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 마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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沖雅也 (おき まさや)
1952년 6월 12일~1983년 6월 28일. 향년 만 31세.
일본배우가수. 오이타현벳푸 시 출신으로 1968년에 닛카츠 영화사의 '어느 소녀의 고백·순결'로 데뷔하였다. 혈액형은 B형. 참고로 본명은 히카게 조지(日景城児)[1]이다.
1. 소개
2. 연기 스타일
3. 자살
4. 여담
5. 관련 문서


1. 소개


1952년 6월 12일 오이타 현의 벳푸 시에서 출생하였는데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석유 도매업, 할아버지는 병원 원장인 유복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고 오이타 시로 이사한 이후 곳곳을 전전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중3 때 부모님이 이혼하였고 재혼한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무작정(!!) 가출하여 도쿄로 상경하였다. 이후 도쿄에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바텐더로 정착했으나[2] 가족들의 신고로 경찰들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한번 더 가출했다가 돌아와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예전부터 알고 지낸 아버지의 지인이자 영화사 관계자인 '히카게 타다오(日景忠男)'의 눈에 띄어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필살 시리즈'와 '태양을 향해 외쳐라', 혹성 대전쟁 등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나름 잘 생긴 얼굴이긴 하다. 게다가 키도 183cm(!!)인 위너였다.
히카게의 설득으로 아버지와 다시 만나 화해, 종종 셋이서 함께 술자리를 갖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1975년 사망. 그 후 히카게 타다오의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 외쳐라 2편 출연 이후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고 1981년 자살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촬영 현장에 복귀했지만 간부종과 조울증으로 결국 병에 걸려서 죽었다는 설정으로 1982년 하차하게 된다.

2. 연기 스타일


성격은 열혈이지만 가슴 한 구석에 따뜻한 일면을 가진 역할부터 웃음기 전혀 없고 냉정한 다크 히어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들린 연기를 선보인다. 연기력은 50년대생 배우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일 정도로 강렬하고 뛰어난데, 생전에 재능을 눈여겨본 선배들 덕분에 어린 나이임에도 여러 작품에서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당대 신인 배우들의 연기력 및 인지도 향상을 위해 반드시 거치는 시대극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는데, 1973년 필살 시리즈 제2작 필살처벌인에서 관짝의 죠를 연기하면서 나카무라 몬도 역의 후지타 마코토, 염불의 테츠 역의 야마자키 츠토무와 호흡을 맞추며 선배들 사이에서 전혀 기 죽지 않고 오히려 선배들을 압도할 정도로 독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상대의 뒤통수를 쳐 일격필살을 하는 몬도나 테츠와는 정반대로, 정에 약하고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열혈파이지만 점점 성장해 나가는 죠를 연기하면서 당대에 주목받는 신인 시대극 배우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인 제6작 필살 시오키야 가업에서는 죠와는 정반대로 냉철하고 과묵한 죽세공 장인 이치마츠를 연기하면서 시리즈 굴지의 인기 캐릭터 중 하나로 당당하게 부상하였고, 이후에도 필살 시리즈를 포함한 여러 시대극에서 주조역을 두루 연기하며 주 시청자였던 남성 팬들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3. 자살


1983년 6월 28일 유작인 카마타 행진곡을 녹화한 직후에 몇 통의 유서를 남기고 도쿄 신주쿠 '''게이오 플라자'''[3]의 47층 옥상에서 투신자살하였다. 그가 추락한 곳은 128미터 아래의 7층 수영장이었다.
유서의 내용 중 '''"아버지, 열반에서 기다릴게요(おやじ、涅槃でまってる)"'''라는 말은 당시에도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고, 오늘날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 참고로 유서에서 지칭한 아버지는 친부가 아닌[4] 소속사인 닛카츠 사의 사장인 '히카게 타다오'를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문서 상단의 오키 마사야의 본명 "히카게 죠지"를 보면 알겠지만, 오키 마사야는 1975년 히카게 타다오의 양자가 되어 히카게 성씨를 정식으로 물려받았다.
자살 당시의 상황을 간략하게 전하자면 자살 당시 객실에 유서를 남긴 후 옥상에서 경비원이 한눈을 판 사이 옥상 펜스를 넘어갔다고 한다. 경비원이 눈치를 채고 "기다려!"라고 했지만 너무 늦어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한 가지 유명한 사실이 있는데, 추락한 그의 시신 중 다른 부위는 훼손되었어도 유독 그의 얼굴만은 기적적으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는 것.
자살 당시 그에게 별다른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던 점은 당시 일본에서도 많이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의 고층건물의 옥상은 문을 잠가놓게 되었다고.
그런데 그를 발굴해서 키워 주었던 양부이자 사장인 히카게 타다오는 게이 의혹이 있고, 미남 연예인들을 발굴하여 키워 주면서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있다. 오키 마사야 또한 그에게 사육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실제로 그가 가출했을 때 일했던 바는 사실 남성 손님들을 주로 상대하는 곳이었다고도 한다.
다만 마사야는 생전에 여자 연예인들과도 스캔들이 있었고, 죽기 직전에는 호텔에서 매춘부를 불러 서비스를 받았다는 점을 보면 양성애자였거나 이성애자였을 것이다.

4. 여담


  • 엘비스 프레슬리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슬리가 사망했을 당시에는 워낙 살이 찐 상태였고, 그 모습을 본 마사야는 비만을 극심하게 기피하게 되어서 채식 위주로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우울증에 시달릴 때 급격하게 살이 쪘다고...
  • 그의 자살 전날, 네리마 5인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나 마사야의 자살 임팩트가 컸기 때문에 묻혀졌다.
  • 분재를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출생명은 쿠스노기 조지(楠 城児).[2] 후술하겠지만 이 때 바텐더로 일했던 바는 주로 남성고객들을 상대하는 일종의 게이바같은 곳이라는 소문이 있다.[3] 1971년부터 74년까지 일본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이었다.[4] 친부는 1975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