뤄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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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자: 洛陽(낙양)
중국어: 洛阳(Luòyáng)
일본어: 洛陽(らくよう)[2]
중국 허난성(河南省)의 도시. 대한민국에는 한자음을 한국식으로 읽은 낙양(洛陽)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도시다.“고금의 흥망성쇠를 알고 싶다면, 낙양성에 한번 가보라.”
若問古今興廢事,請君只看洛陽城。
사마광의 시 〈낙양 옛 성을 지나며 (過故洛陽城)〉 中
위도는 34도 정도로 한국의 목포시나 거제시와 비슷한 위치이다.
2. 지명의 유래
황하의 지류인 낙수(洛水)가 남쪽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원래는 '낙(洛)'이라고만 불렸다. 수로를 이용한 교통이 편리하고, 사방이 평야였기 때문에 농업생산력도 뛰어났는데, 이렇게 좋은 입지조건들로 인해 고대부터 유명했다. 중원의 중심으로 예로부터 구주지복지(九州之腹地, 중화 9주 중에서도 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불렸다. 이후 주나라(서주) 때 수도인 호경(鎬京)의 별칭인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어 '성주(成周)'로 불리다가 동주 때 수도가 되면서 낙읍(洛邑)으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전국시대에 이르러 강의 북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인 양(陽)이 붙게 되면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3][4] 사방 토지의 중앙이라는 뜻으로 '토중(土中)'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3. 역사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전설적인 하나라 시기이며, 그 후로 장안과 함께 중국의 양대 도시로 성장했다. 그래서 역사가 4천 년 정도 될 정도로 굉장히 오랜 도시다.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산악지대[5] 가 원형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으며, 북쪽에는 황하, 남쪽에는 낙수와 이수가 흐른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는 대규모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6]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낙양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낙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호로관[7]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서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8]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 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3.1. 화려한 전성시대
일단 워낙 입지 조건이 좋아서, 무려 13개 왕조가 1,586년 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주요 왕조로는 9개이기에 "9조고도(九朝古都 -9개 왕조의 도읍)"라고도 한다. 대충만 따져봐도 일단 (전설 속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동주), 후한, 위, 서진, 북위, 수나라[9] , 5대10국의 후량 등이 된다. 여기에 측천무후의 무주(주나라)와 오대십국시대의 후당도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제2수도 격이 된 것도 서주, 전한, 전진, 후진, 수나라(수문제), 당나라, 송나라 등 무려 여덟 왕조가 있었다. [10]
낙양의 '낙'은 낙수에서 따온 말인데, 주공단이 낙읍을 경영하던 시기부터 낙수 락(洛)과 부엉이 락(雒)은 혼용되고 있었다. 지금 洛으로 고정되는 변천 과정은 오행설에 따른 것이다. 진나라는 오행 중 수덕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한 후에 낙수 락 洛陽을 정식 명칭으로 둔 반면, 화덕을 숭상한 한나라는 물수변이 들어간 洛을 떼고 낙양(雒陽)으로 개명해서 사용했다.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나라는 토덕을 받들었기에 물이 흙을 살려준다는 오행상생설에 따라 도로 洛으로 되돌리고 이를 고정시켰다.
동주 멸망 후 한고제 유방도 처음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다 장안으로 정했다.[11] 그러다 후한 시절 광무제가 이곳에 도읍해 2백 년을 지낸다. 다만 당시의 낙양은 지금의 뤄양과 위치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12][13]
후한 말기 동탁이 반동탁연합군을 피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낙양은 초토화가 된다. 거기다 조조가 도성을 허도로 옮기면서 좀 안습이 되었지만 허도는 임시수도였을 뿐 곧 낙양 복구를 시작했다. 조비가 즉위해 위나라가 세워지자 다시 낙양을 도읍으로 잡았으며, 허도는 허창이란 이름으로만 우대받았을 뿐 수도의 기능은 상실되고(...) 모두 낙양으로 이주되었다. 조비와 조예가 낙양에 화려한 전각들을 세우면서 낙양은 곧 수도의 위엄을 찾았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동씨를 매우 싫어하는 반면에, 조씨는 대우해 준다고 한다.
낙양은 위나라 멸망과 삼국통일 후 서진의 수도가 되었으나, 회제 때 침략을 받아 불태워졌다. 이후 남북조를 거치며 재건되었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뒤부터 낙양은 '동도(東都)'로 불리며 수도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14] 이때가 낙양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거의 많은 왕조들이 '''장안과 낙양을 오가면서''' 통치를 했다. 현재는 낙양-장안(서안)에 고속철도가 깔려 있어서 2시간 남짓한 거리로 갈 수 있다.[15] 고속철도를 타고 가다보면 온통 평야지대임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이 지역은 엄청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16]
3.2. 쇠퇴기의 시작
그러나 오대십국시대 때에 후당 왕조의 수도였던 것을 끝으로 송나라 이후부터는 역사상에서의 비중은 안습이 되었다. 이 때부터 중국의 정치적 중심은 관중-중원의 내륙 지대에서 동부로 옮겨 간다. 이렇게 된 이유는 기후환경의 변화가 주된 원인이지만, 기후환경이 심각하게 변해서 농사가 힘들어진 장안에 비해서는 변화가 크지 않아 별 타격을 안 입은 낙양이 중심지에서 벗어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면적이 미묘하게 좁았기 때문'''이다.
일단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좁다. 장안의 것과 비교하면 1/5도 안 된다.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 조달하기 어려우므로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형상 주변의 평야지역에 돌출된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도 쉬운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당장은 안전하지만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도로서의 역사도 길어서 주변 지형이 널리 알려진 탓도 크다. 수도권에 속하는 데다가 주요 관문이 평시에는 통행량이 많을 수밖에 없으므로 지형에 빠삭한 사람을 굳이 현지 주민에서 찾지 않더라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세에는 낙양을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나 전술을 누구나 한 번씩은 연구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도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공격이 가해지므로 수비군이 버티기가 더 힘들어진다.
공격측에서 공격을 연구하는 만큼 방어측도 대비를 잘 해서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의견이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은 성에 대한 모든 정보, 군사적으로는 성의 첩보가 중국인들 전체에게 상시로 노출된 곳이었다는 점이다. 주로 외침을 받은 평양성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성을 쌓은 대야성과 달리 뤄양은 주나라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나라, 당나라 시절까지도 중요 도시였기 때문에 지리적 이점으로 방어하기에는 너무 잘 알려진 도시가 되어버렸다. 전술적으로도 약점 하나만 파고들면 되는 공격측과 달리 수비측은 가능한 모든 약점을 철저하게 대비해야하기에 수비가 어려웠다. 공성전에서 공격측이 방어측 병력의 몇 배가 필요하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정공법의 이야기이며, 공격측이 성의 특징과 약점을 모두 파악한 상태에서 공격 방법을 골라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남쪽 지형에 큰 틈이 있다. 다른 방위선은 강이나 관문으로 차단되지만, 남쪽 통로는 제대로 된 관문을 설치할 수 없을 정도로 통로폭이 넓다. 이 때문에 남쪽에서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남북조시대에는 유유나 진경지처럼 명장이 이끄는 남조의 병력이 종종 낙양을 탈환해서 한동안 유지한 적이 많다.
네 번째로, 의외로 수비하는 데 병력이 많이 들어간다. 낙양은 낙양성만 수비하면 땡이 아니며, 앞서 말한 관문을 수비하는 데 상당한 병력을 할당해야 하며, 흔히 알려진 관문이 호로관 정도고 추가적으로 함곡관 신관 정도지만, 낙양에는 이 관문들 말고도 관문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황하쪽 출입구인 맹진도 장악해야 하고, 맹진 등에 배치할 수군도 필요하다. 그리고 산맥 사이를 넘어올 군대에 대비하기 위한 예비군도 갖추어야 한다. 이런 것을 소홀히 하면 관문과 거점이 몽땅 함락되면서 낙양성이 포위당하는데, 이렇게 전개되면 구원군이 낙양으로 올 통로가 한정되는 데다가 적군이 점령한 관문 등을 활용해서 구원군을 차단하기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 딱 좋다. 서진의 멸망 시에도 이런 약점이 작용했으며, 남조가 북조에게 낙양을 빼앗길 때에도 비슷한 과정이 전개되었다.
다섯 번째로, 하북지방과 관중지방에 각자 독자적인 정권이 수립될 경우, 위치상 끼어버리는 형태가 되어 전쟁터가 되기 딱 좋다. 당장 관중지방의 입장에서는 경계선인 동관이나 함곡관에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낙양을 차지할 수 있으며, 낙양을 점령하면 하북지방이나 다른 곳으로 갈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하북지방의 입장에서는 낙양을 차지하면 관중지방의 입구인 동관이나 함곡관을 공격할 수 있으며, 대치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상당수의 적 병력을 해당 방면에 묶어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전조와 후조가 격돌할 때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누어질 때 같은 사태시 낙양이 전장터로 변해서 폐허로 변하는 일이 많았다. 동주 시절만 하더라도, 걸어서도 지척인 거리에 정(鄭)나라가 있고 진(晋)나라가 이웃해 있어 정나라와 진나라가 강성할 시기에 낙양은 그 사이에 끼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춘추시대에는 형식적으로나마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존중해줬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주 천자의 권위가 결정적으로 떨어지게 된게 지척에 있던 정나라가 주나라 영토를 찝쩍거리다가 주 천자가 모은 연합군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주왕에게 화살까지 맞춰버린 사건이었으니....
그래서 송나라의 경우 수도를 대운하와 직결되며, 평야지형이지만 그물 같은 수로로 보호받을 수 있는 개봉부를 선택한 것이다.
단, 수나라 말기에 봉기한 양현감과 이밀은 위의 단점을 과신해서 장안 공략의 중요함마저 내팽개치고 낙양을 공격하는 데 집착하다 실패하고 천하를 건 쟁패에서의 기선 잡기까지 놓쳐서 몰락한 바 있다. 오래 버티기 힘들다고 해도, 역대 왕조의 수도 후보지로서의 입지는 괜히 얻어진 게 아니었단 소리다. 그래서인지 송나라 때는 서경(西京) 혹은 경락(京洛)이라고 부르며 우대하였다.
놀랍게도 20세기에도 중국의 수도가 된 적이 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이 마옥산 사건을 구실로 제1차 상해 사변을 일으키자 1932년 1월 30일, 장기 항전을 위해 수도를 남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5월 5일 송호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일본군이 철병한 후 12월 다시 남경으로 환도했으며 이것이 아마도 낙양이 중국의 수도가 된 마지막 사건일 것이다. [17]
현대에는 중일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낙양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낙양을 위시한 하남성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350만 명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중국에서 만든 "1942"(영문명 Back to 1942)라는 영화다. 막장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4. 현황
현재 인구는 650만. 과거와 같은 정치적인 힘은 없어졌고 과거의 유산들이 많이 쇠잔해서 흔적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지만, 지금도 강을 이용한 경제적인 도시로서의 역할은 계속하고 있다. 구도심인 낙수 북쪽은 개발이 미미하지만, 남쪽인 룽먼지구는 개발사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5. 특산품
당삼채가 유명하다. 중국 당나라 전기(7세기 말~8세기 초)에 만들어진 백색 바탕에 녹색, 갈색, 남색 등의 유약으로 여러 무늬를 묘사한 도기인데, 뤄양이 생산지라서 질 좋고 큰 당삼채도 싼 값에 살 수 있다. 문제는 운반이다.
말린 대추 또한 최근 특산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6.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낙양
후한 말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언제나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다. 또한 아직 옥새가 미발견 상태인 경우 낙양을 수색하거나 탐색하다 보면 옥새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초기 시나리오의 낙양에서는 채염에 서황같은 인재들도 나오고 있으며 몇몇 시리즈 한정으로는 198년경에 낙양에서 사마의가 나온다. 군웅할거 시나리오같은 194~195년 시나리오를 주로 하는 유저들에게는 중요한 거점. 그리고 매번 반동탁 연합 시나리오에서는 거의 불타는 이벤트가 후기 시리즈들어 자주 나오며, 군웅할거 시나리오에서는 그 영향으로 낙양의 상태가 개판인 채로 시작한다.
삼국지 4에서는 허창을 통해 들어오는 루트를 제외하고는 반격지가 모두 관문으로 막혀있어서 수비하기 매우 편리하며, 후반 시나리오에서는 인구 100만(!)도 손쉽게 초과할 수 있을 정도. 다만 동탁의 장안천도 직후 시나리오에서는 도시를 불태워버렸다는 것을 반영해서 규모가 쪼그라들거나 초토화되어 내정수치가 완전히 바닥인 공백지 상태로 나오기도 한다. 여러모로 헌제와 많이 엮이며 이벤트 발생조건으로 낙양 점유가 조건인 경우가 많다.
삼국지 5에서는 유일하게 상업치의 최대치가 990인 도시다. 낙양의 주변 도시인 업, 허창, 장안 등도 상업치가 900대 이상으로 높지만 990인 도시는 낙양이 유일하다. 상업 요충지답게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데, 그 덕에 동서남북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 특히 후반에 삼국정립이 된 시나리오가 아닌 군웅할거 무렵의 시나리오라면...
삼국지 6에서는 상업치가 최대치인 200에 달하는 대도시이다. 제도를 건설할 수 있고 전투할 때의 지형이 방어가 쉬운 형태다. 나름 고증이 있어서 장안에서 쳐들어가면 함곡관이, 허창이나 완에서 쳐들어가면 호로관을 통과해야해서 야전에서도 성문 하나를 뚫어야 한다. 농성전에서는 대도시 치고는 특이하게 남문과 북문 2개 성문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대도시 공격에서 성문 하나 열고 성 안에서 나머지 성문 3개 열어서 사기 떨어뜨리기 꼼수가 반감된다. 북문은 멀리 돌아가야 하고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공격 측에서는 남쪽 문만 공격하려하고 보통 방어 입장에서는 남문만 지키면 된다. 다만 남문은 성문이 ㄷ자로 나있어서 성문 공격 시 공격 측 피해가 조금 더 크고 북문은 멀긴 하지만 정무청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수비가 견고하다면 공격 입장에서는 오히려 북문을 찔러서 정무청을 점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번 명령하면 3일동안 고정이라 남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발이 묶이는 것은 덤. 참고로 북쪽에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으로 막혀있는데 북망산을 나타내려고 만든 지형인 듯. 두 번째 시나리오인 189년 동탁의 야망을 선택해서 플레이하면 시작 후 얼마 안 되어 동탁 세력의 천도 이벤트가 일어나 초토화되고 불타는 낙양을 매번 볼 수 있으며 플레이어가 낙양을 점령한 뒤 회견에 임하면 낙양 복구하자는 회의안건이 매번 나오게 된다.
삼국지 9에서는 지형조건을 고증해서인지 몰라도 대도시임에도 농업 최대치가 중소도시 수준으로 매우 낮은데 사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대로 낙양의 농업 관련 수치가 그닥 높지 않은 편이었다. 다만 상업은 도시들 중 가장 높은 1000까지 올릴 수 있고, 상인이 상주하고 있어 언제든지 금으로 식량을 구입해 해결할 수 있다. 서황, 사마의 등의 장수들도 낙양에서 나오며 보물인 구석도 낙양에서 얻을 수 있고 왕윤이 사망한 이후의 시나리오에서는 낙양을 뺀질나게 탐색하다보면 무력+10짜리인 칠성검도 얻게 된다.
삼국지 10에서는 학술특화도시로 나오며 지력교습소와 태학이 동시에 있는 유일한 도시이기 때문에 일반 장수의 지력을 100까지 단련하는 것은 이곳만 가능하다. 다른 도시는 80까지만 가능하며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태학이 있다면 능력치단련의 효과가 올라간다. 단, 능력치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시작부터 규모가 대인 것을 제외하면 딱히 좋을 건 없는 도시. 초기 시나리오에선 황제의 소재지라 낙양을 점령할 경우 황제가 손에 들어오지만 고정인 것이 아니고 황제를 옹립한 군주의 소재지 따라 황제도 이동하기 때문에 도시 자체의 효용이 그렇게 높은 편은 아니다.낙양까지 가는길에 호로관, 함곡관, 동관등 관문이 많아 하내 쪽만 조심하면 방어하는 건 쉬운 도시라는 것은 장점. 그 외에는 상업 한도가 높아 자금이 비교적 쉽게 벌린다는 것 정도. 그러나 군웅할거 등 상당수의 시나리오에서는 반쯤 폐허가 되어 방치된 상태라 본격적인 거점으로 쓰고자 한다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단 차지하기는 하내쪽으로 접근하기 쉬운 원소나 진류에서 시작해 관문 하나만 넘으면 되는 조조가 쉽다. 원래 하내에 있는 장양은 낙양을 먹기는 쉬운데 세력이 보잘 것 없어 지키기가 쉽지 않다.
삼국지 11에서는 대도시로 분류되어 있고 낙양 소속의 관문 1곳과 항구 2곳을 보유하고 있다. 함곡관은 그냥 보면 마치 낙양 소속 관문 같지만 실제로는 장안소속의 관문이다. 즉, 낙양만 먹은 상태에서는 함곡관을 먹어도 함곡관에서는 금, 병량 수입이 들어오지 않는다. 낙양 소속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육로로는 낙양으로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하기가 쉽고, 내정 시설을 건설할 수 있는 빈터가 많은 데다 배치도 괜찮아 매우 좋은 도시다. 다만 상대방이 수군을 운용할 경우 항구를 통한 공격으로 낙양을 위협할 수 있고, 수상에서의 원거리 공격이 낙양 본성까지 닿지는 않지만 내정 시설이 공격받아 피해를 입거나 파괴될 수 있다. 때문에 낙양을 완벽하게 방어해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수군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수군이 아니더라도 상륙을 저지할 노병[18] 도 괜찮다. [19]
삼국지 12에서도 대도시고 병력징발에 보너스가 있다. 다만 같은 대도시라도 전차를 생산할 수 있는 장안과 호표기를 생산할수 있는 허창, 연노를 생산하는 성도와 달리 달리 일반 중장만 생산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또 초반부 시나리오 역사 이벤트를 켜두면 동탁이 바로 낙양을 불태우는데 '''부대시설이 하나도 안 남고 싸그리 전멸하기 때문에''' 낙양을 이후 점거하면 재건에 살짝 애로사항이 있다. 거기에 역사 이벤트가 켜진 상태에서 잠시만 진행하면 조조가 날로 헌제와 낙양을 접수하기 때문에 조조는 순식간에 게임에서 대도시 두 개를 보유한 유일한 군벌세력이 되어 질좋은 병력을 펑펑 양산한다.
삼국지 13에서도 동탁의 장안천도 이벤트가 뜨면 홀라당 불타버려서 농업이건 상업이건 문화건 내정도거 거의 100(...)까지 곤두박질쳐서 도무지 여기가 사람 살 땅인가 싶어진다. 심지어 게임상에서도 '''유일하게''' 성 내부건 맵에서건 시꺼멓게 불탄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다. 빡세게 내정을 다스리면 복구못할 건 없지만 아무래도 허창이나 업 같은 도시들에 비해 힘든 건 사실이다. 전투시 맵은 대형 3중 성곽으로 평시라면 내구도를 상승시켜 우주방어를 할 수 있지만 초반부 시나리오는 저놈의 동탁이 트롤질을 해놓아서 내구도가 폭망이다. 강력한 장수로 3부장 다 채워서 성 밖에 아군 부대를 배치하고 적 부대를 요격하는 게 최선일 듯.
삼국지 14에서는 함곡관, 호로관을 사이에 두고 있는 좋은 수비여건을 두고 있으며 위로는 진양 인근인 평양, 포판 등을 점령할 수도 있다. 반동탁연합 시나리오에서는 동탁이 호로관과 낙양을 두고 장안으로 물러나나 함곡관부터는 멀쩡히 동탁의 영토로 남아있다.
7. 기타
낙양의 낙(洛)은 일본어에서는 뜻이 변해 수도, 즉 교토를 상징하는 말이다. 교토 시내의 번화한 모습을 그린 병풍 라쿠추라쿠가이즈(洛中洛外図)같은 문화재의 이름이나, 교토를 점령해 덴노와 조정을 손에 넣어 중앙 정치의 실권자로 올라서는 일을 일컫는 조라쿠(上洛) 같은 단어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헤이안 시대에 중국을 모방하여 수도 교토(당시의 이름은 헤이안쿄)의 서부인 우쿄(右京)지역을 쵸안(長安), 동부인 사쿄(左京)지역을 라쿠요(洛陽)라고 불렀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서부지역은 쇠퇴하여 쵸안의 이름은 유명무실해지고 번성한 동부지역만 남아서 라쿠요가 교토의 대명사가 됐고 낙양의 낙 자가 교토를 뜻하는 한자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장안이 수도를 시사하는 단어인데 이와 대비된다. 조선시대 때 호서 지방(충청도)의 선비들과 한양의 선비들이 유교 사상과 관련한 논쟁으로 호락논쟁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여기서 락 자가 바로 낙양의 낙 자와 같은 글자이다.
코드기어스의 중화연방의 수도로 나온다. 황궁인 주금성이 위치해 있다고 한다.
신해철이 진행한 라디오 방송 고스트스테이션에서는 "낙양성의 복수"라는 전설의 허무 무협 비디오(…)에 대한 도시전설이 있었다. 주인공이 죽을 동 살 동 가족의 복수를 위해 낙양성으로 왔는데 흔한 무협 영화에서 주인공을 갈구는 놈들이 던진 기왓장에 주인공이 맞고 그대로 죽고 허무하게 "끝" 자막이 떴다는 전설의 영화다.
상주시의 옛 이름이 '''낙양'''이며, 그 흔적은 낙양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낙양의 동쪽'을 뜻하는 낙동강(洛東江)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왔다. 낙양이라는 이름답게 임진왜란 전까지 경상도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적도 있었다.
우주소녀 멤버 멍메이치, 유니크 멤버 이보의 고향이다.
중국의 축구 선수 두웨이가 이 곳 출신이다.
관우의 머리가 묻힌 무덤 관림이 위치해있다.
[1] 지금 남아있는것은 문화대혁명때 완전히 박살난걸 다시 재건해 놓은것이다.[2] 일본어를 병기한 이유는 아래 서술.[3] 심수(瀋水)의 북쪽이라 이름이 지어진 심양이나 한강의 북쪽 한양 등의 다른 도시들도 이와 같은 작명법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또한 강의 남쪽 지역에 붙는 접미사는 음(陰)이다. 때문에 회수(淮水)의 이남은 회음(淮陰)이라는 지명이 붙는데, 유명한 한신의 작위 회음후는 이 지역을 분봉받은 데서 온 것이다.[4] 강은 산 사이의 골짜기, 고지대 사이의 저지대에 형성되는데, 중국이 위치한 북반구에서는 태양의 경로가 남쪽에 위치하므로, 일반적으로 강의 남쪽(산의 북쪽)은 산의 그림자가 생겨 음지가 되고 강의 북쪽(산의 남쪽)은 양지가 되기 때문.[5] 참고로, 북쪽의 산악 지역을 '망산', 또는 '북망산'이라고 불렀는데, 이 지역에 과거 공경이나 왕후의 무덤이 많이 만들어져 훗날 저승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6] 서쪽에 통로라고는 신안과 의양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알다시피 신안은 그 유명한 신안대학살이 일어난 장소이며 의양에서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낙양 진출을 막기 위해 저항하던 한나라 군대와 백성들이 몰살당했다.[7] 사수관과 같은 지역이다.[8] 여담으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서안과 낙양의 사이에 있으며(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낙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 史/正史/史記/書 凡八卷/卷三十 平準書第八 益廣關,置左右輔。【集解】徐廣曰:「元鼎三年,丁卯歲,徙函谷關於新安東界。」관關을 더 넓히고,좌우보左右輔를 설치하였다。【집해】서광徐廣이 이르길:「전한 한무제 원정元鼎 3년(기원전 114년),정묘丁卯때에,함곡관函谷關을 신안新安 동쪽의 경계로 옮기었다。」 따라서 킹덤에 나오는 전국시대 진나라의 함곡관과 삼국지의 함곡관은 위치가 다르다. 황하 지류변동으로 옮겼다고 한다.[9] 수양제 때, 동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하나라의 경우 존재 여부가 아직 확실치 않기 때문에 존재가 확인된 상나라부터 셀 경우 도읍으로 삼은 기간에선 시안에게 밀린다.[10] 태원은 춘추시대 조나라, 남북조시대의 전진, 북제, 당과 무주, 후당의 제3수도, 5대10국시대의 후진, 후한, 북한을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9주고도가 된다.[11] 한고제가 낙양을 수도로 정하려다 장안을 수도로 정한 경위는 유경 문서 참조.[12] 크게 동주, 후한-위, 수-당의 낙양성이 각각 구분된다. 지금의 낙양은 마지막 수당시대의 낙양성. 후한 당시의 낙양도 지금의 뤄양의 일부지만 지금의 중심지보다는 약간 동북쪽에 있었으며(위의 지도상으로는 뤄양 시와 옌스 시(Yanshi) 사이), 지금의 뤄양 자리에는 하남현이 있었다고.[13] 예컨데 비슷한 예로 왕십리와 신촌(무악)이 지금이야 서울이지만, 과거엔 도시의 구획이 더 작았다. 무학대사가 왕십리를 도읍삼으려다 취소했다느니, 태종이 서울에서 무악으로 천도(?)하려했다는게 지금의 시각으로는 어색하지만 그 당시엔 말이 된다.[14] 이 시기에 낙양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양제가 낙양을 동쪽의 수도로 만들면서 현 위치에 화끈하게 토목 공사를 벌여 지은 것.[15] 약 500km 정도의 거리이다.[16] 그 후 기후 변화, 과도 경작으로 인한 황폐화, 지속적인 전란의 피해, 본격적인 강남의 개발 등으로 인해 중심 지역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전락하게 된다.[17] 경제 중심이 전부 장강 이남으로 옮겨간 지금은 수도를 옮길 일이 있어도 아마도 중경으로 갈 것이므로 낙양으로 갈 일은 없을 것이다.[18] 늙은 병사가 아니고 쇠뇌병[19] 방어시설 몇개를 낙양 도시 개발지 옆에 지어놓으면 컴퓨터도 황허를 건너 올라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