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축구단

 

'''양지 축구단'''
'''Yangzee Football Club'''
'''정식 명칭'''
양지 축구단
'''구단 형태'''
실업구단
'''창단 연도'''
1967년 3월 29일(57주년)
'''해체 연도'''
1970년 3월 17일(54주년)
'''운영 주체'''
중앙정보부
1. 개요
2. 역사
3. 의의
4. 역대 감독 및 주요 선수
5. 성적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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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반공주의 흐름 속에서 1967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창단된 축구단.
양지 축구단이란 이름은 중앙정보부의 부훈인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에서의 '''양지'''를 따와 지어졌다. 양지 축구단은 청와대 다음 가는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의 주도로 창단된 만큼 국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곳이었고 훈련 또한 최고의 시설에서 받았다. 이에 걸맞게 양지 축구단은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969년에는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1969년 양지 축구단 창단을 지시했던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고 남북 긴장관계가 완화됨에 따라, 이듬해 1970년 양지 축구단은 해체되었다.

2. 역사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꺾고 8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던 대한민국은 이에 큰 위협을 느꼈고, 북한의 국가대표팀에 맞설 축구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육군/해군/공군/해병대 축구단에서 복무 중인 장병들을 차출하고, 입대 가능 연령대의 실업구단 소속 축구선수들을 징발하여 1967년 3월 29일 양지 축구단을 창단했다. 그리고 초대 감독으로 '황금다리'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최정민을 선임했다.
중앙정보부의 양지 축구단에 대한 관리는 철저해서, 권투 선수가 받는 체력 훈련을 축구 선수들에게도 내렸으며, 휴가 중 무단 이탈을 염려해 휴가 내내 감시를 했다. 하지만 청와대 다음 가는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에서 창단을 주도한 만큼 양지 축구단에 대한 지원과 대우는 당대 대한민국 최고였다. 양지 축구단 선수들은 양지 축구단 소속 기간을 군 복무 기간으로 인정 받았고, 당시 국영기업 중간 간부 급의 월급액이었던 2만 5천 원을 생활보조비로 받았다. 또한 축구 국가대표팀조차 허가 없이 이용할 수 없었던 이문동 소재 중앙정보부 천연잔디구장을 허가 없이 이용할 수 있었으며, 식단도 특별히 신경 써 선수들에게 매일 육류를 제공하는 등 당시 국가 형편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초호화 대우를 해 줬다.
그리고 대한민국 축구팀 최초로 105일의 유럽 전지훈련을 떠나 현지 팀들과 연습 경기를 갖기도 했다. 양지 축구단은 1969년 5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세계 군인 축구선수권 대회 아시아 예선에 참가해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리는 대회 본선 진출권 따냈다. 하지만 본선 조별리그에서 이라크를 1 : 0으로 이기고, 그리스에게 1 : 2로 패한 뒤 3-4위전에서 이란과 1 : 1로 비기며 공동 3위[1]에 그치자 전력 강화 필요성을 절감했고, 유럽에 체류하며 현지 팀들과 연습 경기를 가졌다. 유럽 4개국에서 전지훈련을 치르며, 서독,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등에서 아마추어 팀, 프로 팀, 군 팀과 10차례 이상 경기를 치렀고 1969년 8월 귀국했다. 유럽 전지훈련 동안 양지 축구단이 현지 팀들을 싱대로 거둔 총 전적은 26전 18승 2무 6패였다.
양지 축구단은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관리와 대우에 힘 입어, 양지 축구단 소속 선수들이 국가대표팀 23명 중 11명을 채울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증명해 냈다. 하지만 양지 축구단은 북한과의 축구 국가대항전을 대비해 만들어진 팀이었지만, 정작 북한과의 대결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1969년 10월 12일, 1970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1차 예선에서 '''주적''' 북한이 아닌 '''숙적''' 일본을 만나게 됐다. 일본과의 1차전에서 2 : 2 무승부를 낸 국가대표팀은 6일 뒤 2차전을 갖게 됐다. 2차전 경기 전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직접 국가대표팀 숙소를 찾아가 '''"일본놈들을 묵사발을 내버리라"'''는 주문을 하며,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고 물었다. 이에 당시 대표팀에서 막내였던 이회택이 당돌하게도 '''"사기 진작을 위해 보너스를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답했다. 당연히 코칭 스태프와 선배들은 경악하며 새파랗게 질렸지만, 정작 김형욱은 껄껄 웃으며 즉석에서 금일봉을 꺼내 선수들에게 나눠주었다.[2]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10월 18일 일본과의 2차전에서 2 : 0 완승을 거뒀다.
양지 축구단 소속 선수들이 절반 가량을 차지한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을 제외하고도 양지 축구단은 축구단으로서 여러 대회에 참가해 큰 성과를 거뒀다. 양지 축구단은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69년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당대 아시아 최고 구단 중 하나임을 만방에 과시했다.
하지만 1969년 10월 20일, 양지 축구단 창단을 직접 지시했던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직에서 해임되고 이후락이 후임 부장으로 온 이후 남북 간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이듬해 1970년 3월 17일 양지 축구단도 해체됐다.

3. 의의


양지 축구단은 남북 대결의 냉전시대에 반공주의 흐름 속에서 정치적 의도로 창단된 팀이었지만, 양지 축구단에서 활동했던 선수들이 양지 축구단 해체 후 대한민국 축구사에 남긴 족적은 엄청나다.
양지 축구단에는 당대 최고의 선수라 불렸던 이세연, 김호, 김정남, 서윤찬, 정병탁, 조정수, 김기복, 김삼락, 이회택, 임국찬 등이 선수로 활동했고,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또한 K리그 참가 구단 중 최고(最古) 구단인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 포항제철 축구단에 해체된 양지 축구단의 선수들이 합류하면서, 양지 축구단이 K리그에 남긴 족적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가적으로 육성하던 팀이었기 때문에 70년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1대1 선수관리 시스템이나, 식단조절, 당시 최고급 훈련시설 등 선진적 축구 환경이 양지 축구단에 도입되었다. 이를 경험한 선수들에게 이 경험이 큰 유산이 되었고, 이런 이유에서인지 김호, 김정남, 이회택, 김삼락, 정병탁, 김기복, 박이천 등은 K리그와 국가대표, 연령별 대표 감독직을 맡는 등 명감독으로 향후 이름을 남기게 된다.

4. 역대 감독 및 주요 선수


'''직책'''
'''이름'''
'''비고'''
'''재임기간'''
감독
최정민
창단 감독
1967~1968
김용식
제 2대 감독
유럽 105일 원정 당시 감독
1968~1969
코치
박일갑
창단 코치
?
강준영
2대 코치
?
'''포지션'''
'''이름'''
'''생년월일'''
'''전 소속팀'''
'''통산 A매치 경력'''
GK
이세연
1945.7.11
경희대학교
74경기 50실점
GK
이준옥
1939.9.26
제일모직
2경기 3실점
GK
오인복
1938.2.17
금성방직
22경기 18실점
DF
김호
1944.11.24
제일모직[3]
77경기 0골
DF
김정남
1943.1.28
해병대[4]
52경기 0골
DF
허윤정[5]
1936.9.30
대한석탄공사
40경기 16골
DF
강수길
?
서울시경
22경기 0골
DF
조정수[6]
1944.8.20
금성방직
10경기 0골
MF
김삼락
1940.6.19
해병대
24경기 2골
MF
서윤찬
1941.12.17
제일모직
41경기 4골
MF
이영근
?
대한석탄공사
17경기 1골
DF/MF
최재모[7]
1946.7.10
금성방직
43경기 2골
MF
박광조
1944.1.22
중앙대학교
5경기 0골
MF
박수일
1944.4.25
외환은행
21경기 3골
FW
이이우
1941.2.18
해병대
14경기 5골
FW
정병탁
1942.3.14
해병대[8]
39경기 11골
FW
이회택
1946.10.11
대한석탄공사[9]
81경기 21골
FW
임국찬
1940.2.15
경희대학교
11경기 0골
FW
김기복
1944.5.22
중앙대학교
33경기 21골
FW
배금수
1943.11.26
경희대학교
2경기 0골
FW
이완석
1938.7.4
대한석탄공사
1경기 0골
FW
박이천
1947.7.26
중앙대학교[10]
89경기 36골
1960년대의 최고 레전드로 꼽히는 이세연, 김호, 김정남, 이회택, 박이천, 김삼락, 정병탁, 서윤찬, 김기복 등이 모두 양지 축구단에 '''강제로''' 입단했기 때문에 선수단은 대한민국 최정상일 수밖에 없었다. 팀 조직 후 내분도 일어났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모두 국가대표급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기싸움도 있었고, 사생활 감시 등의 압박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장이자 팀의 총괄자였던 김형욱은 해결 방안으로 감독 교체를 지시했고, 이후 한국축구의 대부인 김용식[11]이 2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선수들의 독단적 행동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5. 성적


  • 메르데카컵(1967) : 우승
  • 아시안 챔피언 클럽 토너먼트[12](1969) : 준우승
  • 세계 군인 축구 선수권대회(1969) : 공동 3위

6. 관련 문서



[1] 대회 결과[2]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김형욱은 3일 뒤 중앙정보부장에서 경질 당한다.[3] 해병대에서 군 복무중[4] 고려대 졸업 후 곧바로 입대[5] 1호 한국인 해외진출 선수로 유명하며, 허정무씨의 삼촌이기도 하다.[6] 전 축구선수 조원광씨의 큰아버지.[7] 금석배 유소년 축구대회 창시자 중 한명이다.[8] 연세대 졸업 후 곧바로 입대[9] 해병대에서 군 복무중[10] 육군에서 군 복무중[11] 월드컵, 올림픽 본선 진출이 요원했을 당시, '''선수로 올림픽 2회 출전''',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월드컵 1회 지도 및 아시안컵 우승'''을 이뤄낸 김용식은 80년대의 '''분데스리가 1호 선수''' 차범근, 2000년대의 '''EPL 개척자''' 박지성, 현재의 '''유럽진출 한국인 최다골 기록자''' 손흥민과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던 그야말로 레전드였다.[12] AFC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