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선 남성혐오 논문 게재 사건
1. 개요
2019년 한국학술지인용색인(Korea Citation Index; KCI)에 등재된 학술지 '철학연구'(Journal of The Society of philosophical studies)[1] 에 실린 '''여성학''' 저서로, 가톨릭대의 윤지선 강사[2] 가 저술하였으며, 표제는 《‘관음충’의 발생학: 한국남성성의 불완전변태과정(homomorphism)의 추이에 대한 신물질주의적 분석》이다.#
사실과 다른 내용, 편견으로 가득찬 내용을 담은 혐오문건이 '논문'이라는 이름 하에 검증 등의 작업이 전혀 없이 국내 유수의 학회지에 등재되었다는 점, 적절하지 못한 과학 개념 적용[3] 그리고 피해자가 생겼는데도 자정 노력이나 반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국내 프랑스철학계의 한계와 이들이 제대로 된 연구방법론과 연구윤리가 적용되는 다른 학계에서 학문 취급도 받지 못하고 대중에게도 외면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들 스스로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2. 내용
2.1. 초록
본 논고는 대한민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불법촬영물이라는 특정 포획물을 기반으로 분포하고 있는 ‘관음충’에 대한 형태발생학적인(morphogenetic) 고찰이다. 형태발생학적 고찰이란 대한민국의 사회문화적 환경 안에서 디지털 성범죄 시스템을 추동시키는 ‘관음충’이라는 특정 군집구성체(population)가 어떠한 젠더와 조건을 중심으로 발생과 생장, 증식을 거듭하는지를 추적함을 의미한다. 필자는 한남유충-관음충-한남충이라는 용어가 배태하고 있는 곤충 군집체의 형태발생학적 착상(conception, idea)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본 논의의 배경(background)으로 삼고자 한다. 그리하여 한남충을 알-유충-성충의 단계에서 탈피와 성장을 거듭하지만 형태상으로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는 ‘불완전변태(homomorphism)’의 모델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한남유충’에서 ‘한남충’으로의 변태(metamorphosis) 과정의 추이가 ‘관음충’의 지수(factor)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진화 가능한지를 첨예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미국의 신물질주의(New materialism) 이론의 선두주자이자 들뢰즈의 현대적 계승자인 마뉴엘 데란다(Manuel De Landa)의 이론적 틀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관음충 군집체의 발생과 진화과정, 그것의 잠재적 궤적 방향과 현실적 양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첫째, 데란다가 제시한 ‘군집구성체적 사고(population thinking)’ 틀을 통해 한국에서 태어난 남아가 어떻게 ‘관음충’으로 집단적으로 생장, 진화하는가를 분석하고자 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한 자가복제 기제들(replicators)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둘째, ‘강렬도의 사고(intensive thinking)’ 틀을 통해 관음충의 형태발생학적 변화 과정을 ‘영토화(territorialisation)와 코드화(coding)’라는 두 가지 기준척도를 통해 각각의 변이국면의 주요 특이점들을 파악하고 고찰할 것이다. 셋째, ‘위상학적 사고(Topological thinking)’ 틀을 통해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지평 내 관음충 군집체가 주파할 잠재적 궤도 방향과 메커니즘을 분석, 고찰하고 대한민국 사회가 이 궤도로부터 어떻게 이탈 가능할지를 페미니즘적으로 사유하도록 하겠다.
3. 비판
윤지선의 본 저서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온갖 왜곡, 날조, 선동, 확대해석, 논점 일탈, 오류, 온갖 기괴한 논리와 기괴한 용어 사용으로 견강부회로 점철되어 있는 수준이다. 이 저서를 조금만 읽어보면 저자가 대학교에서 뭘 가르친다는 건지 경악할 정도다. 윤김지영 문서만 봐도 알수 있듯이, 자매가 쌍으로 남성혐오에 찌들어 있는 래디컬 페미니스트이기도 하고.[4]
해당 저서에서는 곤충 군집체의 형태발생학적 착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답시고 한국의 남아를 남성혐오 발언인 '한남유충', 한국의 성인 남성을 '한남충'이라고 정의하였다. '한남충'은 현대에 남성이 중심이 되어 남성중심적, 여성혐오적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 여러 용어들이 만들어지는 세태에 대한 반격으로써 만들어졌으므로 정당하며, '한남유충'은 한국 남아가 어떻게 '한남충'으로 도래하였는지 설명하기 위한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한남충', '한남유충'을 사용한 것에 대해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 언어사용에 한남충과 같은 단어가 경종을 울리며, 이로 인해 혐오 단어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있다.
첫째로, 형식적 오류에 속하는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라 볼 수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건 일종의 비형식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관음충', '한남충'은 한국의 강경한 여성우월주의자들이 몇몇 한국 남자, 혹은 전체 한국 남자들을 벌레에 빗대어 사용하는 멸칭'''이지 '관음충', '한남충'이라는 '생물종'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공식적인 칭호도 아니기 때문이다. '관음충', '한남충'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이미 판례적으로 ''''한남'이라는 단어 자체가 욕으로 인정'''된 바 있다.
저자가 펼치는 논지의 전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관음충, 한남충이 그저 비유적인 멸칭일 뿐인데 진짜 벌레를 뜻하는 기생충, 이충, 해충 등과 생물학적인 분류에서 같은 맥락에 속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으며, 이는 매개념 부주연의 오류[7] 이전에 비형식적 오류 중 비유의 오류나, 동음이의어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구별하지 않는 애매성의 오류에 해당한다. 게다가 저 주장은 비형식적 오류 가운데 피장파장의 오류라든가, 특별 변론의 오류 등등 여러 가지 비형식적 오류를 함축하고 있다.1. 불법촬영물을 즐겨 보는 사람, 여성혐오[5]
를 하는 사람을 멸칭하여 각각 '관음충', '한남충'이라고 한다.1. 벌레 중 다른 생물의 개체에 기생하는 것들을 '기생충'이라고 하며, 이들 기생충 중 '사상충'은 몸이 실(絲) 모양(狀)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고, '구충'은 갈고리(鉤) 모양과 같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6]
애매성의 오류부터 살펴보자. '관음충', '한남충'은 그저 인터넷상에서 멸칭으로 쓰이는 '-충'이라는 접미어가 '관음', '한남'이라는 단어에 붙은 비유적인 멸칭일 뿐이다. 반면 기생충이나 해충 등은 실제로 존재하는 곤충들을 특정 특성에 따라 묶어서 부르는 말이며 그 단어 역시 공식적인 호칭이다. 헌데 일부 한국 남자이든 전체 한국 남자이든, 진지하게 어떤 종의 측면에서 그들을 곤충과 동일한 범주로 묶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으로 객관적인 공통 특성을 지녀야 한다. 이에 대한 타당한 부연설명이 없는 전제와 여기서 전개되는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게 애매성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일상적인 용법 측면에서 생각해 봐도, 어떤 대상이 비유적인 멸칭으로 불린다고 해서 동일한 접미어가 붙은 다른 단어들이 나타내는 개념에 그 대상이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다. 농담의 수준을 벗어나 이를 진지하게 주장한다는 것은 비유의 오류를 범하는 것 이전에 이미 사고방식이 정상이 아니다. 별로 길지도 않은 주장 속에서 대표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이 두 가지의 비형식적 오류 외에도 여러 비형식적 오류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굳이 페미니즘만의 얘기가 아니라 본래 이런 류의 사조들이 대개 그렇듯이, 한남충이니 관음충이니 하는 멸칭과 여러 비형식적 및 형식적인 논리 오류가 포함된 무리한 주장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기가 어렵다.[8]
둘째로 자가당착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한국에는 '관음충', '한남충'이란 용어 외에도 '자기 자식 밖에 모르고 주변에게 민폐를 서슴없이 끼치는 엄마를 멸칭하는 맘충', '자기 집으로 들여서 키울 생각은 않고, 도시 위생 문제를 일으키며 야생 생태계를 교란하는 길고양이를 더욱 양산시키는 여자를 멸칭하는 캣맘충'이란 용어가 있다는 점을 상기하자. 당장 해당 저서의 내용을 위 두 용어로 치환해서 쓸 수도 있다.
셋째로 애초에 저서에서 쓴 전문용어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이를 방증하듯 '형태발생학적(morphogenetic)', '군집구성체(population)', '불완전변태(homomorphism)' 등은 영어 표기를 병기하여 해당 용어가 저서에서 전문용어로 쓰임을 시사하고 있는데[9] '관음충', '한남충'은 그러한 표기를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불완전변태(homomorphism)'는 영어 표현도 잘못 썼는데 옳게는 hemimetaboly 혹은 incomplete metamorphosis이고, homomorphism은 대수학/암호학에서 쓰이는 '준동형 사상'이다.[10][11] '위안부'(comfort women)라는 용어가 피해자들이 당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노예'(sex slave)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때도 해당 용어가 피해자들을 멸칭하는 것이 아닌, 가치중립적인 전문용어임을 나타내는 표기(따옴표를 이용한 표기 등)가 이루어졌다.
이 밖에도 보겸의 보이루를 여성혐오 용어라고 단정한 것도 문제가 된다. 보겸이 직접 가톨릭대와 해당 저서가 실린 '철학연구'를 발행하는 철학연구회에 전화하고 찾아갔지만 전부 모르쇠로 일관했다.[12][13] 보이루는 보겸+하이루를 축약한 용어로 여성혐오는 물론 여성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 표현이다. 그런데 극단적 페미니즘 진영에서 보겸을 매도하기 위해 '보이루'가 여성의 생식기를 멸칭하는 표현인 '보지'와 '하이루'의 합성어라며 악의적으로 가짜 뉴스를 만들고 선동하여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보겸이 큰 정신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런 경위가 있음에도 윤지선은 사실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보겸이라는 유투버에 의해 전파된 '보이루'라는 용어는 보지+하이(Hi)의 합성어로, 초등학교 남학생부터 20-30대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용어 놀이의 유행어처럼 사용되었다."'''라고 서술했다.
그나마도 앞부분을 '보겸이라는 유튜버와 관련이 있는'으로 썼다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으나, '보겸이라는 유투버에 의해 '''전파된''''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보겸 본인이 악의적인 의도로 저런 표현을 고안한 데다 적극적이며 주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졸지에 여성혐오 유튜버로 낙인 찍힌 건 덤. 개인 SNS나 시사 언론의 칼럼에 이런 허위사실 및 근거 없는 날조로 떡칠된 글이 실려도 문제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14] , 사회적 권위를 갖는 학술지에 저런 내용이 실렸으니 파장이 더욱 큰 것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가 연구윤리[15] 를 치명적으로 위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철학연구회'의 회원인 여명숙[16] 이 본인의 유튜브 채널 개수작TV에서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1[17] , #2, #3
뿐만 아니라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 「철학적 탐구」에서 인용한 문구가 있는데, 놀랍게도 동서문화사의 번역본을 참조했다. 동서문화사는 일본어 중역판이나 해적판 번역을 내고 유령 번역가를 내세우는 걸로 유명하다. 즉, 번역 신뢰도가 바닥인 출판사다. 그 때문에 일반 독자들도 출판사 이름만 보고도 거르는 곳인데, 논문에 인용하기 위한 참고 문헌 자격 여부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저서를 KCI 등재 학술지나 되는 곳의 심사관 3명 중 한 명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렇게 문제가 심각한 저술이 KCI 등재 학술지에 올라간 만큼, 해당 문헌이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KCI 등재 취소 여부는 국가에서 별도로 심사하는 기준이 있으므로, 이런 한 건의 스캔들만 가지고 등재 취소를 곧바로 예단하기는 어려우나, 본 사건을 계기로 과거 여성학 관련 논문들까지 이렇게 허술하게 통과되었는지 전수조사를 해야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3.1. 저자의 반응
그동안 보겸이 법적 조치를 취하기 전에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고 싶다며 다방면으로 연락을 시도해봤으나 '''어떠한 연락도 받을 수 없게 원천적으로 차단을 해놓고 있다가''' 2021년 2월 20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에 대한 반응을 드러냈다.윤지선 교수 “보겸, ‘여혐표현’ 의도 은폐…엄중 대처 할 것”[18]
요약하면
- 보겸은 여성비하 용례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
-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남성팬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 명예훼손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으며 연구자로서 소명을 느낀다
- '보이루'를 '보지+하이루'로 왜곡한 건 오히려 급진 래디컬 페미니트계이며, 보겸은 이에 대해 꾸준히 반박해온 바 있다.#1#2 보이루 문서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이들의 피해망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의도적인 멸칭 '자이루'(자지+하이루)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쓰기까지 했으며 윤지선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있다. 대체 누가 누구를 혐오한다는 것인가? 설령 해당 용어를 '보지+하이루'로 왜곡해서 쓴 사례가 있다 하더라도 보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용어를 왜곡해서 쓴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최소한 보겸이 자신의 유행어를 왜곡해서 쓴 사례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다는 도의적 책임감은 물을 수 있어도 이는 보겸이 '보지+하이루'의 의미로 썼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 보겸은 꾸준히 '보겸+하이루'의 의미로만 써왔으며 이를 보겸이 '보지+하이루'라는 의미로 유행어를 전파시켰다는 건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보겸 본인이 직접 해명했음에도 여전히 날조와 선동으로 본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므로 보겸은 명백한 피해자이다.
- 상기 비판에서 지적되었듯 해당 저서는 '논문'으로서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신물질주의 이론을 적용하여 마뉴엘 데란다의 이론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건 둘째치고, 전문용어조차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으며 사실 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썼다는 게 들통난 판에 과연 그 글이 정말 연구자로서 소명을 느끼면서 작성한 글이라고 객관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4. 어떻게 게재가 가능했는가?
해당 저서가 KCI에서 검색이 되는 것은 단순히 '''KCI에 '철학연구'(Journal of The Society of philosophical studies)가 등재되어있기 때문'''이다. KCI는 준 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관리하는 학술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으로, 특정 학술지가 KCI에 등재될 만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는지 아닌지만 심사한다. 이를 통해 어떤 학술지가 'KCI 등재 후보 학술지' 혹은 'KCI 등재 학술지' 자격(이하 KCI급)을 갖춰 KCI에 등재되면, 그 저널의 데이터베이스는 KCI와 바로 연동이 되므로 굳이 간행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지 않아도 KCI에서 검색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논문의 심사는 오롯이 해당 학술지의 심사관 몫이다. 만약 학회나 심사관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엉터리 논문이 통과될 수 있고 KCI에서 검색이 된다.[19] 즉, 수준 미달인 저서도 어떻게든 KCI급 학술지에 실리기만 하면 학술적 가치가 있는 논문으로 둔갑이 되는 것이다. 강남 묻지마 살인사건, 워마드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도촬 사건등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 마다 이를 주제로 수사기관이나 정부의 조사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여성혐오가 원인이라고 자체 분석하는 수준 미달의 페미니즘 저서들이 많았는데, 이런 글들이 전부 허술한 심사 과정으로 KCI급 여성학 저널에 기고가 되었다. 즉, 이런식의 저서 게재는 하루이틀 된 이야기가 아니라 최소 10년이 넘어가는 뿌리 깊은 배경이 있다. 게다가 K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연구 업적으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이후 연구비를 지원받는 심사에서 가산점 요소로 작용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에는 자신들의 저서가 KCI급 학술지에 게재되어 공인성을 인증받은 데다가 연구비까지 탈 수 있어 일석이조였던 셈이며, '''학술지의 허술한 심사 과정'''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것이다.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 이름만 들으면 누구라도 다 아는 권위 있는 학술지는 물론 일반적인 학술지도 제대로 된 곳이라면 무조건 출판 전의 동료평가(peer review)라고 불리는 심사 과정을 통해 문제가 있는 내용을 검토하며, 최종 출판 버전에서 정정되거나 아예 빠지게 된다. 문제점이 심한 논문의 경우 동료평가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 전에 편집자가 심사(editor screening)해서 거절해버린다.[20] 다만 동료평가 문서에도 나와있듯 이 과정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닌데, 오늘날에는 연구 분야가 워낙 세분화 되어있다보니 논문의 주제를 잘 모르는 사람이 심사를 맡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유명한 학술지들은 '''저자가 원하는 심사관으로 요청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물론 과거 공동 연구를 진행한 적이 전혀 없거나 같은 소속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야 하는 등 나름대로 기준이 있지만, 이 규정만 만족하면 저자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을 요청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 현 시점에서는 윤지선이 이 허점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1]
설령 운 좋게 동료평가를 통과해 논문을 출판했더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게재 이후에 발견된 오류나 문제점에 대해 저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다못해 '''학술지의 후속 기사를 통해''' 지적된 사항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하며, 단순한 데이터 표기상의 오류가 발견되면 내용을 검토하여 수정하고 역시 '''별도의 정정 기사로 알리는 것'''은 물론[22] , 논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탕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어 더 이상 논문으로서 가치가 없어지면 게재가 철회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상기 '비판' 항목에서 '사실 관계'에 관한 오류가 드러났음에도 오히려 굽히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은 연구자로서 매우 부적절한 행동으로 연구윤리에 어긋나며, 정상적인 학계에서 이런 짓을 한 저자는 제재를 받는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