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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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휠라코리아의 회장이며 휠라 본사가 한국기업이 된 이후 휠라의 초대 회장. 샐러리맨의 전설 신화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연매출 30억달러의 대기업의 회장이 되기까지 온갖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그의 인생사는 이미 여러 경제지를 통해 알려져 있으며, 샐러리맨 성공신화를 언급할 때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다.
2.1. 초기 생애
1945년 9월 9일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되기 전에 장티푸스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고모의 손에 자란 그는 고등학교 때 아버지마저 폐암으로 여의게 된다. 이 때 돌아가시기 직전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려달라며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학업에 매진한 그는 재수 끝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합격하게 된다. 그러나 치과의사가 되어서는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다시 한 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목표로 재수를 하게 된다. 그러나 삼수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의대의 벽을 넘지 못했고, 결국 후기모집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입학하게 된다.[5]
대학에 입학하긴 했으나 늦은 나이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을 시작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학년 기말고사에서 친구의 부정행위에 억울하게 휘말려 정학을 당하고 만다. 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군복무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카투사에 입대한다. 카투사 복무 기간에도 틈틈이 영어와 사회과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문제는 제대를 하고 나니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고 잘 곳도 변변치 않았다는 것. 세수할 곳이 없어서 친한 사람이 근무하던 조선호텔 화장실에서 씻고 그곳 급식을 먹기도 했고,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도와달라는 연락도 주변인들에게 많이 돌렸다고 한다.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거듭한 윤윤수는 공부로 성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제일 자신이 있는 과목인 영어와 전공인 정치외교학을 살려 외무고시를 응시하기로 결심, 정치외교학과 친구들을 8명 정도 모아 스터디를 시작하고 이듬해 외무고시 1차에 합격한다. 그러나 나이 탓에 어린 경쟁자들과의 싸움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고 느꼈고, 외교관이 된다 해도 근속연수에 비례하게 승진하는 특성상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해 공무원이 되기보다는 기업체에 취직하기로 하고 외무고시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학교 공부에 전념해 겨우겨우 외대를 졸업하는데, 이때 나이가 30살이었다. 본인은 이때를 '결국 이룬 것 하나 없이 하는 일마다 실패로 얼룩진 채로 20대를 마무리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2.2. 샐러리맨 생활
대학을 졸업한 윤윤수는 서른 살의 나이에 갖고 있는 거라곤 인문계 졸업장밖에 없었던 탓에 취업난을 겪다가 한진해운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도전적이지 않은 해운회사의 분위기, 그리고 제한적이고 사소한 직무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다시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한 끝에 이익도 많이 거둘 수 있고 나라에 외화도 많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무역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직을 위해 이력서를 수백 장 쓰기 시작한다. 주로 상사회사에 지원했는데 나이 때문에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오라는 곳은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윤윤수의 동기들은 이미 회사에서 과장들을 달고 있을 나이다 보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그렇게 좌절감을 느끼다 하루는 코리아헤럴드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게 된다. 회사 이름과 소개도 별로 없이 수출하는 회사라면서 wanted라는 광고만 덩그러니 있었지만 무작정 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1명을 뽑는데 무려 8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뒤늦게 알고 보니 '''JC페니'''라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유통기업이었고[6] 한국 제품을 사서 미국 전역에 판매하는 외국계 회사였다고. 인사담당자, 한국 지사장, 아시아 총괄, 본사 책임자가 와서 보는 등 6개월이 넘는 채용 절차 끝에 기적적으로 국내 최고의 무역회사에 다니던 사람들을 모두 제치고 합격을 거머쥔다. '윤수 인생은 이미 꺼진 불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주변인들도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고 농담을 했다고.
JC페니에서 삼성전자 전자레인지를 미국에 대량 수출[7] 하는 데 성공한 윤윤수는 무역업계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고, 화승그룹으로부터 임원직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화승에서도 신발에 관련된 여러가지 아이디어 상품을 개발하지만, 곧 악재에 부딪히게 된다. 그가 아이디어를 낸 ET 봉제인형이 저작권 문제에 발목잡혀 회사에 80만 달러 가량의 손해를 입히게 된 것.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윤윤수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측은 사의를 만류했으나 끝내 3년의 임원 생활을 뒤로 하고 회사를 나오게 된다.
2.3. 휠라코리아 회장
다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윤윤수는 후배의 소개로 예식장에서 일해 보는 등 잡일을 이것저것 하다가 다시 신발 사업에 뛰어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화승그룹 재직 시절 출장 중에 미국 사람들이 입고 다니던 휠라 티셔츠를 인상깊게 보았던 것을 기억해 낸다. 브랜드가 세련되고 멋스러서 의류뿐만 아니라 휠라 브랜드로 신발을 만들어 미국에 팔면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당시 미국 휠라의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던 호머 알티스에게 제안을 했다. 그리고 휠라 미국 사업을 도와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8] 1991년, 휠라 본사는 한국에 진출하려고 조사를 하다가 윤윤수의 존재를 알게 되고 휠라코리아 사장을 맡아달라고 그에게 제안하고, 윤윤수는 이를 수락하여 휠라코리아 초대 회장 자리에 앉게 된다.
휠라코리아는 윤윤수 체제 하에 설립 이듬해 150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이후 6년 간 매년 50% 이상의 성장세를 기록한다. 당시 FILA 회장이었던 엔리코 프레시가 '휠라의 탄생은 이탈리아에서였지만 휠라의 성장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다'고 말했을 정도라고. 연봉 25억원이라는 샐러리맨 신화를 기록한 윤윤수는 2005년 삼성증권으로부터 180억 원을 대출받아 휠라코리아를 인수하게 된다.
2.4. 휠라 본사 인수
1990년대 말 휠라 본사는 과도한 확장으로 매출액이 급격히 하락하게 되고, 휠라의 최대 주주 사모펀드 서버러스가 본사 매각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윤윤수는 휠라 본사를 인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휠라코리아의 매출액과 자신의 전재산, 그리고 직원 200명을 일일이 설득해 가며 모금한 돈에 브랜드 로열티를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빌린 돈을 합쳐 휠라 본사를 인수한다. 휠라 회장 자리에 앉은 그는 경영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시장 전략을 수정하고 적자의 원인을 없애는 등 피나는 노력 끝에 부채를 모두 해결하고 2007년 휠라를 완전히 소유하게 된다.
2011년부터 미래에셋과 힘을 합쳐 약 6년 간 52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들인 끝에 골프 브랜드인 아쿠쉬네트 홀딩스를 인수한다. 이로서 골프 업계 1위 기업의 주인이 됐고, 이를 뉴욕 증시에 상장까지 시켰다. 매년 2000억원이 넘는 아쿠쉬네트의 현금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전문가들로부터 성과만 놓고보면 투입자금 대비 거의 최고 수준의 거래라고 평가받는 수준이다.
2018년이후에는 경영 일선에서 약간 물러나 있는 모습이다. 현재 사장으로 있는 아들에게 경영 승계를 목표로 하는 듯 하다.
3. 인간성 및 여담
- '유리알 경영'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할 정도로 투명한 경영을 철칙으로 삼고 있고 실제로 행하고 있다. 회사의 실적과 자신의 연봉을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있으며, 모범납세자 상을 2000년과 2007년 두 번 수상했다. 참고로 2000년에 휠라의 소득이 110억 원이었는데 낸 세금이 50억 여 원이니 우회나 절세 없이 세율 그대로 때려박은 것.
- 큰누나와 같은 계모임에 속해 있던 장모를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윤 회장의 아내는 굉장한 여장부 스타일로, 수출입 사업을 하던 때 윤윤수 회장에게 뇌물 제의가 들어오자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먹고 살 바에는 차라리 굶어 죽을 테니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고. 이뿐만 아니라 남편이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때 비서와 운전기사, 청소부 역할을 다 담당했고 사업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구해다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토록 고생을 함께 한 조강지처라서 그런지 윤윤수 회장은 지금도 재계의 소문난 애처가다. 인터뷰에서 '아내와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밝히기도 했다.
- 우여곡절 끝에 입학하기는 했어도 모교인 한국외대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2018년 외대가 도서관 리모델링을 위해 동문들에게 모금을 청할 때 선뜻 20억원을 기탁해 기부자 1위에 올랐다.[9] 이외에 동문회관 건립에도 거액을 쾌척했다. 그 덕에 한국외대 학내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에브리타임 등 학교 커뮤니티에 윤윤수 회장에 관한 글이 올라오면 폭풍 추천과 함께 찬양의 댓글 행렬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 무역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인지 외국어 능력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터뷰 때마다 대학생들에게 외국어를 배울 것을 장려하고, 실제로 아들을 고등학교 때부터 미국으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 비서울대 출신(정확히는 서울대 중퇴)으로 서울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한 최초의 인물이다.
- 아내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들 윤근창 씨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잠깐 삼성전자에 근무했다. 미국에서 MBA를 마친 후 2007년 휠라에 입사, 휠라 USA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쳐 현재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서강대 경제학과를 나온 노은정과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고 있다. 딸 윤수연 씨는 성신여대 피아노학과와 맨해튼 음대 대학원을 나왔다.
[1] 해외 활동 시 사용하는 영어 이름이라고 한다.[2] 출처.[3] 현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쌍학리[4] 2019년 블룸버그 기준[5] 이 때 외대에서 입학성적이 가장 높았던 영어과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삼수의 압박감으로 겁이 나서 정치외교학과에 원서를 넣었다고 한다. (당시 후기 외대 영어과는 서울대에 낙방하고 차선책으로 지원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입결이 매우 높았다.) 막상 입학해 보니 본인이 수석입학이었다고...[6] 현재도 옛날만큼의 위상은 아니지만 미국과 푸에르토리코를 주력 시장으로 밀고 있는 거대 백화점 기업이다. 2020년 COVID-19로 인해 파산신청을 했다.[7]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미국에 가전제품을 대량 수출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미국까지 몇 번을 오가고 끈질기게 한국 공장을 보여준 끝에 바이어 설득에 성공했다고.[8] 이 때부터 휠라는 본래 주력분야였던 의류보다 신발이 더 큰 비즈니스로 성장하게 된다.[9] 한국외대에서는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도서관 내 강당을 '휠라아쿠쉬네트홀'이라고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