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공근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安恭根'''

[image]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9년 7월 11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color=#fff> '''사망'''
1939년?
사망지 미상
<color=#fff> '''본관'''
순흥 안씨
<color=#fff> '''호'''
신암(信奄)
<color=#fff> '''이명'''
서리로(西利潞)·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color=#fff> '''세례명'''
요한
<color=#fff> '''종교'''
가톨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연해주에서의 행적
2.3. 상하이에서의 행적
2.4. 특무공작단과 독립군 양성
2.5. 김구와의 갈등, 그리고 실종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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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안중근의 친동생이다.

2. 생애



2.1. 초년기


안공근은 1889년 7월 11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진사 안태훈(安泰勳)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미곡상을 경영한 인물로, '안억핍'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노력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셋째 아들 안태훈이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와 연계된 것 때문에 가문이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가산을 정리한 후 해주읍 동문 밖에서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첫째형 안중근과 둘째 형 안정근이 해주읍 동문 밖에서 태어났던 반면, 안공근은 청계동에서 태어났다.
안공근은 9살 때 부친 안태훈의 인도로 모친 조마리아, 둘째형 안정근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세례명으로 요한이 정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천주교 서적과 서양의 문물, 언어, 사상을 체험했다. 부친이 소천한 이듬해인 1906년 봄, 안공근은 일족과 함께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주했다.
안공근은 19살 때 안중근이 가산을 들여 설립한 가톨릭 계통의 삼흥학교(三興學校)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했고, 뒤이어 일어학교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그의 일본어 실력은 여순에서 안중근의 동생 신분으로 참고인 신분을 받을 때 일본인 형사와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눴을 정도로 뛰어난 편이었다. 1907년 3월, 안공근은 작은형 안정근과 함께 한성부로 상경해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기간의 속성과를 마췄다.
이후 1908년 8월부터 진남포의 공립보통학교 부훈도을 지냈다. 그러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발발했다. 안공근은 사건 직후 공범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1909년 11월 7일 이전에 진남포 세관주사 김남규(金南奎) 및 둘째형 안정근과 함께 진남포 경찰서에 구치되었다. 일제는 이들과 안중근과의 사전공모 여부를 캐내기 위해 엄한 취조를 가했다.
그러나 이들은 안중근의 의거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한 달 남짓 지나서 석방되었다. 안공근은 석방 직후 작은형과 함께 큰형을 면회하고자 11월 13일 인천을 거쳐 중국 대련으로 향했다. 이후 일본 순사 3명의 동행 감시 하에 대련을 거쳐 1909년 11월 18일 여순에 도착했다. 여순에서 안중근을 면회한 두 사람은 형수와 조카 돌보기, 옥바라지 등의 일들을 상의한 후 형수와 조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의 포프라니챠나 지방으로 향했다.
이들이 다시 여순으로 돌아왔을 때, 일제는 안중근과의 면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12월 20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미조부치 요시오(溝淵孝雄) 검찰관으로부터 참고인 심문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안중근을 면회한 자리에서 모친 조마리아가 건내준 십자가를 전하고, 신부가 주재하는 종교의식에 따라 영면하기를 권하는 모친의 당부를 전했다.
안정근과 안공근 형제는 형의 공판이 열릴 때까지 옥바라지하면서 경성변호사회에 변호사를 보내달라는 전보를 쳤다. 그러나 일제는 는 전보를 압수하고 한국인 변호사의 변호를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한인 변호사 안병찬이 자원하여 여순으로 달려왔지만, 일제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통하지 않으면 재판에 지장이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안병찬의 변호를 막았다.
두 형제는 자주 안중근을 면회했고, 1910년 2월 7일부터 12일 사이에 열린 5회의 공판에 참석하여 안중근의 공판투쟁을 지켜봤다. 안공근은 공판과정에서 일제 검찰관이 거짓 논고를 하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검사 미조부치가 논고하기를, “피고는 본래 정치사상이 없는 자다. 대한매일신보안창호의 연설로 인하여 정치사상이 있게 되었으며, 이번 일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피고의 자백이 아니고 그 동생에게서 들은 것이다”고 하였다. 안공근이 노하여 따지고 말하기를, “우리가 언제 그런 말을 했기에 우리한테 들었다는 것인가”고 하니, 미조부치가 말이 막혀 외치기를 “이런 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논고한 것이다. 어찌 감히 질문하는가”고 하였다.

안공근이 “이는 강제이지 법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승복할 수 있겠는가”고 하니, 미조부치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안창호가 사주하여 하였다는 말이 아니고 그것은 안창호의 연설로 인하여 정치사상이 있게 되고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고 말한 것뿐이다”고 하였다.

박은식, <안중근> p.306.

안중근은 동생들과의 마지막 면회에서, 조국이 독립하기 전에는 비록 죽어서라도 귀국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며 하얼빈공원 옆에 묻어달라고 하였다. 안중근에 대한 교수형이 집행된 후에 안중근의 동생들은 형의 시신을 귀국시켜 고향에서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일제에게 여러 번 요청했으나 일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들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여순의 공동묘지에서 안중근을 장사지내고 통곡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2.2. 연해주에서의 행적


안공근과 안정근 형제는 고향에서 일제 헌병과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에 다른 곳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망명지를 물색하다가 연해주를 주목했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안중근의 아내와 두 아들이 머물고 있었다. 또한 연해주에 사는 한인들은 안중근추도회를 개최하는 등 안중근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1910년 5월, 두 형제는 평양에서 출국 준비를 했다. 안정근은 북간도를 거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고, 안공근은 원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두 사람의 가족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후 안중근의 주요 활동지이자 단지동맹이 일어난 곳인 크라스키노로 이동했다. 그들은 1910년 가을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과 결의형제를 맺었던 엄인섭의 집과 안중근의 의병 활동을 후원했던 최재형의 집에 머물렀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거기까지 미치자, 두 형제는 가족의 안전한 정착지를 물색했다. 이들이 거주지를 선정하는 데에는 안창호가 도움을 주었다. 안창호는 1910년 8월말부터 1911년 3월까지 연해주와 중국, 러시아 접경지대를 무대로 독립운동 근거지 개척사업을 비롯한 다양한 독립활동을 모색했다. 1911년 2월 7일, 그는 개척사업의 일환으로서 안정근, 장경 등과 함께 밀산현 봉밀산 개척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4월에 안중근의 일족을 데리고 동청철도의 동부선상에 있는 목릉(穆稜)으로 가서 팔도구에 정착하도록 도와줬다.
안중근 일족이 정착한 목릉은 북만주 밀산부에 인접한 곳이며 경작에 용이한 미간지가 넓게 퍼져있는 곳이었다. 또한 목릉에는 서북 출신들이 많이 살면서 항일집단촌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안정근은 연해주에서 안중근, 안공근 가족을 포함하여 20명에 달하는 일족을 거느리고 1912~1913년간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활비를 마련했다. 이때 목릉의 안정근 저택에는 1912년 4월 치타에서 목릉으로 이주한 이갑 부녀를 비롯하여 장도빈, 김성무(金聖武), 박무림(朴茂林) 등이 기숙했으며, 많은 한국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안정근이 가족을 부양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있을 때, 안공근은 유학을 떠났다. 그가 유학을 떠난 것은 안중근의 당부에 따른 것이었다. 안중근은 1909년 음력 4월 3일자 편지에서 안정근에게 법률학을 열심히 공부할 것, 안공근을 다시 고등학교에 들여보내 학업을 계속하게 할 것 등 2가지를 당부했다. 또한 그는 같은 날짜의 편지에서 안공근에게 고등학교에 들어가 학문을 배워 국가의 동량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안공근은 큰형의 가르침에 따라 1912년 6월부터 1913년 가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어 1913년 가을부터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는 고등학문을 배우려 했지만 유학경비 부족과 가족 부양 문제로 인해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고 1914년 4월 니콜리스크로 돌아와 마침 목릉에서 이갑의 가족과 함께 이주한 안정근과 만났다. 안정근이 온 가족을 니콜리스크로 이주시킨 것은 일본군의 가택수색과 감시가 나날이 심해졌고, 니콜리스크에 이갑의 동생이 차린 '우리국수집'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갑의 동생은 안정근에게 생활비를 보조했고, 안정근은 니콜리스크에서 자본금 4천원을 가지고 국내에서 연해주로 건너온 인사들과 함께 상점을 개설하였다. 그는 상점을 잘 운영하여 니콜리스크 한인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기관으로 양성함과 동시에 이전에 실패했던 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을 복구할 계획을 품었다. 안공근은 형이 개설한 상점에서 일하면서 안정근의 독립운동 방침을 도왔다.
1914년 8월 20일 재블라디보스토크시 일본 황실 총영사 외무부는 연해주 군총독에게 비밀 문건을 보냈다. 그 내용은 "조국의 독립을 꿈꾸는 반일적 성향의 무리들"을 연해주에서 축출하라는 요청이었다. 거기에는 21명의 축출자 명단이 들어있었는데, 이종호, 이동휘, 이동녕, 윤해, 정재관, 계봉우, 오주혁, 이범윤, 이갑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안정근과 안공근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4년 8월 22일 연해주 행정청에서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경시총감에게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의 공문에 따라 안정근, 안공근, 이강 등의 직업, 품성, 가족사항, 사회적 지위 등 상세 정보를 조사하여 통보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지역의 경찰서장은 9월 21일에 답신을 보냈다.

1) 안정근: 1912년 러시아 국적 취득, 보리소프스카야읍 농민조합 소속, 니콜리스크시 거주, 상업, 처와 3자녀 부양.

2) 안공근: 26세, 처와 두 자녀 부양, 니콜리스크시 거주, 1914년 6월부터 친형인 안정근의 상업을 돕고 있음.

상기 한인들은 범죄사실이 없으며 별다른 특징이 발견되지 않고 있음.

두 형제는 이러한 감시를 받게 되자 1914년 9월 일제 밀정 김정국(金鼎國)을 처단했다. 사건이 발각되어 고태규(高泰奎) 외 2명이 체포되자 추격을 피해 러시아 영내로 도주했고, 도중에 김성백, 조도선, 진학신 등과 왕래하며 차후의 항일운동을 준비했다. 이후 안정근은 1915년 8월 니콜리스크 병사관에 출두하여 국민병으로 종군을 자원하여 하바로프스크 병영에 들어갔고, 안공근은 러시아 당국에 귀화를 요청했다.
1918년 6월 13일, 니콜리스크 소재 고려족중앙총회 사무소에서 연해주와 오소리주에 사는 500명의 한인들이 모여 비밀회합을 개최했다.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로 알려진 이 비밀회합에 참석한 이들 중엔 안공근도 있었다. 이 회합에서는 15개조의 비밀결의가 채택되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1. 고려족은 타국에 귀화하더라도 결속을 강화하여 일본에 반대하는 고려민국을 재건한다.

2. 노령 각지에 있는 조선인 민회는 고려족중앙총회와 일치된 행동을 유지하며 중국 각지에 있는 조선인회와 연대한다.

3. 고려족 단독으로 폭동을 일으키지 말고 타국의 후원에 따라 행한다.

4. 흑룡강성 오운현에 새로운 이주지를 개척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교양을 증진해야 한다.

1919년, 안정근은 기후와 풍토가 벼농사에 적합지 않다고 알려진 니콜리스크에서 처음으로 벼농사에 성공하였다. 안정근은 200석 가량의 백미를 수확하여 예상 밖의 호성적을 거두었다. 그러자 인근의 러시아인들과 학생들이 안정근 형제의 농장을 견학하였고, 일제측도 벼농사의 성공을 예의 주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간한 <독립신문> 1920년 1월 17일자 기사에서, 안정근과 안공근이 이미 국유지를 조차하기 위해 러시아 국적을 활용하여 러시아 관헌과 교섭을 벌였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두 사람은 니콜리스크에서 대규모 미곡농장을 경영하여 미곡을 수출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농장경영은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정근은 동생 안공근에게 미곡농장 개척사업을 맡기고 상하이로 향했다. 안공근은 개척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비밀결사 활동에도 가담했다. 1919년 7월 중순에 맹정국(孟正國), 방두원(方斗圓), 서모(徐某) 등 3인은 훈춘지방에서 독립 의군의 재정부장으로서 노령의 오지로 들어갔다. 이들은 채극평(蔡克平)을 고문으로 삼고 지방부락에 의연금의 헌납을 강요했으며, 재력이 없는 이들을 억지로 결사대로 편입시켰다.
이때 안공근은 오주혁, 김동한(金東漢), 박인연(朴仁黙) 등과 함께 연해주의 추풍(秋風)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왕청과 훈춘의 경계에 있는 천여산 속에 숨겨놓았다. 이들 무기는 간도와 안도현에 거주하는 동지들과 연락하여 항일운동을 펼칠 때에 사용하려던 것이었다. 그가 연락하려는 독립군은 이동휘가 총사령이며, 각기 200명으로 구성된 홍범도군ㆍ황병길군ㆍ김의군군ㆍ원미하일군이 있으며, 그중 60명을 결사대원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2.3. 상하이에서의 행적


1920년 1월, 안공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러시아 외교특사로 선정되었고 5월에 상하이로 향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극심한 자금부족 문제를 러시아의 재정지원을 통해 해결하고자 대러교섭의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외교를 맡고 있던 안창호는 1920년 1월 15일 안정근의 방문을 받고 외교특사 파견문제를 협의하다 안공근을 특사로 정했다. 이는 유학 경력을 지닌 안공근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모스크바의 사정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국무원은 1월 22일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 등 3인을 모스크바에 파견할 특사로 결정했다.
이날 안창호는 안정근에게 안공근을 속히 불러와 출발시키자고 했으나, 안공근은 가사를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오느라 5월 3일 직전에야 상해에 당도했다. 당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안창호가 선정한 여운형과 안공근을 꺼려하여 자신의 측근인 한형권만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 상하이에 온 그는 안중근을 '형님'으로 모시며 적극 따르던 안정근과는 달리 안창호와 거리를 뒀다. 안창호가 흥사단 가입을 권유하자, 그는 "자기 심에 실로 적절히 생각하나 실행에 대하여 난(難)한 것을 각(覺)하노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또한 그는 5월 23일 안창호에게 "총리가 여러 가지 음모하는 것이 심히 의심스럽다."고 했는데, 이는 이동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이동휘가 자신의 심복 한형권이 소련과의 협상 끝에 받아낸 자금을 공산당에 유용했다는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 휘말리다 사임한 뒤 1921년 4월 29일 외무차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7월 임시정부 최초의 러시아 대사가 되었다. 그는 7월 29일 이희경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9월에 독일 주재 러시아 대표부가 있는 베를린에 일시 정착했다가 1922년 초에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안공근은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 운동 후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한 뒤, 소비에트 정부의 이동휘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것임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로부터 별다른 회답을 받지 못하자 다시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는 1923년 이전에 상하이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안창호가 개설한 베이징 인근의 해전농장으로 이주한 안정근은 1925년 뇌병으로 대외 활동이 매우 힘들어졌다. 이에 안공근은 형을 대신해 조마리아와 형 및 자신의 자녀들을 부양했다. 그는 수년간 상해 구미공사관에서 통역과 정탐원 생활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제 정보 기록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통해서 상해의 미국 혹은 영국 공사관에 통역으로 고용되었다. 그후 러시아 영사관으로 옮겼다가 러시아영사관이 인양되자 독일영사관에 출입하면서 일면으로 러시아의 밀정이 되어 재상해 白系러시아인의 조사ㆍ보고를 하였다."

1925년 7월, 프랑스조계 공무국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안공근은 김구, 이시영, 노백린, 김규식, 김원봉[1], 여운형, 이유필과 함께 중요한 한국인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1925년 11월 당파와 애증이 없는 전민족적 통일을 주장한 박은식의 유언을 필기했다. 그리고 1926년 2월 여운형에 이어 상해교민단 단장에 취임하여 교민사회의 통합에 힘썼다.
1926년 5월경 안공근은 독립운동촉성회를 조직하여 ‘전민족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자들의 통합운동이 일어날 때 조상섭(趙尙燮), 최창식(崔昌植), 이유필(李裕弼)ㆍ오영선 등은 안공근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독립운동촉성회는 “한국 민족해방을 촉성하기 위해 철저한 독립운동자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기성하려고 노력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이 단체는 조직적 대단결의 달성방안을 토의하기 위해 장래 대표대회의 개최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한국독립운동촉진회 명의의 5월 12일자 선언서를 인쇄하여 남만주지방과 조선 내외의 일반에게 배포했다, 그러나 내부의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대표대회를 개최하지도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1926년 7월, 안창호가 유일당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은 안창호의 주장을 임정의 시정방침으로 채택했고, 상하이와 베이징의 여러 세력이 유일당운동을 지지했다. 이때 안공근은 <공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일당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의 모든 정당을 통합하여 일본에 대항할 혁명가들을 양성할 것을 결의했으며, 아시아의 소수 민족들이 힘을 합하여 외국 열강에 대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구체적인 조직기반은 중국내에 구축하기로 하였는데, 그것은 유사시에 중국이 한국인들에게 원조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해의 임시정부는 한국 혁명의 원천일 뿐이다.

우리는 고국에 공식적인 우리의 정부를 세우기를 염원한다. 한국 본국과 만주에는 수많은 한국인 정당들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아직 완비된 조직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우리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혁명사업을 준비하기 위하여 하나의 책임 있는 정당을 수립하고자 한다.

1927년 4월 상해에서는 좌파세력들의 동조에 힘입어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안공근은 홍진, 이동녕, 조완구, 김구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와해와 코민테른의 12월테제로 인한 국제정세가 순조롭지 못했고, 좌우세력의 합작 동기와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유일당운동은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좌파세력들이 상해촉성회의 해체를 선언하고 좌파의 결집체를 별도로 설립함으로써 유일당운동은 결렬되었다.
한편, 안공근은 1920년대 중반부터 한인 아나키스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925년 초경에 불란서 조계 하비로에 약방을 차려보려고 3층 양옥을 세집으로 얻었으나 약방 개업을 준비하지 못하고 빈집으로 놔뒀다. 그러다 4월경에 아나키스트 정화암의 부탁을 받고 아이스크림가게로 쓰도록 내주었다. 아이스크림 장사는 연이은 호우로 실패하고 말았지만, 두 사람은 이때부터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1928년 3월, 안공근은 상하이에서 유기석, 윤호연(尹浩然), 이을규(李乙奎)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또한 1926년 이후 어느 시점에 조카 안원생 및 청년들과 함께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했다. 팔인단은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로서, 안공근 자신이 책임자가 되었다.
유일당 운동이 실패한 후, 안공근은 1930년 1월 25일 민족주의 세력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이동녕, 안창호, 김두봉, 이유필, 조소앙 등과 함꼐 "당의와 당규를 기초하고 그것을 가결하는" 7인의 기초위원에 선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설립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원수 일본의 모든 침략세력을 박멸하고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하여 안으로 국민 각자의 균등생활을 보장하고 밖으로 민족과 국가의 평등을 실현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정강을 표방했다.

1. 대중에 대해 혁명의식을 환기하고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일.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일.

3. 세계 피압박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일.

4. 보통선거제를 실시하고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히 하여 기본 권리를 보장할 일.

이무렵, 안공근은 안창호계와 입장을 달리 햇다. 1926년 5월 임시의정원이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안공근은 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과 함께 반대했다. 또한 임시의정원의 집정 최창식(崔昌植)에 의해 국무령으로 추대된 홍진이 내각을 구성했을 때, 안공근은 오영선,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입각을 반대하여 결국 안창호가 내각 구성을 도왔다. 이렇듯 안공근은 안창호의 서북파를 멀리하고 이동녕, 김구를 비롯한 기호파와 활동을 같이 해, 기포하 내지 중간파로 분류되었다.
그가 이러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안창호의 점진적 실력양성주의에 불신을 품고 김구 등의 무력적 파괴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안공근이 외교주의나 실력양성주의보다는 무력적 파괴주의를 지지한 것은 20대 중후반의 일제밀정 처단사건과 결사대원 양성사업, 30대중반 무정부주의자들과의 연대경험, 그리고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계를 위해 일대 쇄신이 필요하다는 시대분위기 등이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4. 특무공작단과 독립군 양성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동녕 등은 의열단의 고문을 지낸 적이 있는 재무장 겸 민단장 김구에게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운영을 일임하고, 한인애국단의 모든 업무를 선결하여 처리하고 사후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31년 11월경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올랐다. 이때 안공근은 단원으로서 가담했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비밀결사단체였으나 실제로는 김구의 사조직처럼 운영되었다. 김구는 한인애국단의 운영을 안공근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안공근은 참모(나중에 부단장)라는 직책을 가지고 단원의 모집과 관리, 통신연락, 정보수집, 특무활동 등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하였다. 신입단원에게 한인애국단의 취지를 설명하는 일은 안공근이 맡았으며, 신입단원은 안공근의 앞에서 김구를 비롯한 여러 선생들의 지휘명령에 절대복종하며 목적 달성을 위해 활동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이었고, 따라서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은 안공근의 집에서 이뤄졌다.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의 선서식이 안공근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또 단원들의 통신 연락처도 안공근의 집이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안공근의 차남 안악생(安樂生)이 안공근의 집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또한 안공근은 러시아인을 통해 일본 측의 정보를 입수했으며, 한인 청년 위혜림과 김성근을 포섭해 일본영사관의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그가 위혜림을 시켜 조사한 비행의 내용을 친구 정화암에게 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상해의 독립운동가 중의 일부 요인에 대한 일본영사관측의 암살지령 내용, 이간과 중상모략의 내용, 그리고 일본영사관으로부터 그들이 받은 자금내역 등에 이르는 상세한 기록까지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2]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수색이 극심해지자, 김구는 일단 상하이 외인기독교청년회 주사인 S.A. 피치의 집으로 피신하기로 했다. 이때 그는 안공근, 엄항섭을 불러 "이후로 군 등의 집안 생활을 내가 책임질 터이니 오로지 우리 사업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이는 자신의 권한을 상당 부분 두 사람에게 양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안공근은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처를 옮길 때에 김구를 동행하였고, 가흥과 상하이를 오가며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운영을 총괄하였다.
안공근은 윤봉길 의거 이후에도 대중국 교섭과 친일파처단 활동에 열중하였다. 윤봉길 의거를 한중 양국민의 시름을 씻어준 쾌거로 간주한 중국의 관민과 군부는 1932년 5월경부터 10월까지 김구와 여러 한국 독립운동가에게 상당한 자금을 희사하였다. 안공근은 국민당정부의 지원금 가운데 60% 이상을 직접 받아서 김구에게 전달했다. 또한 1933년 8월 아나키스트들을 시켜 제약회사를 경영하며 일제 관헌과 내통한 것으로 알려진 안창호 지지자 옥관빈(玉觀彬)을 암살하게 했다.(옥관빈 피살사건)
1933년 1월 개최된 한국독립당 대표대회에서 이직과 태만을 이유로 김구, 안공근, 엄항섭, 박찬익 등이 이사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김구는 한국독립당과 임정과 관련없이 독자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측근들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조직과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 안공근은 엄상섭, 박찬익과 함께 외교와 정보 방면에서 김구를 보좌했다. 아울러 1933년 봄 김구가 장제스를 면담하러 난징에 갈 때 엄항섭과 함께 김구를 모셨다.
안공근은 1934년 이후 김구가 설립한 특무교육기관의 실질적인 책임과 운영을 맡았다. 그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을 거느렸다. 한인특설반은 김구가 장개석의 협조와 지원을 받아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1934년 2월에 설립한 학교였다. 한인특별반은 김구 계열이 운영자금을 장악하고 지청천계가 교육훈련을 담당하는 이원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김구가 고문 자격으로 총괄했지만, 입교생들의 모집부터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무는 '학생보호계'를 담당한 안공근이 맡았다. 또한 안공근은 1934년 6월부터 중국 측과의 교섭 업무를 담당했다. 그 전에 이 역할을 맡았던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구와 불화를 빛다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김구와 인연을 끊었다. 이에 김구는 중국의 지원담당 실행위원인 샤오정(蕭錚)에게 편지를 보내 안공근을 소개하며 교섭위원의 교체 사실을 통보했다.
한인특별반에서 김구계와 지청천계 간의 주도권 다툼이 심해지자, 김구는 1934년 8월 자신 휘하의 입교생들을 철수시킨 뒤 난징 안의 목수영 고안리 1호에 한국특무대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고 대장을 맡아 80여 명의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실시했다. ‘김구특무대’라고 불린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군사적 무장수련을 목적으로 하고, 배신자나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제국주의와 그 정책을 파괴할 것을 설립목적으로 삼았다. 안공근은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참모로서 학생들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일을 주관했다.
그는 학생들의 입회심사, 일상생활, 편의제공, 지시 하달, 혁명 학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김구를 대신하여 주관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육할 때 특무활동의 필요성과 의의를 논급하는 강연을 하였다. 또한 한국특무대독립군 외에도 김구의 또 다른 사조직인 학생훈련소를 운영하였다. 학생훈련소는 1935년 2월 안공근의 건의에 의해 난징 내 동관두(東關頭) 23호에 설치되었다. 학생훈련소는 이후 각 지방에서 모집한 약 30명의 한인 청년들에게 중국어, 기하, 대수 등 예비교육 외 혁명정신에 대한 교양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그해 6월 일본 관헌에게 본부가 발각되자, 장쑤성 선흥현 용지산으로 옮기고 엄항섭이 관장했다. 10월에 훈련생 정성언(鄭成彦) 등 2명이 체포되어 실체가 노출되자, 일본 측은 중국 측에 한인의 군관학교 입교를 거부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로 말미암아 학생훈련소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폐쇄되었다.
김구는 193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이용하여 한국국민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임시정부를 옹호할 것을 천명하였다. 김구는 좌익계의 민족혁명당에 불참한 임시정부 내 구세력과 한인애국단 소속의 측근들을 망라하여 한국국민당을 결성했다. 안공근은 김구의 후광을 등에 업고 한국국민당 이사,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안공근은 1936년 이후에도 임정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특무조직을 관리하고 운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국민당은 그 전위조직으로서 한국국민당청년단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거느렸다. 한국국민당천년단은 1936년 7월 기존의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해산된 학생훈련소를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고, 전위단은 광동지역에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김구의 아들 김인(金仁)과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安偶生)을 파견하여 조직한 것이다. 안공근은 이러한 전위조직들을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한국국민당의 세력기반을 확장했다.
1937년 8월, 안공근은 한국애국단 대표 자격으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한국국민회 등 5개 단체, 중국내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등 8개 단체와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의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또 같은 달 17일에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하와이 및 미국 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여 1938년까지 활동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는 본부를 창사에 두고 안공근ㆍ안경근을 홍콩에 파견하여 잠복책동 중인 김인, 안우생 등으로 하여금 동지규합에 힘쓰도록 하고, 항일 선전자료와 기타 정보 수집에 애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연합회내에 노인이 많고 청년층의 활동분자가 극히 소수이기 때문에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2.5. 김구와의 갈등, 그리고 실종


안공근이 특무단 사업에 열성을 기울이던 1936년 1월 초순, 특무부대의 중견단원 김동우(金東宇), 오관식(吳冕植)ㆍ노종균ㆍ송효춘(宋曉春)ㆍ양여주(楊汝舟) 등 7~8명이 "김구의 독재전제적 행동과 안공근의 전횡불륜 행위에 분개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무부대를 이탈하여 상하이에서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했다.
이로 인해 김구의 특무부대가 와해될 지경에 처하자, 김구는 새로이 청년들을 모집해 약 20명을 모으고 엄항섭을 지휘자로 삼아 혁명교육을 실시하게 했다. 이는 안공근이 특무단의 운영권을 엄항섭에게 넘겼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공근이 떠난 이후 한국국민당의 특무공작은 침체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국국민당의 독립활동도 이전만 못하였다.
안공근의 '전횡불륜(專橫不倫)'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 시기에 그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안공근은 훙커우 공원 의거 이전에 위혜림과 함께 대공원 근처에 도박장을 설립하자는 광동 사람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 또, 정정화는 자신의 일대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안공근이 상하이에 있을 때에 형 안중근의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공금을 챙겨 홍콩으로 잠시 몸을 피한 일이 있었다. 재주가 많고 말을 잘하는 이라서 여기저기에 허튼 소리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임정 어른들께 야단을 맞게 생겼으니까 홍콩으로 도망갔던 것이다. (중략) 백범은 나중에 돌아온 그에게 "이제 사람이 돼라. 지금 이 자리서 결심을 해라. 그 대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이 담배를 끊겠다. 너 사람이 될때까지."라고 말했다.

정정화, <녹두꽃>, p.77

특무단원으로서 안공근에게 신임받았으나 신병이 생긴 뒤 소외되어서 서운한 마음을 품었던 백찬기(白贊基)는 나중에 일제 관헌에게 체포된 뒤 취조받을 때 다음과 같이 공술했다.

안공근은 항상 주거지를 숨기고 있는데, 어디인지 중국사람 집에 있는 것 같았다. 김구파 제1의 실력가이고, 가장 인기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김구의 참모이자 또한 김구의 대리로서 일체를 처리하여 김구파의 혁명운동은 모두 이 안공근의 의도에서 나온다고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남경정부에서 김구파가 받는 대양전 2,500원도 김구와 안공근 사이에서 적당히 안배하여 처분되고 있는 모양이다. 출입할 때는 언제나 인력거를 쓰는데 그 싼 곳에서도 한 달에 인력거 비용만 40원이 된다는 소문으로 그들의 생활이 호화로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구파의 간부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병으로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는 의료원으로 가라고 여비 정도만 주어 쫓아버리는 식이니 자연스럽게 부하의 신망도 엷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의열단과는 정반대이며 의열단은 운동을 위해서는 상당히 돈을 쓴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김구파는 의열단에게 그 세력이란 점에서 멀리 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 이 안공근은 상해의 프랑스조계 이하는 모르고, 가족을 맡겨놓고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다.

이렇듯 구설수가 많았던 안공근이었지만, 김구는 그를 굳게 신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37년 10월 이후 심한 갈등을 빛었다. 백범일지에는 그 까닭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1937년 10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오자 안공근이 자신의 가족을 제쳐두고 김구의 모친 곽낙원 만을 모시고 난징으로 이동했다. 김구는 안공근에게 상하이로 돌아가 그의 가솔과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를 모셔오도록 거듭 당부했지만, 안공근은 자기 가솔만을 데리고 나왔다. 이에 김구는 크게 꾸짖었다고 한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부터 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하여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안군 가문의 도덕에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군의 가족도 단체생활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본의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안공근이 자기 식구만 충칭으로 이주케 하고 단체 편입을 원하지 않았기에 본인의 뜻에 맡겼다고 한다. 큰형의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면 온갖 비난이 쏟아질 것임은 누구보다도 안공근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큰형의 가족을 피신시키지 못한 것은, 이미 일제의 수중에 떨어진 상하이의 현지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명분과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는 김구는 그러한 불리한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고 원칙론에 입각하여 안공근의 부도덕성만을 일방적으로 꾸짖는 말을 자신의 회고록인 백범일지에 남겼다.
1939년 5월 30일, 안공근은 충칭에서 홀연히 실종되었다. 1920년대부터 안공근과 친밀하게 교류했지만, 이무렵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던 아나키스트 정화암은 안공근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안공근은 운동자금 명목으로 중국정부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 자기 마음대로 지출을 해오면서 낭비가 많았다. 한번은 김구가 안공근에게 어떤 용도가 있어 5원의 지출을 요구했다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을 당했다. 어디에 돈을 썼냐고 물으니 화암과 위혜림에게 주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김구가 의심을 품고 자기의 큰아들 김인(金仁) 및 김종수(金鍾秀), 나월환, 김원룡(金元龍), 이해평(李海平)을 나에게 보내 왔다. 나는 이들에게 안공근을 만난 일도 없고 위혜림을 통해서 접촉한 일도 없다고 말해 주었다. 이들은 위혜림에게 가서 다시 이 사실을 확인했다.

김구는 비로소 나와 안공근이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상황이 바뀌어 가자 안공근은 안공근대로 딴 공작을 하기 시작했다. 국민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다이리이란 사람과 손을 잡고 자신의 형인 안정근을 내세우려고 계략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 내막까지 알게 된 김구는 즉시 안공근을 축출하고 그동안 안공근이 맡았던 중국 정부와의 모든 연락과 교섭 업무 일체를 성암 이광에게 맡겼다. 그리고 안공근을 중심으로 했던 모든 활동을 봉쇄하고 정보 업무에 필요한 공작기계(전신기계)와 그가 쓰던 집까지 몰수해 버렸다. 그후 안공근은 충칭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교포 유모의 집에 자주 내왕했는데, 그 뒤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ㅔ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p.180~181.

정화암의 회고를 요약하자면, 안공근은 자금 사용 문제로 김구와 사이가 벌어지자 김구를 축출하고 자신의 형을 추대하려고 했다가 발각당하는 바람에 김구로부터 모든 행동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안중근 가문의 여러 인사들과 어린 시절 상하이에서 친하게 지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은 유진동의 부인 강영파가 자신의 모친 정정화에게 "한인 청년들이 안공근의 시신을 유진동의 병원으로 들고 왔다."고 말한 것을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김구의 측근 모 독립운동가가 안공근을 암살했다[3]는 말이 전하고 있다. 출처의 오영섭은 안중근의사기념관 연구위원장이다. #
반면 일제 밀정이 안공근을 암살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안공근은 국제간첩인 중국인 나검북(羅劍北)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왕빙이(王炳毅) 교수가 <문사춘추(文史春秋)>에 게재한 논문 '한국 항일 의사 안공근 충칭 실종 사건 내막'에 따르면,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안공근이 홍콩에서 일제 밀정을 추적하고 있을 때, 그는 상하이 시절부터 항일운동가로 알고 있던 나검북이 일제 밀정과 접선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검북은 북경대를 마치고 영국에 유학하여 정치, 법률을 공부했고, 1929년에는 장학량 휘하의 정보처장을 지내며 일본군의 정보를 빼내는 공훈을 세웠다. 그는 상하이에서 <동방관찰가>라는 항일잡지를 발간하다가 자금난에 처하여 영국군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이후 영국 국적을 취득하고 영국스파이가 되었다. 안공근은 친하게 지냈던 그의 실체를 목격한 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판단하여 은밀히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나검북은 그를 알아봤다.
이후 홍콩을 떠나 충칭에 도착한 안공근은 상하이 시절부터 협력하던 사이였던 중통(中統)국장 주자화에게 전화를 걸어 이틀 후에 홍콩에서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실종 당일에 안정생(安靜生)에게 한국인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후 저녁에 가족과 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말하고 권총을 소지한 채 집을 나섰다.
이날 그는 조웅(趙雄), 이합성(李合盛) 등과 식사를 같이 했는데, 조웅은 난징에서 안공근 가족과 친하게 지낸 인물로서, 영화제작소 감독실에서 비밀공작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안공근은 나검북이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충칭으로 잠입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검북은 안공근과 친한 조웅과 결탁한 뒤 안공근을 살해하고 시체를 폐광의 경내에 버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밝혀낸 국민정부는 나검북이 영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서 처형하지 못하고, 대신 조웅 등 3인만 처형했다.
이렇듯 안공근이 김구 파벌에게 암살당했다는 설과 일제의 밀정에게 암살당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지만, 두 설 중 어느 쪽이 사실에 부합한지는 현재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는 안공근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위부장 김영신(金永信)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충칭 시장 양삼화(楊森和)와 경비사령 류즈(劉峙)에게 전화를 걸어 안공근 실종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안공근의 장녀 안정생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에게 서한을 보내 부친을 반드시 찾아서 돌려보낼 것, 찾지 못한다면 시신만이라도 거두어 줄 것, 자신과 형제들의 생활을 도와줄 것 등 3가지를 간청하였다. 이에 쑹메이링은 군통국장 다이리와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주자화에게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안공근의 행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안공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대중매체에서


  •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선 배우 장훈이 연기했다.
  • 1979년작 KBS-TV 8.15 특집극 <대한국인>에선 배우 송보영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송석호가 연기했다.
  • 1995년작 KBS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임대호가 연기했다.
  • 1996년작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선 배우 김명진이 연기했다.

[1] 호인 약산(若山)을 딴 '김약산'으로 기록되었다.[2]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p.145.[3]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3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