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덴급 경순양함
1. 개요
2.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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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덴급 경순양함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함정 보유의 제약이 생긴 독일이 1921년에 건조 및 보유 할 수 있는 6척의 경순양함중의 첫번째로 기존 순양함 설계에 따라 6,000톤급 수준으로 계획해서 건조하게 되었다. 함명은 엠덴으로 동형함은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이 이름은 3대째로 초대 엠덴(SMS 엠덴)에서 따왔다. 제법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던 독일 제국해군의 순양함을 기반으로 만들어져서 포탑이 전부 중앙에 배치 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기준으로는 8문의 포중에서 동시에 6문을 발사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균적인 성능을 보였다.[3][4] 다만 이전 함선들에 비해 좀더 함선을 길고, 폭이 넓어 졌고 거기에다가 선수를 저항이 적은 형태로 바꿨다. 거기에다가 대양 항해를 위해 넉넉한 항속거리를 보유하고 있었다.[5] 그렇게 1921년 12월 8일에 건조되기 시작해서 1925년 10월 15일에 엠덴은 취역하게 된다.
3.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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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항구에 정박해 있는 엠덴
엠덴이 취역한 다음 주로 신생 해군의 수병들을 위한 훈련함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중한 수상함 전력으로[6] 당장은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었지만 꾸준한 개장으로 언제든지 전투를 할 수 있게끔 했다.먼저 1926년에 마스트의 길이를 줄여 피탄성을 줄였고 1933년에는 석탄 보일러에서 출력 좋은 디젤 보일러로 교체했다. 이후 어뢰관, 대공포 등도 손을 보는 등 항상 1선급 전력으로서 관리받았다.[7]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엠덴은 북해로 출항해서 기뢰를 부설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빌헬름스하펜으로 귀항했는데 이때 영국의 블렌헤임 폭격기의 공습을 받았다. 대공포에 의해 5대가 추락했고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운 나쁘게 추락하는 폭격기 한대가 엠덴에 떨어졌고 29명의 수병이 사망했다.
1940년, 엠덴은 베저위붕 작전때 중순양함 블뤼허와 도이칠란트(뤼초)와 함께 그루페 5에 속해서 오슬로로 출격했지만 블뤼허가 허무하게 격침되고 뤼초와 엠덴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노르웨이 국왕의 지시로 오슬로가 비저항 도시가 되어서 무사히 점령했지만 엠덴은 항구로 귀항해서 수리를 하게 된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발하자 엠덴은 라이프치히와 함께 동부전선을 지원하러 갔고 리가 만을 점령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티르피츠와 함께 발트 함대에 소속되어 리투아니아의 리바우에서 머물게 된다. 1942년,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훈련함 역할을 하다가 1944년, 노르웨이로 가서 기뢰를 부설하거나 동부전선에서 병력이나 피난민을 수송하기도 했다. 엠덴은 결국 1945년, 영국군의 공습으로 항구에서 착저하고 그대로 연합군에게 나포된다. 1949년에 스크랩되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장하면서 3.7cm SK C/30 기관포 4문, 2cm Flak 30 기관포 18문 추가[2] 개장하면서 53.3cm 어뢰관으로 교체[3] 엄밀하게 따지면 완전히 포가 측면에만 배치되어있는 방호순양함에서 벗어나서 일부 포가 중앙으로 간 제1차 세계 대전후기 형태이긴 하다. 여담으로 영국,일본처럼 제법 포가 중앙에 많이 배치된 경우와 독일과 미국, 네덜란드와 같이 여전히 측면에 절반 이상의 화력이 존재하는 형태가 혼재하던 시절이다.[4] 20년대 초 건조했던 순양함들을 보면 영국의 에메랄드급 경순양함(6인치 단장포 7문), 일본의 쿠마급, 나가라급, 센다이급(전부 14cm 단장포 7문)을 보면 여전히 구형 순양함의 형태를 띄고 있다. 참고로 순양함의 포탑이 중앙에 전부 배치 되기 시작한 것은 유바리가 건조 이후 부터이다.[5] 독일 제국의 패망으로 카이저리히마리너는 소멸했지만 여전히 많은 장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과거 세계 2위의 해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 했기 때문에 비록 제한 되었지만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배를 요구한 것이다.[6] 전드레드노트 전함인 도이칠란트급 전함 2척, 엠덴급 경순양함 1척,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3척,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2척[7] 이시절에 엠덴의 함장으로 부임했던 사람이 나중에 크릭스마리네의 2대 원수가 되는 칼 되니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