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1888)

 


尹海
1888.4.15.~ ?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시절
2.2. 블라디보스톡과 북간도에서의 활동
2.3. 러시아 한족대표로서의 활동
2.4. 프랑스 파리에서의 활동
2.5.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2.6. 다시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활동
2.7. 다시 중국에서의 활동
2.8. 러시아에서의 비극적 말년
3. 가족관계


1. 개요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1910년대부터 1920년대초까지 국외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1]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공산주의 활동에 매진했다.

2. 생애



2.1. 초년 시절


1888년 4월 15일,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능동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병헌(尹秉憲)은 성균관 박사, 유림단체인 경학회 회장, 인명(仁明)학교 설립자 겸 교장 등을 역임한 지역 유지였다.
1905년 경 보성학교에 입학해 대한자강회(1905) 회원으로 활동했다. 1907년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전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는 대한협회 회원, 황성신문 신진부, 서북학회 간부, 함남친목회 회장, 비밀결사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보전 재학 시절 신교육과 계몽운동을 통해 독립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실력양성론의 입장에 있었다. 특히 국론에 발언권을 가진 재야의 한 정당으로 인정받던 서북학회에서는 안창호·유동열 등과 함께 지략을 겸비한 청년 논객의 한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2. 블라디보스톡과 북간도에서의 활동


1910년 보전 법과를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0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청년돈의회가 주최한 안중근의사추도회에서 안중근의 죽음을 통분하는 연설을 했다.
1910년 8월 북간도로 가서 간민교육회 부회장으로 계몽잡지 '교육'을 발간했다. 1911년 1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설된 근업회에 참여하였고, 1912년 간민교육회 대표로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 연론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권업신문 편집인으로 「공론과 사회」(1913.3.16.), 「사관교육과 노령청년의 좋은 기회」(1913.4.6) 등을 썼다. 이 글들은 당시 분열되어 있던 노령 한인사회의 통일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한 군인양성을 주창하는 내용이었다.
일제의 사주에 의해 러시아정부가 1914년 권업회를 해산시키자, 1915년 3월 북간도에서 이봉우 등과 간민회(墾民會)를 조직하여 교민 자치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후 나자구로 가서 4개월 과정의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1916년 아무르 주 블라고베셴스크 한인들을 위한 교육과정도 개설하며 인재의 양성에 주력했다.

2.3. 러시아 한족대표로서의 활동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제정러시아정부가 붕괴되고 러시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정부는 러시아영토 내의 소수민족에게도 집회, 언론, 결사 등의 자유 보장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에 고무된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윤해는 한족신보에 게재된 「노동신성론」(1917.9.24.), 「우리도 가볼까? 농촌으로」(1917.10.22) 등에서 도시 노동자를 주축으로 한 독립 국가를 표본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같이 러시아에 새로운 정세가 조성되자 1917년 12월에는 문창범, 원세훈 등과 함께 전로한족회를 조직하였고, 1918년 1월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제1회 전러시아한족대표자회의에 참가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서 발간하기로 결정해 동년 7월 7일 창간된 '청구신보(靑邱新報)'에 박은식과 함께 주필로 활동했다.
1918년 6월 제2회 전러시아한족대표자회의에서 조직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서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이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될 즈음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선임되었다. 그래서 1919년 2월 고창일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출발하였으나 파리 강화 회의가 폐막된지 3월 지난 1919년 9월 26일에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 강화 회의 참석에는 실패하였다.

2.4. 프랑스 파리에서의 활동


파리에서는 1920년 1월 국제평화추진회가 추진하는 프랑스주재 중국사회단체연합대회에 참가해 한국독립부흥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20년 4월 국제연맹에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병과 한국독립을 요구하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파리대학교 법학과에서 학업을 이어가다 동지들의 요청으로 1921년 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상하이로 왔다.

2.5. 상하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 주비회, 독립신문 편집장 등으로 국민대표회 소집 필요성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혁명중앙을 조직하자는 입장을 가졌다. 이 때문에 당시 임정 존속파였던 경무국장 김구의 사주를 받은 김상옥에게 저격을 당해 1달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독립운동단체 71개, 지역 23개 대표 125명이 참석해 공론과 공결을 통해 통일적 지도기관과 운동노선을 세울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윤해는 회의규정기초·헌법기초·외교분과 위원회위원과 부의장 등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중앙을 조직하자고 추장하였고, 임시정부의 제도·인물·헌법 등을 실질운동에 맞게 고쳐 중앙기관으로 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했다.
결국 임정존폐문제로 개조파가 회의를 탈퇴하자 1923년 5월 15일 창조파가 주도한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 7일 마지막회의에서 33명으로 이루어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서 선출한 국무위원회를 집행기관으로 한 ‘위원제’정부를 조직했다. 폐회사에서 일부 대표가 탈퇴해 회의가 원만하게 종료되지 못했다고 인정하면서도 국민위원회는 독립운동중앙, 즉 혁명 중앙일 뿐이라고 강조했으며, 신정부인 조선공화국의 창설을 제창하였다.

2.6. 다시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활동


국민위원회는 소련정부로부터 무기, 탄약, 자금 등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벌일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그리고 1923년 9월부터 1924년 2월까지 현지 고려공산당 등과의 통합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위원회가 임시정부같이 정부적 성격을 갖고 있고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대표들의 통합조직이 아니었다는 이유 등으로 국제공산당은 국민위원회 위원들에게 러시아 영토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려 한국독립당 조직은 무산되었다. 이 한국독립당은 노동자, 농민이 주도해 정치적 경제적 독립을 쟁취한 뒤 자립적 공화국 건설을 전망했다.

2.7. 다시 중국에서의 활동


이후 중국 영안현 영고탑으로 가서 학우당의 학우통신과 중동선청년연합회의 농민익보에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세력을 하나의 전선으로 통일할 목적으로 글을 게재했다. 이 같이 1924년부터 국내외 혁명요소들을 집중시켜 하나의 중심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까닭은 식민지 독립운동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민족문제라고 파악한 데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조선노동당의 비밀 그룹인 스파르타쿠스당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육체적 나약함과 함께 이론 지식이 미흡하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1926년 10월 중국손일선노동대학(中國孫逸仙勞動大學, 1928년 9월부터 중국노동자공산대학으로 개칭됨)에 입학해 1928년 10월 중국노동자공산대학 선동선전과를 졸업했다. 중국노동자공산대학 학장은 졸업과 동시에 국제레닌과정에 윤해를 추천하였다. 이것이 러시아 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자료에서 확인되는 윤해의 마지막 행적이다.

2.8. 러시아에서의 비극적 말년


일제 정보문서에는 1929년 5월 하바롭스크의 고려민족협의회에서 개편된 당간부 명단에 모스크바 주재 한인대표로 선임되었다고 적혀 있다. 1931년 5월에는 국제공산당 산하 하바롭스크 극동뷰로에 의해 만주에 파견되어 훈춘에서 연락책임을 맡았고, 1934년 만들어진 국외 용의조선인 명부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국제공산대학강사인 것으로 되어 있다.
구소련 스탈린은 1930년대 초반부터 1937년까지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스파이, 반소 반혁명 활동 등의 혐의로 숙청하고 극동의 한국인 20만여 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때 소련정부는 비밀리에 2,500여 명의 주요한 한인 독립운동가를 무고하게 처형했고 일반 한인들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과정에서 수천 명이 희생되게 했다.
소련정부가 비밀스럽게 처형하였기 때문에 소련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강제로 소련에 구금되어 있다고 판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3년경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행방불명된 독립운동가 57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문서를 소련타스사 주중특파원 앞으로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 57명에는 윤해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소련은 그에 응하지 않았다.
이 무고하게 희생된 한인독립운동가들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복권, 복당과 함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강제이주와 비밀숙청에 관한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그 자료를 근거로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934-1938년 소련에서 정치탄압 희생자들 - 고려인」이란 제목으로 14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윤해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윤해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가족관계


가족은 형 윤광제, 조카 윤만주·윤만정, 부인 정만명 사이에 1911년생 아들 윤만복과 1913년생 딸 윤승영이 있었다.
[1] 이하의 내용은 조철행, '독립운동가 윤해 행적의 복원'이라는 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기록인 2013 AUTUMN + Vol.24, 96면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