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핑

 


王金平(왕금평) / Wang Jin-pyng
[image]
1. 개요
2. 상세
3. 기타
4. 선거 이력


1. 개요


대만정치인. 당적은 중국 국민당이다. 2015년까지 중화민국 입법원의 입법원장, 즉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2. 상세


국립대만사범대학을 나와서 잠시 동안 수학 교사로 지내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제대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가업을 이었기 때문에 교사 경력은 그대로 끝[1]. 1975년부터 가오슝지역구에서 입법원 의원(국회의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후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국민당 지도부에 있다. 대만입법원 부원장을 지냈고, 이후 원장(국회의장)을 했는데 무려 1999년부터 '''16년간''' 국회의장직을 지켰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장은 정계은퇴 직전의 마지막 정치 커리어로 2년 단임[2]인 것에 비하면 대만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왕진핑 입법원장 하에서 수많은 '''국회 공성전'''이 나왔다.(...) 하도 공성전을 많이 해서 어지간한 공성전에는 꿈쩍도 않고 법안처리를 진행하는 강한 멘탈의 소유자다.
2013년 한 때 마잉주 총통과 사이가 안 좋아서 중국 국민당 당적을 박탈당한 적이 있으나 2015년 복당해서 여전히 국민당 지도부 및 국회의장으로 활동중이다. 마잉주 전 총통과는 2005년 중국 국민당 주석선거에서 맞붙은 적 있었다. 한 때 차이잉원에 맞설 중국 국민당 대선후보 얘기도 나왔지만,[3] 대만 정부총통 선거 출마를 포기했다. 아무래도 70대로 접어든 고령의 나이가 부담으로 작용한 듯.
3인칭화표현을 즐겨쓴다. 또 2013년대한민국에 개인 자격으로나마 방한한 적이 있다.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낙선을 우려했는지 소선거구제 지역구를 버리고 '''비례대표 1번'''으로 나갔다.(...) 왕진핑 본인은 당선됐지만 결국 선거에서 참패하고 입법원장직 임기가 끝나 입법원장이 민주진보당쑤자취안한테 넘어갔다.

왕진핑의 17년 국회의장 시절을 나타낸 보도.
차이잉원이 총통에 취임한 후 중국과의 양안 대화, 교류를 담당하는 반관반민 기구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 이사장을 제의했지만, 사양한 것으로 전해졌다.
2020년의 제15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중국 국민당 총통 후보 경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한창 정치적 인기를 누리는 중인 한궈위 가오슝 시장의 지지 선언을 확보한 상태. 하지만 6월 7일에 출마 포기 선언했다.
2020년 9월, 푸젠 성 샤먼시에서 열리는 중국 공산당 관리들과 대만의 정치인들이 만나는 행사인 해협포럼에 중국 국민당측 대표로 내정되었으나, 중국 관영 CCTV가 "국민당의 왕진핑 전 입법원장이 본토에 평화를 구걸하러 온다"는 논조의 보도를 하자, 대만 국내에서도 "중공 전투기가 방공식별구역을 넘나드는 이 시국에 중공을 방문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장지천 중국 국민당 주석이 당 차원의 해협포럼 참석을 없던 일로 하면서 대륙방문은 좌절되었다.

3. 기타


  • 외성인 출신이 많은 중국 국민당 정치인들 가운데 본성인이다.
  • 국민당 당적 박탈 문제를 놓고 크게 부딪혔던 마잉주 전 총통을 제외하면 정치권에 적이 없는 스타일이다. 리덩후이 시절에 국민당 주류로 성장하였으며, 리덩후이 전 총통을 포함해 롄잔, 우보슝, 하오룽빈 등 국민당 각 계파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깊다. 중국 대륙은 여러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다 민주진보당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어 차이잉원으로부터 대륙위원회 주임위원 제안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였다.
  • 본성인에 가오슝 출신이며 리덩후이 총통 시절에 거물로 등극한 특성상 중국 국민당 내에서는 본토파로 불린[4]다. 물론 92공식에 대한 지지의사와 타이완 독립운동에 대한 반대의사는 명시적으로 드러냈으나, 그렇다고 해서 양안통일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대만 간섭에도 명확하게 반대입장을 견지했다. 온건한 스타일로 ECFA 서비스협정 확대 때도 입법원장 권한으로 국민당의 협정안 강행 처리를 막았으며, 해바라기 운동 때도 시위대들을 강제로 내보내지 않고 협상을 통해 자진해산시켰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5
입법위원 선거(타이완성 5선거구)
중국국민당

'''당선'''
'''초선'''
1980
입법위원 선거(타이완성 5선거구)
중국국민당

'''당선'''
'''재선'''
1983
입법위원 선거(타이완성 5선거구)
중국국민당

'''당선'''
'''3선'''
1986
입법위원 선거(타이완성 5선거구)[5]
중국국민당

'''당선'''
'''4선'''
1989
입법위원 선거(타이완성 12선거구)[6]
중국국민당

'''당선'''
'''5선'''
1992
제2대 입법위원 선거(가오슝현)
중국국민당
'''90,552(16.94 %)'''
'''당선'''
'''6선'''
1995
제3대 입법위원 선거(가오슝현)
중국국민당
'''106,656(19.6 %)'''
'''당선'''
'''7선'''
1998
제4대 입법위원 선거(가오슝현)
중국국민당
'''81,050(13.85 %)'''
'''당선'''
'''8선'''
2001
제5대 입법위원 선거(가오슝현)
중국국민당
'''59,100(10.21 %)'''
'''당선'''
'''9선'''
2004
제6대 입법위원 선거(비례대표 1번)
중국국민당
'''3,190,081(32.83 %)'''
'''당선'''
'''10선'''
2008
제7대 입법위원 선거(비례대표 1번)
중국국민당
'''5,010,801(52.4 %)'''
'''당선'''
'''11선'''
2012
제8대 입법위원 선거(비례대표 1번)
중국국민당
'''5,863,279(47.59 %)'''
'''당선'''
'''12선'''
2016
제9대 입법위원 선거(비례대표 1번)
중국국민당
'''3,280,949(32.19 %)'''
'''당선'''
'''13선'''

[1] 이 시절 제자로 유명한 사람이 대만 루엔텍스그룹 회장 인옌랑이다. 관련 기사[2] 이론적으로는 왕진핑처럼 무제한 연임이 가능하지만 이만섭 국회의장 시절부터 국회의장들이 관례적으로 단임 및 퇴임 후 정계은퇴를 해왔다.[3] 국민당 소속이지만 전통적으로 민진당 지지층이 많은 가오슝 출신이고, 입법원장으로 장기간 재직하면서 여야간 타협을 이끌어내는 경험이 풍부하여 중도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4] 타이완 지역 내 지방에 자기 세력들을 많이 두고 있다.[5] 가오슝현,핑둥현,펑후현 일대[6] 가오슝현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