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재일 조선인 단체. 약칭으론 일본에서는 조선총련(朝鮮総聯/朝鮮総連)이나 총련(総聯/総連), 한국에서는 조총련(朝總聯)이라고 부르며, 북한에서는 조선총련이라고 부른다. 재일 조선인 중 좌익 계열이 세운 단체이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여기며, 북한에서처럼 북한을 공화국, 남한을 남조선으로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에는 민단보다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북한의 몰락과 재일 조선인의 일본 귀화 등으로 인해 조총련은 갈수록 세가 약화되는 추세.
홈페이지도 있으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유해사이트로 막혀 있다.
2. 역사
이 단체의 기원은 1945년 8.15 광복 후 세워진 좌우합작 전국 재일 조선인 조직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며, 산하 단체로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과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등을 두었다. 그러나 1949년 GHQ에 의해 '폭력주의적 단체'로 몰려 김천행과 한덕수 등 주요 간부들이 쫓겨났고, 이듬해 해산당했다. 이후 조선인단체협의회,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 등이 명맥을 잇다가 1951년 재일조선민주전선(민전)이 결성됐으며, 행동조직으로 조국방위위원회(조방위)를 두었다.
1954년 8월에 남일 북한 외무상이 재일 조선인을 북한 사람으로 하고, 한덕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5년 5월 25일에 민전과 조방위를 해체했고, 26일 현재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새로 출범해 일본공산당과 관계를 끊었다.
창립 초기에는 한덕수 등 6명의 집단지도체제였다가 1958년부터 한덕수 1인 체제로 개편됐고, 1970년대 초 들어서 김병식 부의장이 새로 떠오르는 듯했으나 1972년에 한덕수와 대립하다 실각했다. 1975년부터 민단의 모국방문사업으로 인해 민단으로 전향하는 사례가 늘었으며, 2013년 이후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제225부(구 대외련락부)의 지도를 받고 있다.
3. 본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본부는 도쿄도 치요다구에 소재하고 있다. 사실상 주일 북한 대표부 역할을 한다.
현재 일본은 북한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미수교 상태이며, 조총련 중앙본부가 비자와 여권 발행 업무를 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 국적자가 통일부의 허가 없이 일본의 조총련 및 관련 기관(조선학교 등)을 방문하면 국가보안법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북한에 관련된 사안은 국가정보원과 통일부가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으므로 외국이라고 안심하지 말 것. 그리고 한국 법률 및 한국 정부의 대응 이전에 한국국적자가 조총련 관련 기관에 방문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4. 특징
일본에선 북한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고, 또 이 단체 구성원들이 3D 업종에 많다보니, 전체적으로 삐딱하고 과격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인식이 박혀있는 경우가 많다. 최양일의 영화 '피와 뼈'에 등장하는 막장 주인공 김준평이 바로 이런 조총련상의 전형 중 하나. 실제 일본에서 이들은 주로 빠칭코[3] , 운수업, 경비업 등 대우여건이 비교적 낮은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현지에서 이들의 인식이 좋지 않은 이유로는, 우선 북한에 대한 추종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북한의 잘못들을 옹호해주기 급급한 행태에 있다. 이들의 논지는, "우리의 정체성이 모호했을 때 우리가 조선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우리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고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 준 조국이다. 좀 이상하긴 해도 어쨌건 조국 아니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상이 달라도 그래도 동포니까 감싸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패망 이후 돌아올 사람들은 일단 귀국했지만, 여러 이유로 귀국하기 힘든 사람들은 일본에 남아 터를 잡고 살면서 당시 일본 사회의 여러 차별과 박해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였다. 이렇게 힘든 상황일수록 자신의 정체성[4] 을 명확히 인식하고 '조국'이나 '민족'과 같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유대감에 의지하고 싶은 경향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이 시기에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민족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이 (북한과 연계된) 조총련이었다.[5] 당시 재일 교포의 상당수가 북한과 조총련의 관점에 따라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인식했다.
실제로 이 글을 읽는 한국인 상당수는 한국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이 한국을 욕하면 왠지 불쾌하고, 실드쳐주고 싶은 기분이 들고, 한국보다 더 잘 살고 살기 좋은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인식하여 그런 좋은 나라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물론 이게 심해지면 일명 국뽕에 취하게 되는데, 조총련의 북한 인식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 그들 역시 북한 내 주민보단 북한이 지옥 같다는 것을 도무지 모를 수가 없지만, '북한이 자신의 조국이다'라는 인식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았기에 '그래도 조국이니 버릴 수는 없다'고 반응하기 쉽다는 것.[6] 또한 조총련과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에서는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소속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어떤 국가가 좋은 나라라서 조국으로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이니까' 나쁜 점까지도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쉽다.
맹목적 북한 찬양과 옹호 행위로 일본내 우익 세력들의 주된 타겟이자 일본 사회에서 조총련을 그래도 이해해주던 진보세력들을 팀킬하는 주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한 단체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선 세력 자체도 많이 약해졌을 뿐더러 특히 젊은층 중심으로 자유화 물결이 일면서 조총련 모두가 북한을 진심으로 추종하는 행태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7] 이런 사람들의 경우 성인이 되고 나선 당연히 한국이나 일본 국적을 얻고 싶어하지만, 이런 '이적'은 가족과 친척을 포함해 사회적 매장 수준의 보복이 가해질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그냥 조총련 소속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
4.1. 20세기
일본에서 북한의 공작원들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점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 혹은 한국을 경유해서 북한에 자금을 대주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요코타 메구미 사건 뿐만 아니라 70~80년대에는 적지않은 "북조선 공작원"들이 일본인들을 포섭했고, 때로는 납치했다.[8] 이들은 북한에 호의적인 언론인, 학자, 경제인들을 포섭해서 북한을 견학 시켜주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허나 이것도 1980년대까지나 먹혔지 동구권 붕괴 이후에는 얄짤없는 얘기.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통하질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야 조총련 내에서 이런 흐름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역시, 60~70년대의 조총련식 민족교육의 영향 아래서 성장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북한에 대해서 비판, 심지어는 독재 및 인권 문제와 폐쇄성 같은 지극히 당연한 문제점을 지적해도, 이에 격렬한 알러지를 드러내면서 적대적인 의사를 보이는 것이다. 흠좀무스럽게도, 이들 중 극단적인 경우는 중동 국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처럼, 북한의 독재체제도 나름대로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9] 북한에 실존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 화제를 꺼내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일은 고사하고 대부분 이중잣대를 적용하거나[10] 오히려 그 사실을 외부세력의 협잡으로 극구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북한은 완벽한 까임방지권을 가진 신성하고 위대한 조국이므로 깐다는 것 자체가 금기다. 이는 조총련계 학교의 철저한 세뇌교육에 기인한다.[11]
4.2. 21세기
물론 21세기 들어선 북한의 실체가 원체 까발려져서인지 옹호보다는 오히려 앞장서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사실 독재정권 하에서도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조총련의 저런 이중잣대는 그냥 "세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에 맞서 자기 나라를 옹호하는 경우는 정치범수용소와 같은 중대한 인권유린에 대한 지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개고기 문제 같은 말초적인 놀림에 대응하는 경우이거나 논쟁이 분분한 정치적인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과 같은 명백한 결함국가에 대한 인지부조화적 옹호에 댈 바는 아니다.
일본 사회에서 북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독자세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조선적 국적[12] 을 유지하는 한편, 독자적 민족학교인 조선학교[13] 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계 민족학교가 단 4곳 뿐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진학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단이 운영하는 학교가 인가 학교로 운영되는데 비해, 이쪽은 비인가 학교로서 정식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결국 조선학교 출신 학생들은 사회진출을 놓고, 이상과 현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에는 많은 수가 진학과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면서까지 꿋꿋이 조선적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 정식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해당 국적을 따는 소위 '이적'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적을 원하는 자녀와 이를 막으려는 부모세대간의 갈등은 매우 심한 상태이며, 일단 이적한 경우 이적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되면 '''조총련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을 당하다시피 한다'''. 사실 일본을 싫어한다는 것도 일본 내 조선인 사회에서의 전통적인 의미와 정치적인 의미가 섞인 기묘한 것으로, 실제로는 다른 일본인들과 별 차이 없이 일본의 영화나 만화, 음악을 즐기고 있다. 때문에 이를 이중잣대가 아닌 문화적인 부분과 정치적인 부분을 철저히 나눠서 생각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상적으로는 아무리 반일 성향이라고 하나, 그들은 이미 일본 사회에서 몇십 년을 부대끼며 살아왔다. 문화와 정치를 상당부분 유기적으로 보는 한국이나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개개인이 파편화 되고 개인주의화가 상당수 진행이 된 일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이들은 정치적 스탠스는 북한을 긍정하지만, 실제 생활은 일본인과 별 다를바 없다. 이러한 고충이 독립영화 '우리 학교'에도 잘 드러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새로운 세대들은 어느 정도 융통성을 보이는 한편, 이전 세대처럼 무조건적인 북한 지지자도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 중에는 "한국과 조선은 모두 같은 뿌리인데 좀 안 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시크하게 제3자처럼 간격을 두고 접근하려는 신세대도 있다. 신세대의 적지 않은 수가 조총련으로서의 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있으며 정식으로 일본 혹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있다. 교포사회 전체가 2~4세까지 물갈이 되는 과정에서 적잖이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먹고 살기 편하다면 뭐 한국이나 일본 국적이 대수인가…?"라며 '이적'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진 상황. 그 결과 해방 직후엔 조선적/총련계 재일교포 숫자가 다수였지만, 현재는 한국 국적자들이 조총련을 제치고 재일교포 세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한국 국적만 따놓고 정신적으로는 조총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실제로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지만 실상 한국 국적을 택한 시점에서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이질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다보니 대내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가?"라는 회의론도 나오고 있으며,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사고의 차이도 이미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발언 자체만으로도 이적이라고 할 법한 "김정일 위원장도 너무한다! 자꾸 저러면 안 되는데!"라는 불평도 종종 튀어나온다. 신세대들은 성장 과정부터 일본에서 민주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과거 세대와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해졌다. 이러다보니 구세대들은 어떻게든 조선학교를 통해 사상적인 교육 을 시키려 들지만, 북한 내부와는 달리 여기서는 본인의 진학 선택권도 있고[14] 환경상 일본의 법을 적용받는지라 강제적으로 통제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윗동네의 막장화도 가속화되다 보니까 북한식 교육을 독특한 문화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일 뿐, 그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골수적인 주체사상 지지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고 한다.[15] 조선학교 교내에서는 "일본 학교로 전학 혹은 진학한다."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이며 2012년까지는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이야 뭐.. 케바케지만 대체적인 분위기가 그러한 듯.
이처럼 세대갈등과 문화접변으로 인한 약체화 속에서 '''현재의 조총련은 과거와 같은 독자적 소사회로서의 위상은 고사하고 겨우 소속 교포들의 취업/주택/복지문제에 관련된 생협수준으로 크게 몰락했다'''. 이 때문에 요즘은 1990년대 이전과 같은 사건도 많이 줄어든 대신, 오히려 혐한초딩들이나 재특회 소속의 찌질이 잉여 잉간들이 가끔 조선학교에 몰려가서 깽판을 부리거나, 혹은 조총련 지부에 난입하는 식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오히려 일본 내의 좌파들이 이들을 불쌍하다고 안쓰러워하는 복잡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16]
이처럼 특유의 배타성에 따른 대외적 멸시와 대내적 이반 속에서도 어떻게든 근성으로 명맥은 이어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조총련 내부 경제사정이 악화되어, 조총련 기관들도 압류 크리를 겪고 있다. 특히 수차례에 걸친 미사일 발사, 핵실험과 연평도 포격 사태를 계기로 일본 내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일본 내 모든 지방 관청의 조총련/조선학교 지원 반대가 한층 힘을 얻고 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친북을 고수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당연히 좌우를 막론하고 언론마다 조총련을 까대고 있다.
이 때문에 조총련뿐만 아니라 민단 등 애꿎은 한국 국적자들까지 도매금으로 피해를 보기도 한다. 물론 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익들은 까겠지만. 하여튼 재일 한국인 전체를 공격하는데 가장 좋은 핑계거리 중 하나로 전락한 셈이다.
5. 대외적 인식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이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 많다. 그 뿌리는 한국전쟁의 후폭풍으로 인한 반공의식의 심화가 원인이다. 사민주의조차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보던 당시 시대상황에, 아예 대놓고 북한을 찬미하고 옹호하는 조총련은 그 자체로 터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남북관계가 최악의 대치를 보이던 90년대 후반까지도 국민의 해외여행이 거의 드물던 시기에는 굳이 비지니스나 여행목적으로 해외에 나갈 경우 반드시 출국하기 전 안기부쪽 기구에서 방첩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였는데, 그 교육 내용에는 일본에서 '고려', '조선' 과 같은 한글 단어가 쓰여진 점포들은 대개 조총련 계열의 상점이며, 그런 곳에 드나들면 보안에 저촉됨은 둘째치고 그 돈이 그대로 북한의 자금줄이 되어 무기화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라 한다. 당시까지는 조총련이 그나마 일본 내에서 꽤 기세등등했음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반감이 완화된 지금이라고 해서 일본이든 한국이든 조총련에 대한 인상이 딱히 나아진 것도 아니다. 조총련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에 대한 광신적 숭배[17] 남북관계에 대한 객관적 시각 결여, 일본 내에서의 발전적인 노선 부재, 그러니까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알맹이는 이미 일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민족 개념의 쭉정이만 강조하는 부분들이 문제로 남아있다. 바꿔 말해서, 일본 내의 민주주의와 풍족한 인프라를 누리며 자기 생활을 영위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일단은 떠들고 있는 주체사상에 환상을 갖거나 자기 아쉬울 때만 소수민족 드립을 치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는 것이다.[18] 그나마 이들 외에는 동포 사회에서 제대로 된 향후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무작정 민족주의만 내세우기보다 실질적인 공존을 모색해보자."라고 주장하면 해당 사회에서는 배신자로 치부되어서다.
북한과는 1960~80년대 꽤 빈번한 교류가 있었고, 지금도 서로 립서비스 정도는 잘 해 주지만 1990년을 전후해 경제난이 닥쳐오면서 북한에서 지원해주는 신세라기보다 뜯어가는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다. 북송사업이 한창 활발하던 때, 먼저 북송선을 타기로 한 교포가 대놓고 편지에다가 오지 말라는 내용을 쓰면 검열을 받을 게 뻔하니 내가 편지를 가로로 써서 보내면 너도 북송선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고, 세로로 써서 보내면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편지가 줄곧 세로로 쓰인 편지밖에 없어서 안 갔다는 흠좀무한 에피소드도 존재한다.[19] 또 다른 에피소드로, 편지에 "여기는 일본의 XXX만큼 풍요롭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알고보니 그 XXX라는 곳은 빈민가였고,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북한 관리가 풍요롭다는 표현만 보고 부촌이겠거니 생각해서 검열을 통과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때문에 이 둘의 관계도 과거에 비해서는 다소 소원해진 상태다. 때문에 우습게도 결국 활로의 한 방편으로 1990년대 이후에는 그토록 적대시하던 민단과도 교류협력이 자주 행해지고 있다.
한편, 일부에선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이 조총련을 일본을 휘어잡고 뒤흔드는 거대세력으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한다. 물론 일본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존재들은 있는데... 바로 이들. 허나 실상은 조총련이 전성기였을 때도 그런 힘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70년대 전후 전성기의 조총련이 군대만 없는 국가 안의 소국가라고까지 불리며 기세등등한 건 일본 내에서 조총련(및 재일 조선인)이 차별받는 약자였기 때문이다. 사회의 주류에 진출할 여지가 없다 보니 파칭코, 야쿠자, 야키니쿠 가게, 좀 잘 풀리면 일부 연예계나 스포츠계 등 그나마 재일 조선인이 활동할 여지가 있는 영역에서만 활동하게 되고, 사회 주류에 섞일 수 없으니 폐쇄적이고 독자적인 소사회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20] . 북한의 경제력이 좀 괜찮았던 7~90년대 초반까지도 일본의 경제력은 세계 2위까지 치고 올라가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며 [21] 정치 분야에서도 그나마 사회당과 공명당 정도가 이들에게 연민을 보내줬을 뿐, 이들을 제외한 타 야당(민사당과 공산당)이나 집권여당(자민당)은 북한을 아예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런 형편이니 당연히 일본을 뒤흔들 힘을 가질래야 가질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재일교포설은 일본의 예술/스포츠계에도 꽤 퍼져있는 루머긴 하다. 허나 사실인 경우는 꽤 드물다.
5.1. 귀국자에 대한 북한의 대우
하지만 북한에서 조총련계 이주자들에 대한 현지주민들의 처우는 한 마디로 '''이질적 존재'''. ‘째뽀'[22] 라는 비하하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일본과 자본세계의 불순한 물을 먹고 온 이단아로 치부한다. 법적으로도 '''무조건 동요계층'''[23] '''이하로 분류되며''' 분류 과정에서 적대계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암암리가 아닌 대놓고 차별과 감시가 존재하고 사회적 진출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한다.
사실, 재일교포 북송 귀국사업 당시에도 북한을 선택한 상당수의 조총련 출신 교포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치거나 북한사회에서 증발한 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인 강철환씨의 경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총련 지역 간부 출신으로 있다가 북송교포 귀국사업 때 북한으로 간 경우이다. 이러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조총련계 교포들의 이반을 가속화하기도 했으나 북송된 교포들은 일종의 볼모이자 인질이나 다름 없었기에 일본 현지의 친척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총련에 충성하고 북한에 돈을 송금 해야 하기도 했다.
이런 북한 현지 인식도 모르고 재일교포 북송선을 탔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그저 안습. 물론 일본 내의 재일동포 차별 대우 문제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선 재일동포를 골치덩어리로 치부하며 암암리에 차별했고, 50년대 중반 즈음 북한이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일본측에 제안하자 이에 일본 정부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겉으로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며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골칫덩어리도 떠나 보내고, 거기에 세금도 아낄 수 있다며 좋아했다.
다만, 고용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되면서 북한의 조총련에 대한 차별대우는 어느 정도 시정되었고 90년대 경제난이 닥친 이후에는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일반인들은 수시로 굶는 게 일상이 된 반면, 재일교포들은 꽤나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가용을 가진다거나 일본에서 친척들이 벌어온 돈으로 당국과 함께 사업을 한다거나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먹어서 돈을 버는 식이었다. 사실 조총련계가 일본에서 하위층에 속한다고 하지만 애시당초 '''압도적인 일본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90년대 중반에 일본의 1인당 GDP가 4만 달러를 넘어섰는데[24] , 이건 엔고의 영향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당시 북한의 1인당 GDP는 500달러 선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총련계 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예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며, 아직도 사회적인 차별이 남아있다.
참고로 일부 머리 속에 뇌 대신 대포동 미사일이 들어있는 찌질이들은 북송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에서 북한 주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망언을 하고 있는데, 이를 논파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바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다. 이건 남한으로 치면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형식적으로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빨리 재외국민에 대해 선거권을 인정했고, 제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는 그래서 조총련계 대의원들이 7석이나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5기까지는 조총련계가 최고인민회의에 의석수를 작게나마 확보했나 싶더니, 6기부터는 슬그머니 조총련의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2, 3당으로 떠오른다. 제 5기 대의원 선거와 북한의 70년대 대격변 시기와 시점이 일치하고, 이 시기에 조총련 의장 추대와 관련하여 조총련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북한사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북한사회에 협조적이거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조총련계 인사들만 살아남았다는 분석이 있다. 참고자료.
6.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의 관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재일 한국인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는 끝장나게 사이가 나빴다. 한반도의 분단에 따라 재일 조선인들도 좌우로 갈라졌는데 1945년에 재일본조선인연맹(재일본조선인련맹 약칭 조련)이라는 좌우합작 재일 조선인 단체가 공산주의 세력 주도로 좌경화되자,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조련을 나와 세운 단체가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 즉 현재의 민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과 북한이 6.25 전쟁을 겪고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한국을 옹호하는 민단과 북한을 옹호하는 조총련의 사이도 극단적으로 나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옛날부터 서로서로 비방하고, 심지어는 상대방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몽둥이로 조지는 등 정말 사이가 험악했다.[25]
냉전이 끝난 이후로는 양쪽의 온건파들이 '한민통(오늘날의 한통련)'을 결성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양쪽의 화해를 도우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어느 정도 화해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김정일의 끝없는 벼랑 끝 전술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특히 2006년에는 하병옥 민단 중앙단장이 서만술 의장과 화해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가 지방조직의 반발을 사 몇 개월 못가 사임했고, 이듬해에 민단으로부터 제명당했다.
또한 탈북자 문제도 민단과 조총련을 화합하게 할 수 없는 원인 중 하나. 북한은 조총련에게 있어 돌아갈 조국이자 최후의 지상락원인 곳인데 거길 비난하며 탈출했다는 것은 용납이 어렵고 배신감마저 느낄 것이라 탈북자 단체와 상당히 사이가 나쁘다. 그런데 민단이 주로 지원하는 단체 중 하나에 탈북자, 특히 일본으로 흘러온 탈북자 관련 단체가 있다.
7. 각종 매체에서의 조총련
재일한국인으로 유명한 가네시로 가즈키가 어릴적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다. 자전적인 소설 GO에서도 나오는데 나중에 한국 국적으로 아버지가 바꾼다. 이유는 하와이를 가고 싶어서라고. 사실 가즈키의 대부분의 작품에 재일한국인, 총련계 인물들이 한번씩 등장한다.
한국에서 연재 후 출간된 만화 <재일동포 리정애의 서울 체류기>를 보면 조총련 골수파의 전형적이면서도 솔직한,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불편한 특유의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조총련 사회가 민족주의를 광신적으로 숭배함을 엿볼 수 있고, 특히 반일 경향이 아주 지독하게 강해서 일본인은 진보적인 사람까지 전부 '쪽바리'라고 여과없이 통칭하는 것도 나온다.''' 심지어는 "'''이런 쪽바리까지 욕해서는 안 되는데…'''" 같은 여러모로 모순적인 표현도 나온다. 이건 뭐. 또한 남북관계의 모든 문제 책임에 있어 '''"공화국(북한)은 전혀 잘못이 없다."'''며 모든 문제 책임을 오로지 한국의 탓으로만 전가하는 등,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러한 조총련 골수파의 가치관이 흥미롭다면 일독해 볼 필요는 있다. 이런 거 생각하기 싫고 심심하면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처럼 개그물로서 봐도 괜찮다.
과거 한국의 드라마 등에서는 악의 소굴로 묘사되기도 했다. 때로는 월북의 창구로 그려지기도 했는데[26] 70년대 실화극장에서 소개된 조총련 부분은 그야말로 조총련에 대한 음습한 조직이라는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27] 이후 1986년경 KBS1의 특집드라마 <멀고 먼 사람들>[28] 나 MBC의 <동토의 왕국>[29] 등에서 조총련의 행태를 크게 비판하였다. 2018년 12월 개봉된 영화 <마약왕>에서는 조선인 야쿠자로 등장하는 김순평이 1970년대당시 조총련과 연계된 야쿠자로 나온다.
1991년 남북 UN 공동 정회원국자격 가입 이후에 조총련이 한국 내에서 수준이상으로 미화된 매체는 이현세의 남벌이다. 자세한 내용은 남벌 항목을 참조할 것. 근데 남벌 자체가 불쏘시개급이라..
8. 역대 의장
의장 자리는 사실상 종신집권이 가능한 자리다.
- 한덕수 (1955~2001)
- 서만술 (2001~2012)
- 허종만 (2012~ )
9. 산하단체
- 재일본조선인상공련합회
- 재일본조선청년동맹
- 재일본조선민주녀성동맹
- 재일본조선청년상공회
- 재일본조선인교직원동맹
- 재일본조선인중앙교육회
- 재일본조선신용조합협회
- 재일본조선언론출판인협회
- 재일본조선사회과학자협회
- 재일본조선인의학협회
-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
- 재일본조선문학예술과동맹
- 재일본조선인체육련합회
- 재일본조선류학생동맹
- 재일본조선인총교인련합회
- 재일본조선불교도협회
- 재일본조선력사고고학협회
- 재일본조선인통일동지회
- 재일본조선평화옹호위원회
- 재일본조선학생위원회
- 조선신보사
- 학우서방
- 조선청년사
- 총련영화제작소
- 조선문제연구소
- 금강산가곡단
- 재일조선축구단
- 조선미술연구소
- 조선문예사
- 조선음악사
- 금강보험주식회사
- 조일수출입상사
- 동해상사주식회사
- 조선특산물판매주식회사
- 조선산업주식회사
- 치요다국제무역
- 중외려행사
- 조선총련중앙학원
- 동포결혼상담중앙센터
10. 그 외
과거 일본이 북한에 관한 정보력이 엄청났던 이유다.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 지금은 조총련이 몰락했기에 옛날만큼의 위상은 가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정이 확인될 경우, 조총련 쪽 사람들이 가입을 권유하러 마치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 업자들처럼 뻔질나게 초인종을 눌러댄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물론 이는 도시전설일 뿐, 현재 생활협동조합 수준으로 크게 축소된 조총련은 이런 일을 벌일 여건도 안되고, 여력도 없다.[30]
요즘(?)은 일부에서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월북 권유글'''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보지도 않고 쿨하게 무시하지만, 의외로 낚여서 연락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 심지어 구글 검색 결과 '''극우 성향 사이트인 정사갤, 일베에까지 글을 올려대고 있다.''' 월북 후 신분세탁해서 돌아갈 수 있다는 부분이 압권.
우리민족끼리처럼 나무위키 문서에 반달을 저지른 적이 있다. 주로 김씨일가에 관한 문서에 반달을 하였다. (반달에 사용된 계정, 반달에 사용된 계정 2)
믿기 힘들겠지만, BEMANI 시리즈의 정발판 번역 하청업체가 이 조총련 계열사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번역 업무는 전부 코나미 일본 본사 소관이며 코나미 본사가 조총련계 업체에게 하청을 줘서 작업하는 것이다. 유니아나는 번역 권한이 없고 검수만 담당한다. 그래서 글꼴이 북한식이고[31] 가끔 북한식 표현이 튀어나오는 것.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10.1. 조총련계 금융기관
민단이 세운 신한은행과는 다르게[32] , 조총련계 신용조합은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불량채권 문제로 일본경제의 뇌관이 되고 있다.
2020년 9월 현재 일본에는 7개의 조총련계 신용조합이 있는데, 웬만하면 이들 7개 신용조합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말자. 일본거주자도 여기 이름들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거다. 만날 일도 없고, 일본 메가뱅크도 계좌개설 충분히 해주니 거주예정자들은 걱정 할 필요없다.
해당 신용조합은 이하와도 같다.
- 우리신용조합(ウリ信用組合) : 홋카이도
- 이어신용조합(イオ信用組合) : 기후현 등
- 조은서신용조합(朝銀西信用組合) : 큐슈 및 시코쿠
- 미래신용조합(ミレ信用組合) : 오사카부
- 하나신용조합(ハナ信用組合) : 도쿄도
- 케이지신용조합(京滋信用組合) : 쿄토부
- 효고히마와리신용조합 (兵庫ひまわり信用組合) : 효고현
한국어 위키백과의 조은신용조합 항목을 참조.
일본거주자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위의 조총련계 신용조합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말 것.만약 한국계 금융기관과 거래하고 싶으면 KEB하나은행 , SBJ은행, 재일한국인신용조합협회 소속 7개 신용조합(+ 킨키산업신용조합)을 추천한다.
특히 SBJ은행은 지점에 방문을 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계좌개설이 가능하다.
11. 관련 문서
[1]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후지미 2-14-15[2] 일본에서는 聯을 連에 병합했지만 조총련은 聯을 쓴다. 또한 북한 문화어에서는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총'''련'''합회라 한다.[3] 일본내 빠칭코의 상당 수가 재일 한국-조선인(민단 및 조총련을 모두 포함한)계 소유이다. 때문에 김일성 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돈줄 중 하나였으며, 일본인들의 재일 조선인 관련 부정적 인식에 한몫하기도 했다. 특히 혐한초딩들의 공격 이유 중 하나.[4] 특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자신들을 '일본인'으로 인식할 수 없는 만큼, 그렇다면 자신들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5] 민단은 당시 조총련보다 세력이 약했고, 한국에서 재일 한국인들의 민족 교육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반대로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지원해줬다.[6]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초코파이 주며 월남을 권유하는 남한군 이병헌에게 북한군 역할을 맡은 송강호가 "내가 원하는 건 이 초코파이보다 더 맛있는 과자를 내 조국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한 것과도 비슷할듯.[7] 일본엔 민단이 지원하는 한국계 민족학교보다 조총련이 지원하는 북한계 조선학교가 훨씬 많기 때문에, 북한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조총련 소속이라 어쩔 수 없이 그냥 조총련 소속으로 있는 사람도 많다.[8] 실제로 1987년 초 김만철 '''탈북''' 사건에서 일본이 멋모르고 '''이쪽 통역사를 붙여주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자칫 큰일 날 뻔한 사건. 당시에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일본에서 크게 관심을 못 받을 때였고, 당시로부터 불과 10년 ~ 20년 전에 활동했던 좌익 운동가가 조총련과 연계된 경우도 꽤 있었기에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당연히 조총련의 입김이 센 편이었다.[9] 굳이 따지기 시작하면 아주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 북한의 처참한 폭정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10] 북한은 그 특수성 때문에 그런 곳이 존재할 수는 있는데, 그걸 전체로 보면 곤란하다는 식이다.[11] ‘하늘과 땅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해와 달이 꺼질 때까지 존경합니다.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을 우러러보며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이것은 조총련계 국민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김일성 수령을 찬양하는 대목이다. #는 1994년 시사저널 기사로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 조총련의 30대 연령층이다. 조총련계 학교의 교육은 북한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조총련 고위층은 북에서 직접 임명하는 이상 사실상 북한의 대외공작기구에 가깝다.[12] 사실상 무국적[13] 통칭 '조교'.[14] 부모가 조선 학교에 강제로 보내려 들자, 대판 싸우고 분가해 일본의 제도권 학교로 진학한 사례도 흔하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무력으로 옥죌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15] 이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말하자면, '''미션스쿨에 다닌다고 다 교인이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미 이런 분위기는 영화 박치기에서 학생들이 "야, 미국하고 김일성 장군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같은 것을 농담 따먹기에 써먹는 분위기가 가감없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 흔히 조선학교에서 이미 일어나는 상황이고, 이런 것이 조선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현재의 조선학교 학생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북한 같았으면 무시무시한 아저씨들한테 끌려가서 코로 랭면 원샷을 할 것이다.[16] 20세기 내내 일본 내 좌파는 그 특유의 국제주의적 성격 때문에, 재일 조선인 차별에 민감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전후 전쟁범죄 청산과 재일 한국인/조선인 차별 금지운동에 가장 힘을 많이 실어준 집단이 되었다. 요즘에서야 잊혀지기도 했고, 과거의 언론통제로 잘 안 알려진 점이 있지만, 일본 좌파는 일본 내 차별금지부터 한국의 민주화 지원까지 적지 않은 부분에서도 많이 도움을 준 바 있다. 재밌는 것은 당시에는 일본의 극우 인사로 알려진 사람들 중 일부도 당시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을 지지하며 한국의 민주주의 정착을 도와주거나, 아예 일본 정부에서 한국 민주화 인사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이 일본 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 일본의 많은 우익들(혐한초딩들 말고 정치인 급의 엘리트들)이 반한으로 돌아선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성장을 이룩해 일본의 국익에 따라 휘둘리지 않을 존재가 되자 한국에 견제를 놓으려는 측면이 크다.[17] 겉보기엔 멀쩡해보여도 그들과 직접 얘기해보면 한민족에 대한 개념 자체가 한국 국민들하고는 엄청나게(?) 다르다. 한국이 이제는 다문화 개념까지 등장할 정도로 자유주의, 선택권과 다양성을 받아들인 반면, 그들은 "북과 남은 무조건 한민족! 그러므로 둘은 동일!"이라는 매우 고전적이고 통제적인 민족주의에 젖어있다. 골수 조총련계는 이 안이함에 더해 "그러므로 위대한 령도자 동지의 훈령 아래 단결해야 한다" 라고 뻘소리를 하기도.[18] 주체사상에 대한 사상적 평가를 떠나서, 이 주체사상이란 것조차 지금 북한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 등은 의문을 표한다.[19] 전승에 따라서는 반대로 편지를 세로쓰기로 쓰면 북송선 타고 가로쓰기로 쓰면 북송선 타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편지들이 죄다 가로쓰기여서 안 갔다고도 한다.[20] 이 당시 재일조선인의 실상은 영화 GO(영화)와 그 원작소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선생들은 조선인이라도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의사나 변호사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실제로는 재일 조선인으로써 의사나 변호사는 커녕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것. 즉 사회 자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주류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21] 특히 70년대 들어 북한의 성장이 둔화되면서 격차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벌어졌다. 90년대 이후에야 뭐...[22] ‘재일동포’(在日同胞)를 북한에서는 줄임말로 ‘재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을 세게 발음한 것이다. 이는 일본제 물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23] 혹은 복잡한 군중[24] 참고로 같은 시기 '''미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 대 중반이었다.[25] 가라테 중에서 한국인들이 만든 태권도, 극진공수도가 슨도메를 없애고 실제로 치고 박는 실전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것도 민단 - 조총련 싸움이 작용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26] 과거 외국여행이 제한된 시절, 월북하는 주된 코스가 바로 일본 방문 → 총련의 커넥션을 통한 월북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월북자 자체가 엄청나게 드물어졌긴 하나, 여전히 월북의 정석으로 통한다. 물론, 잘못하면 현실은 시궁창이 되지만. [27] 최은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한으로 유출된 이 드라마에서 만경봉호 선장(겸 조총련 고위간부)으로 열연한 문오장의 연기를 본 김정일이 '''적화통일 후 붙잡아 손봐주겠다고 했다 한다.'''[28] 김성겸이 조총련 창시자인 한덕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29] 각본은 조선왕조 5백년의 신봉승, 연출은 바로 태왕사신기의 김종학이었다. 다만 이 작품은 가족을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잃은 조총련 전직 간부의 고백록을 극화한 것으로, 정치성보다 다분히 인권중시 측면에서 북한의 어두운 실태를 조명하였다.[30] 다만 종교단체 소속인 교포들이 입교를 해달라고 초인종을 눌러대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조총련이 아니라 해당 종교 관련 얘기지만.[31] 북한 '고직체'(고딕체)이다[32] 씨티은행 다음으로 일본에 2번째로 외국계 은행 현지 법인허가를 받았다.[33]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일으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육영수가 사망하고, 박근혜가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