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오노르 다키텐

 


[image]
(상상화)
프랑스어: Aliénor d'Aquitaine (아키텐의 알리에노르)[1] / Éléonore d'Aquitaine[2]
오크어: Aleonòr d’Aquitània (아키텐의 알레오노르)
영어: Eleanor of Aquitaine (아키텐의 엘리너)
라틴어: Alienora (알리에노라)

'''이름'''
알리에노르 다키텐
(Aliénor d'Aquitaine)
'''출생'''
1122년
보르도 혹은 푸아티에
'''사망'''
1204년 4월 1일 (80-82세)
앙주 제국 푸아티에
'''재위'''
아키텐의 여공작
1137년 4월 9일 ~ 1204년 4월 1일
'''배우자'''
루이 7세 (1137년 결혼 / 1152년 이혼)
헨리 2세 (1152년 결혼 / 1189년 사망)
'''자녀'''
마리, 알릭스, 기욤 9세, 헨리, 마틸다, 리처드 1세, 제프리 2세, 엘레오노르, 조안, 존 왕
'''아버지'''
기욤 10세
'''어머니'''
에노르 드 샤틀르로
'''형제'''
페트로닐라, 기욤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프랑스의 왕비
2.3. 잉글랜드의 왕비
2.3.1. 결혼 생활
2.3.2. 남편과의 전쟁
2.4. 왕국의 섭정
3. 기타


1. 개요


아키텐 공작령의 공작이자 '''프랑스잉글랜드 양국의 왕비'''였던 인물. 생몰 1122년[3] ~ 1204년[4] 루이 7세의 전 부인이자 헨리 2세의 부인으로 헨리 2세의 아들인 잉글랜드리처드 1세존 왕을 낳았다. 중세시대의 대표적인 여걸이자 당시 가장 영향력 있던 인물이기도 하다. 12세기 서유럽 역사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인물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영토였던 아키텐 공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점찍어져 당시 중세 유럽 여성들과 달리 어릴때부터 온갖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총명한 머리는 물론 아름다운 외모와 주변을 사로잡는 당찬 성격에 아키텐 공작 지위까지 가진 엘레오노르는 당대 최고 엄친딸이었으며 특히 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있어 음유시인, 즉 트루바도르들을 후원하였다고 한다.[5] 오빠인 기욤이 사망하여 엘레오노르는 아버지 기욤 10세로부터 아키텐 공국과 푸아티에 백작령의 광대한 영지를 15세에 계승했다. 아키텐 지방의 영주들의 충성서약에도 불구하고 훗날이 걱정된[6] 기욤 10세는 영지를 지켜줄 유력한 사윗감으로 상위 주군인 프랑스 왕 루이 6세의 아들 루이 7세를 점찍고는 루이 6세를 후견인으로 지명했다. 단, 카페 왕조가 영지를 낼름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상속권은 결혼한 루이 7세가 아닌 둘 사이의 '''아들'''로 한정하는 조건으로 했다. 이는 훗날 그녀가 루이 7세와 아들없이 딸 둘만 있는 채로 이혼한 뒤 헨리 2세와 재혼할 때 그 영지가 고스란히 플랜태저넷 왕조로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왔다.

2.2. 프랑스의 왕비


1137년 4월 9일에 기욤은 스페인 쪽으로 성지순례 중에 죽었고, 그해 7월 25일에 엘레오노르는 보르도의 상 앙드레 성당에서 프랑스의 왕자 루이와 결혼하고 함께 파리로 이동하던 중 루이 6세의 죽음과 함께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엘레오노르는 프랑스의 왕비로서 직접 제2차 십자군 원정을 친정했으나, 프랑스 군은 다마스쿠스 공략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부터 쌓여왔던 둘 간의 불화(특히 아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가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엘레오노르는 숙부인 안티오키아의 레몽과의 관계에 대해 의심을 받기도 한다. 엘레오노르가 직접 십자군에 참여한 것도 루이 7세는 예루살렘의 순례에 더 중점을 둔 데 반해 엘레오노르는 숙부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이유로 인해 원정이 진행될수록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2.3. 잉글랜드의 왕비


이후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교황 에우제니오 3세에게 거절당했다. 그러나 엘레오노르에게서 아들을 얻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루이 7세는 이혼에 합의한다. 결국 1152년 3월 11일 교황은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무효화했다. 하지만 결혼 무효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딸들은 적녀로 인정받았고 양육권은 루이 7세에게 넘어갔다. 대신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루이 7세에게 독립되어 있던 아키텐 영지의 여공작에 다시 올랐다. 결혼 취소가 승인되자마자 엘레오노르는 앙주 백작이자 노르망디 공작이며 자신의 친척이었던 9세 연하의 헨리 플랜태저넷과 약혼했다.[7]
1152년 5월 18일, 둘은 푸아티에에서 결혼하였다. 그리고 1154년 10월 25일에 헨리가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2세가 되었고 엘레오노르는 성탄절에 다시 왕비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국왕이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원래부터 갖고 있던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앙주, 거기에 결혼으로 아키텐과 푸아티에 등의 방대한 영지를 가진 셈이 되어서 후에 지속적으로 전개될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대립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8]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의 이런 수법은 200여 년 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어받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여자들과 결혼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별로 치르지도 않고 영토 확장에 성공한다.

2.3.1. 결혼 생활


첫 결혼에서는 딸 둘만 얻었던 엘레오노르는 헨리와의 결혼에서는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으면서 왕가의 핏줄을 번창시켰으나, 당시의 권력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리고 헨리 2세가 상당히 호색가였던 만큼 여러 차례 바람을 피워대자 둘 사이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2.3.2. 남편과의 전쟁


1173년 헨리 2세의 부정으로 불화를 겪던 중, 남편과 공동으로 왕위에 올라있던 아들 '젊은 헨리'(혹은 청년왕 헨리)[9]필리프 2세와 같은 헨리 2세의 정적들에게 꼬드김을 받았고, 동생 리처드와 조프리를 동참시켜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하였다. 첫째 아들 기욤이 3살이 안된 나이에 사망하자 둘째였던 헨리가 사실상 첫째 아들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공동 왕위까지 올랐으나, 실권은 아버지가 모두 틀어쥐고 있는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오히려 각자 자기몫의 영지를 상속받아 각자 통치를 하고 있던 동생들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막내 에 대해 지나친 편애를 보였던 아버지에 대해서 반발감이 컸던 리처드는 형 헨리의 동참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 헨리 2세 콩가루 전설의 시작이었던 이 반란은 그 때까지만 해도 유능함을 아낌없이 보여주던 헨리 2세의 능력으로 진압할 수 있었고, 이 반란이 실패하자 아들들은 용서해주었으나 엘레오노르는 유폐되고 말았다.
이후 아들들의 반란은 더 이어졌고 결국 헨리 2세가 아낌없이 편애를 퍼부었던 존마저 리처드와 함께 반란에 나서자 기력과 의지를 상실한 헨리 2세는 1189년 사망하였고, 아버지의 왕위를 이은 리처드는 바로 어머니의 유폐를 풀었다.

2.4. 왕국의 섭정


이후 리처드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가 리처드 1세로 즉위한 이후 3차 십자군에 참전하자 왕이 부재한 왕국을 윌리엄 마샬, 휴버트 월터와 함께 섭정으로서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재위기간 내내 전쟁터를 누빈 리처드는 인재보는 안목이 빼어나 자신이 부재한 사이 내정을 돌볼 사람들을 무척 잘 골랐고 상상이상의 수완을 발휘한 어머니의 능력까지 더해져 장기간의 부재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리처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그녀의 막내아들 존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도와 잉글랜드의 영토를 지키는 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10]

3. 기타


엘레오노르의 아들 리처드 1세와 함께 3차 십자군에 참여한 프랑스의 필리프 2세는 그녀의 전 남편 루이 7세의 아들이지만, 엘레오노르 본인의 아들은 아니다.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이 무효화된 뒤 샹파뉴의 아델(아델라)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애초에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면 이혼(혼인무효)도 없었을 것이고, 그 아들이 아키텐 영지를 상속했을 것이기 때문에 카페 왕조가 헨리 2세, 리처드 1세, 존 왕과 그렇게 싸워댈 필요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엘레오노르 본인에게는 딸과 아들이 각각 5명씩 있었는데 그 중에 딸 둘은 루이 7세와의 사이에서, 나머지 8명은 모두 헨리 2세와의 사이에서 본 자식들이다. 아들들 중 첫째 기욤은 3살 무렵에 죽었고, 실질적 장남 헨리는 아버지에게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반란 중에 병으로 사망한다. 리처드 1세는 정식 아들없이 사망,[11] 4남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 아들이 자식없이 할머니보다 일찍 사망[12], 그 많은 아들 중에 오직 존 왕만이 혈족을 남겨 플랜태저넷 왕조가 장수할 수 있도록 했지만, 지지리도 못나서 프랑스의 영지를 대부분 날려먹는 '실지왕'이 되어버렸다.
로빈 후드를 다루는 작품 중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헨리 2세 시대로 설정하는 작품에서는 로빈 후드를 사면해주고 아들 리처드 1세와 연결해주는 조력자 역할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빈 후드의 활동 시기를 리처드 1세, 존 왕 시대로 늦춰잡는 작품들(이쪽이 사실 다수이다)에서는 잠시 등장하거나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십자군에 참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각종 중세 문학에서 살라흐 앗 딘과의 염문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선 이에 대한 증거는 없고 애초에 살라딘은 당시 10살 꼬맹이에 불과했다.
문명 6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선택할 수 있는 지도자로 등장했다. 문명 6 영국 & 문명 6 프랑스 참고.
[1] 흔히 알려진 이름인 엘레오노르(Éléonore)는 현대 불어식 이름. 중세에는 Aliénor, 알리에노르라고 했다.[2] 현대 불어식 표기[3] 태어난 해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앨리슨 위어의 책에서는 죽을 때 82세라고 했으니 역산해서 1122년인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4] 80세를 넘긴 거니까 현대인 기준으로도 제법 장수했다.[5] 이들이 주로 궁정연애를 다룬 서정시를 많이 읊었으며 시를 읊을 때 쓴 언어가 로망스어였고, 여기에서 연애 혹은 연애물을 의미하는 단어 '로맨스'가 유래했다고도 한다.[6] 결혼을 통해 그녀가 상속받은 영지를 꿀꺽하려는 영주들도 많았다.[7] 중세 유럽에선 12촌 이내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간주했고, 엘레오노르와 루이의 결혼이 10촌 근친혼이란 이유로 무효화됐는데, 엘레오노르와 헨리는 더 가까운 8촌이었다. [8] 다만 실지왕 존의 치세인 13세기 초엽에 프랑스 내의 영지는 필리프 2세에게 '강제로 회수당한다'. 헨리 3세 시기인 1259년에 파리 조약으로 보르도 일대의 해안은 수복하여 가스코뉴라고 불리며 백년전쟁 시기까지 통치하긴 한다.[9]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헨리'인데 아버지보다 오래 살았다면 헨리 3세가 되었겠지만 먼저 죽는 바람에 이러한 호칭으로 남았다. 하지만 기름부음의 의식까지 거쳤기 때문에 정식 왕의 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참고로 헨리 2세의 어머니 마틸다(모드 황후)의 경우 최고의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의식을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최초의 여왕이 아닌 여영주로 간주된다.[10] 출처: 두산백과[11] 정식 부인이 아닌 여자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아들이 한 명 있다. 리처드 사후 어떻게 뎌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12] 리처드 1세 사후 왕위를 주장하며 작은아버지인 존 왕과 싸우며 심지어 할머니인 엘레오노르를 공격하는 패륜까지 저지르다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