서지 않는다'''"며 고집스레 그대로 묶여 있었다. 어명보다 원칙이었던 것이다.
당시 몽골족들은 전쟁과 정복에는 탁월하였지만 통치의 기술이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야율초재가 세운 업적은 지대한 것이었다. 많은 업적이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업적은 금나라 수도 변경 함락 시, 그간의 몽골족 원정 원칙을 뒤집어 엎은 것.
호라즘 왕국의 건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은 원정 중에 저항한 적에 대해서 일체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5] 하지만 야율초재는 칸에게 모든 항복하지 않은 자를 죽여 없애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간언하여 그걸 관철시켰다. 덕분에 몽골은 금나라의 문물과 군사기술을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고, 이는 후의 남송 정벌 때 양양성 공방전 등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문화나 학술 발달에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못 하는 학문이 없었으며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죽었을 때 집에 가 보니 취미삼아 수집한 돌이랑 글, 책들 외에 금은보화 같은 것들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후 유목민에게 맞지 않고 한족에게 맞는 정책을 편 것이 문제가 되어 그가 주장했던 개혁들은 거의 대부분 묻혔다. 어쨌든 이 사람이 임관하기 전에는 몽골은 '''세금도 안 거뒀다.''' 나중에 아득바득 조세 제도를 확립하고, 자연스레 산더미처럼 들어오는 재물들을 보고 황제가 턱이 빠질만큼 놀랐을 정도.[6]
그리고 사실 그가『'''중국인을 구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게, 몽골군의 계획 중에는 「'''중국을 정복하면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몽골 항목에서 발췌) 이걸 안 막았다면 지금 중국은….
명언과 일화로는 오고타이 칸과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와,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에 대해 말한 것이 유명하다.
'''오고타이''': "아버지께서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대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야율초재''':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새로운 제도로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것을 제거하십시오."
칭기즈칸에게 등용된 후 몽골 사람도 아닌 외부 인사인 야율초재가 하루아침에 칭기즈 칸에 중용받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는 활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 사람은 늘 자기 솜씨를 뽐내었는데 어느 날 야율초재에게 '''학문이 있는지 모르지만 무엇이건 만들어낼 줄 모르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다.'''라 헐뜯었다. 이에 초재는 조금도 화내지 않고 '''활을 만드는 데는 활 만드는 사람이 있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오.'''로 역관광 시켰고 이에 말문이 막힌 그 사람은 물러나야 했다.
3. '몽골제국 명재상'의 실체에 대한 논란
여기까지만 보면 몽골 제국의 공신 중의 공신, 중신 중의 중신으로 보이지만 현존하는 기록의 교차검증에서 의문점이 많다. 남은 기록으로 보면 실은 높은 위치의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고 몽골 제국 내부에서의 발언권이나 영향력도 약했으며, 오히려 다소 과대평가된 인물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우선 당시 몽골 제국에서 상업과 기록 등에서 여러 모로 우대받던 '''페르시아인들의 기록에서 야율초재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야율초재가 속해있던 몽골 제국 서기국(書記局)의 친카이(鎭海)[7] 는 페르시아, 중국, 심지어 로마 교황청 사절의 기록에서도 중요 인물로서 등장하지만 야율초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세계 제국의 이름난 재상이었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인류를 구했다거나 지금의 중국을 있게 했다는 말도 치켜세워주기 성향이 짙다. 야율초재가 잔악한 풍습을 뜯어고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런 쪽으로 정책을 입안하거나 시행한 공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기록에 관심없었던 옛 몽골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야 있지만, 어찌되었건 역사기록에서 야율초재의 정책에 대해 찾아볼 수 없으니 이제와서는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야율초재가 담당했던 한문 기록 분야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그것 뿐. 자기가 손댈 수 있는 기록에서만 대단하게 묘사되다보니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야율초재가 몽골인들을 바꿔놨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등용된 후에도 몽골 제국은 수없이 많은 제노사이드급 학살을 일으켰다. 야율초재의 주요 활동 반경은 대부분이 중국의 화북 지방인데, 이곳은 몽골 제국이 점령한 이래로 엄청나게 황폐해진 곳이다. 아예 '화북 지방의 황폐화' 라는 키워드는 몽골 제국의 활동 내역을 이야기할 때 절대로 빠지지 않을 정도다. "중국인을, 나아가 인류를 구원한 야율초재" 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야율초재는 자신이 있던 지역의 황폐화를 막지 못했다. 명재상으로서의 맹활약이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애당초 이 '재상' 이라는 것도 어폐가 있는게, '''몽골 제국에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재상의 존재가 없었다'''. 일단 야율초재가 활동하던 시기 야율초재의 활동 반경은 화북 지방뿐이고, 그것도 혼자 한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의 인사들과 함께 했다. 그렇지만 몽골제국이 그런 인사들을 사용하는 모양새를 페르시아, 중국 등이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 그냥 바지르, 재상이라고 기록한 것일 뿐. 일단 재상이 수십 명인 것부터 에러. 근데 그 중에서도 타 민족에게 돋보이지 않았던 야율초재를 '대제국의 명재상'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 모로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다.
당시의 문화권 차이 때문에 타 문화권에 야율초재의 명성이 전해지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예전 한자 문화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었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야율초재는 외국과 교류할 때마다 겸손하게 행동했는데, 당시의 다른 문화권(유럽, 중동, 서아시아 등)에서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덕분에 야율초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임관 후에도 몽골 제국이 변한 게 없기 때문에 여전히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다. 경제적으로 중요하던 페르시아 지방은 엄청난 학살을 당하며 무너지고 있었고,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방에 비하면 떨어지더라도 나름 부유한 경제력을 지녔던 키예프는 대도시에서 시골이 되도록 학살당했다.[8]
학설 중의 하나로는, 야율초재는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재상 급의 위치가 아니라, 하급 공무원 정도의 지위에 있었는데 간간히 칸과 주요 인사들을 만나 조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게 상당히 그럴싸한 것이, 출신을 따지고 자기 부족끼리 뭉치는 몽골 출신 인물들 사이에서 이방인인 그가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렇게 처신하지 않았다면, 목숨 부지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북방 유목민족사를 연구하는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9] 는 대놓고 "야율초재의 명성에는 거품이 많다. 한족 문화권에서 이름을 날린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실에서는 무력한 하위 관료에 불과했을 것이다. 페르시아 등의 다른 나라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걸 보면 기록될 만한 가치도 없었던 인물." 이라는 뉘앙스로 비웃었다.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딴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말이지만, 실제로 중국의 사료에서는 야율초재를 '''서기국의 하급 사무직'''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스기야마 교수가 언급한대로였을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몽골인들 중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보니 한족 출신, 금나라 출신(금나라에 귀속되어 동화된 옛 발해인들도 포함), 고려 출신 등의 지식층이 등용되어 기록이나 서적을 관리했다. 즉 야율초재는 상관들이 기록에 관심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공적과 업적을 부풀려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한자 기록을 읽을 수 있는 한자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심히 포장하고 허세를 부렸다는 이야기이며, 다른 문화권에서는 한자를 모르기 때문에 야율초재에 대해 알지 못하니 기록도 남지 않았음이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만약 이게 야율초재 전설의 실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의 직장생활에 비유할 때 잘 쳐봐야 중간관리직 급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이 '명재상'이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제갈량 같은 인물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깐깐하고 대쪽같은 이미지도 '''자신이 관여해서 남길 수 있는 기록''' 에서만 보이기 때문에 별도 사료와의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바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10]
4. 창작물에서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시기를 다룬 코에이의 게임인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와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 A, 전투력 E. 지도력 B, 매력 B로 전투력을 제외하고는 준수한 능력치로 나온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100·지모 93·전투 34에 모든 내정 특기를 소유한 최강의 정치가로 등장한다. 특히 몽골 장수들은 원정을 떠나 때려부수는 역할을 하는 전투광, 전투기계들만 득실득실 하기에(사준사구) 그의 존재는 빛이 된다. 시나리오 1에서 재야로 지내는 야율초재를 등용하고 야율초재와 같이 연회를 열고 초재에게 말을 걸면 술이 항아리도 부식시킨다며 오래 살려면 술을 적당히 마시라고 조언을 하는데 수락하면 군주의 수명이 늘어난다. 다만 파킷 시나리오 3에서 오고타이 칸의 신하로 나올 때는 술꾼인 오고타이를 섬기다 지쳤는지 이런 조언을 하지 않는다. 원조비사에는 시나리오 2 시작시 칭기스칸의 정치 고문이 무카리로 되어있기에 요동을 먼저 공략해 야율초재를 등용해 정치 고문을 야율초재로 교체하면 전투 능력이 좋은 무카리를 장수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이미지는 뭔가 징기스칸의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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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에도 등장. 근데 생김새가 '''사마랑'''과 똑같다.(...)
김용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도 짤막하게 등장한다. 몽골의 재상이자 야율주, 야율제, 야율연 남매의 아버지로 설정되어있다. 양과와 육무쌍이 이막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야율주의 관사에 숨어들어 군관으로 위장했을 때 등장하는데, 이때 완안평이 금나라가 멸망하여 자기 가문이 몰락한 데 원한을 품고 야율초재를 암살하려 하지만 야율제에게 저지당해 실패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몽골에서 숙청당해 야율주와 함께 처형당했고, 이때 살아남은 야율제 남매는 남송에 의탁하여 각각 곽부, 무돈유와 결혼하여 곽가에 편입, 양양에서 곽정을 도와 몽고와 싸우는 데 앞장선다.
5. 기타
http://www.archive.org/details/06077457.cn
위 링크에서 그의 저서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1~3권을 PDF 파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1] 이전 판에 이게 거란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거란어는 현재 복원이 힘들 정도로 자료가 없어서 발음을 재구하기 어렵다. 야율은 '야루드(Yaruud)'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나 초재는 거란어로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다. 거란어보다 나은 여진어 역시 그나마 많이 알려졌을 뿐이고 아직도 뜻이 밝혀지지 않은 문자들이 많은 걸 감안하면 당연하지만.[2] 말년에 옥천산(玉泉山. 북경 서북쪽의 산)에 기거해서 생긴 별명이다. 도교에 일가견이 있었다.[3] 몽골어로 '수염 긴 남자'. 그의 외모에서 따서 칭기즈 칸이 붙여준 이름이다. 칭기즈 칸은 항상 야율초재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4] 이 야율초재가 칭기즈 칸에 영입된 과정도 흥미롭다. 당시 야율초재는 연경(지금의 북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도시에 몽골군이 몰려오자 초재의 두 형은 도망갔지만 야율초재는 태연한 얼굴로 독서를 하거나 좌선을 했고, 심지어 도시가 몽골군에게 함락된 후에도 전혀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의 생활을 이어갔다. 이 소문을 들은 칭기즈 칸은 그에게 흥미가 생겨 데려오도록 명령한 것.[5]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물론 호라즘은 지들이 자초한 바가 크지만.[6] 이때 이후 몽골인들은 세금에 환장해서(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중동 지방과 중앙 아시아에서는 세금을 엄청나게 매겨서 현지인들이 고통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무역로를 장악해서 실리를 챙기려 했다.[7] 한국에서는 '진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본래 위구르인으로 칭기즈 칸에게 등용되었고 칭기즈 칸이 가장 어려운 시절부터 그를 섬겨서 '발주나의 흙탕물'을 마셨던 19명의 창업 공신 중 한 명이다. 오고타이 시대에는 서기국의 필두로 제국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히려 이 사람이 야율초재의 상관이자 일반적으로 흔히 연상하는 '재상'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사람이며, 그 외 색목인 출신인 야라와치, 마흐무드 역시 야율초재처럼 서기국에서 일한 관료들이다.[8] 다만 이 부분은 야율초재가 할 수 있었던 것이, 항복 안 한 자를 싸그리 죽여 없애던 몽골의 기존 관습에서 쓸모 있는 자들은 살려서 쓰자 정도로 순화시키는 정도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피정복자들이 학살당하는 걸 막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공돌이(…), 기타 재주 있는 자들은 살려서 인류의 기술과 문화수준이 리셋되는 것은 막았다고 볼 수 있다.[9] 일본의 동양사학자이자 교토대학 명예 교수. 일본에서는 몽골 역사 분야의 권위자이다. 저서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몽골 세계제국> 등이 한국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10] 남겨진 기록을 살펴보면 스스로를 과시하는 경향이 강하며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친다. 이것이 꾸며진 이미지라고 한다면 실제 성격이나 행적은 상당히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