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로프 팔메 총리 암살사건

 



1. 개요
2. 올로프 팔메는 누구인가?
3. 총리 암살
3.1. 암살 배후 1: 미국
3.2. 암살 배후 2: 소련
3.3. 암살 배후 3: 스웨덴 내 극우파
3.4. 암살 배후 4: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 기관
3.5. 용의자 크리스터 페테르손
3.6. 허위 자백들
3.7. 장기 미제로
4. 살인 공소시효가 폐지되다
5. 재수사와 수사 종결
6. 참고


1. 개요


'''스웨덴 역사상 최대의 미제 사건.''' 1986년 2월 28일, 당시 스웨덴의 총리였던 올로프 팔메(Olof Palme, 1927-1986)가 스톡홀름 시내 극장에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본 후 지하철로 가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이다.
당시 스웨덴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현직 총리가 암살당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체포하는데 실패했으며, 현재까지 38년째 범인을 체포하지 못해 장기 미제 사건이 되었다.

2. 올로프 팔메는 누구인가?


1927년 1월 3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속한 팔메 가문은 한때 발렌베리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명문가이며, 그가 태어난 집도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현재 루마니아 대사관저로 쓰이고 있다.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던 도중 미국의 사회적 부조리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사민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종래에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던 연금을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개선했고 고등교육 기회를 강화하는 등, 기존의 복지제도를 더욱 평등하게 개혁했다.
1969년 처음으로 총리에 취임한 뒤 대외적으로는 스웨덴의 중립 노선을 강화하고 대내적으로는 여성과 장애인의 인권을 개선하는 정책을 펼쳤다. 대표적인 예로 선천적 정신, 지적장애인 대상 불임수술을 폐지했다. 1976년 세금에 대한 여론 압력에 밀려 총리를 잠시 사임했으나, 1982년 재선되어 제3세계 지원과 전쟁으로 사이가 나빠진 이란이라크 사이를 중재하려 했고, 남아공아파르트헤이트를 성토하는 등 인권과 평화주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열성적으로 스웨덴을 이끌어가던 그는 1986년 2월 28일, 향년 만 59세에 갑작스럽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출처)

3. 총리 암살


1986년 2월 28일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올로프 팔메 총리는 그의 아내 리스베트 팔메와 함께 스톡홀름 시내에 위치한 그랜드 시네마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1]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 역으로 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와 권총을 꺼내 총리 내외를 향해 여러 발을 난사했다. 리스베트 팔메는 총상을 입었지만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총리는 등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현장에 있었던 두 소녀가 총리 내외에게 달려간 사이 인근을 지나던 택시기사가 구급차를 불렀다. 행인들이 모두 총리 부부에게 다가간 사이, 범인은 어둠을 틈 타 유유히 현장에서 달아나버렸다. '''불행하게도 이 날 총리 내외의 곁에는 경호원이 없었다!''' 경호원 없이 부부 단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가 이런 변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애초에 팔메 총리는 격식을 차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경호원 없이 다니는 걸 즐겼다고 한다. 올로프 팔메 총리는 긴급하게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3월 1일 자정에 사망하고 말았다. 향년이 불과 59세였다.
시내 한복판에서 총리가 권총에 피격당해 암살당하자 스웨덴 사회는 일제히 충격에 빠졌고 곧바로 총리 암살범을 찾는 데 집중했다. 팔메 총리는 화끈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인해 친구도 많았지만 적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총리 암살범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팔메 총리 암살 배후로 지목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3.1. 암살 배후 1: 미국


처음으로 올로프 팔메 총리의 암살 배후 세력으로 지목된 건 미국이었다. 팔메가 스웨덴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던 시절에 베트남 전쟁이 터지자 팔메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팔메의 비판은 미군이 1972년 연말 북베트남의 하노이를 폭격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한 크리스마스 폭격 당시 절정에 달했는데 미국의 크리스마스 폭격 직후 팔메는 연설에서 게르니카 폭격,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바비야르 학살, 카틴 학살, 리디체 학살, 샤프빌 학살[2]을 거론한 뒤 "이제 이 학살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겠군요: '하노이, 1972년 크리스마스'"라며 미국의 폭격을 대차게 깠다. 당시의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이 연설을 듣고는 '공산권인 소련중국도 이 폭격에 대해 미국에 욕을 퍼붓긴 했지만 올로프 팔메는 그 소련이나 중국보다도 더하다'라고 할 정도(...). 그 때문에 미국과 스웨덴의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고, 미국이 스웨덴 대사를 철수시켰을 정도였다.
또한 총리가 된 이후에도 그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나는 미국 유학 시절에 미국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고 강조해 왔고, 1970~80년대 미국이 냉전 체제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중남미와 아시아 등지에서 쿠데타로 극우 성향의 군부 독재 정권이 수립되는 것을 지원하고 수많은 인권 탄압과 정적 제거,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는 것을 방관한 것 역시 강하게 비판했다.[3] 이 때문에 미국에서 CIA 요원을 스웨덴에 파견해 올로프 팔메 총리를 암살하도록 시킨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다.

3.2. 암살 배후 2: 소련


올로프 팔메는 모든 유럽 국가의 핵무기 보유 금지를 주장했던 반핵주의자였다. 그는 평소 유럽이 비핵화를 하지 못한 원인을 소련이라고 생각했다. 즉,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니 소련과 국경을 맞닿은 유럽 강대국인 영국프랑스도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덩달아 핵무장을 하면서 유럽이 비핵화를 하지 못하게 됐다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비핵화를 위해 핵무장을 한 소련을 강도 높게 비난해 왔던 것이다.
팔메는 1986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비핵화 회담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그 회담이 열리기 불과 1개월 전에 암살을 당했다. 이 때문에 소련에서 KGB 요원을 스웨덴에 보내 팔메 총리를 암살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3.3. 암살 배후 3: 스웨덴 내 극우파


올로프 팔메 총리는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한 사람으로 부의 재분배를 위해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스웨덴복지국가의 대명사가 된 것은 모두 올로프 팔메 총리의 덕이었다. 그러나 올로프의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는데, 바로 스웨덴 내 대기업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극우 세력들이었다. 복지 확대를 강조하는 총리였기에 이들은 평소 올로프를 공산주의자로 비난했고 스웨덴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고 있다고 깎아내렸다.
또 올로프 총리가 평소 강대국 위주의 세계질서에 반감을 표하고 아프리카팔레스타인에 정치적, 재정적 도움을 주면서 제 3세계를 대변했던 행적 때문에, 친미 성향을 가진 스웨덴 내 극우파들의 반감을 샀다. 당시 스웨덴은 미국과의 관계가 매우 악화된 상태였는데 극우파들은 이 상태의 원인이 모두 팔메 총리에게 있다고 보았고 스웨덴 내 대기업들도 복지 확대를 위해 납부해야 할 세금이 늘어나자 올로프 총리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이 둘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스웨덴 내 대기업에서 극우단체들을 고용해 팔메 총리를 암살한 것이란 주장이 있다.

3.4. 암살 배후 4: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 기관


마지막으로 거론된 올로프 총리의 암살 배후는 바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보 기관이었다.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백인 정권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세계 최악의 인종차별 정책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팔메 총리는 이런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매우 강도 높게 비난하였는데, 아파르트헤이트를 '섬뜩한 정책'이라는 감정적인 표현까지 썼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권에서는 팔메 총리를 매우 혐오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보 기관에서 올로프 팔메 총리를 암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다.

3.5. 용의자 크리스터 페테르손


한편, 경찰의 조사 결과 올로프 총리를 암살하는 데 쓰인 권총은 1983년 모카피아르트 우체국 강도 사건의 총탄 성분과 일치하는 스미스 웨슨제 권총으로 밝혀졌다.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1988년, 리스베트 팔메는 팔메 총리의 암살범으로 한 남성을 지목했는데 그는 알코올 중독자이자 마약 중독자였던 크리스터 페테르손(Christer Pettersson)이란 사람이었다.
하지만 페테르손이 암살범이란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물증이 나오지 않았고[4] 정신병으로 약물을 복용하고 있었으며 마땅한 살해 동기가 없는 점, 총리 부인의 기억이 객관적 증거로 채택하기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만약 페테르손이 진범이 맞다면 범행 동기는 마약으로 인한 우발적 충동[5]이거나 정신병으로 인한 망상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들의 망상은 정부와 관련된 경우가 많으며, 정신병자들이 정치 이념과 무관하게 국가 원수나 연예인 등 유명인을 암살하려 한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존 레논 암살 사건과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이 이런 경우다.

3.6. 허위 자백들


이후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이 올로프 팔메 총리를 암살한 암살범이라고 '자백'해왔으나, 사실은 그저 영웅심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밝혀졌다. 이 영웅심리 때문에 허위 자백을 한 자들 중에는 터키쿠르드족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3.7. 장기 미제로


결국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스웨덴 수사당국은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다. 그러던 2004년, 팔메 총리 암살범으로 지목되었던 크리스터 페테르손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런데 크리스터 페테르손의 친구이자 저널리스트인 게르트 필킹이 페테르손이 자신이 살인범이라고 자백했다고 발표한다.
게르트 필킹의 발표로 크리스터 페테르손이 올로프 총리의 진짜 암살범인지에 대한 논란이 새롭게 일었고, 2006년 올로프 암살 사건의 유력한 단서가 발견된다. 익명의 제보를 받은 수사 당국은 스웨덴의 한 호수에서 낡은 권총 1자루를 발견하는데, 그 권총은 스웨덴의 모카피아르드 우체국 강도 사건과 올로프 암살에 사용된 스미스 웨슨제 권총이었다. 그러나 총이 너무 오랫동안 호수 속에 방치되어 지문이 씻겨 내려가 버린 바람에 정말로 총리를 암살하는 데 쓰인 권총인지 여부를 밝혀낼 수 없었다.

4. 살인 공소시효가 폐지되다


당시 스웨덴에서는 살인사건의 공소시효를 25년으로 규정하였다. 그 때문에 이 사건은 본래 2011년 2월 28일에 시효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효가 만료되기 1년 전인 2010년에 스웨덴 정부가 이 사건을 계속 수사하기 위해 사안이 심각한 특정 범죄에 대해서는 25년 공소 시효를 없애기로 법을 개정함으로서 팔메 총리의 암살범에 대한 수사는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범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5. 재수사와 수사 종결


2016년 11월 15일, 스웨덴 당국이 사건 발발 30년을 맞아 다시 올로프 총리 암살사건을 재수사하기로 결정했다. 스웨덴 검찰은 크리스터(Krister) 페테르손 검사가 오는 2월 1일부터 재수사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유력한 용의자 페테르손은 Christer로 이름이 다르다. 여튼 이에 대해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페테르손 검사는 2003년 당시 외무장관이던 안나 린드 피습사건 수사를 담당하는 등 세간의 이목을 끈 사건을 맡아온 조직범죄 전문 베테랑이다. 그는 "무척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며 (중략) 영광으로 생각하고 엄청난 열정으로 이 임무를 받아들인다." 하고 말했다.
비록 올로프 팔메 총리는 38년 전에 암살당했지만, 여전히 스웨덴 국민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재수사에 스웨덴 국민들도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고 한다.
2020년 6월 10일에 수사를 종결하였다.# 스웨덴 검찰은 2000년에 사망한 스티그 엥스트롬을 용의자로 지목했으나 그에 수반하는 새로운 증거는 공개하지 않았다. 엥스트롬은 팔메 암살 당시부터 용의자로 지목됐으나 목격자로 행세하면서 진술이 엇갈리고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풀려났는데 그를 다시 용의자로 확정한 것이다. 그의 아들 모르텐 팔메(Mårten Palme) 역시 엥스트롬을 범인으로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확실한 증거가 공개되지 않아서 여전히 팔메 암살의 진상은 의문 속에 있다.#

6. 참고


[1] 당시 본 영화는 수잔느 외스텐의 The Mozart Brothers였다고 한다.[2]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이 흑인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3] 실제로 앞에서 언급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현재까지도 이것 때문에 전 세계에서 '기소되지 못한 전범'이라며 무한대로 까인다.[4] 총리를 암살하는 데 사용된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다.[5] 이 경우 범인은 팔메 총리를 암살할 의도가 없었으며 피해자가 우연히 팔메 총리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