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민(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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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정민 (崔貞敏 / Choi Chung-Min)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생
1930년 8월 30일
사망
1983년 12월 8일
출신지
평안남도 대동군
포지션
공격수
선수시절 소속팀
특무부대 축구단
감독
양지 축구단 (1966~196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77)
국가대표
47경기 22골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5. 사망
6.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못 올라


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축구 선수이자 감독. 1950년대에 한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별명은 '아시아의 황금 다리'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장식한 선수이기도 하다. 흔히 올드팬들이 대한민국 축구의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야기할 때, 최정민 - 이회택 - 차범근 - 최순호 - 황선홍(최용수)으로 꼽는 경우가 많으며 이후 안정환(이동국) - 박주영 - 손흥민 순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1]

2. 선수 경력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평전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4 후퇴로 남하한 뒤 CIC 축구단에 합류한 뒤, 김용식의 발탁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된 뒤 10여년간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예선에서 최초의 한일전이 성사되었다. 이승만은 이 경기를 불허할 작정이었다. 가뜩이나 한국전 이후라 신예를 양성하지 못해 노장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일본에게 이긴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광복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선수들을 입국시키는 것도 국민정서상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홈경기에서 패배를 한다면 설상가상이었다. 이 때, 재일교포 유력자들이 민족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사기를 상기시켰고 이유형 감독은 두 경기 모두 원정으로 치러도 상관없고 패배한다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면서 간청했다. 이에 이승만의 허락이 떨어졌고,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 장택상마저 선수들을 모두 자택에 불러모아 "패배한다면 현해탄을 건너지 않고, 고기밥이 되어도 상관없느냐?"라고 당부했다. 이에 선수들은 모두 동의하고 독한 마음을 먹고 일본 원정길을 떠난다. 일본은 서류의 누락을 이유로 입국을 미루며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최정민은 한국 축구 최초의 한일전 원정 두 경기에서 3골을 넣으며[2] 을 1승 1무로 이끌어 일본으로부터 스위스행 비행기표를 빼앗아왔다.
허나, 본선에서는 스코어가 엄청나게 벌어지는 참패만 맛보고 돌아오고 마는데 1950년대 전후의 한국은 세계 최빈국급 국가로 제대로 된 세계대회 경험이 전혀 없었다. 양복조차도 외상으로 맞춰입은[3] 대표팀은 미군의 수송기를 타고 일본 하네다로 향했으나 경험이 없고 행정력이 미숙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며칠을 허비하다가 겨우 스위스행 비행기가 있다는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거기서 다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비행기표를 제대로 못 구해서 한날 한시에 같이 이동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코치진의 좌석은 "월드컵인데 못 가는 게 말이 되느냐?"는 영국 여행객 부부의 호의에 기대서 양보받았다. 방콕에서도 스위스 직항이 아니라 캘커타 경유였다. 경기 이틀 전 그것도 밤 10시에 도착한 대표팀은 숙소를 예약했을 리도 없고, 스위스 축구협회의 도움으로 간신히 숙소를 잡게 되었다.
그나마 경기가 열리기 전까지 주무가 있을 리 없는 선수단은 축구화와 유니폼 준비 등으로 분주했다. 당연히 시차고 여독이고 피로가 풀렸을 리도 없는 대표팀은 당시 세계 최강의 팀 중 하나였던 헝가리와의 1차전에서 후반전 시작 후, 얼마 못 가서 탈진해서 쓰러지는 선수가 속출했고, 결국 2차전은 2군을 내보내고 만다. 이 때 선수단은 6.25 전쟁의 영향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후배들을 양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시절에 활동하던 노장급의 30대 선수들이 대부분이었으며 40대 선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참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으나, 위엄차게 아시아 무대를 정복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당시 1956년 1회 홍콩 아시안컵, 1960년 2회 아시안컵을 2연패했다. 4개 팀의 풀리그로 승자를 결정짓는 이 대회에서 한국은 1승 1무였는데 이스라엘이 베트남을 꺾고 2승 1패를 차지하게 되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베트남을 맞이하게 된다. 최정민은 이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3번째 골과 5번째 골을 넣으며 5:3 승리에 기여한다. 두 번째 대회에서도 최정민은 첫 경기 베트남전에서 3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5:1로 압승을 거뒀으며, 이 대회는 한국이 3전 전승을 거두며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또한 1954 마닐라 아시안 게임,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두 대회에서 연속 준우승을 차지했고[4] 아시아의 호랑이로서 명성을 드날렸으며, 최정민도 역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서 명성에 걸맞는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1960년 이후, 아직까지도 AFC 아시안컵을 우승하지 못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주무기는 178cm의, 당시로서는 큰 키와[5] 100m를 11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한일전의 사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한일전에 강해서 한일전에만 무려 6골을 넣은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는 한일전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기도 하다. 당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에서 맞붙었던 일본 수비수 히라키 류조는 최정민에 대해 “밸런스와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여서 그를 저지할 수 없었다. 우리는 거인과 싸우는 어린이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4. 지도자


최정민의 딸이었던 최혜정 씨의 의하면 "선수들이 눈을 못 쳐다볼 정도로 무서웠어요. ‘이놈의 애미나이 새끼들’ 하면서 운동장에서 소리치던 게 생생해요. 국가대표팀 맡았을 땐 특히 차범근 선수를 많이 야단쳤던 것 같아요.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났으니까 더 잘하라고 다그치신 거죠. 그렇지만 품어줄 땐 넉넉하게 품어주셨고, 윗사람 눈치를 보지 않으셨어요."라고 회고했다.

5. 사망


은퇴 이후, 1966년에서 1969년 사이에는 전설적인 축구팀(경기 내적이든 외적이든)인 양지의 감독을 맡았으며, 77년에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여기서 차범근 감독을 가르쳤다. 특히 1983년에는 전국체육대회 이북5도 대표팀 감독을 맡은 가운데 지병으로 입원 중이었음에도 병원을 몰래 빠져나와서 선수들을 독려한 일화도 있다. 결국, 동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못 올라


이상하게도 한국 최전방 스트라이커의 최초였던 선수인데 이상하게 A매치 47경기 22골을 넣었으니 당대 최고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도 올라가지 못했다. 당시 최혜정씨는 이렇게 인터뷰했다.
축구인 사이에서 최정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후배들은 그를 ‘정 많고 화통한 선배’로 기억한다. 이재(利財)에 밝은 최정민은 친형과 함께 갈비 · 냉면집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씀씀이가 컸고, 어려운 후배를 보면 그냥 보고 넘기지 않았다는 게 주위의 증언이다. 혜정씨는 “중앙대 감독 시절엔 당시 귀한 고기나 생선을 시장에서 떼 와서 어머니가 직접 요리를 해 선수들을 먹이곤 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축구 원로들도 있었다. 사생활이 반듯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까마’[6]라는 별명처럼 그는 해외로 나갈 때마다 국내에 없는 물건들을 대량으로 들여오곤 했다. 어떤 이는 이를 ‘밀수’라고 했고, ‘지인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성격 탓’이라고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2005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 에도 그는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일부 원로들의 거센 반대로 등재되지 못했다.
중앙대와 대표팀 시절 최정민을 감독으로 모셨던 조영증 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은 “최정민 선생님은 워낙 실력이 출중한 스타 출신이어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셨고, 축구에 대한 집념만큼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어요”라고 회고했다. 조 위원장은 “사생활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한국축구 스트라이커 계보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객관적인 평가와 예우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 다만 이들 중 상당수의 세부 포지션을 스트라이커로 보기는 힘들다. 70년대에는 득점에 집중하던 선수가 아예 없었다. 위치 상 중앙 공격수는 김재한이었으나 골게터가 아니라 타겟맨 역할이었으며 윙어인 차범근과 세컨드 스트라이커인 이회택, 박이천 네 명의 주요 공격수 모두가 골고루 득점을 올리는 형태였다. 안정환 또한 세컨드 스트라이커였으며 손흥민도 골게터에 가까운 역할을 맡긴 했으나 위치 상으로는 윙어다. 그리고 이동국과 박주영이 비교가 자주 되는데 이들의 전성기로 볼 때 이동국은 박주영이 아닌 안정환과 비교하는 것이 맞다. 이동국의 국가대표 전성기는 2006년 월드컵 예선까지였고 시기 상 겹치는 선수는 박주영이 아니라 안정환이다. 안정환이 2002년 월드컵과 2006년 월드컵에서 우수한 활약을 보여줬다면 이동국은 2000년 아시안컵2004년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다.[2] 6골로 차범근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통틀어서 이 부문 최다 권위자이다.[3] 그런데 당시 국내 양복점이라 품질이 똥같은 나머지 장시간 비행에 단복이 망가져서 유럽 기자단의 조롱을 받았다.[4] 우승은 2차례 다 대만이 차지했다.[5] 당시로서는 최장신급이었다. 10년이 넘는 후배인 국가대표 중앙 수비수들인 김호와 김정남도 170대의 비슷한 신장이었다. 이 정도 신장은 당시 유럽이나 남미선수 기준으로도 큰편에 속했다. 이시기 180대 선수는 정말 드물었고, 160~170대의 선수들이 주류였기 때문.[6] 중간상인을 뜻하는 일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