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재
[clearfix]
1. 개요
이도재(李道宰, 1848년 ~ 1909년)는 구한 말 관료, 정치가이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아호는 심재(心齋), 운정(篔汀), 자는 성일(聖一), 본관은 연안(延安),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 상세
1848년 출생으로 친아버지는 이명익이지만 이건익에게 입양되었다. 대한제국 내부대신, 외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급진개화파 성향 문신이다.
급진개화파이지만 고영희, 박중양, 이규완 등과 달리 한일 강제 병합에 반대했고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자 박영효, 남정철과 고종에게 폐위를 압박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에는 친일파로 전향했던 박영효, 남정철과 달리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은 채 1907년에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와 함께 나문정죄 당하여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3. 생애
1848년 이명익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을 때에는 강위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한다. 그가 33세가 되던 1880년 음서로 무관 관직에 천거되었고 2년 후인 1882년(고종 19)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부수찬으로 등용되었다.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 당시 수령에 의해 누명에 씌어져 살해, 수탈, 고문 등의 피해를 받던 백성들을 구제해 백성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바위에 그의 공적을 쓴 어사암이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진압 작전에 참전해 갑신정변을 진압했다. 이후 경상좌도암행어사, 동부승지, 참의군국사무,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다. 1886년 호군에 재직중 사대당[1] 에 의해 고금도로 귀양을 갔고, 1894년 개화당(급진개화파) 정부가 수립되며 풀려났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라도 감사로 파견되어 김개남을 사로잡아 전주 초록바위 위에서 처형시키고, 전봉준을 생포했다.
군부대신, 학부대신 등을 역임했지만 단발령이 내려지자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다시 철도원 총재, 학부대신, 내부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4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사람들을 모아 농광회사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척은 일본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906년에 그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을 서훈받았다. 1907년,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의 퇴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하여 어전회의가 개회되자, 질병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완용 내각에 의해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자 박영효, 남정철 등과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지원을 통해 7월 20일, 고종의 양위식 날 이완용을 비롯한 고종의 양위를 결정한 관료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됐고 결국 체포되었다. 2005년 8월 3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4. 여담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부장 이도재 예복을 보관 및 전시 중인데 국가등록문화재 제 553호로 1897~1907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제국의 예복이다. 이 예복은 운정 이도재가 입었던 것으로 대한제국의 예복이라는 상징적인 가치 뿐만이 아니라 보존 상태, 디자인, 색상 등 보존 상태가 뛰어나 보존 가치가 더욱 높다.