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다 기요시

 


'''일본 중의원 ((구) 사이타마 5구)'''
'''제39대'''
사와다 히로시
후쿠나가 노부히코
와다 가즈히토

'''제40대'''
'''우에다 기요시'''
에다노 유키오
와카마츠 가네시게
후쿠나가 노부히코

''선거제도 개편''
'''일본 중의원 (사이타마 4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2대
우에다 기요시'''

'''제43대'''
진푸 히데오
'''민선 제16-19대 사이타마현 지사'''
'''(うえ( (きよ(
우에다 기요시
'''
'''출생'''
1948년 5월 15일 (75세)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
'''국적'''
[image] 일본국
'''신체'''
AB형
'''가족'''
배우자 우에다 쓰네코, 2남 1녀
'''학력'''
호세이대학 법학부 졸업
와세다대학 대학원 정치학 석사과정 수료
'''직업'''
정치인
'''소속 정당'''

'''현직'''
일본 참의원
'''경력'''
신자유클럽 정책위원
정책과학연구소 정책위원
사이타마현 제4구 중의원
중의원 재해대책특별위원장
중의원 운영위원회 이사
민선 제16-19대 사이타마현 지사
일본 참의원 (사이타마현 선거구)
1. 개요
2. 생애
3. 성향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7.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사이타마현 선거구 일본 참의원으로, 사이타마현 제4구 중의원, 민선 제16-19대 사이타마현지사를 역임했다.

2. 생애


후쿠오카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나 오무타시에서 자랐다. 후쿠오카현립 미이케 고등학교, 호세이대학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포기하고 대학 졸업 후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다. 대학원 재학 중에는 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시에 학원을 열기도 했으며, 대학원 수료 이후에는 대학교에서 비상근 강사로 근무했다.
1976년 신자유클럽 창당에 참여해 당 정책위원으로 근무했고,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신자유클럽 소속으로 구 사이타마현 제5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한다.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총 4번의 낙선을 경험한다. 신자유클럽이 해산된 후에는 정책과학연구소 정책위원으로 활동하며 와타나베 미치오 전 의원[1]의 브레인으로 있다가 자유민주당에 입당한다.
그러다가 자민당을 탈당해 신생당에 합류하고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신생당 공천을 받아 구 사이타마현 제5구에 5번째 출마한 끝에 당선되었다. 이 당시 같은 지역구에서 같이 당선된 사람으로 에다노 유키오가 있다. 신생당 해산 이후에는 신진당에 합류했으며,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는 사이타마현 제4구를 지역구로 중의원에 당선된다. 신진당 해산 이후에는 프롬 파이브, 민정당 민주당에서 활동한다.
쓰치야 요시히코 지사가 사임한 뒤 치뤄진 2003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 출마해 자민당이 지지한 후보를 포함해 7명의 후보들을 꺾고 당선되어 사이타마현지사에 취임한다. 이후 2007년, 2011년, 2015년 선거에서도 연거푸 당선되면서 4선을 기록한다.
2019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에는 불출마하고 후임인 오노 모토히로 지사가 현지사 선거 출마로 사퇴하여 공석이 된 사이타마현 선거구 참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 대표인 타치바나 타카시를 꺾고 당선된다. 현지사 직과 참의원 직을 서로 맞바꾼 셈이다. 당시 상대 후보는 타치바나 밖에 없었으며, 자민당은 별도의 후보를 내지 않아[2] 지역에서 인지도가 높은 우에다가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3. 성향


강경 우파 성향으로 추정된다. 한때 자민당 소속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해(?)는 되지만,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민주당 소속이었을 때 했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아무래도 같은 민주당 출신 지자체장인 카와무라 타카시와 비슷한 부류인 듯 하다.[3]
  • 새역모에서 만든 역사교과서를 지지한 적이 있다. 또한 한국, 중국 등의 항의에 대해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새역모 부회장 출신 인사를 사이타마현의 교육위원으로 내정하기도 했다. #
  • 카와무라 타카시 나고야 시장이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을 당시, 카와무라를 옹호하면서 “인구 20만명인 곳에서 어떻게 희생자가 30~40만명이나 나올 수 있느냐.”[4], “장제스마오쩌둥도 아무런 성명을 내지 않았다.”[5] “70년대까지 난징 대학살에 대해 중국은 교과서에 기재하지 않다가 어째서 80년대 들어서 갑자기 기재한 것이냐.”라는 망언을 했다.
  • 위안부 문제에 대해 “종군 위안부는 없었다.”, “동서고금 위안부를 데리고 행진하는 군대는 없었다. 위험 지역에는 위안부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
  • 젠더블라인드에 반대하는 성향이다. 또한 고등학교의 남녀공학화를 반대한다.
  • 조선학교 무상화 정책에 반대하면서 납치 사건과 관련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산하에 있으므로 일반적인 고등학교와 다르다고 말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6 - 1986
정계 입문
창당

1986 - 1990
정당 해산

1990 - 1993
입당

1993
탈당

1993 - 1994
입당

1994 - 1997
합당

1997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따라서 탈당

1997 - 1998
창당

1998
합당

1998 - 2003
합당

2003 -
현지사 선거 출마로 탈당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선거'''
'''선거구'''
'''정당'''
'''득표수(득표율)'''
'''당락'''
'''비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사이타마현 제5구

42,156표(9.0%)
낙선(5위)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39,056표(9.4%)
낙선(5위)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9,595표(14.8%)
낙선(4위)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4,418표(9.3%)
낙선(5위)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0,606표(18.4%)'''
'''당선(1위)'''
'''초선'''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사이타마현 제4구

'''72,420표(39.3%)'''
'''당선(1위)'''
'''재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6,131표(49.3%)'''
'''당선(1위)'''
'''3선'''
2003
2003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
사이타마현

'''808,092표(40.80%)'''
'''당선(1위)'''
'''초선'''
2007
2007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
'''1,093,480표(69.77%)'''
'''당선(1위)'''
'''재선'''
2011
2011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
'''1,191,071표(84.29%)'''
'''당선(1위)'''
'''3선'''
2015
2015년 사이타마현지사 선거
'''891,822표(58.5%)'''
'''당선(1위)'''
'''4선'''
2019
2019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
사이타마현 선거구
'''1,065,390표(86.36%)'''
'''당선(1위)'''
'''초선'''

6. 기타


  • 취미는 독서, 등산, 낚시이다.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사이타마현 치치부시를 배경으로 한 마음이 외치고 싶어해가 개봉되기 전 9월 10일 주인공 나루세 준을 연기한 성우 미나세 이노리와 기획을 맡은 시미즈 히로유키가 사이타마현청을 방문해 우에다와 만난 적이 있다. 우에다가 미나세에게 사이타마에 온 소감은 어떠냐고 묻자 미나세가 "지난달 치치부에 왔는데, (치치부 음식) 된장감자를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도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경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고.#

7. 둘러보기



[1] 와타나베 요시미의 아버지.[2] 이는 후술할 우에다의 정치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 게다가 둘 다 1948년 생으로 동갑인데다, 자민당에 있다가 신진당을 거쳐 민주당으로 넘어와 중의원을 역임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카와무라는 민사당, 우에다는 신자유클럽에 있다가 넘어왔다는 점 정도가 있다. 또한 엄밀히 따진다면 카와무라는 기초자치단체장이지만, 우에다는 광역자치단체장이다. 물론 카와무라가 시장으로 있는 나고야시정령지정도시인데다 일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주요 도시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영향력이나 권력은 우에다랑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쎌 것이다. 당장 둘 다 똑같은 역사 관련 망언을 했음에도 카와무라의 망언이 더 많이 알려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 난징 대학살 문서에도 나오지만 30~40만명이라는 희생자 수치는 어디까지나 일부 학자의 추정일 뿐이며, 정확한 희생자 수는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학자들의 대부분은 최소 10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는 점이다.[5] 난징 대학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난징 대학살에 언급을 많이 안 한 것은 일본과의 외교 문제 때문에 언급을 안 한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