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둔이
1. 개요
대만의 정치인. 마잉주 정권 2기에서 부총통을 역임했다.
2017년 8월부터 국민당 주석으로 재임하였으나 제15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와 제10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참패함에 따라 지도부와 함께 사퇴하였다.
2. 상세
국립대만대학을 졸업했으며, 잠시 중국시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3년에 타이베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어 최연소 시의원 기록을 세웠다. 당시 25세.
난터우 현의원을 거쳐 1994년 중화민국 지방공직인원 선거지방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의 장쥔슝(張俊雄) 후보를 누르고 가오슝 시장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1998년에는 셰창팅 후보에 0.6%(4천여표)차로 밀려 석패했다. 그 이후 2002년에 중화민국 입법원의 입법위원으로 당선되고 마잉주 정권에서 행정원장(국무총리)까지 올랐다. 그 이후 2012년 샤오완창 부총통 대신 우둔이가 마잉주의 러닝메이트로 나와서 당선되어 대만 제13대 부총통을 지냈다.
2010년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당시 태권도 종목에서 문제가 생겨서 대형 사건으로 번졌다. 이 사건 당시 행정원장이던 우둔이가 반한 발언을 했다.기사 그래서 당시 내일신문에서는 이런 기사도 냈다.
그 후, 2017년 5월 20일. 국민당 주석(당 대표) 선거에서 50% 이상의 득표로 훙슈주 현 주석을 꺾고 당선되었다.관련기사 3개월 후인 8월 20일에 정식으로 국민당 주석직에 올랐다.
국민당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만 현지 출신, 즉 본성인이라는 점에서, 국민당의 양안정책 노선을 친중 일변도에서 중립적으로 조정할 가능성[3] 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단 1년 후인 2018년으로 예정된 전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에 관심이 쏠리는 상황.
2018년 11월 24일의 전국 지방자치 선거에서 국민당이 전국 22개 단체장 가운데 과반인 15개에서 당선되고, 특히 직할시급의 6곳 가운데 절반인 3곳에서 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는 20년 동안 민진당의 아성이었던 가오슝에서 한궈위 후보가 당선된 것도 있었다. 정작 우둔이는 차이잉원 다음으로 비호감 정치인으로 꼽혔다.
그러나 이후 중국의 홍콩 탄압으로 대만 내의 반중 인식이 높아져 1년여 후인 2020년 총통 선거에서는 가오슝 돌풍의 주역 한궈위를 내세우고도 패했으며, 우둔이 본인도 국민당 비례대표 14번으로 출마했으나, 13번까지만 당선되면서 입법위원 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민주진보당의 입법원 과반의석 저지 또한 실패했기에 당 주석직에서 사임하였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대한민국의 황교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 계열 정당의 부진 이후 성립된 보수 정권에서 서열 2위의 지위(국무총리/부총통)를 가졌다는 점[4] 과, 퇴임 이후 보수 정당의 당 대표를 지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이끌던 보수 정당이 선거에서 민주당계 정당에 참패를 당하고 선거에서 출마한 자신까지 낙선해서 당대표 직을 내려놓았다는 점까지 유사하다.[5] 다만 우둔이는 황교안 수준의 강경보수는 아니고, 오히려 이념적으로는 자유보수주의에 가깝다.
3. 선거 이력
[1] 정당의 사무총장과 같은 역할이다.[2] 의전상은 국무총리급이나 실질적으로 국무총리급이라고 평가되는 행정원장보다 권한이 적다.[3] 실제로 우둔이는 대륙이 주장하는 일국양제에 대한 반대 의견을 여러차례 공개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4] 정권 후기 1인자(대통령/총통)의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을 겪었다는 점, 본인이 이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민주당 계열 정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점[5] 우둔이는 그래도 지방선거에서 크게 승리했지만, 황교안은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데 이어 첫 전국 선거에서 참패하고 사퇴했다.[6] 단독출마로 등액선거 당선[7] 관선 임명직으로 초선 임기 수행[8] 2009년 9월 9일 행정원장 임명으로 중도 사임[9] 국민당은 13번까지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