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축구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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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대표하는 축구 선수. 김호와 함께 한국 국가대표 센터백 듀오. 감독으로서는 한국을 32년만에 다시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명장
고려대학교 법학과(61학번) 졸업, 前 축구 선수, 前 축구 감독. 前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현 한국OB축구회 회장.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어린 시절부터 축구를 좋아했으며, 당시 좁은 골목에서 공놀이를 하고 연습하곤 했다. 이 덕택에 키핑과 기술이 좋아서 두각을 드러내 중학교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학원축구는 1부, 2부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김정남은 동아리 느낌인 2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고 싶었던 김정남은 축구 명문 한양공고로 진학하게 된다. 원래는 공격수였으나, 경쟁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하게 되었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게다가 한양공고가 운동장도 좁은 편이라 3:3 4:4 등 소규모 인원의 보충훈련을 즐겨하며 계속 수비력과 기술이 발달했는데, 어느 날 주전선수가 아파서 대신 경기에 출장하게 된 이후 주전을 꿰차게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게 된다. 봄에 먼저 19세 대표팀에 선발됐고, 이어 그 해 여름에 성인 대표팀에도 선발된다.
2.2. 성인 시절
원래는 풀백 출신이었으나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이 유행하자 김정남은 스위퍼의 역할을 맡았고, 김호는 스토퍼의 역할을 맡아 대단히 성공적인 국가대표 경력을 꾸리게 된다. 열정적인 김호와 달리 냉정하고 침착하게 플레이했다고. 부상으로 고생하다 71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는데, 축협 회장의 권유로 호주로 지도자 연수를 떠났으나 알고 보니 플레잉 코치였다. 이렇게 선수생활을 연장한 김정남은 1974년 외환은행에서 은퇴한다.
2.3. 플레이 스타일
6~70년대 한국 최고 수비수였다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수비를 했으며 본래 풀백이였으나 스토퍼와 스위퍼 시스템으로 인해 김정남 본인이 스위퍼 센터백 듀오였던 김호가 스토퍼 역할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키핑력과 기술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공격수였는데 경쟁자에 밀려서 미드필더나 풀백을 했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후 1980년대 초, 함흥철 감독을 보좌하며 국가대표팀 코치직을 수행했다. 이 때 이미 전술적인 부분은 김정남이 담당했다고 한다. 1983년부터는 유공 코끼리의 감독으로 부임하였고, 1986년에는 멕시코 월드컵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다.''' 사실 대표팀이 출범할 때는 수석코치였는데, 지역예선 도중 말레이시아에 지면서 문정식 감독이 경질당하면서 그 자리를 승계한 것이었다.
이후 본선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한 조가 되는 어려운 조에 속했다. 사실 당시 월드컵은 24팀 출전이기 때문에 출전팀들이 질이 높아서 지금보다 훨씬 어려울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 대회 우승국이고 아르헨티나는 실제로 그 대회를 우승했다는 점에서 질이 안 좋았다. 첫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 김정남은 일단 적응하기 위해 30분간 수비적으로 운영하라는 지시를 했으나, 선수들이 긴장한 나머지 수비적으로 운영을 하지 않고 지나치게 수비에만 일관하고 몰려다니며 포메이션을 붕괴시키는 등 전혀 경기 운영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2실점을 했다. 이후 후반전에는 오히려 이판사판으로 하자면서 경기력이 좋아졌다고 한다. 불가리아전에서는 수중전에서 무승부를 거뒀고, 이탈리아전에서는 멕시코 언론마저 심판이 도와줬다고 할 정도로 불리한 판정 아래 3:2 패배를 기록했다. 이 때 3위도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김정남은 이탈리아전의 패배를 많이 아쉬워한다.
이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도 역임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오다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K리그 울산 현대 호랑이의 감독을 맡았다. 울산의 짱짱한 스쿼드를 가지고 수비 축구를 한다는 비아냥을 사곤 했지만, 언제나 팀을 상위권에 올리곤 했기 때문에 울산현대의 팬들 입장에서는 단어 그대로 "시원섭섭" 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한창 이름을 날리 시절에는 허정무와 함께 재미없는 축구의 대명사로 군림했었는데, '''"그래도 김정남은 재미없어도 결과보면 이겨있잖아, 근데 허정무는 아니잖아(...)"'''라며 무승부에 취한 전남 팬들이 울산 팬들을 부러워하는 기현상이 발생하였다.
K리그가 뻥축구에 수비축구라는 편견을 일반인들이 가지는데 한몫한 감독 중 하나. 이후 울산은 어떻게 된 건지 감독이 바뀌어도 팀컬러가 수비지향이 되어 버렸다. 그 때문에 현재는 과거의 영광은 어디로 가고 4만짜리 월드컵 경기장을 쓰면서 관중동원 능력은 평균 8천명 선.
그래도 이 분이 무능하지는 않기에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팀 상태만큼 성적을 내 주는 감독으로 인식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K리그에서 유일하게 별 탈 없이 이천수를 제어했던 감독이었다'''. 전남, 수원, 인천, 스페인, 네덜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팀 프런트, 감독, 선수들과 온갖 잡음이 있었지만, '''김정남 감독 아래에 있던 시절에는 정말 순한 한 마리의 양이었다'''. 김정남 감독이 이천수를 제대로 제어한 덕택에 2005 시즌 울산은 K리그 우승을 비롯 탄탄대로를 걸을 수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유상철, 등 한 성격 한다는 선수들도 손쉽게 제어하는 등 그야말로 선수 기강에 있어서 최상위권의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2000년대 K리그에서의 김정남 감독을 본 축구팬들은 거의 인자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봤기에 상상이 가기 힘들지만, 2013년 방송된 '태극전사의 탄생'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1986년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정남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다그치는 모습과 함께 그 당시 선수였던 축구인들이 별명이 '광기'였다고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울산 현대 감독을 맡았던 2001년에는 선수단에게, 외국인 선수도 예외 없이 포함해서 해병대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 그렇긴 해도 본래 축구계에서 부드러운 성격이었긴 한 것 같다.[2]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성적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유공 코끼리의 감독 재임 중에 1989년에 한번 우승컵을 들어올렸고[3] ,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울산 감독 재임 중에 2005년에 한 번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4. 감독 이후
2008년 12월, 울산 감독직을 사임한 후 울산 현대 기술고문, 프로축구연맹 기술고문 등을 거쳐 2010년부터는 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직을 맡았으며, 2012년에도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한국OB축구회 회장직 출마를 위해 2013년 12월 31일 부로 사임하였다. 2014년 1월 16일, 유효표 21표 중 12표를 획득해 한국OB축구회 회장에 당선되었다.
5. 기타
- 집안이 그야말로 축구 집안이다. 5형제의 맏이인데, 동생인 김강남, 김성남, 김형남 모두 축구선수였다. 이 중에서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인데 김강남과 김성남은 동시에 국가대표를 뛰면서 쌍둥이 국가대표로 유명했다.[4]
- 축구계는 영어구사가 가능한 축구인들이 많은데, 이 김정남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영어를 잘 하는 축구인으로 이름이 나 있다.
- 인터뷰나 언행을 보면 상당히 부드럽고 겸손하고 신사적인 언행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냉철하고 분석적으로 축구를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호와의 라이벌 관계는 크게 신경 쓰이는 부분인지 2000년대에 접어들고도 수원 삼성과의 경기에서 납득이 안 가는 판정에 거세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하고 벌금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엄청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었다고 한다.
- 시대를 대표하는 축구인이라면서 국가대표 경기수가 의외로 60~70경기밖에 되지 않는데, 사실 외국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찾는 축구팬들의 도움으로 상당히 많이 늘어난 것이고 아마 상당수의 경기가 묻혀 있거나 자료가 미비해[5] 피파에 인정 못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이 당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예를 들어 도르트문트와 붙어본다거나 산토스와 붙어보는 등 외국의 A급 클럽팀과 붙어보는 등, 또는 상대방이 어디 브라질 무슨무슨 주의 대표팀이라거나 대표팀 2진이라거나 하는 등 당시 한국의 사정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상의 A매치였지만 A 매치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기도 많았다. 다만 붉은 악마 1세대들도 나이를 먹고 GG 쳤으므로 자료가 미비해서 인정 못 받는 경기들은 외국 축덕들이 자국 경기를 발굴하려다가 한국 경기도 우연히 걸리는 게 아니라면 여기에서 멈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