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타나베 요시미

 

'''일본 중의원 (도치기 3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6대
와타나베 요시미'''

'''제47~48대'''
야나 가즈오
'''초대 다함께당 대표
(わた(なべ(よし(
와타나베 요시미
'''
'''출생'''
1952년 3월 17일 (72세)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
'''학력'''
와세다대학 정치학 학사
주오대학 법학 학사[1]
'''소속 정당'''

'''의원 선수'''
'''6''' ()
'''初''' ()
'''경력'''
와타나베 미치오 비서
도치기현 제3구 중의원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다함께당 대표
일본 참의원
'''링크'''
블로그
[image]

1. 개요
2. 상세
3. 소속 정당
4. 아버지 와타나베 미치오


1. 개요


일본정치인. 다함께당(민나노당) 당수이면서 도치기현 제3구지역구로 하는 중의원이다. 중의원 6선.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기 지역구에서 95.3%로 당선, 일본 선거 역사상 최고 득표율 당선으로 기록되어 있다.[2]

2. 상세


도치기현 나스시오바라시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주오대학 법학과를 학사 편입으로 입학해 졸업했다. 이후 부친인 와타나베 미치오의 비서로 근무하다가 부친의 서거 이후 부친의 지역구인 도치기현 제3구를 물려받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다.
자유민주당에 있을 때 아베 신조 1차 내각(2006년 ~ 2007년) 행정개혁담당장관을 맡으면서 내각 참가 경험도 있다. 2009년 자민당에서 탈당해서 민나노당을 창당한 뒤 지금까지 당 대표를 역임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구가 안전해서 당을 장기적으로 이끌어도 당 내에서 불만이 없는 듯하다.
중견 정당이라는 다함께당의 당수라는 것만 보면 나무위키에서는 무관심했을 테지만, 일본 민주당 집권 시절인 2010년 '민주당정치의 정체'라는 책을 통해 '''"민주당은 재일 한국인들한테 장악당했으며, 재일한국인들을 위해 정치를 하고 있다."''' 라거나 '''"흔히 애국자라고 주장하는 단체들은 전부 재일들이 자금줄"'''이라는 등의 헛소리를 당당하게 써놨다. 즉, 극우 성향의 정치인인 셈. 일본 넷 우익들이 재일드립 치는 소스를 제공한 셈이다. 일본 넷 우익들이 재일 드립치면서 실제 출처를 '민주당정치의 정체'라는 책이라고 언급하기도.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아서 묻혔다.
그리고 민나노당이 망하고 나서 히라누마 다케오와 연대했다가 최근 자살했다는 루머가 돌고 있다. 그러나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오사카 유신회에서 출마를 결정했다. 확실히 옛날에 비해서 많이 야위어진 모습.출마 영상 당 이름이 대놓고 오사카 지역정당인데 잘 될지는 미지수였으나 비례대표로 나갔다. 그리고 아베노믹스는 자신의 경제정책에서 따온 것이라며 아베노믹스가 아니라 나베노믹스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사카 유신회 참의원 비례대표로 나가서 개인득표 2위로 당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현재는 오사카 유신회의 공동 부대표를 맡고 있었다.
고이케 유리코의 신당참여가 거의 확실한 모양이다. 일본 법에 따르면 국회의원 5인이하의 당이 중의원 선거에 출마할 경우 정견발표방송이나 석패율제 당선이 불가능하지 때문에 고이케 지사가 현역의원들을 열심히 물색중이다. 아무래도 와타나베 본인이 간토출신 정치인이기 때문에 간사이 기반에다가 앞으로 비전이 없는 일본 유신회에 계속 있는것보다 고이케 신당으로 가는것이 본인 정치생명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결국 유신회에서 제명당하고 말았다. 그의 여동생이 이번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된다.
희망의 당 참여가 유력해 보였으나 결국 입당하지 않았고, 다른 정당 입당 또는 유신회 복당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던 와중 2019년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신세력으로 떠오른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타치바나 타카시와 손을 잡고 정치단체로서의 다함께당을 재건하기로 협력했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5 - 2009
정계 입문

2009 - 2014
창당

2014 - 2016
정당 해산

2016
입당

2016 - 2017
당명 변경

2017 -
탈당

4. 아버지 와타나베 미치오


[image]
아버지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는 1923년 7월 28일, 치바현 나라시노시에서 군인 와타나베 키스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도치기현립 오타와 고등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응시하려 했으나 실패, 구 도쿄상과대학(현 히토쓰바시대학)을 졸업했다. 이듬해 가을 학도병으로 징집되기 위해 조기졸업을 한다. 패전 이후 요미우리 신문 기자로 활동한다. 1955년 자유당 소속으로 도치기현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된다. 그러던 중 1960년 현의원을 사직한 뒤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지만 낙선한다.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고[3] 나카소네 야스히로파에 들어간다. 제3차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농림 정무차관을 맡은 뒤 후쿠다 다케오 내각의 후생대신,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의 농림수산대신을 맡게 된다. 오히라와는 대학 동창이었기에 친분이 있었는데, 나카소네파가 오히라를 끌어내리려 하자 반대표를 던졌고, 나카소네파와 결별하게 된다. 나카소네와 결별한 뒤 자신의 파를 만들어 나카소네파의 젊은 의원들을 영입하고 신인들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이후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대장대신에 임명되고 나카소네파로 돌아간다. 제2차 나카소네 개조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자민당 정조 회장을 맡으면서 와타나베는 나카소네파의 후계자로 주목받는다. 곧 와타나베는 간사장 아베 신타로도 견제할 만큼 승승장구하였으나 리크루트 사건에 관여했다는 게 알려지면서 평소 반와타나베였던 우노 소스케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1988년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빚을 지고도 무책임하다"와 "일본의 한국병합은 한국의 찬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진술로 비난을 받았다.
나카소네파를 이탈하고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1992년 첸치천 외교부장과 만나기 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하였으나 췌장암 수술을 받아 그때부터 담석으로 몸이 안 좋아지게 된다. 이것 때문에 1993년 4월에 직위를 사임하게 되고, 같은 해 7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고노 요헤이에게 패했다.
고노 총재가 불출마를 선언한 1995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자신과 같은 중의원 선거 당선 동기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다. 결국 총리의 자리도 못 얻은 채로 1995년 9월 15일도쿄도 신주쿠구의 도쿄여자의과대학 병원에서 췌장암으로 향년 7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묘소는 도치기현 오타와라시의 고신지 사원이다.
병상에 있었을 때 유언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하였고, 이 카세트테이프는 와타나베의 친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또한 와타나베 미치오가 재무대신을 할 때 비서관이 한국계 일본인이었던 아라이 쇼케이였고, 이외에도 전 방위대신 하마다 야스카즈가 그의 비서관이었다. 참고로 아라이 쇼케이의 비서인 오구마 신지(小熊慎司)는 참의원을 거쳐 2020년 현재 입헌민주당 중의원이다. 지역구는 후쿠시마현 제4구.

[1] 와세다대학 졸업 후 학사편입으로 입학했다.[2] 사실 이 기록은 당시 상대 후보가 행복실현당 후보 한 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록이다.[3] 당시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동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