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석
1. 劉禹錫
당(통일왕조)의 문학자 겸 정치가로, 자는 몽득(夢得)이다.
772년(대력(大歴) 9년) 뤄양에서 태어났고, 79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5년 후인 798년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하여 괸직에 진출했고, 감찰어사(監察御史) 등 다양한 관직에 올랐다. 이 때 같이 합격했던 유종원과는 평생 벗으로 지냈다.
805년(정원(貞元) 21년) 당순종이 즉위하자 왕비(王伾), 왕숙문(王叔文), 유종원 등과 함께 등용되어,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환관들을 억제하고 부패를 막아 황권을 강화하는 영정혁신(永貞革新)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환관들이 이에 저항하여 수구파 세력과 연합해 같은 해 8월에 황태자 이순(李純)을 옹호하여 순종을 몰아내고 왕비, 왕숙문은 죽임으로써 180여일 간의 혁명은 실패하였고, 유우석 역시 연주(連州, 현 광둥 성 칭위안(清远) 시 소재) 책사로 좌천되었고, 얼마 안 있어 낭주(朗州, 현 후난성 창더(常德) 시) 사마로 발령을 받았다.
815년 유종원과 함께 다시 중앙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반대파가 많았기 때문에 곧 다시 지방의 책사로 발령받고 이후 여러 지방을 전전했으며, 그 와중에 819년 친구인 유종원의 부고를 전해 듣게 되고 그 이듬해에는 모친상을 당한다. 821년 다시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또 소주(蘇州) 책사로 좌천되고 이후 또 여러 지방을 전전한다. 결국 836년(개성(開成) 원년) 병을 얻어 은퇴하고, 842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유명한 작품으로 누실명(陋室銘)과 죽지사(竹枝詞)가 있다.
누실명(陋室銘)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青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廬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유명하고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신령하니
이곳이 누추한 집이라 하나 오직 나의 덕으로 향기가 난다.
이끼 낀 계단은 푸르고, 풀빛은 발#s-3을 통해 더욱 푸르르니
담소하는 선비가 있을 뿐 왕래하는 백정은 없어
거문고를 타고 불경 살필 수 있도다.
귀를 어지럽히는 음악이 없고 몸을 힘쓰게 하는 서류도 없으니
남양 제갈량의 초가집과 서촉 양자운의 정자로다.
공자께서도 이르시기를 "군자가 사는 곳에 누추함이 없다" 하셨도다.
2. 柳愚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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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유관순의 오빠이다. 이명은 유준석(柳俊錫), 유관옥(柳寬玉)이다. 수많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부는 주도하였다는 업적이 있지만 여동생인 유관순의 인지도가 높아 비교적 알려지지 못하였다.
1899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원동면 지령리(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고, 공주시에 있던 영명학교에 재학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3월 12일과 15일에 걸쳐 공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이규상, 현언동과 졸업생 김사현, 재학생 오익표, 안성호 및 목사 현석칠 등이 3월 24일 밤 9시쯤에 영명학교 사택에서 만나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고, 이때 유우석도 학생대표로서 이 계획에 참여하여, 3월 30일 김관회로부터 학생동원과 독립선언서의 등사를 부탁받은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의 집에서 노명우, 강윤, 윤봉균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하여 논하고, 이튿날 오후 3시쯤에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여 장을 쓰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멸에 그는 학생 대표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서로 나누고 장터에 나아가 군중에게 또 그것들을 나누어준 뒤, 군중들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 경찰이 강력하고 신속하게 저지하여 이 독립운동은 비교적 소규모로 전개된 채 끝나고, 그는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한편 같은 날 아우내 장터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그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여동생인 유관순도 체포되어 그의 가정은 풍비박산나고 만다. 유우석은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되어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하였으나, 8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다시 공부를 해서 192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도중 조국수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구금되었으며, 1927년에는 원산청년회를 조직하여 또 일본제국 경찰에 잡혀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구형받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으며 1934년 양양군, 강릉에서 설악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1968년 6월 29일 # 자택에서 노환으로 인해 사망하였고, 그의 장례는 그 해 6월 5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이후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묘지는 고향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있다.
여담으로 그의 부인은 강원도 양양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화벽으로, 감리교회에서 많은 청년을 포섭하여 활발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영순의 딸이다. 유우석과는 1925년 4월 18일 교직생활 중에 결혼하였는데, 아내 조화벽은 유우석의 가족을 모두 양양에 은신시켰고, 어린 시동생인 유인석과 유관석을 양육하였다. 유우석의 가족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쓴 애국가족인 셈이다.[1]
[1] 조화벽이 보호자가 없이 떠돌던 인석, 관석을 거두어 키워준 일로 인연이 되어 유우석과 혼인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